엑소의 리드보컬 변백현 X 사생팬 도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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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자연으로 오세요
신곡이 공개되고 숨 쉴 틈 없는 스케줄이 이어졌다. 가장 바쁜 것은 물론 그룹 멤버들이겠지만, 팬들의 사정 또한 만만치 않다. 공중파, 케이블을 막론하고 음악방송에서는 컴백무대가 쏟아지고, 라디오는 물론 인터뷰 스케줄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스케줄에 죽어나는 것은 팬들이었다. 늦겨울임에도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혔다. 선착순 입장임에도 가장 앞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수는 카메라의 배터리를 확인하고는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손에 고정했다. 컴백무대인만큼, 양질의 사진을 뽑아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 경수의 어깨가 무거웠다. 자신의 사진을 기다리는 많은 팬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숨을 고르던 경수는 스태프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사전녹화홀로 들어갔다.
대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신곡 컨셉에 맞게 다들 머리에 변화를 준 모습이었다. 한 명 한 명 카메라에 담다가, 백현이 렌즈에 걸리자 빠른 속도로 셔터를 내리눌렀다. 그의 움직임이 초 단위로 찍혀 메모리카드에 쌓여갔다. 경수는 망원렌즈를 최대한 돌려 백현의 얼굴을 한가득 잡아냈다. 저번 활동에서는 피부화장만 하고 나오더니 이번엔 섀도우에 아이라인까지 풀로 그리고 나왔다. 아이라인을 한 얼굴과 하지 않은 얼굴의 간극이 큰 백현은, 제 주위에 흐르는 분위기마저 완벽하게 바꾼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몸을 풀던 백현이 타오와 장난을 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들어왔다. 여기저기에서 앓는 소리와 동시에 셔터음이 터져나왔다. 경수도 그 새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찍고 또 찍었다. 왠지 오늘은 감이 좋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른 경수가 백현을 보고 활짝 웃었다. 예쁘다. 백현아.
"사전녹화 시작하겠습니다!"
순식간에 녹화장을 덮친 정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울리는 비트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곧장이라도 무대를 날려버릴 듯 날카로운 비명이 녹화장을 가득 메우고, 멤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틀 전, 선공개 된 음원은 전부 외운지 오래였다.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이던 경수가 이내 차분한 눈을 하고 카메라에 눈을 가까이 댔다. 직캠을 찍기 위해서는 최대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제 팔이 삼각대라도 된 마냥 경수는 목석처럼 단단히 굳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오직 백현만을 좇았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경수는 흥분으로 달아올라 열광하는 소녀팬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집념이었다. 백현이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단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쉴새없이 동선을 바꾸며 무대를 휘젓는 백현을 놓치지 않고 찍느라 노래는 이미 귓가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쉴 틈 없이 초점을 잡고, 백현의 동작 하나 하나를 캐치하려는 경수의 움직임은 티끌 하나 없이 완벽했다. 3년의 내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헌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의상도, 헤어도, 메이크업도, 춤마저 완벽한 백현은 최고의 무대를 펼치고 있었다. 딱 한가지. 의도적이라고 봐도 좋을만큼 백현은 경수의 카메라에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근처에도 미치지 않는 백현의 시선을 집요하게 좇아보았지만, 택도 없었다. 오히려 건너편의 카메라에는 정확히 아이컨텍을 하면서 현란하게 애드립을 추는 것이었다. 안그래도 팬들의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혀왔는데, 백현의 행동에 얼굴끼지 빨갛게 익어버린 경수가 가쁜 숨을 씩씩 내쉬었다. 백현아, 여기 좀 봐! 중저음의 목소리는 높은 하이톤의 고성에 파묻혀 여기저기 채이고 나뒹굴었다. 눈꼬리가 끝도 없이 늘어졌다. 억울해진 경수가 왼손을 번쩍 들어 손을 붕붕 흔들어봤지만, 무대는 끝을 향해 달려갔고 백현이 뒤를 휙 도는 것과 동시에 조명이 일제히 꺼져버렸다. 무대가 끝났다. 그제서야 밀려오는 허무함과 좌절감이 경수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녹화버튼을 누르고 전원을 끈 경수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보나마나 뻔했다. 이번 직캠은 망했구나. 이렇게나 완벽한 무대였는데...! 극심한 자기혐오로 경수는 카메라에 제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 더 왼쪽에 설 걸 그랬다. 무슨 연유인지 백현이 오늘따라 제가 서있는 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워낙 팬서비스로 유명한 백현이기에, 좌, 우, 스탠딩, 2층까지 골고루 아이컨텍을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왜 하필, 내가 서 있는 곳만!! 울분에 찬 외침은 목구멍 너머로 삼킨 채, 경수는 다시 전원을 켰다. 곧 1위 발표를 위해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올 것이다.
"자, 2월 넷째주 1위는…"!"
엠씨의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엑소 멤버들은 1위 후보 바로 뒤에서 저들끼리 손장난을 치며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조급해 하지 말자. 도경수. 얼마 지나지 않아 1위가 발표되고 천장에서 폭죽과 꽃가루가 사정없이 쏟아졌다. 종대와 민석이 꽃가루를 두 손 가득 쥐고선 서로에게 뿌리며 개구지게 웃고 있었다. 백현이는. 백현아, 어디있어. 애타는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던 경수의 눈에 백현이 들어왔다. 정확히 경수가 서있는 곳에서 반대쪽 팬석을 향해 쪼그리고 앉아 눈웃음을 치고 있는 백현을 본 순간, 허무함이 물밀듯 경수를 덮쳐들었다. 망했다. 느리게 카메라를 들고 망원렌즈를 쭈욱 잡아당겨 보았지만, 뒷통수만 찍힐 뿐이었다. 경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하필 오늘인거야! 백현의 팬서비스 폭격에 정신을 못차리는 홈마들의 셔터소리가 저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왔다. 모공까지 찍히는 거리에서 쉴새없이 말을 걸고, 활짝 웃어 보이는 백현덕에 팬석은 거의 아수라장이었다. 이젠 무대 끝에 걸터앉아, 팬석으로 손까지 뻗는 것이 아닌가. 경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끝까지 카메라를 손에 놓치 않은 채, 뒷모습이라도 열심히 찍고 있었지만 이내 분노에 가득 찬 경수의 눈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카메라의 전원을 끈 경수가 빈틈없이 꽉 들어찬 팬석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비집고 나갔다. 이곳 저곳에서 밀지 말라는 둥, 무어라 욕설이 튀어나오는 듯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기분이 몹시도 좋지 않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녹화장 문이 닫혔다. 한참 브이를 그리며 웃고 있던 백현이 뒷쪽을 힐끔거렸다. 잠시 한쪽 입꼬리가 비틀리는 듯 했지만, 워낙 순식간이라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선후배 가수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내려오자, 코디가 호들갑을 떨며 휴지를 내밀어 얼굴을 닦아냈다. 무슨 땀을 이렇게 많이 흘려. 메이크업 무너진다고 살살 하랬지! 아프지 않게 등짝을 내려치는 코디의 말을 가볍게 웃어 넘기며 백현은 미니 선풍기를 받아든 채, 대기실로 향했다. 컴백 무대라 온 신경을 쏟아부어서인지 쇼파에 기대 앉자 마자 피로가 훅 끼쳐왔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을 억지로 밀어내며 선풍기를 목 부근에 가져다대고 쇼파에 길게 누웠다. 하나 둘 들어오는 멤버들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마 오늘 스케줄이 여기서 끝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백현은 젖은 와이셔츠자락을 앞 뒤로 펄럭였다.
"오늘 다들 진짜 잘했어! 오늘처럼만 하자. 쭉."
지치지도 않는지 준면은 평소와 다름없이 의욕이 활활 타오르는 눈을 하고 있었다. 하여튼, 준면이 형은. 백현의 머리맡에 쭈그려 앉은 세훈이 투덜거렸다. 한명씩 의상 갈아입고 오라는 코디의 말에 준면이 가장 먼저 탈의실로 들어갔다. 맨 마지막에 느긋하게 갈아입어야겠다 생각한 백현이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살며시 내리감았다. 솔솔 불어오는 선풍기를 배 위에 올려놓은 채로.
"형."
변성기를 지나 이제는 한층 낮아진 세훈의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울려퍼졌다. 나른한 그 목소리에 더욱 더 깊은 잠에 빠지려는 백현이었다. 미동조차 않는 백현을 내려다보던 세훈이 선풍기를 휙 뺏어가더니, 제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미간을 확 찌푸린 백현이 눈을 쭉 찢고선 세훈을 올려다보았다.
"아, 왜."
"자는 거 아니었어요?"
"불렀으면 말을 해."
팔로 눈을 가린 채, 웅얼거리던 백현이 제 배 위로 다시 올라오는 선풍기를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던 세훈이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티 나던데."
"무슨 소리야."
"걔. 아이폰 도둑."
괜히 알면서 이래. 머리를 쿡쿡 찔러오는 세훈의 목소리에 장난스러움이 가득 배어나왔다. 세훈의 말에 괜시리 움찔하던 백현이 선풍기를 이마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걔가 뭐.
"오늘 아주 형만 죽어라 찍던데."
"원래 내 팬이야."
"평소엔 다른 멤버도 찍는데, 오늘은 아주 그냥 죽어라 형만 찍어대던데요."
"그러더냐."
뭐 대수로운 일이냐는 듯 태연하게 대꾸하던 백현은 갑작스레 빼앗긴 선풍기에 상체를 확 들어올렸다. 아, 왜 자꾸 뻿어가!
"형, 일부러 걔 카메라 피했죠?"
"뭔 소리래."
"티 완전 났다니까."
코웃음을 치던 세훈이 코디의 부름에 벌떡 일어나 탈의실로 향했다. 세훈이 앉아있던 탓에 움푹 파여있던 쇼파가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갔다. 덩그러니 남아있는 선풍기를 제 손에 쥐던 백현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피하긴 누가 피했다고 그래. 눈을 감고 쇼파에 몸을 기댄 백현의 머릿속에 새하얀 얼굴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