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닉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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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의 리드보컬 변백현 X 사생팬 도경수
-5-
w. 자연으로 오세요
"아무리 눈가림을 해도 내 눈은 속일 수가 없지."
하고 세훈은 까닭없는 미소를 준비하며 확신하듯 중얼거렸다. 손 안에 펜을 쥐고 사부작사부작 꿈질대던 백현이 공연스레 헛기침을 해댔다. 괜스레 눈썹을 긁으며 눈을 굴리던 백현이 제 앞에 온 팬을 보고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눈꼬리가 한껏 내려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감쪽같이 표정을 숨길 수 있대. 혀를 쯧, 하고 찬 세훈이 고개를 살짝 내리깔고 좌우로 도리질했다. 참 맑게도 웃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이라고 의심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 완벽하게 숨겨진 그의 얼굴이 오늘 따라 슬퍼보인다고, 세훈은 생각했다.
집까지 어떻게 도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하철 역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질 않아, 택시를 잡아 탔다. 차창을 꾹꾹 누르며 의미없는 낙서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늘 두 글자만이 남아있었다. 한참을 뚜덕거리던 경수는 물방울이 흘러 지익 흐를 때까지 낙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어락 소리에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는 초조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일찍 돌아 온 아들의 표정은 여전히 캄캄했지만, 그래도 한결 나아진 것도 같다고 그녀는 제 자신을 달랬다. 행여 제 아들이 집을 박차고 뛰쳐나갈까 싶어, 말조차 걸지 못한 채 우물쭈물해 하는 그녀를 쳐다보던 경수가 입을 열었다.
"엄마."
"응?"
궁금증을 꾸역꾸역 삼켜내느라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내가 엄마를 싫어하면, 어떨 것 같아요."
"……글쎄."
"……."
"슬프지 않을까? 많이."
경수가 엄마를 싫어하면, 많이 슬플 것 같아.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세월의 흔적이 그녀의 눈가에서 살포시 접혔다. 경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등 뒤로 문고리를 잡고 문짝에 기대어 선 경수의 입에서 애끓는 한숨이 터져나왔다. 혼란스러운 머리는 더 이상의 사고가 불가능했다. 안녕하세요- 녹녹한 목소리가 제 귀를 간지럽히고, 그 것이 가슴께로 흘러들어 딱딱하게 굳힐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미안해요- 아주 담담한 목소리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 어렴풋하게만 느껴졌다. 흥분, 화, 분노마저 가라앉은 자리에는 그저 침잠한 그의 표정만이 남아있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경수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의미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제게 돌아온 그 시선만이 중요했다. 나를, 쳐다 봤어. 먹먹한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울먹이던 입에서는 끅끅거리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고작 그게 뭐라고 저를 쳐다봐 준 것만으로도 이만큼 행복해하는 자신이 애처로워서 눈물이 났다. 그럼에도 좋은 너였다. 천장을 보며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그 자리에 사르륵 주저앉은 경수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각종 메신저에서 뜬 알림이 상단바를 가득 채웠다. 덧없이 액정을 문지르던 경수의 눈에 스케줄표가 들어왔다. 안 그래도 꽉 들어 찬 스케줄란에 행사 몇 군데가 더 추가되었다는, 친한 홈마의 불만섞인 메신저가 날아들었다. 무거운 눈을 문지르던 경수가 액정을 끄고선 잠시 시선을 멍하게 두었다. 이내 가볍게 털고 일어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그런 제 모습에 자조섞인 웃음이 터져나왔다. 카메라 배터리까지 차곡차곡 집어넣은 작은 백팩을 챙겨 든 경수가 가방 끈을 만지작 거렸다. 행사는 내일 저녁이었다. 가방을 책상에 올려두고 무거운 몸을 침대에 뉘였다. 이마에 손을 짚자,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이 속도를 늦춰갔다. 가만가만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이 두 눈을 가렸다.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결국 잠든 것은 끝내 창문 새 스며드는 여명을 확인하고 난 후였다. 점심을 훌쩍 지나 천천히 눈을 떴을 때에는 망설임없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있었다.
집보다 익숙해진 대기줄의 앞에는 언제나 경수가 있었다. 조금 늦은 탓에 첫번 째는 아니었지만, 만족스러운 대기번호를 받아 든 경수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7시.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행사는 한없이 지연되고 있었다. 지친 경수의 다리가 욱신거렸다. 두 시간을 내리 서 있던 탓에 후들거리던 다리는 더 이상 서 있을 힘조차 없다며 비명을 질러댔다. 입술을 감쳐물던 경수의 미간이 바삭거리며 구겨졌다.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을까, 기다리던 입장이 시작되고 당당히 스탠딩 석에 자리를 잡고 선 경수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정확했다. 정확히 한 가운데다. 카메라와 같이 마음도 고쳐잡으며 경수는 눈을 감고 홀 안에 채워지는 인파에 섞여들어갔다. 지연되었던 행사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진행자가 빠르게 멘트를 읽어내려갔고, 엑소의 차례는 행사의 끝자락에서야 돌아왔다. 차분한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그 소란스러움이 소리를 키워가고, 이내 으리으리한 함성으로 자라났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자꾸만 도근도근 한 것이, 귓 가에서 절구를 찧는 것만 같았다. 왼쪽 가슴을 한 번 쓸어내리기도 전에, 전주가 폭발하듯 시작되었다. 홀 전체를 꽝꽝 내리찍는 비트에 발 밑이 일정한 박자로 요동했다. 체 한 듯 속이 울렁거렸다. 첫 스타트를 끊은 세훈의 파트가 끝나고 백현의 파트가 돌아왔다. 오늘은 메이크업이 자연스러웠다. 의상에 초점을 두자는 코디의 의견이었다. 깔끔하게 내려오는 머리는 백현이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며 윤기를 뽐냈다. 황홀경에 빠진 듯 셔텨를 누르던 경수의 숨이 일순 잦아들었다. 귓가에 울리던 음악소리는 볼륨을 줄인 듯 서서히 작아져가고, 사람들의 움직임은 뒤에서 누군가 잡아당기는 듯 어색하게 느려져갔다. 화려한 조명은 색을 잃고, 공기를 어지럽게 울리던 스피커의 비트는 어긋났다. 오직, 무대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백현만이 생동감있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온 몸을 휘감는 싸한 느낌에 경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셔터를 누르는 것 마저 잊어버렸다. 시간들을 달려서, 너에게로 왔어. 쾅, 쾅, 쾅, 쾅. 제 앞까지 다가온 백현이 두 눈을 빠르게 꾸욱 감았다가 떴다. 그 뒤에 딸려오는 곱다란 웃음과 함께 파트가 끝난 백현이 제 위치를 찾아 가는 동안 경수는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지지할 힘을 잃은 다리는 위태롭게 땅 위에 곧추서있었다. 곧 멤버들이 대형을 맞추더니 둥그렇게 섰다. 빙글빙글 돌며 열심히 춤을 추는 멤버들 속에서 보이는 것은 환한 미소를 띈 백현이었다. 그 때였다. 환한 미소로 안무를 추던 백현의 몸이 크게 휘청인 것은. 경수의 왼쪽편에 서 있던 사생이 백현의 발목을 콱 잡아챈 것이다. 당황한 멤버들이 어찌 할 새도 없이 백현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더니, 허공으로 부웅 떠올랐다. 그리고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갔다. 경수의 시야에 시간은 한없이 느리고 정적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없었다. 경수는 볼품없는 다리를 움직여 멈춰진 인파를 거침없이 헤쳐 나갔고, 시선을 들자 제 눈 앞에 백현의 등이 있었다. 쿵. 이마에 떨어진 묵직한 카메라와 함께 경수의 의식도 힘없이 툭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