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이 새하앴다. 하얀 벽이 주위를 뱅글뱅글 감싸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빈도가 잦아진 두통이 찌르르 머리를 울렸다. 그리고 얇은 모포가 무릎 아래로 떨어졌다. 모포? 싸늘해진 어깨가 추위에 움츠러들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머리안에 새하얀 벽이 가득 찼다. 눈을 몇번이나 감았다 떴을까. 뻑뻑한 눈동자가 얇은 눈꺼풀 안에서 헤엄쳤다. 혈관을 거쳐 감은 눈까지 찌르고 들어온 오후의 햇살이 간지러웠다. 눈을 비비며 얇은 천 조각에 손을 댔다. 마른 촉감. 곱게 접은 경수가 그것을 들고 자리를 털었다. 기다림에 지쳐 잠들었던 지난 새벽의 저를 상상했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을 푸욱 묻었다. 뒤집어진 뒷머리를 정리하는 손길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의미없는 행동을 반복하던 경수의 손이 뚝 멈췄다. 불현듯 스치는 좋지 않은 예감. 설마.
"……내 카메라."
모포 위를 비집고 튀어나온 눈이 복도 구석구석을 헤집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시선에서 팽팽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한바퀴를 뱅그르르 돌고 다시 하얀 벽과 마주한 경수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떨궈진 손 끝에 걸쳐진 모포가 위태로웠다. 깨진 카메라 안에 꽂혀있던 메모리카드. 그 날의 위험했던 장면까지 담겨져있을 자신의 카메라가, 자고 일어난 사이 없어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눈을 거듭 치켜떴다. 경수는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초조하게 떨어지는 발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넓지도 않은 조그만 복도를 끊임없이 돌았다. 같은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경수는 깨달았다. 가져갔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경수는 1층에 있는 거대한 팬 무리를 의심했다. 우선순위로 기자들을 꼽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생. 사생은 상상하지 못할 일들을 평범한 일상처럼 여긴다. 백현이 입원을 했고, 그의 팬이 옆 병실에 입원했다. 동기는 충분했다. 경수는 얼마전까지 수도 없이 올라왔던 자신을 향한 악플들을 떠올렸다. SNS를 꽉 채운 인신공격과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설들. 같은 사생이름을 달고도 저를 비난하는 그들을 경수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같은 사생이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하루의 전부인. 경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자신의 논리가 억측이길 바랐다. 결국 경수는 프론트에 가보기로 마음을 돌렸다. 분명 그곳에 있을거야. 홀로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경수는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그 때, 어깨에 급작스러운 무게감이 엄습했다. 무어라 알아채기도 전에, 돌려진 경수의 몸이 병실 안으로 빠르게 먹혀들어갔다. 하얀 벽이 모던한 벽지로 바뀌고, 문은 닫혔다. 아직도 단단히 잡힌 어깨에 미미한 통증이 전해졌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손톱에 경수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아!"
그도 놀랐는지 어깨에 올린 손을 빠르게 거두었다. 가벼워진 어깨 위로 가습기의 축축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병실이 넓었다. 자신의 것과 비슷한 구조였다. 경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쉿."
"……."
"말하지 마."
수목원도 아니고 화단도 아닌 것이 향기로운 내음이 났다. 그것도 아님 꽃집인가. 어지러이 퍼지는 달큰한 봄내음에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무수히 쏟아지는 햇살과 그 사이를 부유하는 물알갱이,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시야 안에 백현이 있다. 경수는 자신이 아직도 꿈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전혀 낯선 세계의 풍경이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어릴 적 동화에서 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말했다. 모든게 너무 혼란스러워. 잠에서 깨 눈을 떴을 때,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던 바람이 이루어진걸까.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카메라도, 병원도, 머리에 감겨진 이 붕대도, 내 눈 앞에 있는 너도. 눈을 뜨면 사라지는 일장춘몽이었으면 좋겠다.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은 언어기능을 마비시켰다. 굳은 입술 새로 뜻없는 말들이 토해져 나왔다. 잠깐. 아니야, 혹시. 그러니까, 니가.
"…백현이."
니가 백현이니? 바보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물었다. 너 변백현이야? 뻔한 패턴의 드라마에 나오곤 했다.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를 보고, 제 눈을 의심하며 손등으로 눈꺼풀을 마구 비비고는 한참 후에야 진짜 너야? 같은 뻔한 대사를 읊조리는 주인공들이. 드라마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지금 경수는 그 뻔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백현의 앞에 섰다. 한참 뒤에야 영원히 정지할 것만 같던 장면이 움직였다. 슬로우모션처럼 백현이 테이블에 손을 뻗어 카메라를 쥐었다. 이거. 건네지는 손길이 무심했다. 경수는 느리게 양 손을 뻗었다. 두 손바닥에 올려진 카메라의 렌즈가 자신을 묘하게 비췄다. 햇빛에 익숙해진 눈이 사물을 또렷하게 인식했다. 백현의 병원복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배상할게."
카메라 값 말이야. 또렷한 눈이 의미를 알지 못해 한바퀴 뱅그르르 돌았다. 답답하다는 듯 마주 보고 있던 백현이 툭 덧붙였다. 그 말에 경수가 고개를 휘휘 빠르게 저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이마를 철썩 때렸다. 백현이 미간을 구기고 자세를 고쳐섰다. 나 때문에 깨진 거니까 배상해준다고. 무엇이 못마땅한건지 백현은 시비조로 말했다. 그럼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경수가 답답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야. 아, 진짜. 입을 떼자마자 백현은 곧바로 후회했다. 거칠어진 말투에 경수의 눈에 물기가 번들거렸다. 본성이 자상하지를 못했다. 사근사근하게 뱉는 법을 몰랐다. 강아지같이 순한 성격. 그딴 건 카메라 앞에서 만들어낸 가짜 모습이었다. 본래의 변백현은 한없이 무딘 성정이었다. 그런 그가 경수를 울리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임에 자명했다.
"아니, 경수씨."
"……."
"배상을 해줘야 서로 찝찝한 거 없이 끝나요."
그보다 내가 찝찝해서 안돼. 무의식 가장 낮은 곳에 깔린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짧은 시간동안 강하게 뿌리내린 적대감과 거리감이 그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경수의 가슴을 모질게도 후벼팠다. 물론, 백현은 그 사실까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매니저한테 카메라값이랑 피해보상금 뭐 이런 거 청구하면 된다는 말이에요. 알아들어요? 재촉하는 백현의 목소리에도 경수는 꿋꿋이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굳이 그 이유를 들자면, 쪽팔렸다. 이렇게 아무 마음의 준비도 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어떡하자는 거야. 머리는 온통 까치집에 후줄근한 병원복 차림인데ㅡ물론 백현은 병원복을 입어도 멋졌다ㅡ내심 백현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백현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듯 계속해서 보상금에 대한 이야기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어쩌면 이게, 그 나름의 사과일지도 모른다고 경수는 스스로를 달랬다. 다시 문이 닫혔다. 이번에는 하얀 벽이었다. 그리고 현실이었다. 봄이 끝나고 겨울이 왔다. 경수는 추웠다. 아직도 손에 들린 모포가 꺼끌꺼끌한 감촉을 뽐내며 경수의 어깨에 둘러졌다. 백현의 말대로 곧 이어 매니저가 찾아왔다. 경수는 깔끔하게 그를 돌려보냈다. 단 한 마디로.
"유출 안해요. 사진이든 뭐든."
유치한 짓거리였다. 매니저는 생각지도 못한 경수의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확답을 얻어내자 미련없이 병실을 나갔다. 갑자기 불어오는 한기에 경수가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무릎에 통통한 볼을 올리고 백현을 떠올렸다. 질리도록 본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 앞에서 떨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어쩔줄을 몰라 요동치는 두 다리가 얄궂었다. 메모리카드의 둥근 모서리가 손바닥을 아프게 눌러왔다. 어떻게 처리 할 지 고민하던 카메라는 창 밖으로 내던졌다. 아마 지금쯤 산산조각이 나 아스팔트 바닥 어딘가에 쳐박혀 있겠지.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경수는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몸을 두텁게 감쌌다. 끝도 없는 한기가 끼쳐왔다.
경수의 퇴원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벼운 타박상에서 끝난 덕이었다. 반면, 백현은 퇴원날짜는 여전히 미정이었다. 매니저가 간간히 병실을 찾아오면 불퉁하게 입술을 쭈욱 내밀고서 핸드폰만 만지작댔다. 한 번은 꽥 소리를 지르며 퇴원할거라고 생떼를 놓아봤지만, 매니저는 말 없이 핸드폰을 압수해 갈 뿐이었다. 제 손을 떠난 아이폰을 허망하게 쳐다보던 백현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없이 절규했다. 병실에 있는 티비는 전원이 켜지는 횟수가 드물었다. 무대에 선 멤버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올라 끝내 티비를 꺼버렸다. 무대 위에서 부주의했던 제 자신에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빨리 나가고 싶어. 막힌 입을 웅얼대던 백현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렇게 근 한 달이 지나서야 백현은 꿈에 그리던 퇴원을 했다. 열심히 뛰어준 멤버들 덕에 신곡은 공중파 1위 석권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멤버들은 홀로 숙소에서 방송을 보고 있을 백현에게 말했다.
"백현아. 이 방송 보고 있지? 우리 1위 했다. 빨리 나아서 같이 무대하자. 사랑해."
지랄. 백현은 리모컨을 던졌다. 가증스러운 찬열의 웃음이 꼴보기 싫었다. 우두커니 쇼파에 앉아있던 백현이 꺼진 화면에 비춰진 제 얼굴을 보았다. 꼴이 말이 아니다. 퇴원한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푸석한 피부며, 거칠어진 머릿결은 좀체 돌아오질 않았다. 백현은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었다. 불편한 다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깁스를 풀긴 했지만,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라며 몇 번이고 주의를 주던 의사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도망치듯 병원을 뛰쳐나왔다. 해방감도 잠시, 백현은 병실보다 훨씬 넓은 숙소라는 감옥에 갇혀버렸다. 어느 채널을 틀어도 멤버들이 나왔다. 씨에프며, 광고며, 예능이며, 아홉시 뉴스까지. 올해는 엑소의 해가 될 것이라며 아나운서는 앨범 판매량 그래프 앞에 서서 말했다. 밖에는 자신의 쾌유를 빌며 밤낮으로 울어제끼는 팬들이 있었다. 핸드폰은 다리가 나을 때까지 받을 수 없다며 매니저는 으름장을 놓았다. 이보다 끔찍한 감옥은 없을거라고 백현은 자명했다.
새벽 2시. 텅 빈 숙소에서 백현은 눈을 떴다. 비쩍 마른 목구멍이 갈증을 호소했다. 방을 나오자 완벽한 어둠에 잠긴 거실이 있었다. 더듬더듬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고 보조등을 켰다. 커다란 식탁에 덩그러니 의자를 빼 앉았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중국 스케줄이 잡혀있었다. 내일 점심 쯤 들어오겠지. 멤버들의 얼굴도 이젠 가물가물 했다. 퇴원하고 한 번도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으니. 새벽에 들어와 새벽에 나가는 아이들. 막내는 잔인한 스케줄을 이겨내는 것이 버거웠는지, 늘상 표정이 굳어있었다. 검색어에 세훈 방송태도 논란이 뜨고 난 후, 꾸역꾸역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막내의 모습에 백현은 괜스레 가슴이 저렸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무대를 하고, 숙소에 돌아와 옷만 갈아입고 나가는 멤버들의 하루가 수도 없이 반복되고 백현의 죄책감은 늘어만 갔다. 멤버들의 노력에 무임승차하는 기분이었다. 백현은 병원에서 받아 온 알약을 마구 입 안에 털어넣으며 잘근잘근 씹어댔다. 다리야. 빨리 나아라. 터진 알약에서 가루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입안이 미친듯이 썼다.
백현이 숙소에만 있는 시간이 늘어가자, 팬들은 아예 숙소 앞에 진을 치고 목이터져라 백현의 이름을 불러제꼈다. 달빛도 사그라든 새벽, 발코니 너머로 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어둔 창문에서 차가운 새벽공기가 새어들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백현이 조심스레 발코니 앞으로 갔다. 어렴풋이 팬들의 머리가 보였다. 다닥다닥 까맣게 모여있는 팬들은 쉬지도 않고 제 이름만 불러댔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백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몰라, 자자.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백현의 눈을 사로잡은 뒷통수가 있었다. 일부러 염색한 듯 새카만 머리카락. 유난히 작은 키. 심증도 물증도 완벽했다.
"…도경수?"
분명 제 귀에도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읊조리듯 내뱉은 그 목소리를 들었던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는지 몰랐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커다란 눈이 정확히 자신을 바라봤고, 제가 먼저 그 눈을 피했다는 것이었다. 촥 소리와 함께 커튼이 완벽한 암실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커졌다. 백현아! 좀 나와 봐, 백현아!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음성들을 가멸차게 내치고 백현은 방으로 들어갔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침대로 기어들어가자, 음성은 더욱 더 크게 들려왔다. 정말 목소리를 들은거야? 믿을 수 없이 정확한 타이밍에 뒤를 돌아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잔상처럼 어둠속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눈을 떨쳐냈다. 스쳐지나간, 정말 짧은 찰나에 두 눈은 오롯이 백현을 찾고 있었다. 마주친 두 눈, 그리고 제 가슴에서 휘몰아친 그 감정들을 백현은 알지 못했다. 바싹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여봐도 금새 쩍쩍 갈라졌다. 미처 닫지 못한 발코니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밀려들었다.
"아씨…."
잠잠했던 불면증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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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는 정말 숨도 안 쉬고 미친듯이 썼네요ㅠㅠ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타 및 오류 발견하시면 지적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