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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의 리드보컬 변백현 X 사생팬 도경수
-4-
w. 자연으로 오세요
피곤함에 눅진한 몸은 한참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딴에는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이라며, 나름의 배려를 해준 것인지 세훈은 말없이 베개를 들고 종인의 방으로 향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딱히 붙잡진 않았다. 세훈은 무뚝뚝했지만,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아이였다. 깊게 말을 섞어본 적은 없지만, 룸메이트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성정이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도 귓전을 때리는 초침소리가 거슬렸다. 싱글침대가 힘없이 삐그덕거렸다. 백현은 베개밑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켰다. 캄캄했던 시야가 일순 밝아져 눈살이 찌푸려졌다. 입술이 마른 낙엽마냥 버석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던 백현은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화면에서 쏟아지는 불빛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호들갑스러운 슬리퍼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천천히 신발을 꿰어 신던 경수는 제 앞에 멈춰선 짙은 감색 슬리퍼를 잠시 쳐다보았다. 학교 가니. 경수?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에 괜시리 울컥하는 마음을 먹먹하게 달랬다. 말없이 뒤돌아선 경수의 등으로 따뜻한 눈빛이 쏟아졌다. 좀체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는 집을 나섰다. 조심히 다녀와, 우리 아들. 닫히는 문 틈 새로 다급히 던지는 목소리에 진심어린 걱정이 묻어나왔다.
평소 스케줄마다 끌고 다녔던 차는, 오늘 타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오늘은 지하철이 타고 싶었다. 숨막히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구겨지듯 끼어진 채, 한참을 덜컹거리다보면 금새 도착할 것이다. 조금 걷고 싶었다. 지하철역까지 걷는 내내, 경수는 고개만 푹 숙인 채 백팩 끈만 만지작거렸다.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그 사실이 경수를 슬프게 만들었다. 쏟아질 것 같은 눈에 습기가 어렸다. 거칠게 눈을 문지른 경수가 커다란 백팩에서 야구모자를 꺼냈다. 제 머리보다 조금 큰 사이즈 덕에 눈두덩까지 푹 덮인 캡모자 아래로 하얀 피부가 유독 창백했다. 제 분신과도 같은 카메라를 목에 걸고, 한 손에는 입장권을 든 채 팬싸인회 장으로 향하는 경수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목 끝까지 채워잠근 점퍼 안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입장권을 주고 순번에 맞추어 자리에 앉았다. 기다란 테이블과 12개의 의자.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던 경수의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백현아. 널 만날 때는 늘 설레는 마음에 떨리곤 했었는데.
난 지금 왜 널 생각하면 두려워지는걸까.
어느새 100명의 선택받은 인원들이 모두 입장하고 무거운 철문이 굳게 닫혔다. 행사를 시작한다는 진행요원의 멘트와 함께,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었다. 흥분과 떨림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멤버들이 하나 둘 입장하기 시작했다. 우렁찬 비명에 경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카메라를 잡으려 해봤지만, 엄격하게 통제하는 진행요원들 때문에 촬영은 포기해야 했다. 백팩에 카메라를 넣고 대기순서를 확인했다. 앞줄에 앉아있던 경수의 순서는 생각외로 빨리 돌아왔다. 무대위로 걸음을 옮기는 경수의 다리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침착해, 도경수. 왜 이래, 한 두번도 아니잖아. 자신을 채찍질하며 무대로 걸어갔다. 방긋방긋 예쁘게도 웃는 멤버들에게 앨범을 건네고 싸인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름이?"
"도…경수요."
"어? 혹시 그 때 뵜던 분인가?"
종대의 활기찬 목소리에 경수가 흠칫 손을 떨었다. 설마.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걸까. 어쩔 줄 모르는 눈동자가 갈 곳없이 허공을 배회했다. 손에서 식은땀이 질척하게 배어나왔다.
"저번에 대전 팬싸때도 오지 않았어요? 남자분이라 기억나는데!"
"네, 맞아요."
"하항, 나 기억력 되게 좋다!"
모자를 더욱 눌러 쓴 경수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얼굴한번 쳐다보지 않고 하나 하나 싸인을 받던 경수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움직이기 위해 살짝 고개를 든 순간, 마지막으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음 분, 이동하실게요."
하마터면 앨범을 떨어뜨릴 뻔했다. 삐걱대며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당겨 백현의 앞에 섰다. 앨범을 내려놓는 손이 사시나무 떨 듯 후들댔다. 침조차 삼켜지지 않는 입을 천천히 떼었다.
"안녕하세요."
"…네."
보지 않아도 눈 앞에 그려지는 백현의 미소에 정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염없이 펑펑 울 것만 같아서, 손바닥으로 입을 꾸욱 내리눌렀다. 사각거리는 펜소리가 유난히 느리게만 느껴졌다.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경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느릿하게 펜을 놀리던 백현이 고개를 들어 경수를 올려다보았다. 한 쪽 눈을 감고 보아도, 경수는 안쓰럽도록 떨고 있었다. 펜 뚜껑을 손에 쥔 채 그런 경수를 쳐다보던 백현이 몇 번 입을 달싹이다가 목을 울렸다.
"이름이 뭐였죠?"
금새 까먹었네. 장난끼 넘치는 목소리가 경수의 눈물샘을 자꾸만 자극했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던 경수가 가쁜 호흡을 내쉬고선, 제 이름 석자를 불렀다. 사실, 경수는 백현에게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파르르 떨며 앞에 섰고, 말없이 싸인이 끝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현은 반듯한 글씨체로 경수씨. 라고 적었다. p.s를 쓰려 내려가던 손을 멈추고, 펜 뚜껑을 닫았다. 앞머리를 쓸어올리려다, 강력 스프레이로 고정시키며 몇 번이고 거듭 말하던 코디의 당부가 떠올라 그만두었다. 시릴만큼 낮은 목소리가 경수를 불렀다. 경수씨.
"……."
"왜 안 봐요. 나 보려고 여기 온 거 아닌가."
경수는 얼굴을 땅으로 떨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숨에 울음이 섞여있는 듯 했다. 그 모습에 아랫입술을 짓이기던 백현이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히 읊조렸다.
"미안했어요, 그 땐."
"……."
"뭐라고 더 말씀 드리고 싶은데, 이제 경수씨 내려가야 될 것 같아서."
"……흐으…."
"미안해요. 정말."
나중에 볼 땐, 많이 웃어줄께요. 뒷말은 차마 들려주지 못한 채로, 경수는 끌려가듯 무대를 내려갔다. 앨범을 꼭 쥔 손이 핏기 없이 새하얗게 질려있던 것이 눈 앞에 어룽거렸다. 손이 차가웠다. 온풍기에서 펑펑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도 냉골처럼 차가운 손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힐끗 본 마지막 뒷모습은 소리없이 들썩이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말없이 떨리던 어깨가, 요동하는 팔이, 공률하던 얇은 다리가 그렇게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