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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이지훈] O.M.R (Oh My Rainbow) Returns _ 09 | 인스티즈

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Murakami Haruki - 〈Norwegian wood> 중에서














[세븐틴/이지훈] O.M.R (Oh My Rainbow) Returns _ 09 | 인스티즈

     이른 아침, 차가운 물줄기에 건조함을 씻어낸 초췌한 얼굴이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거울에 드문드문 박혀 어지러움을 토해냈다. 충혈된 눈동자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 붉은 실을 잠재운다. 손등과 턱선을 따라 미끄러지던 물방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해 세면대 아래로 자살을 시도했다. 남은 잔해들도 곧 그럴 운명이었다.


뿌연 수증기가 실내 곳곳에 축축함을 남긴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싼 채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였다. 창밖 너머 새벽녘의 그림자가 빈 책상에 드리울 때, 진즉 샤워를 마친 룸메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식어 빠진 커피를 들이켰다.

드디어 마지막 시험이네. 마케팅 P 강당이라던데. 그녀의 손가락이 창밖 너머 산 중턱을 가리킨다. 캠퍼스에서도 맨 꼭대기에 자리한 최후의 건물이 희생양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난 마케팅 교수의 탁월한 선택에 갈채를 보냈다. 그녀가 옅게 조소했다. 

먼저 시험을 끝낸 타과 학생들은 일찍이 기숙사를 떠난 터라 인적 없는 건물은 적막했다. 문밖으로 복도를 걷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발자국이 잔 먼지를 남긴다. 먼저 준비를 마친 그녀가 운동화를 구겨 신고 현관 문고리를 잡았다. 시험 잘 봐. 나중에 한 번 모이자. 빠지면 섭섭할 형식적인 인사도 잊지 않고서.




- “아아.”

……

- “……아아.”




공허한 메아리가 울린다. 온기 없는 바닥은 사막의 모래알로 서걱거렸다. 주인을 잃은 식어 빠진 커피잔이 홀로 자리를 지킨다. 그 길이 외로울까 침대 맡에 앉아 대신 온기를 나눴다. 적당한 온도에 창밖 아름드리 나뭇가지에도 해가 걸린다. 나뭇가지를 적시는 물구나무선 바다, 지난날 내가 누구인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물었던 하늘 속에 오래된 영상이 담기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세븐틴/이지훈] O.M.R (Oh My Rainbow) Returns _ 09 | 인스티즈

흑백 영상 속 돌아가는 낡은 필름은 내 잔상들로 이루어진 기억의 파편이었다. 흐릿한 장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선명해졌고, 평범하기 짝이 없던 B급 영화에 어느덧 이지훈, 그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을 진 캠퍼스 언덕에 올라 하늘에 손을 뻗고, 본관 건물 벽에 비스듬히 기대 모자를 고쳐 쓰고, 기숙사 앞 벤치에 앉아 통화 하다 눈이 마주치면 옅게 미소 짓고, 푹 패인 보조개가 달빛을 머금고…….


어느 날 시계의 운동이 곱절보다 빠름을 느꼈을 때, 그리고 근본 없이 할애되었다 생각했던 내 시곗바늘의 주체가 지훈이, 너였음을 깨달았을 때, 내 입술은 비로소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소중한 내 것을 그보다 소중한 너에게 준 것이었구나, 라고.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21 <너와 나의 거리>
























[세븐틴/이지훈] O.M.R (Oh My Rainbow) Returns _ 09 | 인스티즈

32.
학기 마지막 스케줄이 치러질 시험장 앞에서 창문 가장자리에 얼룩진 자국을 따라 초점 없는 눈동자를 굴렸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강당 입구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든 웅성거림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순간 수그러들었다. 대신, 바닥에 주저앉아 손때 묻은 요약 노트를 훑거나 긴장을 없애려 친구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들, 혹은 나처럼 창밖을 말없이 바라보는 이들의 담담한 습도가 있었다.

얼룩을 쫓던 눈동자는 오후의 강렬한 빛에 잠시 눈꺼풀 뒤로 모습을 감췄다. 그보다 먼저 눈을 감고 불경을 외듯, 옆에서 마케팅 관련 용어를 줄줄이 꿰는 동기의 입술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여자애 있잖아. 네 남친 쫓아다니던……. 감긴 눈꺼풀이 각성하듯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녀의 손을 벗어난 펜이 허공에서 일정한 속도로 원을 그리다 낙하했다. 중력에 의해 자살하던 새벽의 물방울이 흔들렸다.




- “이번에 자퇴한다고 동아리 선배들이 그러더라.”

- “…….”

- “하긴, 과방 앞에서 그 쪽을 당했는데 나 같아도 얼굴 팔려서 못 다닌다.”

- “…….”

- “금수저로 태어나면 뭐해. 행실이 그 모양인데. 안 그래도 부모 빽 믿고 나대는 거 눈꼴시려웠는데 잘 됐지 뭐.”




그녀는 요약 노트를 넘기며 다시 암기에 매진했다. 창가에 떨궈진 빛이 휑한 발목을 얼린다. 새벽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시던 민규가 생각났다. 한창 지훈과 여자애의 관계에 모든 것이 침체될 무렵이었다. 민규는 적을 알아야 백전 백일승이라며 나지막이 운을 틔웠다.




- ‘건축하는 사람 중에서 그 여자애 부모 회사 안 들어 본 사람 없을걸. 개총 전부터 선배들이 번호까지 알아갔다니까. 금수저가 뭐야, 완전 캐럿 수준이지.’

……

- ‘처음엔 여러 남자 찔러보는 쓰레기 인성이다 뭐다 뒤에서 욕했으면서, 막상 나중에는 자리 하나 얻고 싶어서 선배들부터 입 털기 장난 아니었다고.’

……

- ‘요즘 대기업도 인턴은 먹고 버리는 판국에, 거긴 정규직 채용률도 높고 연봉도 탄탄하다 그러니까 걔한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대놓고 무슨 지랄을 하겠어? 다들 입 다물고 쓰레기든 뭐든 모른 척하는 거지.’




민규는 씁쓸한 마지막 한 모금을 넘겼다. 반절도 털어내지 못한 내 것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도저히 마실 기분이 나지 않았던 건 그들의 상관관계 때문이었다. 권력 있는 부모, 금수저, 그리고 그 황금빛으로 머리칼을 흠뻑 적시고 싶은 육지 밖 정어리들.

……알 수 없다. 아직 때가 타지 않은 것인지, 아님 부러 모른 척하고 싶은 것인지. 복잡한 관계가 그물이 되어 서로의 아가미를 엮는다.




- “여주야, 방학 때 뭐 할 거야?”

- “글쎄…….”

- “내가 아는 언니가 호텔 사무직에서 일하거든? 친하지는 않은데, 어떻게 말 좀 잘해서 단기라도 끼워 달라…….”

- “문, 열렸다.”




굳게 닫힌 대강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짧게 친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구석에 놓인 가방을 챙겼다. 혹시 관심 있으면 연락해. 부대끼기 싫어도 인맥 통해서 일하는 게 제일 나아. 내 어깨를 주무르던 그녀가 강당으로 사라진다. 대기하던 모든 이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난 창밖 서슬이 시퍼런 볕을 온몸으로 맞았다. 건축과 아이들도, 당장 미래를 생각하는 그녀도 아직 내게는 너무나 버거운 현실 속 사람들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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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험이 끝난 시각은 교내 연못 속 창백한 잉어 꼬리에 노을의 절정이 새겨질 때였다.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시각도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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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낮게 깔린 하늘은 이유 없이 울어 댔다. 젖은 어깨를 털어 빗물을 날린다. 약속 장소는 학교와 다소 먼 카페였다. 둥근 테이블에 마주 앉은 상대방의 찢어진 두 눈이 내 손마디에 있는 반지에 머문다. 그녀는 밋밋한 손으로 유리잔을 움켜쥐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 “사람들이 언제 불행을 느끼는 줄 알아?”

- “…….”

- “내 것보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게 더 좋아 보일 때.”

- “…….”

- “나한텐 이지훈이 그래.”




검은 빗방울에 몸을 떠는 민들레가 바람에 밀려 차도에 유실됐다. 그 장면을 담던 두 눈이 내게 향한다. 생기 잃은 눈빛, 그녀의 공허함을 비추는 마음의 창이었다. 그녀가 형용하고 싶지 않은 연민과 동정을 억지로 끌어낼 계획이었다면, 난 단호히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실 그 어디쯤 매장하고 싶은 덩어리를 끄집어낸 그녀가 포장 없이 말한다. 나는 지금 나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고.




- “어떻게 한 사람을 저렇게도 좋아할 수 있을까. 나는 죽도록 불행한데 이지훈은 왜 너만 보면서 웃고 있을까.”

- “…….”

- “나도 갖고 싶다, 뺏고 싶다, 저 옆 자리 내가 앉고 싶다.”

- “…….”

- “나도 저런 사람이 있었다면……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끝을 흐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종국에는 눈물을 쏟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떤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를 찌를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못된 욕이라도 해볼까, 지난날로 돌아가 일일이 잘못을 되짚어줄까, 인성을 운운하며 비난을 해볼까. 하지만…….




- “……넌 지금 어디 있는데.”

- “네가 상상할 수 없는 밑바닥.”

- “…….”

- “내 이름인데 날 부르는 게 아닐 때, 그래서 비참해질 때……. 그 기분, 네가 알아?”




벌건 눈가를 훔치며 불규칙한 숨을 내쉰다. 그녀와 내가 유일하게 같이 걷는 길은 김여주, 이름 석 자. 내 앞에서 잃어버린 그녀의 이름이 빗물에 젖는다. 애석하게도 일말의 연민이 드는 까닭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진 제 이름을 온전히 제 것으로 담을 수 없었던 그녀의 씁쓸함이 입가에 맴돌아서였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 이상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범위임을 알기에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그녀는 가죽 가방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그 안에서 꺼낸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구깃한 모서리, 뒷면에 툭 튀어나온 익숙한 필체.




- “욕심 같아서는 벌써 버리고도 남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 “…….”

- “이제 내 연락은 안 받아. 그래서 너한테 전화 한 거야.”

- “…….”
- “네가 알아서 해. 어차피 네 꺼니까.”





굵은 빗방울이 멎는다. 먼저 자리를 떠난 그녀는 가게 문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다 모습을 감췄다. 창밖으로부터 스며든 높은 습도에 어느덧 실내에 비가 내렸다. 구깃한 실금이 잔뜩 난 종이에는 내가 모르는 이지훈, 그가 있었다.










여주랑 하고 싶은 거.

- 놀이동산 관람차

- 스티커 사진

- 음악 듣다가 낮잠 자기

- 책 읽어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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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이지훈] O.M.R (Oh My Rainbow) Returns _ 09 | 인스티즈

……좋아한다 말하기.





















[세븐틴/이지훈] O.M.R (Oh My Rainbow) Returns _ 09 | 인스티즈

34.
캠퍼스 운동장에 노을이 깔린다. 비가 그친 저녁, 기숙사 짐을 싣고 빠져나가는 차들이 축축한 진흙 위를 달렸다. 연이어 진한 바퀴 자국과 웅덩이를 남긴 채 언덕으로 사라진 그들은 인사도 없이 다음을 기약했다.

운동장 농구대에서 계 선배를 비롯한 아는 얼굴들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거진 지훈의 친구들이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고 스탠드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나무 사이를 빙빙 돌며 목표물을 탐색하던 고양이 한 마리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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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일본 고양이 그거 같다. 식당 카운터에 가면 손 들고 인사하는 거. 어느새 내 옆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는다. 머리를 쓰다듬는 낯선 손길도 피하지 않는다. 되려 기분 좋게 그르릉거리던 아이는, 이내 폴짝 계단을 내려가 솜뭉치로 신발 앞코를 눌렀다. 뾱뾱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집사가 꿈이라는 승관이가 보면 분명 질투할 장면이었다.

가까운 발소리에 잽싸게 화단 뒤로 몸을 숨긴 아이는, 빼꼼 고개를 내밀며 상대방을 염탐하다 금세 어딘가로 사라졌다. 대신 내 옆자리는 고양이 치곤 사람같이 생긴 지훈이 차지했다. 반달 눈으로 예쁘게도 웃는다.




- “둘이 성격은 닮았는데 사이는 별로 안 좋아 보이네.”

- “어제 싸웠어.”

- “미안하다고 문자 했어?”

- “응, 내가 서툴렀다고 장문으로 보냈지.”




이젠 시답잖은 농담도 무리 없이 받아친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우리 지훈이. 어깨를 맞대고 미는 시늉을 하는 내게,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잔잔한 숨을 뱉었다. 농구 골대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지훈을 부르던 계 선배는 포기한 듯 구석에 앉아 있는 석민을 괴롭혔다. 운동에 젬병이라는 석민은 농구공을 한 자리에서 빠르게 열 번을 튀기고 급히 퇴장당했다. 지훈이 석민을 보며 작게 웃는다.




- “끝나고 뭐 했어? 시험 아까 끝났다며.”

- “……약속 때문에 잠깐.”

- “기숙사 짐은.”

- “어제 택배로.”

- “나는.”

- “마음으로는 벌써 내 방에 가뒀어.”




건축과 종강은 내일, 더불어 그가 책임져야 할 종강 이후의 과제는 만만치 않다. 보통 정규 학기보다 방학이 곱절이나 더 바쁘다는 특수 학과 성격상, 먼저 본가에 내려가야 하는 아쉬움에 폭-, 한숨을 내쉰다. 당분간 나는 본가에, 그는 자취방에 머물러야 했다. 혼자 떠나는 것도 원치 않는 마당에 막상 떨어져 있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하루 일찍 종강을 맛본 승관이가 떠날 때 미련 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건만, 지훈이는 그게 되지 않는다.




- “건축은 방학이 아니라 학기의 연장선이네.”

- “응, 그래도 틈 날 때마다 보면 돼.”

- “누가 학교까지 와? 저도 방학 되면 할 일 많아요.”

- “네가 왜 와. 내가 가면 돼.”

- “빡빡한 스케줄에 누를 끼치기 싫은데요.”

- “뭐, 쉬는 날 하나쯤은 있겠죠.”




그리고 말투 왜 그래요. 저도 민폐 되기 싫은데요. 찌뿌둥한 얼굴로 조곤조곤 말을 잇는다. 조금은 붕 뜬 그의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로 빗어 내리자, 내 옆을 지키던 고양이처럼 말없이 받아 낸다. 어쩌면 정말 대화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똑 닮은 둘이었다.




- “벌써 저녁이네.”

- “…….”

- “……자?”




노을 진 하늘에 짙은 이끼가 몰려든다. 학교 울타리를 넘는 경적이 배경이 되어 정적을 깨웠다. 정말 자는 건지 미동 없는 말간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날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 “얼굴 닳겠다.”

- “내가 보여?”

- “콧김이 뜨거워.”

- “숨이라고 해.”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그가 반짝 눈을 뜬다. 물끄러미 내 얼굴을 훑던 그가 일어나 제 주머니를 뒤졌다. 손 줘봐. 줄 거 있어.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을 직접 내 손바닥에 얹는다. 은색 열쇠였다.




- “도어락 바꿀 건데 아저씨가 다음 주에나 올 수 있다 그래서 임시로 받아 놨어.”

- “네 오피스텔?”

- “어, 나중에 학교에 나 보러 왔는데 없으면 먼저 들어가.”

- “배운 게 도둑질밖에 없는데.”

- “맘대로.”




산 중턱에 걸린 노을이 발밑을 비춘다. 기지개를 켜는 그를 보며 보조개에 손을 자연스레 얹는다. 쏙 들어가는 별빛 두 개,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 눈에도 또 하나의 별이 반짝인다. 보조개를 만지던 손마디가 어엿한 두 뺨에 닿는다. 내 손등을 감싸 쥔 그가 그대로 입술을 감쳐 물었다.

습관처럼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공간을 만든다. 유일한 서로가 숨을 나누고 온전히 받아드리는 시간, 그가 내게 숨결을 불어넣는다. 갈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애타게 마음을 두드리는 그가 뺨에 진한 입맞춤을 남겼다.




- “소원 들어 줘. 세 가지 들어 준다고 약속했으니까.”

- “……뭔데?”

- “가지 마, 오늘.”

- “…….”

- “……안 가면 안 돼?”














운동장에 하얀 가로등이 피었다. 맞잡은 손에 장난스레 입을 맞추는 그가 쌀쌀한 공기를 녹인다. 넓은 어깨에 가볍지 않은 마음을 기대 함께 밤을 걷는다. 한쪽 후드 주머니를 차지한 구깃한 종이를 감싸 쥐고 입술을 뗐다. 작은 것 하나라도 너를 위해 헤아리고 싶은 날 부디 알아줬으면.




- “우리, 놀이 공원 갈까. 첫 방학이니까 가서…….”




……각성하듯 굳게 입을 다문다. 그토록 바라던 이러한 순간들이 어느 한 기점으로, 나락으로 쏟아져 내릴까 두려운 것이다. 비단 찰나의 두려움이 아니었다. 빌어먹게도 내 인생은 늘 그랬다. ‘행복’이라는 정의할 수 없는 감정에 심취하거나 깊이 빠져들면, 벌이라는 것이 항상 뒤를 따랐다. 그래서 행복에 절여지는 삶이 무서웠다. 사소한 행복마저 눈치를 봤다. 얼만큼의 불행이 날 찾아올까 새벽마다 몸을 떨었으니 말이다.

쉼터가 되어 주겠다 약속했던 가족이 날 버렸을 때 비참하게 울었고, 내 버팀목이었던 은수가 죽어버렸을 때, 그때서야 난 행복하면 불행하다는 걸 알았다. 내 인생은 늘 그래왔던 거라 행복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세뇌했다. 아직은 살아있는 날 위해, 그리고 죽어버릴 날 위해.




……하지만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훈이를 옆에 두고서.










나사 빠진 내 인생은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것을.










-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어.’

- ‘…….’

- ‘진심이야.’













트라우마는 여전히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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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름 방학의 시작이었다.























Epilogue.

- 2015년 1월 22일.

은수야, 난 내가 평생 불행했으면 좋겠어. 행복하면 너무 아파. 이젠 네가 없어서 맨날 방에서 울고 꿈에서도 널 기다려. 견디기 너무 힘들어. 차라리 태어날 때부터 불행했다면, 지금 보단 쉽게 넘길 수 있었을 거야. 많이 아파봐야 가끔씩 생각나는 게 전부였을 거야. 그런데 난 널 만나서 행복했고 그 만큼 아파. 행복한 만큼 불행이 온다면, 난 그냥 불행한 사람으로 남을래. 마지막까지 불행하게 죽고 싶어. 행복한 거 싫어. 행복하면 벌 받아야 하잖아. 나는 또 누군가를 잃을 거고 버림받을 거야. 승관이도 날 떠날 거고, 남은 가족도 날 버릴 거야. 내가 죽기 전에 주제도 모르고 누군가를 만나 행복해 보인다면 당장 멈춰줘. 그때 돼서 아니라고, 그건 네 오해였다고 대들어도 제발 끝내줘. 부탁이야.

오늘도 네가 꿈에 나오지 않아서 이런 일기를 써. 하지만 난 멍청해서 금방 잊어버려. 내가 왜 울면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겠지. 그래도 혹시나 네가 내 행복을 바란다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

일기장을 다 쓸 쯤엔, 그땐 네 옆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불행히도 그게 내 행복이야.

오늘만 이해해줘.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쓰는 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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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이가 말한 '소원 들어줘'는 예전에 젠가 게임에서 이긴 지훈이가 여주에게 얻은 '소원 세 가지 찬스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제 두 번의 소원이 남았네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정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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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225.214
앗 작가님 흔적입니다!! 오늘은 분위기가 평소랑은 다른 것 같아요 음... 작가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소원이 두 개가 남았는데 그 두 개 다 지훈이랑 여주가 행복하기 위한 소원이었으면 좋겠어요 헿... 오늘도 글 잘 읽고 가욤!
6년 전
하프스윗
♥️
6년 전
독자1
소나무입니다. 드디어 방해꾼이 사라지게 되었네요. 이제 둘이 훼방꾼 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네요. 항상 여주만 생각하는 지훈이가 오늘따라 좀 더 멋있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여주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지훈이를 빨리보고싶네요. 그리고 여주가 지훈이랑 승관이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ㅠㅠㅠㅠㅠㅠ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네요.
6년 전
하프스윗
소나무님 안녕하세요. 가장 행복한 사람...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예쁜 꿈 꾸세요 ♥️
6년 전
독자2
물민이에요! 첫 부분부터 작가님의 필력에 또 한번 놀라면서 글을 읽기 시작했어요,, 여주도 지훈이도 승관이도 이젠 행복하기만을 바랬지만 원래 누구나 그렇듯 인생에 행복만이 있을 순 없겠죠..?? 그래도 여주가 과거의 트라우마에 계속해서 머무르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ㅠㅠ.. 지훈이와 승관이 또 주변 사람들과 함께 극복해 나갈 수 있을거라고 믿어봅니다 ㅜㅜ 과거의 불행이 현재의 행복을 삼키지 않기를 바래봅니다ㅠㅠ... 오늘도 너무너무 훌륭한 글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다음 신알신도 기다릴게요..!! ❤️
6년 전
하프스윗
제가 평소 물민님 댓글을 되게 오랫동안 보는데 개인적으로 의미를 곱씹는... 그런게 있어요 ㅎㅎ 과거가 현재를 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문장이 오늘따라 많이 와닿네요. 언젠가 제 글에 넣고 싶은 생각도 들고요. 읽어줘서 고마워요 ♥️
6년 전
독자3
아이고ㅜㅜ 제 댓글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해주셔서 감사해요 ㅠㅠㅠ 정말정말 기분이 좋네요..ㅎㅎㅎㅎ 제가 정말 글솜씨가 좋은 편이 아닌데 오엠알을 읽으면서 늘어가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 ㅎㅎ 작가님 글을 읽으면 단순히 재미 감동 뿐만 아니라 정말 글 자체에 감탄을 하게 돼요. 댓글에 그거에 대해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쓰다보니 항상 조금 더 오래 생각하면서 쓰는데.. 이렇게 잘 읽어주셔서 정말 행복합니다 ,,ㅎㅎㅎㅎㅎ
6년 전
독자4
트윅슈 입니다! 야자를 마치고서 온 다음 씻지도 않고 (...) 미친 듯이 몰입해서 봤어요 오늘 분위기는 가벼운 듯 한없이 무거운, 수면 위의 파동에 머무른 듯 싶다가도 한없이 깊은 심연에 머무르는 듯한 분위기가 더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어요 진짜 그 쓸데없이 핑크색을 독점했던 여자애가 여주와 같은 이름이었단 점에서 1차 충격에 가족이 버렸었다는 거에 2차 충격 (물론 이건 제가 떡밥을 못 보고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지만요 ^ㅁㅠ).... 진짜 달달한 분위기만 지속되는 것보다는 간간히 무거운 분위기를 직접 느끼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오늘도 정말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사랑해요 💛💜💚💚❤💙
6년 전
하프스윗
쓸데없이 핑크색 독점ㅋㅋㄱㅋㄱㅋㅋ 아잌ㅋㅋㅋ 마땅한 색이 없었어요 용서해 듀세요... ^_T 얼른 씻고 따땃한 방에서 같이 코 잡시당! 근데 도대체 누가 트윅슈님 야자 시키죠? 면담 하고 싶으니 담당자 불러주세요 했는데 왠지 트윅슈님이 자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온 것 같으니 이만 저는 물러갑니당... 떡밥은 차차 풀려용 ♥️
6년 전
독자6
ㅋㅋㅋㅋㅋㅋㅋㅋ 고삼은.... 야자... 자율이지만... 해야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느낌..... 사랑해요 엉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ㅠㅠ 같이 따땃하게 코 자요!!!!! 전 언제나 열려있답니다 (?) 진짜루 사랑해요,, 💖💙💖💙
6년 전
독자5
은블리입니당
자다 일어나서 보는 오엠알이네요ㅎㅎ
매번 느끼는거지만 여주는 되게 위태로운 사람 같다고 할까요? ㅠㅠ 뭔가 행복하더라도 갑자기 한없이 불행해지는 것 같은 그런...
여주가 얼른 트라우마를 이겨냈으면 하네요ㅠㅠ
지훈이가 자신을 아주많이 사랑하는 것도 깨달았으면!
오늘도 글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당 행복한 주말보내세용 >< ♡

6년 전
하프스윗
은블리님 말이 맞아요. 어쩌면 그 사이에서 괴로워할 수도 있고요... 스포호시가 되기 직전이니 전 자장가를 부르며 다시 은블리님을 잠재워보겠습니다(? ㅎㅎ 잘자요 ♥️
6년 전
독자7
작가님 몽글이 구름입니단..!
야자 끝나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온 후
이불 속에서 보는 오엠알은 언제나 지친 하루를
위로 해 주는 것 같아요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언제나 가장 놀라운 건 작가님 표현력.. 작가님 글을 읽으면 제가 그 장소에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그리고 여주랑 제가 조금 닮은 거 같기도 해요
저도 가끔씩 현재에 너무나 만족하고 행복하지만
오래전 일에 얽매여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가 많거든요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들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힘 내야지 하다가도
좋지 못했던 기억이 떠오르면 행복한 기억들이 다 사라지고 우울하고 서글픈 감정만 남아요ㅠㅜ
그렇지만 언제나 과거는 과거일뿐 앞으로 행복할 날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금방 안 좋은 기분을 털어내려고 노력 한답니다 여주도 옆에서 항상 응원해주는 승관이와 지훈이랑 늘 행복했으면 해요 ㅠㅠ 오늘도 작가님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 ♡ !

6년 전
독자8
아아ㅠㅠㅠㅠㅠㅠ 분위기 진짜 말이 되는 건가요..ㅜㅜ 아 저는 샤샤에요ㅜㅜㅜ 여주랑 공감가는 부분들도 있어서 더 좋아요 저도 행복하면 안 좋은 것들이 생각날 때가 있거든요 비슷한 것도 있어서 그런지 이번 화는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봤어요 시작부터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아까방금까지 시험공부하다 봐서 반갑기도 했고ㅎㅎ 좋은 글 감사해요 마음이 청소된 기분이에요!
6년 전
독자9
아움입니다 전글을 몰아서 보니까 진짜 이번편은 굉장히 많은 생각이드네요 여주는 많이 힘들었을것 같아요 여주가 참 현대의 힘든 사람들의 모습이 잘 담겨 있는것 같아요 힘들때, 옆에 누군가 있으면 참 힘이되는데 여주는 진짜 다행이에요 지훈이같은 멋진남자가 힘이되어주니깐요 여러가지로 지훈이와 여주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것 같아서 보기 좋고, 볼때마다 힐링이됩니다! 이번편은 두고두고 나뒀다가 힘들때마다 꺼내봐야겠어요!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리고 혹시 실례가 안되면 bgm 여쭤봐도 될까요 굉장히 마음이 안정되는 노래인것 같아서요!
6년 전
하프스윗
정승환 - '보통의 하루' 입니다 :)
6년 전
독자10
너라는 꽃입니다. 가끔은 이런 무거운 글도 괜찮은 것 같아요. 읽는 내내 많은 감정들이 떠오르는 글이네요. 지훈이가 여주랑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놓은 종이가 너무 설레어서 혼자 내적 소리질렀어요. 책 읽어주는 지훈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너무 설렙니다ㅜㅜ 그래도 여주 곁에는 감싸안아주고 힘이 되어주고, 묵묵히 좋아해주는 지훈이가 있으니 다행이네요. 여주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응원합니다. :) 물론 작가님의 삶도 늘 응원해요! 미세먼지 조심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6년 전
독자11
여우비입니다! 작가님 글은 왠지 항상 새벽에 읽고 싶어져요 조용한 방에 혼자서 한 문장 한 문장 찬찬히 새겨가면서 지훈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게 이 글을 가장 행복하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서요. . 항상 이 글의 지훈이를 보면 생각이 많아져요!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ㅎㅎ) 그 감정에 대해서 수만가지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게 진짜 예쁜 것 같아요 지훈이라서 더 사랑스럽고 ㅎㅎ 오늘 글도 잘 읽었습니다!
6년 전
독자12
아련한 글... 늘 읽고나면 여운이 길게 남아서 좋네요 휴일에 선물처럼 온 글, 감사합니다
6년 전
독자13
우리우지입니다 작가님네 동네는 비가 오나요? 저희 지역은 비가 갑자기 많이 쏟아져서 다 젖어서 집 들어왔어요ㅠㅠ 비 오는 날 이번 편을 보고 있자니 뭔가 편안해지네요 되게 잔잔하게 흘러간 거 같아요 여주가 또다시 과거의 트라우마에 머무르게 됐네요... 이전까지는 표현이 안 나와서 다 극복한 줄 알았는데ㅠㅠㅠㅠ 여주 옆에는 지훈이도 있고 승관이도 있고 잘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맛점하세요!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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