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Murakami Haruki - 〈Norwegian wood> 중에서
이른 아침, 차가운 물줄기에 건조함을 씻어낸 초췌한 얼굴이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거울에 드문드문 박혀 어지러움을 토해냈다. 충혈된 눈동자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 붉은 실을 잠재운다. 손등과 턱선을 따라 미끄러지던 물방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해 세면대 아래로 자살을 시도했다. 남은 잔해들도 곧 그럴 운명이었다.
뿌연 수증기가 실내 곳곳에 축축함을 남긴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싼 채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였다. 창밖 너머 새벽녘의 그림자가 빈 책상에 드리울 때, 진즉 샤워를 마친 룸메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식어 빠진 커피를 들이켰다.
드디어 마지막 시험이네. 마케팅 P 강당이라던데. 그녀의 손가락이 창밖 너머 산 중턱을 가리킨다. 캠퍼스에서도 맨 꼭대기에 자리한 최후의 건물이 희생양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난 마케팅 교수의 탁월한 선택에 갈채를 보냈다. 그녀가 옅게 조소했다.
먼저 시험을 끝낸 타과 학생들은 일찍이 기숙사를 떠난 터라 인적 없는 건물은 적막했다. 문밖으로 복도를 걷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발자국이 잔 먼지를 남긴다. 먼저 준비를 마친 그녀가 운동화를 구겨 신고 현관 문고리를 잡았다. 시험 잘 봐. 나중에 한 번 모이자. 빠지면 섭섭할 형식적인 인사도 잊지 않고서.
- “아아.”
……
- “……아아.”
공허한 메아리가 울린다. 온기 없는 바닥은 사막의 모래알로 서걱거렸다. 주인을 잃은 식어 빠진 커피잔이 홀로 자리를 지킨다. 그 길이 외로울까 침대 맡에 앉아 대신 온기를 나눴다. 적당한 온도에 창밖 아름드리 나뭇가지에도 해가 걸린다. 나뭇가지를 적시는 물구나무선 바다, 지난날 내가 누구인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물었던 하늘 속에 오래된 영상이 담기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흑백 영상 속 돌아가는 낡은 필름은 내 잔상들로 이루어진 기억의 파편이었다. 흐릿한 장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선명해졌고, 평범하기 짝이 없던 B급 영화에 어느덧 이지훈, 그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을 진 캠퍼스 언덕에 올라 하늘에 손을 뻗고, 본관 건물 벽에 비스듬히 기대 모자를 고쳐 쓰고, 기숙사 앞 벤치에 앉아 통화 하다 눈이 마주치면 옅게 미소 짓고, 푹 패인 보조개가 달빛을 머금고…….
어느 날 시계의 운동이 곱절보다 빠름을 느꼈을 때, 그리고 근본 없이 할애되었다 생각했던 내 시곗바늘의 주체가 지훈이, 너였음을 깨달았을 때, 내 입술은 비로소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소중한 내 것을 그보다 소중한 너에게 준 것이었구나, 라고.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21 <너와 나의 거리>
32.
학기 마지막 스케줄이 치러질 시험장 앞에서 창문 가장자리에 얼룩진 자국을 따라 초점 없는 눈동자를 굴렸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강당 입구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든 웅성거림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순간 수그러들었다. 대신, 바닥에 주저앉아 손때 묻은 요약 노트를 훑거나 긴장을 없애려 친구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들, 혹은 나처럼 창밖을 말없이 바라보는 이들의 담담한 습도가 있었다.
얼룩을 쫓던 눈동자는 오후의 강렬한 빛에 잠시 눈꺼풀 뒤로 모습을 감췄다. 그보다 먼저 눈을 감고 불경을 외듯, 옆에서 마케팅 관련 용어를 줄줄이 꿰는 동기의 입술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여자애 있잖아. 네 남친 쫓아다니던……. 감긴 눈꺼풀이 각성하듯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녀의 손을 벗어난 펜이 허공에서 일정한 속도로 원을 그리다 낙하했다. 중력에 의해 자살하던 새벽의 물방울이 흔들렸다.
- “이번에 자퇴한다고 동아리 선배들이 그러더라.”
- “…….”
- “하긴, 과방 앞에서 그 쪽을 당했는데 나 같아도 얼굴 팔려서 못 다닌다.”
- “…….”
- “금수저로 태어나면 뭐해. 행실이 그 모양인데. 안 그래도 부모 빽 믿고 나대는 거 눈꼴시려웠는데 잘 됐지 뭐.”
그녀는 요약 노트를 넘기며 다시 암기에 매진했다. 창가에 떨궈진 빛이 휑한 발목을 얼린다. 새벽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시던 민규가 생각났다. 한창 지훈과 여자애의 관계에 모든 것이 침체될 무렵이었다. 민규는 적을 알아야 백전 백일승이라며 나지막이 운을 틔웠다.
- ‘건축하는 사람 중에서 그 여자애 부모 회사 안 들어 본 사람 없을걸. 개총 전부터 선배들이 번호까지 알아갔다니까. 금수저가 뭐야, 완전 캐럿 수준이지.’
……
- ‘처음엔 여러 남자 찔러보는 쓰레기 인성이다 뭐다 뒤에서 욕했으면서, 막상 나중에는 자리 하나 얻고 싶어서 선배들부터 입 털기 장난 아니었다고.’
……
- ‘요즘 대기업도 인턴은 먹고 버리는 판국에, 거긴 정규직 채용률도 높고 연봉도 탄탄하다 그러니까 걔한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대놓고 무슨 지랄을 하겠어? 다들 입 다물고 쓰레기든 뭐든 모른 척하는 거지.’
민규는 씁쓸한 마지막 한 모금을 넘겼다. 반절도 털어내지 못한 내 것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도저히 마실 기분이 나지 않았던 건 그들의 상관관계 때문이었다. 권력 있는 부모, 금수저, 그리고 그 황금빛으로 머리칼을 흠뻑 적시고 싶은 육지 밖 정어리들.
……알 수 없다. 아직 때가 타지 않은 것인지, 아님 부러 모른 척하고 싶은 것인지. 복잡한 관계가 그물이 되어 서로의 아가미를 엮는다.
- “여주야, 방학 때 뭐 할 거야?”
- “글쎄…….”
- “내가 아는 언니가 호텔 사무직에서 일하거든? 친하지는 않은데, 어떻게 말 좀 잘해서 단기라도 끼워 달라…….”
- “문, 열렸다.”
굳게 닫힌 대강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짧게 친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구석에 놓인 가방을 챙겼다. 혹시 관심 있으면 연락해. 부대끼기 싫어도 인맥 통해서 일하는 게 제일 나아. 내 어깨를 주무르던 그녀가 강당으로 사라진다. 대기하던 모든 이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난 창밖 서슬이 시퍼런 볕을 온몸으로 맞았다. 건축과 아이들도, 당장 미래를 생각하는 그녀도 아직 내게는 너무나 버거운 현실 속 사람들이었기에.
마지막 시험이 끝난 시각은 교내 연못 속 창백한 잉어 꼬리에 노을의 절정이 새겨질 때였다.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시각도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33.
낮게 깔린 하늘은 이유 없이 울어 댔다. 젖은 어깨를 털어 빗물을 날린다. 약속 장소는 학교와 다소 먼 카페였다. 둥근 테이블에 마주 앉은 상대방의 찢어진 두 눈이 내 손마디에 있는 반지에 머문다. 그녀는 밋밋한 손으로 유리잔을 움켜쥐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 “사람들이 언제 불행을 느끼는 줄 알아?”
- “…….”
- “내 것보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게 더 좋아 보일 때.”
- “…….”
- “나한텐 이지훈이 그래.”
검은 빗방울에 몸을 떠는 민들레가 바람에 밀려 차도에 유실됐다. 그 장면을 담던 두 눈이 내게 향한다. 생기 잃은 눈빛, 그녀의 공허함을 비추는 마음의 창이었다. 그녀가 형용하고 싶지 않은 연민과 동정을 억지로 끌어낼 계획이었다면, 난 단호히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실 그 어디쯤 매장하고 싶은 덩어리를 끄집어낸 그녀가 포장 없이 말한다. 나는 지금 나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고.
- “어떻게 한 사람을 저렇게도 좋아할 수 있을까. 나는 죽도록 불행한데 이지훈은 왜 너만 보면서 웃고 있을까.”
- “…….”
- “나도 갖고 싶다, 뺏고 싶다, 저 옆 자리 내가 앉고 싶다.”
- “…….”
- “나도 저런 사람이 있었다면……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끝을 흐린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종국에는 눈물을 쏟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떤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를 찌를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못된 욕이라도 해볼까, 지난날로 돌아가 일일이 잘못을 되짚어줄까, 인성을 운운하며 비난을 해볼까. 하지만…….
- “……넌 지금 어디 있는데.”
- “네가 상상할 수 없는 밑바닥.”
- “…….”
- “내 이름인데 날 부르는 게 아닐 때, 그래서 비참해질 때……. 그 기분, 네가 알아?”
벌건 눈가를 훔치며 불규칙한 숨을 내쉰다. 그녀와 내가 유일하게 같이 걷는 길은 김여주, 이름 석 자. 내 앞에서 잃어버린 그녀의 이름이 빗물에 젖는다. 애석하게도 일말의 연민이 드는 까닭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진 제 이름을 온전히 제 것으로 담을 수 없었던 그녀의 씁쓸함이 입가에 맴돌아서였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 이상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범위임을 알기에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그녀는 가죽 가방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그 안에서 꺼낸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구깃한 모서리, 뒷면에 툭 튀어나온 익숙한 필체.
- “욕심 같아서는 벌써 버리고도 남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 “…….”
- “이제 내 연락은 안 받아. 그래서 너한테 전화 한 거야.”
- “…….”
- “네가 알아서 해. 어차피 네 꺼니까.”
굵은 빗방울이 멎는다. 먼저 자리를 떠난 그녀는 가게 문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다 모습을 감췄다. 창밖으로부터 스며든 높은 습도에 어느덧 실내에 비가 내렸다. 구깃한 실금이 잔뜩 난 종이에는 내가 모르는 이지훈, 그가 있었다.
여주랑 하고 싶은 거.
- 놀이동산 관람차
- 스티커 사진
- 음악 듣다가 낮잠 자기
- 책 읽어 주기
.
.
.
.
.
- ……좋아한다 말하기.
34.
캠퍼스 운동장에 노을이 깔린다. 비가 그친 저녁, 기숙사 짐을 싣고 빠져나가는 차들이 축축한 진흙 위를 달렸다. 연이어 진한 바퀴 자국과 웅덩이를 남긴 채 언덕으로 사라진 그들은 인사도 없이 다음을 기약했다.
운동장 농구대에서 계 선배를 비롯한 아는 얼굴들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거진 지훈의 친구들이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고 스탠드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나무 사이를 빙빙 돌며 목표물을 탐색하던 고양이 한 마리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온다.
너, 일본 고양이 그거 같다. 식당 카운터에 가면 손 들고 인사하는 거. 어느새 내 옆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는다. 머리를 쓰다듬는 낯선 손길도 피하지 않는다. 되려 기분 좋게 그르릉거리던 아이는, 이내 폴짝 계단을 내려가 솜뭉치로 신발 앞코를 눌렀다. 뾱뾱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집사가 꿈이라는 승관이가 보면 분명 질투할 장면이었다.
가까운 발소리에 잽싸게 화단 뒤로 몸을 숨긴 아이는, 빼꼼 고개를 내밀며 상대방을 염탐하다 금세 어딘가로 사라졌다. 대신 내 옆자리는 고양이 치곤 사람같이 생긴 지훈이 차지했다. 반달 눈으로 예쁘게도 웃는다.
- “둘이 성격은 닮았는데 사이는 별로 안 좋아 보이네.”
- “어제 싸웠어.”
- “미안하다고 문자 했어?”
- “응, 내가 서툴렀다고 장문으로 보냈지.”
이젠 시답잖은 농담도 무리 없이 받아친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우리 지훈이. 어깨를 맞대고 미는 시늉을 하는 내게,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잔잔한 숨을 뱉었다. 농구 골대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지훈을 부르던 계 선배는 포기한 듯 구석에 앉아 있는 석민을 괴롭혔다. 운동에 젬병이라는 석민은 농구공을 한 자리에서 빠르게 열 번을 튀기고 급히 퇴장당했다. 지훈이 석민을 보며 작게 웃는다.
- “끝나고 뭐 했어? 시험 아까 끝났다며.”
- “……약속 때문에 잠깐.”
- “기숙사 짐은.”
- “어제 택배로.”
- “나는.”
- “마음으로는 벌써 내 방에 가뒀어.”
건축과 종강은 내일, 더불어 그가 책임져야 할 종강 이후의 과제는 만만치 않다. 보통 정규 학기보다 방학이 곱절이나 더 바쁘다는 특수 학과 성격상, 먼저 본가에 내려가야 하는 아쉬움에 폭-, 한숨을 내쉰다. 당분간 나는 본가에, 그는 자취방에 머물러야 했다. 혼자 떠나는 것도 원치 않는 마당에 막상 떨어져 있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하루 일찍 종강을 맛본 승관이가 떠날 때 미련 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건만, 지훈이는 그게 되지 않는다.
- “건축은 방학이 아니라 학기의 연장선이네.”
- “응, 그래도 틈 날 때마다 보면 돼.”
- “누가 학교까지 와? 저도 방학 되면 할 일 많아요.”
- “네가 왜 와. 내가 가면 돼.”
- “빡빡한 스케줄에 누를 끼치기 싫은데요.”
- “뭐, 쉬는 날 하나쯤은 있겠죠.”
그리고 말투 왜 그래요. 저도 민폐 되기 싫은데요. 찌뿌둥한 얼굴로 조곤조곤 말을 잇는다. 조금은 붕 뜬 그의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로 빗어 내리자, 내 옆을 지키던 고양이처럼 말없이 받아 낸다. 어쩌면 정말 대화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똑 닮은 둘이었다.
- “벌써 저녁이네.”
- “…….”
- “……자?”
노을 진 하늘에 짙은 이끼가 몰려든다. 학교 울타리를 넘는 경적이 배경이 되어 정적을 깨웠다. 정말 자는 건지 미동 없는 말간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날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 “얼굴 닳겠다.”
- “내가 보여?”
- “콧김이 뜨거워.”
- “숨이라고 해.”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그가 반짝 눈을 뜬다. 물끄러미 내 얼굴을 훑던 그가 일어나 제 주머니를 뒤졌다. 손 줘봐. 줄 거 있어.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을 직접 내 손바닥에 얹는다. 은색 열쇠였다.
- “도어락 바꿀 건데 아저씨가 다음 주에나 올 수 있다 그래서 임시로 받아 놨어.”
- “네 오피스텔?”
- “어, 나중에 학교에 나 보러 왔는데 없으면 먼저 들어가.”
- “배운 게 도둑질밖에 없는데.”
- “맘대로.”
산 중턱에 걸린 노을이 발밑을 비춘다. 기지개를 켜는 그를 보며 보조개에 손을 자연스레 얹는다. 쏙 들어가는 별빛 두 개,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 눈에도 또 하나의 별이 반짝인다. 보조개를 만지던 손마디가 어엿한 두 뺨에 닿는다. 내 손등을 감싸 쥔 그가 그대로 입술을 감쳐 물었다.
습관처럼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공간을 만든다. 유일한 서로가 숨을 나누고 온전히 받아드리는 시간, 그가 내게 숨결을 불어넣는다. 갈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애타게 마음을 두드리는 그가 뺨에 진한 입맞춤을 남겼다.
- “소원 들어 줘. 세 가지 들어 준다고 약속했으니까.”
- “……뭔데?”
- “가지 마, 오늘.”
- “…….”
- “……안 가면 안 돼?”
운동장에 하얀 가로등이 피었다. 맞잡은 손에 장난스레 입을 맞추는 그가 쌀쌀한 공기를 녹인다. 넓은 어깨에 가볍지 않은 마음을 기대 함께 밤을 걷는다. 한쪽 후드 주머니를 차지한 구깃한 종이를 감싸 쥐고 입술을 뗐다. 작은 것 하나라도 너를 위해 헤아리고 싶은 날 부디 알아줬으면.
- “우리, 놀이 공원 갈까. 첫 방학이니까 가서…….”
……각성하듯 굳게 입을 다문다. 그토록 바라던 이러한 순간들이 어느 한 기점으로, 나락으로 쏟아져 내릴까 두려운 것이다. 비단 찰나의 두려움이 아니었다. 빌어먹게도 내 인생은 늘 그랬다. ‘행복’이라는 정의할 수 없는 감정에 심취하거나 깊이 빠져들면, 벌이라는 것이 항상 뒤를 따랐다. 그래서 행복에 절여지는 삶이 무서웠다. 사소한 행복마저 눈치를 봤다. 얼만큼의 불행이 날 찾아올까 새벽마다 몸을 떨었으니 말이다.
쉼터가 되어 주겠다 약속했던 가족이 날 버렸을 때 비참하게 울었고, 내 버팀목이었던 은수가 죽어버렸을 때, 그때서야 난 행복하면 불행하다는 걸 알았다. 내 인생은 늘 그래왔던 거라 행복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세뇌했다. 아직은 살아있는 날 위해, 그리고 죽어버릴 날 위해.
……하지만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훈이를 옆에 두고서.
나사 빠진 내 인생은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것을.
-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어.’
- ‘…….’
- ‘진심이야.’
트라우마는 여전히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음을.
첫 여름 방학의 시작이었다.
Epilogue.
- 2015년 1월 22일.
은수야, 난 내가 평생 불행했으면 좋겠어. 행복하면 너무 아파. 이젠 네가 없어서 맨날 방에서 울고 꿈에서도 널 기다려. 견디기 너무 힘들어. 차라리 태어날 때부터 불행했다면, 지금 보단 쉽게 넘길 수 있었을 거야. 많이 아파봐야 가끔씩 생각나는 게 전부였을 거야. 그런데 난 널 만나서 행복했고 그 만큼 아파. 행복한 만큼 불행이 온다면, 난 그냥 불행한 사람으로 남을래. 마지막까지 불행하게 죽고 싶어. 행복한 거 싫어. 행복하면 벌 받아야 하잖아. 나는 또 누군가를 잃을 거고 버림받을 거야. 승관이도 날 떠날 거고, 남은 가족도 날 버릴 거야. 내가 죽기 전에 주제도 모르고 누군가를 만나 행복해 보인다면 당장 멈춰줘. 그때 돼서 아니라고, 그건 네 오해였다고 대들어도 제발 끝내줘. 부탁이야.
오늘도 네가 꿈에 나오지 않아서 이런 일기를 써. 하지만 난 멍청해서 금방 잊어버려. 내가 왜 울면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겠지. 그래도 혹시나 네가 내 행복을 바란다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
일기장을 다 쓸 쯤엔, 그땐 네 옆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불행히도 그게 내 행복이야.
오늘만 이해해줘.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쓰는 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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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이가 말한 '소원 들어줘'는 예전에 젠가 게임에서 이긴 지훈이가 여주에게 얻은 '소원 세 가지 찬스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제 두 번의 소원이 남았네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정한 밤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