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 오세훈 사장님
욕조 끝까지 물을 채우고 들어가 앉았다. 머리를 물 속에 집어 넣고 바람을 푸- 불었다. 보글보글 올라가는 공기방울들에 시야가 흐려져 물 위로 입과 코를 내밀었다.
나는 오세훈과 만남 아닌 만남을 갖기 시작한지 며칠이 되었고, 가슴 깊숙히서부터 벅차오름이 느껴졌던 것이 좋아한다느니 누군가와의 설렘이니, 그런 가벼운 연애 감정 말고,'사랑'이라는 호르몬 질병이었음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사랑한다, 그를.
참 사색적이면서도 생소한 한 마디이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느니, 누군가 나를 가슴에 품고 있다느니.
잘 자.
악몽 꾸면 꼭 전화 하고.
별 거 아닌 여자 하나가 세훈에게 같이 밤을 보내자고 말을 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오세훈은 끔찍하다는 듯 눈살을 찌뿌리고, 애틋하게 바라보며 볼에 입을 맞춰 줄 뿐이었다. 울 것만 같은 얼굴로 돌아 서던 그는 떨리는 숨을 내쉬고 발을 한 발짝씩 내딛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도 나를 깊히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 그녀는 소리 없이 조용하게, 또 아프게 웃었다. 사람에게 많이 베였다. 그런데 그 상처들을 또 다시 사람에게 치유받고 있다.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희망에 가득차 다가섰던 그녀에게 곁눈질을 하며 내쳤던 사람들과 달리,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난 세훈은 그녀 자체만으로도 웃어줬다. 참 특이하면서도 고마운 인간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생각이 깊어진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퉁퉁 불은 손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곤 욕조에서 빠져 나왔다.
악덕 오세훈 사장님
"저 오늘…."
"너 어디 아파?"
가래가 목 언저리에서 들끓는 소리를 들은 건지 그는 어디 아프냐며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고, 나는 긴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 할 뿐이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전화를 하지."
"죄송해요…."
"뭐가 미안해."
"미리 전화 드렸어야되는건데…."
"자느라 못 받았다며, 어쩌겠어."
"금방 준비하고 출근…."
"어여 자."
"…."
"어차피 나 포럼 겸 출장 다녀와야 해."
"어디 가는데요?"
"호주, 가면 일주일은 있을거야."
"…"
"보고싶을 텐데, 애기 아파서 어떻게 하나."
"…."
"이제 대답하지 말고, 자."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듯 했고, 우리 둘은 그렇게 서로 아무도 먼저 끊지 못하고 긴 침묵을 끌었다. 목소리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은데, 당신이 이 땅에서 멀어진 일주일 동안 나는 어떻게 지내지, 몇 만가지의 고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몰랐을 거다. 익숙함, 기대. 그것들의 무서움은 원체 모르고 있던 사람에게 더 두려운 법이니까.
전화기 스피커로 잡음에 비슷한 작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상 잠들지 않은 내가 미처 그와의 전화를 못 끊었다고 생각한 그가 뱉은 한 마디였다.
"사랑해."
알림음과 함께 끊긴 전화기를, 나는 놓지도 잠들지도 못하고 한참을 붙잡고 누워 있었다.
나, 만약에 이 사람하고 볼 품 없이 이별하게 되면 어떻게 살지, 내 일상이란 이름으로 자리매김한 그 사람, 나에겐 어느덧 익숙함으로 떠오르는 그 사람. 그렇게 어떤 사람에게 의지하고 기대 살아 간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 줄 알면서도 불안한 미래를 생각하게 되는 내가 우습다.
악덕 오세훈 사장님
열린 대문 앞 담벼락에서 한참동안이나 서 있는 나를 초점 잃은 눈동자로 한참 동안이나 주시하던 그 애는, 내가 뱉은 한 마디에 계단을 한 칸씩 밟기 시작했다.
"너 집까지 들어가는 것만 보고 싶어서 그래."
정말 너 집까지만, 들어가는 거 보고싶어서 그래. 오늘 너와 많은 시간들을 함께 한 이후로부터 자꾸만 욕심이 난다. 전에는 손만 흔들면 고개를 까딱거리며 스치고 지났을 이 담벼락 안에서, 널 자꾸만 내 눈에 담고싶은 욕심에.
그 애가 계단을 겨우 두 칸 밟았을 때 였다. 이제 먼저 등도 돌릴 줄 알고, 많이 컸네. 나는 먼저 뒤를 돌아 계단을 올라가는 그 애처럼 뒤를 돌았다.
'세훈아, 오랜만에 식구끼리 얼굴 좀 보자. 형 한국 왔어.'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 액정에는 형이 보낸 메세지의 까만 글씨가 하얀 메세지창 위로 새겨져 있었고, 앞으로 딛으려던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ㅇㅇ의 급작스런 포옹이었다.
어깻죽지 조금 더 아래에 얼굴을 파묻고 내 허리를 감싼 그 애의 돌발적인 행동에 온 세상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가는 듯 했다. 안쓰럽게 떠오르는 그 애의 얼굴에 허리를 감싸 깍지를 낀 두 손을 잡아주었다.
"나랑 자요."
뜻 밖의 행동에, 그리고 뜻 밖의 말에. 무엇이 너의 가슴을 그리 후벼 팠는지, 무엇이 너의 그 따뜻한 온기를 결핍 되게 했는지. 그동안 더 빨리 기억도, 너도 찾지 못한 내게 화가 나기도 하면서 안쓰러운 마음에 자꾸만 숨이 떨렸다.
붉게 물든 너의 손과 얼굴을 보았다. 그것들은 세상 그 무엇보다 내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억장이 무너지게 했다. 연분홍색 ㅇㅇ의 코트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은 나는 ㅇㅇ의 손을 잡고 원래 목적지인 담벼락보다 조금 더 안인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잘 자."
"…."
"악몽 꾸면 꼭 전화 하고."
내가 세상에게 받은 사랑들, 애정들. 모두 내가 반으로 나눠 줄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멍청하게 서 있는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속에 우리만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건 그 애도 마찬가지였을 것 이리라. 나는 그렇게 떨리는 숨을 가다듬고 뒤를 돌아 섰다. 부디, 오늘 밤은 외로움이란 추위에 벌벌 떨지 않기를.
대문을 나오자 금세 그녀의 집에는 빛이 잠들었다. 그녀의 집안에 불이 꺼짐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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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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