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트/야동] 츤데레ツンデレ 19 |
"아!"
쿵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성규가 아픈 듯 머리를 문질렀다. 바닥에 크게 부닥친 제 머리를 슥슥 문지르며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워낙에 잠버릇이 나빠서 매일 아침 이렇게 침대에서 떨어지는 걸로 일상을 시작하는 성규였다지만 땅바닥에 떨어지고 나서 찌릿하게 스며드는 아픔은 통 적응이 되질 않는다. 에이씨 짜증나. 조만간 혹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성규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주위를 슥 둘러보다,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 배경에 미간을 더 좁혀 왔다.
"… 예감이 안 좋아."
열 아홉 살 남학생 치곤 꽤 정갈한 방 안에 성규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평소 같았음 늘 침대 왼 쪽으로 떨어졌어야 했을 텐데 오늘은 오른쪽으로 떨어진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의 시작을 보통과는 다르게 보냈으니 오늘 하루는 완전 배배 꼬이겠구나. 가끔씩 이렇게 오른쪽으로 떨어진 날에는 늘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였다. 흐음, 마음에 안 들어. 성규가 찌뿌둥한 팔을 돌려 기지개를 펴다 밖으로 나왔다.
"… 읭?"
찌개 끓는 소리, 깔끔하게 치워진 거실, 반찬들과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밥그릇. 혼자 사는 성규의 집 안에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다. 누구 왔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성규가, 부엌 언저리에 와서야 누군가를 발견하고 아는 체를 해 보였다. 어? 성종아.
"깼네." "이게 얼마만이야? 평소엔 잘 찾아오지도 않더니."
반가운 표정을 해 보이는 성규와는 달리 성종의 반응은 그닥 밝지 않았다. 얼른 먹어. 신이 난 듯 제게 쫑알거리는 성규의 말은 한 귀로 흘린 성종이 퉁명스레 제 앞 식탁을 가리켰다. 어? 응 그래 그래. 앞치마를 두른 성종에게 한참 시선을 두던 성규가 느릿느릿 식탁 앞에 앉았다. 이게 얼마만에 먹어보는 밥인지. 저번에 비 맞았던 날 성열이 차려 줬던 밥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늘 기숙사 앞 매점에서 떼우곤 했었는데. 고맙다 이성종. 성규가 답지않은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숟가락을 들었다.
"근데 집은 어쩐 일이야?" "뭐 좀 물어보러 왔어."
성종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그제서야 성종의 살짝 굳은 표정을 알아차린 성규가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뭔데? 물어봐.
"그게……." "뭐야, 뭔데. 말 해 봐"
"… 남우현이랑 무슨 사이야?" "켁!… 어, 어?"
성종의 예고치 못 했던 말에 먹던 음식이 목구멍에 걸린 성규가 켁켁댔다. 뜬금없이 남우현이라니. 가뜩이나 요새 우현에 대한 알 수 없는 마음 때문에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던 성규였더랬다. 사래에 걸려 몇 번 기침을 하다가, 성종이 말없이 건네드는 물을 몇 번 마시고 나서야 성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갑자기 왜?
"혹시 남우현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지?" "누, 누가 그래?" "형 남우현 싫어했잖아."
역겹다며. 그새 말 바꾼 거 아니지? 응? 어린 중학교 남자애들이 그렇듯 툭툭 내뱉는 듯한 성종의 말투가 꽤 날카로웠다. 아침부터 우현의 이야기를 들먹거리는 성종이 성규는 당황스러울 뿐이였다. 무어라 말 해 주어야 하나. 예전과는 달리 '응, 싫어.' 하고 선뜻 말해줄 수 없는 제 자신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 성규의 머뭇거림을 알아차린 성종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꼭 겉으로는 내색 안 하고 속으로 질투하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남우현 그 양아치 새끼한테 놀아나지 마." "… 양아치라니."
"양아치 맞잖아. 그 저급 찌질이 새끼.." "너보다 나이 많은 선배야. 말 똑바로 해 이성종"
"… 치."
계속된 성종의 이유 없는 투덜거림에 살짝 열이 뻗친 성규가 나무라자 성종은 아예 성규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얼마 간 못 본 새에 배배 꼬여서 온 것 같다. 잔뜩 뒤틀린 성종의 말투가 꽤나 거슬렸다. 게다가 우현을 깎아내리는 말투에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는 것은 그 후문이요. 성규는 연유도 모른 채 잔뜩 삐쳐 있는 성종을 어린아이 달래듯 채근했다. 너 갑자기 우현이 애기는 왜 하는데?
"사귀지 마." "뭐?"
"사귀기만 해. 다 엎어버릴 거야." "야."
탁. 은수저를 내려놓는 성규의 손에 잔뜩 힘이 실려 있었다.
"니가 뭔데 나랑 남우현한테 껴드는 건데?" "형…?"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정말로 엎어버릴 듯 성규를 노려보던 성종의 눈빛이 다시금 여린 남학생의 면모를 갖추었다. 살짝 울먹일 듯한 성종의 표정. 성규는 잔뜩 예민해져서 돌아온 성종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랐다. 기껏해야 중3 어린 녀석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우현을 대놓고 욕하는 성종을 가만히 지켜만 보자니 참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내뱉어진 말이였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니.. 무슨 남우현이랑 애인 사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는 제 자신이 우스운 성규였다.
"형 남우현 소문 몰라?" "……."
"완전 변태에 집착도 쩔어.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꼴초에 학교도 잘 안 와. 바람도 존나 잘 피고 좋아하는 사람 하루에도 수십 번 씩 바뀌는 게 남우현이야. 지금 당장은 형한테 잘 해줄 것 같지? 천만에. 나도 속았으니까." "… 니가 어떻게 알아."
"형한테 이러기 전에 나한테도 이랬으니까. 알아들어? 그니까 형 혼자 착각하지 말라고. 남우현 그게 몇 달이나 갈 것 같아? … 아 씨, 형도 남우현도 둘 다 짜증나 죽겠어."
나 갈래. 성종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야 이성종!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난 성규가 성종을 붙잡았지만 이미 가방을 꽁꽁 동여맨 성종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세게 닫히는 현관 문. 무언가가 탁 하고 풀리는 기분에 성규가 식탁 의자에 다시금 털썩 주저앉았다. 휴..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냐. 간지러운 뒷머리를 벅벅 긁은 성규가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모르겠다. 머리나 감으러 가야지.
**
"양아치 새끼…."
성규는 아까 성종이 제게 내뱉었던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양아치라니, 제가 그렇게도 혐오하고 싫어하는 종족이 아니였던가. 그 동안 우현과 함께 있느라 자신이 학생회장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성규였더랬다. 게다가 자신은 3학년, 우현은 1학년. 그러고 보니 우현과 제 사이에는 잊고 있었던 장애물들이 꽤 많았다. 쩝. 그래도 절대 나쁜 애는 아닌데…. 자꾸만 성종이 했던 말을 옹호하고만 싶어졌다. 남우현은 그런 부류가 아니야. 남우현은 달라, 하고. 하지만 이런 긴 생각 끝에 또다시 드는 생각은, '과연 남우현이 그들과 어떤 점에서 다르다는 걸까?' 에 대한 답문이였다. 그래. 따지고 보면 우현은 변한 게 없었다. 천방지축인 행동도, 밥먹 듯 일삼는 싸움도, 풍겨 오는 특유의 불량스런 채취도. 다 알고 있었다, 이 말이다. 우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마저도.
하지만 희한하게도 이제는 그런 우현이 미워 보이지 않았다. 진짜 김성규가 미친 걸까. 성규는 알 수 없는 야릇한 마음을 품은 채 방으로 터벅터벅 걸어들어갔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핸드폰을 가만히 쥐어든 성규가, 액정 위로 뜬 알림을 확인했다. 미확인 문자 세 통. 내심 발신자가 남우현이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다가, 다시 혼란스러운 제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규, 안 와?]
역시나 제 생각과 들어맞게도 발신자는 세 통 모두 남우현이였다. 오글거리게 규가 뭐냐 규가.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김성규 진짜 안 와?] [나 기다려]
그러고 보니 주말에 남우현 병원 찾아가기로 했었구나. 내가 뭐라고 보냈더라? 짐 싸들고 간다고 그랬었나. 분명 이 문자 세 통을 보내기 위해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겠지. 계속해서 문자를 썼다 지웠다 했을 우현의 모습이 떠올려졌다. 늦게 일어났던 만큼 한 시간 만에 답장을 보내는 성규의 입꼬리가 히죽 걸려 있었다. 꾹꾹 정성스럽게 키패드를 누르는 성규의 하얀 손. 남정네 손이라기엔 예쁘기 그지없다.
[안 가.]
열심히 눌러봤자 기껏해야 두 글자 뿐이지만. 성규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결국 보내려던 내용을 다 지워 버리고 단 두 자 만을 채워 전송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 제 자신도 우현만큼이나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쩝, 내가 비웃을 처지는 안 되구나. 괜시리 씁쓸해졌다. 지잉ㅡ 핸드폰을 내려놓은 지 1분도 채 안 되서 또다시 울리는 핸드폰. 괴물같은 속도로 도착하는 우현의 답장에 새심 놀라며 성규가 핸드폰을 다시 쥐어 들었다. 그리곤 또 피식 피식.
[왜??ㅠㅠ]
[생각할 일이 생겼어ㅎ;; 당분간 연락하지 말자.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줄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ㅅ성규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귀여워. 성규는 문득 병원에 있을 우현을 떠올리다 아까 전 성종이 했던 말을 다시금 새겨 들었다.
완전 변태에 집착.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꼴초에 학교도 잘 안 오는, 바람도 존나 잘 피고 좋아하는 사람 하루에도 수십 번 씩 바뀌는 게 남우현. 아니. 적어도 내가 아는 남우현은 순진하기 그지없고 좋아하는 사람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는,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이야.
성종아 네가 틀렸어. 그제서야 한참 만에 답을 찾아낸 성규가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도 끔찍히 여겼던 남우현이 이제서야 예뻐 보이는 이유는, 제가 남우현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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