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결혼하자.’
김재환이 말했다. 별 이상한 소릴 다하네. 옥상 바닥에 담뱃재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왜, 나랑 결혼하기 싫어?’
김재환은 또 물었다. 이번엔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결혼이란 건 말도 안된다 생각을 했지만 김재환, 널 싫어하는 건 아니었기에.
솔직히 얘기하면 그 때의 우리는 어렸다. 고작 해봐야 열아홉이었다. 더구나 김재환의 생일이었던 5월의 끝무렵. 아직 완연한 여름이 다가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날씨가 더워졌다. 낮이면 20도를 맴도는 온도는 김재환의 이른 하복셔츠를 데리고 왔다. 그는 여러모로 바보 같았다. 성적은 곧잘 받는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모자랐다. 모자른 정도가 아니지. 멍청했다. 그 때의 네가 뭘 할 수가 있다고 넌 그런 말이나 꺼냈는지.
‘뭐야. 진짜 나 싫어?’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내려가. 점심 시간 다 끝났어.’
근데 그 때의 난 더 멍청했다. 그가 장난삼아 던진 농담에도 얼굴이 뜨거웠다. 한낮에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보다 더 뜨거웠다. 볼이 후끈거리고 손에 땀이 났다. 치마에 손을 문대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를 끌어 앉히는 손이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내려가.’
‘뭐래.’
‘나 아파.’
내 말을 가로막는 김재환의 말이 들렸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내 손이 그의 얼굴로 다가갔다. 그가 아프다고 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였다. 또 아버지한테 맞았어? 숱한 가정폭력 속에서 방치된 어린아이. 그게 김재환이었고 난. 그러니까 난. 그런 그가 유일하게 옆에 둘 수 있는 ‘친구’였다.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뺨에 빨갛게 상흔이 올라왔다. 조만간 곧 멍이 될 것만 같은 상처가. 그의 친구로 있으면서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 발라주기 위해 매일같이 챙기고 다니는 후시딘 외엔 그 어떤 것도 난 해줄 수도 없었다. 친구인 난 그저 속으로 또 마음을 삭히다가 김재환의 얼굴 위로 약을 바르는 게 다였다.
‘나 내년엔 집 나올거야.’
‘응.’
‘혼자서 살거야.’
‘응.’
‘넌?’
그의 말에 성의없는 대답만 이어가고 있다가 불현듯 손이 멎었다. 넌 내년에 어떡할거야? 무슨 말을 덧붙어야 하지. 가만히 뺨 위에 연고를 덧바르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내년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묻는 사람은 없었다. 내년이면 2018. 우리가 스무살이 되는 해였다. 그 땐 대학 가야지. 고작 몇 분을 생각하다 꺼낸 답이 멋쩍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했는데 김재환은 특히나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올곧게 나있는 눈썹이 크게 일렁거렸다.
‘나중에 정 마음에 드는 사람 없으면 나랑 결혼하자.’
그리고 짧게 입이 부딪혔다. 그가 다가옴과 동시에 내가 1년을 내내 들고 다녔던 약이 옥상 밑으로 떨어졌다.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었다. 주울 수도 없었다. 그러니 난 평생 잊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찰나에 부딪혔다 떨어진 그 따뜻한 숨을. 부드러웠던 입술을. 네가 아무렇게나 꺼낸 말일텐데 난 그 때 이후로 달라진 게 없었다. 10년이 지난 스물아홉의 난 여전히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것이 분명한데.
“나 결혼해.”
정작 그 말을 뱉은 넌 무책임했다.
결혼(結婚)
W.LIGHTER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와?”
오자마자 날 반기는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아직 상대방을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단숨에 알아차릴 듯했다. 그나마 고등학교 때부터 붙임성 있는 성격탓에 김재환과도 잘 지냈던 그는 축의금 액수를 정하고 있었다. 넌 옷이나 좀 잘 입고 오지. 이게 뭐냐. 난 호텔 로비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옹성우를 타박했다. 깔끔하게 정장을 챙겨입고 온 그를 탓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애 결혼식에 어떻게 일찍 와, 라고 말할 용기는 죽어도 없었다.
“사회는 누가 본데?”
“아마 강다니엘이 볼 걸. 대학 때 사귄 친구라던데 괜찮은 놈이더라.”
강다니엘은 김재환의 대학 친구였다. 김재환의 말은 맞았다. 그는 2018년이 되자마자 독립을 했다. 그리고 그를 끝끝내 괴롭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무렵 김재환은 스물하나였고 그는 상복을 입으면서도 눈물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보호자라고 있어봐야 아버지 하나가 전부였던 그는 그 때부터 고아나 다름이 없다며 혼자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뇌까렸다. 그래서 그는 급하게 군대를 갔다가 대학을 자퇴했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김재환은 선수치듯 통보만 해왔다.
‘나 취직했다.’
자퇴를 했다고 하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거늘 그는 곧바로 직장을 찾았다. 근방에서 알아주는 광고회사라고 하니 먹고 살 걱정은 덜었다고.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다. 그가 우역곡절의 그래프를 그리며 살아가는 동안 유일하게 남은 대학친구가 강다니엘 한 명이었고 그건 한편으로 다행이었다. 난 김재환을 걱정했지만 그의 옆에서 고등학교 시절처럼 같이 있어주진 못했으니. 다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건 연락하는 횟수나 만나는 일이 확연히 줄어 들었어도 서로에게 서로가 먼저라는 사실이었다. 여적 그는 어른이 되었다고 자부했으나 내 앞에선 어린애나 다름이 없었다. 술을 마시면 찾는 사람도 항상 나였다. 그게 우리가 쉽게 변할 수 없다는 증명이기도 했으며 곧 내가 아직 김재환에게 가장 첫 번째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뭐?’
‘결혼할 날짜는 아직 못 잡았는데 너한테 먼저 말해주고 싶어서.’
근데 더이상 그에겐 내가 첫 번째가 아니었다. 술을 마시면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의 부재중과 통화기록에서 제일 먼저 있던 내 이름이 밀려났다. 그의 성격만 해도 혼자 지낼 위인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헤어지는 연인보다 친구인 내가 더 낫겠다, 라는 마음도 있었다. 어차피 또 헤어지고 나면 나한테로 돌아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그걸 그는 철저하게 부수었다. 부수고 으깨고 짓밟았다. 나에게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말도, 결혼한다는 말도, 축하해달라는 말도 처음부터 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그의 친구인 게 싫었고 제일 ‘먼저’가 이런 식의 ‘먼저’가 될 줄은 추호도 몰랐다.
‘나랑 결혼하자.’
아니. 넌 이미 그 기억 속에서 사라졌는데 미련하게 붙잡고 있는 내 잘못이었다. 나중에라도 널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내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들어갈 때 옆에 있는 사람이 너였다면. 너를 좋아했던 내 잘못이었다. 넌 이미 새까맣게 다 잊어버렸는데. 10년 전의 5월. 난 되도 않는 청혼을 들었다. 10년 후의 지금의 5월 27일 김재환의 곁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걸 알기엔 그 때도, 지금도 난 멍청했다.
“어서와.”
검은색의 세미정장을 입은 김재환이 날 반겼다. 그의 옆엔 신랑 김재환이라는 팻말을 두고선. 호텔 내에 있는 결혼식장은 이질적이었다. 모든 게 이질적이고 낯설었다. 김재환은 대부분 머리를 내리고 다녔다. 이마를 보이는 게 쑥쓰럽다며 내가 더운 여름에 머리카락에 넘겨주었을 때도 급하게 앞머리를 정리하곤 했었다. 그런 그가 이마를 훤히 내놓고선 제법 어른스럽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건 내겐 너무나도 낯설었다. 괜스레 토기가 치밀어왔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어디 아파?”
뭔데. 너 얼굴 엄청 하얗게 질렸어. 화장실을 간다고 말하기 위해 붙잡은 옹성우의 손이 더 재빨리 내 이마를 짚었다. 그냥, 속이 안 좋아서 그래. 그저 기분이 모호했을 뿐이었다.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것에서 생겨나는 괴리감. 그 뿐이었다. 그런데도 옹성우의 말처럼 몸이 안 좋은 것 같았다. 대충 말을 얼버부리며 화장실로 발걸음을 향하자 또다시 내 손목을 잡아왔다.
“야, 나 진짜 괜찮…”
“너 괜찮아?”
이번엔 김재환이었다. 괜찮다고 말하려던 게 김재환이 물어오자 신기하게도 입이 다물어졌다. 괜찮지 않아. 나 아파. 네가 항상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너에게 때늦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내 손목을 그러쥐는 손길만으로 충분히 날 울리고도 남을 사람이 김재환이니까. 화장실 대신 그에게 아프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수도 없이 그 쉬운 말들이 목구멍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나 괜찮아. 들어가 있어.”
식 얼마 안 남았잖아. 그럼에도 난 그러한 말 밖에 하지 못했다. 하기야 너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기회는 많았는데 그걸 하지 못한 내가 지금에 와서야 무슨 말을 하겠니. 그를 애써 밀어내고선 들어온 화장실에서 난 한참이나 나오지 못했다. 그러기도 그러는 게 한 번 흘러내린 눈물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눈물, 콧물 다 짜고 나오니 얼굴이 엉망이었고 화장을 두 번이나 다시 하고 나서야 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김재환의 결혼식이 시작한 지 꽤 지나서 이젠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을 때쯤. 난 그 때야 화장실 대신 그의 결혼식을 참석했다. 너의 십년지기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이 정도가 난 최선이었다.
“신랑은 신부를 사랑합니까?”
“네!”
그의 목소리가 힘찼다. 내가 알지 못하는 김재환은 저렇게나 밝았구나. 문득 난 우리가 함께 했던 고등학교의 시절을 떠올리다가 온갖 빛을 다 받고 있는 그를 보니 매우 내 기억이 초라해보이기 시작했다. 너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 즈음이었다. 2학년 초여름부터 3학년의 겨울까지 너의 곁에 있었다. 그러고 보면 1년이 전부였네. 내가 김재환과 함께 단 둘이서 보낸 시간은 철저하게 따지고 보면 1년 남짓 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뭐라고 난. 너를 잊지 못하는 걸까.
“다음은 성혼 선언문이 있겠습니다.”
ㅇㅇ야.
네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 날에 유독 거세게 불던 바람도, 휘날리던 셔츠 사이로 보이던 네 상처도.
나한테는 이제 너밖에 없어.
거짓말.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너한테 다가가지 말 걸. 너랑 친구한다고 그러지 말 걸. 네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냥 무시하고 돌아설 걸. 난 몇 번이고 후회했다.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리 할 것이라 다짐했다. 우리의 끝이 결국에 이런 식으로 된다면 난 김재환과 친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고 그의 결혼식을 먼발치서 지켜만 봐야하는 입장이 될 줄 알았다면 난. 정말이지 난, 김재환과 잠깐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써 신랑 김재환 군과 신부 박세현 양이 하나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바입니다.”
“ㅇㅇㅇ!”
그랬다면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재환의 결혼식이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난 그마저도 보지 못했다. 사회자로 서 있는 강다니엘의 목소리가 귓가를 치고 들어왔다. 동시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용기도 없으면서 견디지도 못하는 어리숙한 존재인 나는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얀색의 버진 로드 위로 내 몸이 기울어졌다. 의식이 없어지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처음 깨달았다. 결혼식장에서 들리는 소음들 사이로 내 이름이 들렸는데. 나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이 김재환, 너 인것도 같았는데. 이것도 내 착각이겠지. 찰나에 보인 김재환의 표정이 꼭 울 것만 같았다면. 그건 믿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김재환은 날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
근데 참 웃기게도 나는 김재환을 좋아했었다. 그 때를 가늠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무튼 난 그를 좋아했다.
‘너 김재환 맞지?’
그래서 다 알면서도 네 이름을 다시 되뇌었었다. 반 애들의 이름은 다 못 외었는데 네 이름은 줄곧 잊혀지지 않았다. 삶의 권태란 권태는 온 몸에 덕지덕지 붙여 다니는 거나, 시험은 잘 보면서 숙제는 죽어도 제출하지 않는 너의 이중성이 썩 마음에 들었다. 진짜 인생 한 번 심플하게 산다. 내가 널 보고 느낀 첫 느낌은 이게 다였으니. 그리고 중간고사가 끝난지 한달이 미처 안되었던 때 언제부터인가 학교에 소문이 났다. 내가 김재환을 좋아한다고. 물론 그를 쫓아다닌 적은 손에 꼽히지도 않을 정도로 많았지만 난 널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너한테 말 한 번 걸어보겠다고 과목 부장을 맡았고 그 중에 숙제를 제일 많이 내준다는 수학을 빌미로 널 따라다닌 것 뿐이라, 그렇게 미루어 다짐했다.
‘김재환. 숙제.’
‘야.’
세 번째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내 손엔 그의 노트 대신 공기 한 줌만 담겨져 있었다. 김재환은 숙제를 걷으러 온 나를 아니꼽게 쳐다보고 있었다. 순하게 휘어진 눈꼬리가 유난히 삐딱했다.
‘뭐가? 숙제나…’
‘너 나한테 할 말 있어?’
하지도 않은 숙제 걷는 핑계 대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려는 내 말이 씹혔다. 하필이면 교실도 한적했다. 모든 애들이 음악실로 가는 와중에 나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김재환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면 많았다. 궁금한 게 많았으니 하고 싶은 말도 많을 수밖에. 너는 어떻게 된 게 매일 숙제를 안 해와? 그런데도 점수는 또 어떻게 잘 받아? 아주 단순한 것부터 궁금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져 갔다. 그리고, 김재환 넌. 넌 왜 매일 다쳐서 와? 손목은 왜 엉망이야? 결코 쉽게 나오지 않을 말까지 난 네가 궁금했다.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노는 것보다 자는 시간이 현저히 많은 김재환은 맨 뒷자리에서 매일같이 졸고 있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 건 또 듣기가 싫은지 아니면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런건지 아예 엎드려서 자는 것도 아닌 누가보면 밤을 새서 힘들어 하는 학생처럼 졸았다.
난 그가 눈에 밟혔다. 애초에 김재환과 앞 뒤 자리로 앉았는데 시선이 안 가는 게 더 이상할 일이었다. 그에게 숙제를 내놓으라고 몇 번을 쫓아다니면서 보았던 네 손목의 줄도, 졸 때 눈치껏 본 네 얼굴과 몸에 난 상처들도 나에겐 전혀 남의 이야기만 같은 일을 김재환은 매우 당연하게 겪고 있었다. 그게 자꾸만 걸렸었다. 목구멍에 넘어간 사탕처럼 빼내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지경에 다달아서야 너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호기심이 아니라는 걸 자각했었다.
‘할 말 없으면 나 먼저 간다.’
‘나랑 집에 같이 갈래?’
지금 생각해보면 겨우 떠올린 말이 저 모양일까 괜한 코웃음이 다 나왔다. 그 때 당시엔 너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김재환과 이만큼이나 길게 얘기한 시간은 없었던지라 급했을 수도 있다. 어쩌다가 내가 이 꼴이 되었는진 몰랐어도 아쉬운 사람이 먼저 다가선다고 하니까. 난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을 주워담는 것보다 김재환, 너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물론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데엔 오랜 시간이 소모되었지만.
‘나랑 같이 집에 가자, 김재환.’
기말고사가 끝났다. 7월의 끝자락에서 기승을 부리는 더위가 더 심해졌다. 기말고사가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방학 때 보충학습을 할 학생을 모집했다. 그나마 고 2라서 선택권이 주워지는 거라고 했다. 거의 반강제로 모집을 하는 거였어도 난 한달도 채 안되는 방학에 학교를 나오는 건 싫었다. 방학 때면 학원을 다녀야해서 시간이 안된다고 담임에게 말까지 하려고 했다. 근데 하필이면 우리집 에어컨이 망가졌다. 고치려면 성수기가 끝나고 난 뒤라 실질적으로 여름이 지날 무렵이라고 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게 없지. 우역곡절로 학교에서 에어컨이라도 쐬자하는 바람으로 신청한 보충학습은 인원이 눈에 봐도 적었다. 선생님들도 더위에 한 풀 기세가 꺾인 듯했고 나온 애들 중에 반절은 집중을 못하고 책상위로 쓰러지기 일수였다. 따지고 보면 에어컨만 아니었어도 집에서 공부하는 게 더 좋았는데. 샤프의 끝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대며 선생님이 반강제로 시킨 자습을 하고 있자 때아닌 교실문이 열렸다.
‘김재환?’
누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타나나 했더니 너였다. 김재환은 그대로 자리를 쭉 훑어보더니 내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가 내 옆에 앉자마자 조금은 익숙해진 파스향이 물씬 코 끝에 다가왔다. 내가 반쯤 넉이 나가서 그를 바라보자 김재환은 작게 입을 움직였다. 뭐. 어? 그만 쳐다보고 공부해. 그러고선 내 이마를 살짝 손가락으로 튕겼다. 신기하게도 그가 오기가 무섭게 무의식 중에 난 보충수업을 듣길 잘했다고 내심 뿌듯해했다. 졸지에 자기는 자려고 학교에 온 건지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서 나한테 공부하라는 말이 우스웠지만 다 좋았다. 많은 자리들 중에 그래도 내 옆으로 와준 김재환이 좋았다. 그냥 뭐가 되었든 그가 있으면 좋았다.
사실 내가 그에게 ‘같이 가자’라고 했던 그 날 난 김재환과 같이 가지 못했다. 김재환을 만나기 전, 같이 다니는 무리의 애들이 있었고 어디든 함께 가야한다는 이상한 규칙이 생겼다. 그래서 먼저 말을 꺼낸 내가 지키지 못한게 퍽이나 미안했지만 어차피 넌 나를 기다려 줄 사람이 아니란 것을 더 먼저 알았다. 김재환도 그냥 갔겠지. 주번이라서 제일 늦게 학교를 나왔을 때 운동장 앞에서 멀건히 서 있는 널 보기 전까진.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꺼낸 말은 그저 흘러가듯 없어지는 말이라고. 그런데 그가 운동장과 정문 사이를 왔다갔다 했고. 김재환이 나를 보았고. 내가 너를 보았다.
‘김재환. 일어나.’
점심시간이 다가왔음에도 그는 잠에 푹 빠져 있었다.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안하네. 야, 점심시간이야. 밥 안 먹어?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꺼낸 말이 무색했다. 집에서 잠을 안자나. 밥까지 포기하고 그를 한시간 남짓하는 시간동안 바라보는 건 참 의미없는 일이었다. 나름 계획을 세우며 살아간다고 자부했는데 김재환의 잠자는 모습이 뭐가 그리 재밌다고 멍하니 그것만 보고 있었는지 나조차 의문이었다. 그저 잠을 잘 때도 인상을 쓰고 있는 김재환의 미간주름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잠을 잘거면 편하게 좀 자지. 꼭 젖살이 덜 빠진 아이처럼 하얀 볼이 책상에 구겨졌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네.’
그의 미간 사이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뗐다. 내 손가락을 따라 평평해지는 미간을 보았다. 움찔거리는 김재환의 눈을 보았다. 그러다 문득 나를 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단순히 나를 보는 것 뿐인 일을 김재환이 하면 기분이 묘했다. 사람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보는 그의 습관 때문인가. 괜히 잘못된 일을 하다 걸린 것마냥 수줍었다. 그냥 너를 보면 시도때도 없이 수줍었다. 모든 열기가 얼굴에 솟아나는 듯했다.
‘너 얼굴 빨개.’
날 놀리고자 함이 분명한 말이었다. 덥기는 커녕 쌀쌀하게 맞춰진 에어컨 온도가 영 도움이 되질 못했다. 선풍기 바람에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댔다. 살짝 눈을 찡그리다 다시 바라본 김재환은 여전히 책상에 얼굴을 기댄 채로 날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돌리자 이제는 손이 따라왔다. 앞머리 잘라야겠다, 너. 잠자다가 일어나서 그런지 내 앞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찰나의 잠결이었다. 한낮의 꿈인 듯했다. 정말. 정말, 꿈만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만진 이마가 뜨거웠다.
그가 스스로 했던 말을 기억할런지 모르겠다. 김재환은 그 때부터 여름에도, 겨울에도 방학보충은 꼬박꼬박 나왔다.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거면서 또 출석률은 좋았다. 그게 대단하다고 난 말문이 트이기가 무섭게 그를 칭찬했다. 우습게도 그가 왜 학교에 굳이 오는지, 기껏 온 학교에서 매일 잠만 자는지. 그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너는 집을 싫어했다. 호적상으로 있는 아버지는 제 아버지가 아니라고 했다. 이젠 생사도 불분명한 엄마가 맘대로 데려온 동거남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자주 술을 마셨고 제 뜻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엄마를, 그리고 김재환을 때렸다. 그나마 엄마라도 있을 땐 그래도 살만하다 했는데 그녀마저 없는 곳에서 김재환은 무방비하게 방치된 아이었다. 그가 학교에서 오는 이유. 줄곧 잠을 자지 못해 힘들어했던 이유. 손목에 자꾸만 늘어가는 줄의 갯수. 점차 몸에서 얼굴까지 올라오던 상처. 생각해보면 이렇게나 필연적으로 오는 것들이 또 없었다.
‘여기서 뭐해?’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기억했다. 정작 말을 꺼낸 넌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듯했지만. 난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을 했다. 그 순간을. 그 때의 너의 얼굴을. 옥상에서 바닥만 내려다 보는 너의 얼굴이 평온해보였다. 삶을 다 포기한 사람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나 얼굴에 지겨움을 달고 살던 애가 6층이라는 높은 높이에서 시멘트 바닥을 볼 때만큼은 때에 맞지도 않게 행복해했다. 그래서 불현듯 두려워졌다. 처음엔 수업을 빼먹을 사람이 아닌 네가 반에 없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다음은 널 찾아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옥상에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너 나 좋아해?’
고개를 돌려 날 보던 김재환이 물었다. 뭐? 누군가에게 큰 비밀을 들킨 것처럼 숨이 멎었다. 마른 입술을 질끈 깨물다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좋아하냐고 물어오는 김재환의 말투가 정말 답을 얻고 싶어하는 것 같진 않아서. 대답을 하기 보단 네 하얀 운동화가 난간을 넘어서지 않게 하는 일이 나에겐 더 중요해서. 그에게 있는 힘껏 팔을 뻗는 것 외엔 결국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리와.’
‘…….’
‘김재환, 이리와.’
얼른 내려오라고. 자꾸만 눈물이 났다. 말을 해야하는데 눈물이 말을 가로막았다. 이런 경우는 내가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여차 하면 남의 죽음을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손이 떨려왔다. 아니. 남이 아니라 네 죽음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자살을 하려고 마음이라도 먹은 걸까. 정말 떨어질려고 하면 어떡하지. 난 김재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엔 내가 부족했다. 그를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을지, 왜 네가 난간 앞에서 웃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고작 열여덟의 내가 알리가 만무했다.
‘나 좋아해주면 안돼?’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천천히 발을 움직이자 이젠 김재환이 울었다. 그의 아랫입술이 떨려왔다. 몸은 다 컸는데 우는 건 꼭 어린애 같이 울었다. 재환아. 난 네 이름을 불렀다. 한 번도 부른 적 없던 네 이름이 쉽게 입 밖으로 나왔다. 최악의 상황이 만들어준 기회였다.
‘좋아해.’
그저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말도 해줄 수 있었다. 만약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 앞에서 죽을려고 한다면 나는 지금과 똑같은 말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그 땐 믿었었다.
‘내가 많이 좋아해. 재환아.’
어떤 의미도 담겨있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따위의 말로 설레고 있는 내가 비참했다. 정작 내 손을 가만히 잡는 네 얼굴이 어떤 얼굴을 했는지. 울었는지, 웃었는지. 그것도 기억을 못했는데. 그리 시간이 빨리 지나지 않아서 난 깨달았다.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문득 네가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젠 쓸모없게 되어버린 내 고백이 슬펐다. 그가 여전히 내 앞에 있는 건 좋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생사를 오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내 감정을 알아버린 난 이기적이었다. 매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ㅇㅇ야.’
‘…….’
‘나한테는 이제 너밖에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처음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더 좋았다. 어떤 사람보다도 내가 너에게 특별해진다는 게 좋았다. 정확하게 널 좋아한다고 할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너에게 이런 존재로 남는다면 그 뿐이라도 좋았다. 그리고 네 모든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나라서 좋았다. 김재환의 생사를 먼저 목격한 사람이 나여서, 그를 막은 사람이 나여서. 네가 내민 손을 잡아주는 사람도 너에게 처음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도 나였으니 이만하면 좋았다. 옥상에서 해가 다 지는 것까지 보고 내려가자 당연하게도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반성문을 적느라 야자시간을 다 낭비하는 게 그리 신날 줄이야. 김재환과 함께 한다는 건 여러모로 대단한 것들을 동반했다. 아무렇지 않은 일도 의미있게 만들었다. 넌 나한테 그러한 사람이었다.
‘약 좀 바르고 다녀. 얼굴에 상처 생기면 그대로 흉터 남는댔어.’
그렇게나 신신당부를 했지만 김재환은 말을 들을 위인이 아니었다. 하얀 얼굴이라 원체 상처가 더 돋보이는데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상처라도 보여야 그 새끼가 얼굴은 더이상 안 때리지. 별 말 같지도 않은 말들만 늘어놓을 뿐. 그는 여전했다. 여전히 삶의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웃을 때 말려 들어가는 볼이 티없이 예쁜데 웃는 일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매일같이 무심한 얼굴만 하고 있었다. 학교에 오면 잠을 자느라 바빴고 자습시간엔 옥상으로 올라가는 게 일탈이라고 삼는 놈이었다.
‘김재환, 일어나.’
제발 밥 좀 제때 먹자. 어? 내 말이 들렸는지 미간에 인상을 짓던 그가 눈을 떴다. 그리고선 입이 댓발로 나와서 투덜거리는 나를 보고 웃었다. 너 때문에 점심도 빨리 먹느라 체했단 말야. 성화 아닌 성화에 김재환은 웃다가 내 팔을 잡아 이끌었다. 누가 보면 밥 못 먹어서 안달이라도 난 줄 알겠다. 곱지 못한 말을 하면서도 내 교복 위로 김재환은 제 체육복을 덧입혀줬다.
‘밖에 추워. 외투라도 입고 다녀.’
정작 자기도 달랑 마이 하나 입고 있으면서 남 걱정을 하고 있었다. 김재환은 여전했다. 여전히 삶의 권태를 느꼈다. 학교에는 잠을 자러 오는 게 분명한 듯했다. 무심한 얼굴로 매일을 보냈다. 잘 웃지도 않았다. 근데.
‘빨리 와.’
어느덧 추운 겨울도 얼마 안 남았을 무렵 내 앞에서 넌 곧잘 웃었다. 잠을 자다가도 내 말이면 금세 눈을 떴고 옥상에는 항상 나와 같이 갔다. 삶의 권태를 느끼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변함없는 김재환의 울타리 속에서 유일한 반항이 나였다. 그게 소름끼치게 행복했다. 넋을 놓고 있는 내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는 그가 달라지길 바라면서도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너의 변수로 있는 사람은 나 하나면 충분했다고. 네 옆에는 나만 있기를 바란다고. 수도 없이 휘몰아치는 속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래서 행복하면서 무서웠고 두려웠다. 그 앞에선 내가, 어쩔 수 없이 을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까.
‘나랑 결혼하자.’
김재환이 말했다. 별 이상한 소릴 다하네. 옥상 바닥에 담뱃재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왜, 나랑 결혼하기 싫어?’
김재환은 또 물었다. 이번엔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결혼이란 건 말도 안된다 생각을 했지만 김재환, 널 싫어하는 건 아니었기에. 아니. 그보다 더 너를 좋아했다. 좋아한다는 걸 깨닫는 것도,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매우 갑작스러웠다. 하긴. 김재환은 서서히 다가올 성격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색채 물감이랑은 거리가 꽤나 멀었다. 알록달록한 색깔보다는 검은색이었다. 하얀 도화지에 한 방울만 떨어져도 금세 다른 것들을 가려버리고야 마는 검은색이었다. 적어도 내겐 너는 그랬다. 김재환을 제외하고 난 고등학교 생활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하루의 반나절은 넘게 너를 생각했고 생각하다보니 보고싶었고 또. 그래서 울었다.
‘나 내년엔 집 나올거야.’
‘응.’
‘혼자서 살거야.’
‘응.’
‘넌?’
어쩌면 난 생각보다 오랫동안 그를 좋아했나보다. 더 오래. 더 깊이. 2018년이 되면 김재환과 떨어진다. 너의 그 하고많은 계획들 중에 내가 얼마나 차지하고 있을까. 그 때는 모르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난 짧지 않은 10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그걸 알았다. 너의 미래엔 내가 없었다. 김재환과 함께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뒤에서 축하해주는 친구, 그 개중에 몇 명일 뿐이었다.
‘그 땐 대학 가야지.’
난 그 말을 뱉고 웃었다. 김재환 앞에서 어이없게 울어버릴 순 없었으니 웃었다. 생각해보니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았다. 억울했고 좋아한다고 말도 못하는 내가 바보 같아서 자책 아닌 자책도 했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해.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는 생각이 많았다. 어떤 일을 하든 선택하는 게 내게는 썩 벅찬 일이었다. 우유부단했고 겁이 많았다. 그러니 좋아한다, 는 말도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김재환이라는 건. 혹시나 틀어질 사이를 다시 가져다 붙일만한 자신감이 애초에 내게 있을리가.
‘나중에 정 마음에 드는 사람 없으면 나랑 결혼하자.’
그럼에도 턱 끝까지 하고 싶은 말이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를 손 꼽아 얘기를 하자면. 나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결혼하자는 네 우스꽝스러운 말에 대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 라. 그에겐 어떨지 모르겠으나 난 그런 전제따위 두고 있지 않았다. 김재환이 아니고선 마음에 들 사람이 있긴 할까. 하는 의문이 먼저였다. 순간 가볍게 다가온 입술이 뜨거워지는데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김재환은 제 뜻대로 되질 않을 때면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은 나와 입을 맞출 때도 그대로였다. 내 아랫입술을 깨물어오는 그의 행동이 간지러웠다. 그를 받아내면 받아낼수록 깊이 파고드는 그의 무게감이 좋았다. 내내 달고 살았던 파스 냄새는 김재환의 냄새라고 해도 무방했다.
좋아해.
이젠 그 냄새가 입안을 쓰게 맴돌았다. 눈을 뜨고 나면 다 잊혀질 기억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 나는. 결국 꿈속에서도 우리가 함께 했던 날들을 꾸고 있는 나는. 아주 작게.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좋아한다고. 김재환, 너를 많이 좋아한다고. 잠깐 사이에 꾼 꿈들이 현실에 있는 것보다 더 현실 같았다. 축축하게 젖은 볼의 촉감이 잠결에도 생생했다.
좋아해, 재환아.
내가 아닌 사람이랑 결혼하지 마.
나랑 있어.
여기 있어.
어차피 꿈일 뿐이라고 생각나는 모든 말들이 입 밖으로 나왔다.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넌 내게 입을 맞추고 머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있는대로 꺼내버린 말들에 그는 뒷머리를 여러번 매만지다가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를 하고선 제 입술을 깨물었다. 퍽이나 당황했나보네. 웃으면 안되는데 웃음이 나왔다. 그저 꿈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뿐인데도 네가 사랑스러웠다. 내가 고백을 하면 정말 그는 이런 표정을 지을까. 너는 내 마음을 들으면 스물아홉의 넌 어떤 얼굴을 해올까.
실제로는 하지도 못할 말들을 꿈 속에서라도 했다면 그것만으로 족했다. 넌 무슨 그런 말을 갑작스럽게 하냐. 더구나 꿈 속의 넌 너무나 다정했다. 사무치게도 사랑스럽고 다정했다. 투덜거리면서 새빨갛게 달아오른 귓볼을 몇 번이고 매만지고 나와 눈 맞추는 것조차 수줍어하는 것이. 꼭 진짜로 일어난 일들처럼 선명했다. 나도. 나도 너 좋아해. 그러고선 바로 이어진 때에 맞지도 않은 고백에 대한 답은 날 울게 했다. 이러면 정말.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지는데. 그가 다른 사람이랑 하는 결혼식에 다짜고짜 쓰러진 난 곧 죽을 사람처럼 회고록을 다지고 있었다. 내 삶의 일부이자 전부였던 김재환을 떠올렸고 그와 함께했던 1년의 시간을 되새김질했다. 그건 행복하면서도 힘들어서 도중에 빨리 잠에서 깼으면 하는 순간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이젠 정말 꿈 같은 일이 일어나는 꿈 속에서 헤어나오고 싶지 않았다.
“ㅇㅇ야.”
그리고 꿈에서 깼다. 도통 눈을 뜨면 다 사라질 신기루 같은 꿈에서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사람은.
“결혼식 중간에 쓰러져서 걱정했잖아. 괜찮아?”
김재환이 아니었다. 살풋 김재환의 형상이라도 보인 것 같았는데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옹성우였다. 그리고 그의 대학친구였다던 강다니엘이 날 비단 안타깝게 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지.”
재환이 지금 공항이래. 너 깨어나는 거 보고 가고 싶다고 했는데. 그러면 날 탓하는 듯한 말이 들렸다. 쓰러진 날 업고 병원에 데리고 온 사람은 다름아닌 김재환이라고 했다. 결혼식이 채 마치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자신이 꼭 날 데리고 병원에 가야한다고 온갖 난리를 부렸더랬다. 난 김재환이 욕하는 거 처음 봤다니까? 난 또 네가 뭐 크게 아픈 줄 알았잖냐. 굳이 그들에게 말을 듣지 않아도 순간 내가 몸을 일으키자 무릎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검정색의 마이에서 김재환의 냄새가 났다. 이젠 어디 다칠 일이 없을텐데 옷엔 아직도 파스의 향이 감도는 것마냥 진했다.
“일어나면 바로 전화하래. 걔 너 때문에 신혼여행도 안 간다고 하는 거 겨우 내가 말린거야.”
꽤나 자랑스럽게 말을 하는 옹성우가 저리도 얄미울 수가 없다. 그가 신혼여행을 안 갔으면 했다. 아니 처음부터 결혼을 안 하길 빌고 또 빌었다. 이대로 모든 게 다 돌아가길 바랬다. 내가 꿈을 꿨던 그 때처럼. 열아홉의 김재환과 열아홉의 내가 있는 그 때이길 바랐다. 결국 깨어나면 이렇게나 허망할 뿐인데. 난 나오지도 않은 웃음을 겨우 지어가며 핸드폰에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너 괜찮아?
전화를 받자마자 여보세요, 라는 말보다 빨리 나온 내 안부의 말이 자동적으로 웃음을 나오게 했다. 전부터 너 아픈 거 같았는데 괜히 나 때문에 미안해. 말을 이어가다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그의 목소리에 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김재환은 잘못하지 않았다. 미안한 일도 없었다. 제 오랜 친구인 날 병원에 데리러 와줬고 제 결혼식도 제대로 치루지 못했다. 겨우 간 공항에서도 내 걱정만 하고 있었다는 그를 내가 미워할 수가 있을리 만무했다.
“네가 뭘 미안해. 나 병원에 데려다줘서 고마워.”
나 이제 괜찮으니까 신혼여행 잘 갔다와. 굳이 이 말을 덧붙이고 싶진 않았다. 내 입으로 신혼여행이다, 결혼이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거늘 전화기 너머에서 투정어린 여자의 목소리가 날 움직이게 만들었다. 나와 그의 사이에 뚜렷한 선을 긋고 또 그으게 만들었다. 단순히 들리는 목소리만으로 기죽는 걸 보면 난 한참이나 먼 듯했다. 사실은 널 많이 좋아해. 몇 음절도 되지 않은 말을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지 말라는 말도 꺼내기 어려워 하는 나는, 내가 봐도 한심했다.
“재환아.”
-ㅇㅇ야.
둘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섞여 들어갔다. 너 먼저 말해. 서로에게 먼저 미루다가 살풋 김재환 특유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사실……아니다. 몸 조리 잘하고 있으라고.
작은 숨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게 들렸다. 갔다와서 한 번 보자. 정말이지 오래된 친구처럼 건넨 인사에 쓸데없이 벙어리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넌 무슨 말 하려고 했는데? 지금이 지나면 더이상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게 내게 쥐어진 마지막 기회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김재환의 물음을 가벼이 넘겼다.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대신 후에 이것도 추억으로 남겠지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게 더 먼저였다. 나에게도 언젠가 좋은 사람이 생기겠지. 하얀색의 버진로드 위에 있는 사람이 김재환이 아니더라도 행복하겠지. 살 수 있겠지. 다 잊혀지겠지. 그런 말들만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나도 별 말 아니야. 잘 갔다 오라고.”
겨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와 나의 사이가 이렇게나 어색했나 싶었다. 더이상 오고 갈 말이 없다는 걸 직감했다. 다 끝이구나. 붙잡지도 못할 걸 후회만 하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다가 절망하다가 또 희망을 품는 일도 이제는 못할 짓이라 믿었다. 먼저 끊을게. 짧게 대답하며 뺨에서 핸드폰을 떼었을까 아주 미세한 소리가 귓가를 배회했다. 잡음보다도 작아서 묻힐 것만 같은 목소리에 흔들렸다.
무심코 뚝, 하고 끊어져 버린 핸드폰을 세게 쥐었다. 잡고 싶은데 잡을 게 이것 뿐이었다. 가까스로 다잡았던 나를 넌 또 흔들었다. 물꼬가 터지듯 나온 눈물은 멈추지 못했다. 나에게 남은 거라고는 검은색의 마이가 전부였다. 어느샌가 힘을 주고 있는 내 손을 따라서 그의 마이에 짙은 주름이 생겼다. 그를 만나고 나서 겪는 일들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라는 단어가 많이 따라다녔다.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본 것도, 그 사람을 살린 것도, 좋아하는 것도, 이토록 오랜 감정을 들끊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크게 울어본 적은 없을 정도로 울었다.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들어갔고 그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던 난 울고 또 울었다. 이만하면 되었을 거라 장담했던 내가 우스울만큼.
ㅇㅇ야, 사실.
그래봤자 내게 남은 건 김재환의 마이 하나와
영문을 모르겠다는 옹성우와 강다니엘의 서툰 위로 뿐이었는데.
나 너 많이 좋아했어.
그의 생일, 5월 27일 김재환이 결혼했다.
내가 아닌 사람과.
결혼(結婚)
完
안녕하세요 라이터입니다!
우리 독자님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거죠?ㅠㅠ
폭스글 완결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한동안 본의 아니게 잠적을 해버린 꼴이 되어버렸네요...
다른게 아니라 음....우선 재환이의 생일을 축하해서 어찌저찌 오게 되었는데 우리 킹재환 생일 축하한다!!!!!!
째니 생일도 심지어 28일로 딱 넘어가는 시점에 와가지고 머리 박고 벌 서야 할 판이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선 폭스글을 완결까지 써두었는데 다 날라갔어요 폭스 글 뿐만이 아니라 제 컴퓨터에 있는 글들이 다 깨끗하게 사라졌답니다...ㅎ
그래서 복구하러 가는 시간도 비용도 없는데 인티 임시저장에도 제 글이 없더라구요? 아주 미쳐버릴 거 같습니다
제가 나중에 따로 공지로 제 나름의 사정을 말하겠지만 우리 예쁜 독자님들 거두절미하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중간이 코 앞에 두고선 글 올리더니 이젠 기말시즌에 올리고 앉아있으니 이건 뭐...답도 없네요8^8
폭스글은 다시 재정비하고 차기작 생각하고 번외편이랑 메일링 준비하고 할게 천만가지가 되는 듯하지만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보도록 할게요
하고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지만 내일?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우리 다들 푹 자고 만납시다!!
+)글에 관한 말을 짧게 덧붙이자면
재환이가 '결혼하자'라는 말을 장난식으로 꺼낸 시점이 재환이가 여주를 좋아하는 때였어요! 그걸 못 알아챈 여주 이즈 쏘 멍충이데쓰
근데 엇갈림의 미학을 제가 좋아하기도 하지만 사실 마지막에 평행이론 개념으로 이어주는 결말도 생각해봤는데 이렇게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고 열린 결말로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더라구요
그럼 우린 댓글로 만나용! 굿나잇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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