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에게 14
15장. 무언의 말
서로를 다시 마주한 후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은 서로의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아직 회사에 정식 입사하기 전이라 조금 여유가 있는 은주가 먼저 하루를 마친 후 성우의 집에 와 있다. 웬일로 회사가 일찍 끝났는지, 은주가 집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우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 은주가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은주야, 오빠 왔...”
“오빠 왔어? 오늘 일찍 왔네!”
문 앞에 서서 자신을 반기는 은주의 모습에 깜짝 놀라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돌처럼 굳어버린 성우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성우가 은주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어휴 깜짝 놀랐네. 자 은주씨, 꽃 받으세요. 선물이야.”
이유 모를 꽃 선물에 마찬가지로 놀란 은주가 동그래진 눈으로 묻는다.
“갑자기 웬 꽃이야? 오늘 무슨 날이야?”
“그냥.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채 꽃의 향기를 맡던 은주가 성우를 올려다보았다.
“꽃 너무 예쁘다! 고마워 오빠. 근데 이 꽃은 이름이 뭐야?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
작은 꽃다발 하나에 아이처럼 기뻐하는 은주를 바라보던 성우가 말했다.
“다알리아래. 네가 좋아해 주니까 나도 좋다. 여태 선물 안 한 게 후회되네.”
“전에 꽃 준 적 있었잖아. 리시안셔스인가 그거. 그 꽃도 엄청 예뻤는데.”
“그건 졸업식 때였잖아. 평소에도 자주 꽃 선물할 걸 그랬어.”
“뭘 또 자주 선물해. 가끔 받으니까 좋은 거지. 아 맞다, 이 꽃도 꽃말 있지? 꽃말이 뭐래?”
다알리아의 꽃말이 무엇이냐는 은주의 질문에 성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꽃말? 나도 모르겠는데? 이따 집 가서 찾아봐. 오늘도 여기서 자고 갈 건 아니지?”
“응. 내일 아침 일찍 약속 있어서 오늘은 집 가야돼. 꽃 이름 다알리아 맞지? 꼭 찾아봐야겠다.”
성우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탁자 위에 꽃을 살포시 내려놓고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은주에게 다가간 성우가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은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달 전에 미리 사둔 건데 일주일 남기고 너랑 헤어지는 바람에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가지고만 있었어. 아깝게 못 채운 일주일 오늘로써 다 채웠으니까 이제 줄 수 있겠다. 대단한 거 아니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나의 우주가 되어 주어서 고마워 은주야.”
은주의 이름을 우주로 착각했던 수많은 사람 중 하나에 불과했던 성우는 이제 은주를 자신의 우주라고 불러주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성우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오늘이 만난 지 2년째 되는 날이라는 걸 기억해 낸 은주가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진짜... 난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몰랐는데... 미안해 오빠. 꽃도 너무 예뻤는데 이 목걸이도 너무 예쁘다. 잘 하고 다닐게. 미안해서 어떡해...”
성우가 은주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난 네가 다시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뭐가 미안해.”
괜찮다는 성우의 말에도 미안함과 고마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은주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성우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여기 뽀뽀.”
은주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성우의 볼에 입을 맞추려는 찰나 성우가 은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성우와 은주의 입술이 포개졌다. 해맑게 웃고 있는 성우에게 이러는 게 어디 있냐며 앙탈을 부리던 은주가 이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성우의 볼을 잡고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진득하게 맞닿았다.
혼자 갈 수 있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까지 태워주겠다는 성우의 고집에 못 이겨 집에 오는 내내 성우와 이야기꽃을 피운 은주는 도착하자마자 겉옷을 침대에 던져둔 채 방으로 들어왔다. 자신도 다알리아의 꽃말을 모르겠다고 말하며 미묘한 웃음을 짓던 성우의 표정을 보며 성우가 분명 이 꽃을 고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 은주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알...리아...꽃말...... 됐다.”
「다알리아는 장미처럼 색깔별로 다양한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색깔별로 꽃말이 다르다고? 내가 받은 건 무슨 색이지? 흰색 아니고... 적색도... 장미색 같은데.”
「꽃의 색깔에 따라 꽃말이 달라지는 다알리아는 장미색일 때
‘당신의 마음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라는 꽃말을 가진답니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던 은주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모니터 속 문구를 세 번이나 다시 읽어본 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에 놓여 있던 빈 꽃병에 물을 채우고는 식탁에 올려져 있던 커다란 다알리아 한 송이를 집어 들어 꽃병에 살며시 꽂았다. 하얀 벽지와 잘 어울리는 장밋빛 다알리아의 향기가 방안 가득 퍼져나갔다.
16장. 나의 행복에게
성우와 은주는 입사 2년 반 만에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게 된 성우의 새 정장을 맞추기 위해 은주의 선약이 끝나는 대로 백화점을 찾았다. 함께 장만하는 성우의 첫 양복인 만큼 오래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린 두 사람이 가벼운 마음으로 백화점 밖으로 나왔다.
“내가 입을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막 설렌다, 오빠.”
들떠있는 은주를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성우가 은주에게 물었다.
“어제 집 가서 다알리아 꽃말 찾아봤어?”
뭔가 기대하고 있는 듯한 성우의 표정에 웃음이 터진 은주가 대답했다.
“당연히 찾아봤지. 오빠 내 마음 알아서 기뻤어? 내 마음이 어떤지 알고?”
“다 알지.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러운데 한번 말해봐?”
자신이 은주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디 있냐며 허세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성우를 쳐다보다 피식 웃던 은주가 성우의 입을 자신의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됐어, 말하지 마. 오빠는 내 마음의 반의반도 몰라.”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던 성우가 다시 다정한 얼굴을 하고는 은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성우의 눈에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한 여자가 보였다. 익숙한 얼굴,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인상. 은주의 손을 맞잡은 성우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오빠 괜찮아요? 갑자기 손을 왜 이렇게 세게 잡아...”
“어? 어... 아무 것도 아니야.”
성우는 은주에게 아무 일 아니라는 말 외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그 여자도 성우를 발견하고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려는 성우의 이름을 불렀다.
“성우야.”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은주는 확신했다. 아, 저 사람이 승혜라는 여자구나. 성우의 마음속에 몇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긴 바로 그 여자구나, 하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체 하며 갈 길을 가려던 성우가 놀라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은주가 성우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꼬옥 감싸주었다.
“오랜만이네.”
승혜가 입을 떼었다. 성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옆은... 여자친구?”
은주를 가리키며 뻔뻔하게 묻는 승혜를 더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성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보면 몰라? 그리고 누나가 무슨 자격으로 그걸 궁금해 해.”
“성우야...”
생각보다 냉담한 성우의 반응에 승혜가 말끝을 흐렸다. 당황한 승혜의 모습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했다.
“나 누나 덕에 어떤 여자가 좋은 여자인지 확실히 알게 됐어. 그거 하나는 고마워.”
행여 승혜와 눈이 마주칠까 바닥만 보고 있던 은주가 고개를 들어 성우를 올려다보았다. 승혜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잠시 손을 놓는가 싶더니 다시 은주의 손을 고쳐 잡은 성우가 말을 이어간다.
“은주는 누나랑 달라도 너무 달라. 그래서 참 좋은 여자야. 누나 말대로 나 잘 지내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마. 마주칠 일도 없겠지만.”
승혜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가자, 은주야.”
성우가 자신의 팔로 은주의 어깨를 감싸고는 어안이 벙벙해진 승혜의 등 뒤로 걸음을 옮겼다. 은주는 성우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모퉁이를 돌아 나온 은주가 성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응.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오지 못한 게 좀 아쉽긴 한데,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하고 온 것 같아서 홀가분해.”
애써 괜찮은 척하는 성우의 말에 피식 웃는 것도 잠시, 금세 고개를 떨궈버린 은주가 계속해 성우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런 은주를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던 성우가 은주를 불렀다.
“은주야, 오빠 봐봐.”
은주와 눈높이를 맞추려 살짝 허리를 숙인 성우가 은주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아픈 추억을 마주한 성우를 걱정하던 은주도 결국 같이 웃어버렸다.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네가 나한테 손을 내밀어준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고마워.”
성우의 두 눈이 진심으로 빛났다.
“내가 더 고마워. 난 오빠가 슬프지도, 아프지도 말고 그냥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되도록 내가 만들 거야.”
은주를 다정하게 바라보던 성우가 팔을 뻗어 은주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너는 이미 나의 행복이야, 은주야.”
-The End-
+ 승혜로부터 받은 상처를 완벽히 털어내고
은주를 온전한 행복으로 받아드린 성우의 모습을 끝으로
'나의 행복에게'가 완결되었습니다.
내일(6/7) 저녁 10시쯤에 후기 및 메일링 공지로 찾아뵐 테니
꼭 오셔서 함께해 주세요:)
그동안 '나의 행복에게'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여러분의 행복은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