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시즌 2
W. Bohemian Heal
한 걸음만 더 걸으면 이별인데
왜 뒤로 한 걸음 걸으면 사랑이 아닐까.
07: 그 여름 안에서 下
***
검사님 많이 늦으시나요? 오전 8:30
검사님 재판 30분 남았습니다.. 오전 8:32
검사님ㅠㅠㅠㅠㅠ 오전 8:40
부재중 6통- 김민규보좌관
"좆됐다."
정성스럽게 좆돼는 날이 오늘이였다. 혼술은 무슨 혼술, 갖잖은 외로움을 소맥과 함께 보낸 새벽이었다.
지옥철은 무리였다, 이미 포화상태인 열차에 집어넣기엔 내가 너무 컸다.
입엔 머리끈을 한 손은 휴대폰을 한 손으론 흘러 내린 반스타킹의 고무줄을 끌어 쥐며 정류장으로 달렸다.
실수라니, 머리 박고 죽자 ㅇ/ㅇㅇ. 하필 오늘이었다, 환불 신청을 해둔 구두를 집어 신었고
헐떡거리며 겨우내 올라탄 버스는 이미 앞 뒤로 만원이었다.
- 잔액이 부족합니다.
"..예?"
- 카드를 두 장만 대 주십시오
- 잔액이 부족합니다
없던 종교도 찾게 되는 출근길에 아니 출근도 못하게 생겨버렸고 기사님은 어서 내리란 말을 모든 시선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머피의 법칙인지 뭔지 그거 다 불태우던가 해야지.
시말서를 품에 안고 적어도 이십분은 뒤늦게 제출을 해야 할 사태, 그리곤 불쑥 긴 팔이
나를 감았다. 아니 정확히는 카드가.
"죄송합니다. 두 명이요"
하 진짜.
아주 잠시 까마득한 눈 앞에 그제서야 여름이 온다는 태양의 신호와 마주했다.
"..너 스타킹 올 나갔어"
괜찮아 정신이 안 나간게 어디야.
권순영은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나를 민폐가 되지 않게 조심히 안아 함께 자리를 비켰다.
-검사님 원고 불참석으로 재판 미뤄졌습니다,
그리고 김부장님께서 검사님 찾고 계십니다..ㅠㅠ 오전 9:17
우여곡절의 출근은 이제야 시작이였다. 참았던 숨을 내뱉고 약간 흐른 이마의 땀을 닦아내릴쯤
권순영은 나의 머리칼을 쥐고 조심스레 올려 묶어주었다. 사실 방금 권순영의 행동도 버스에 내려 알았다,
입에 물고 있던 머리끈이 나의 뒤통수에 너무 아프지 않게 꼭 쟁여 매어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원 버스에 자리라곤 틈만 생기면 들어찼다, 적어도 삼십분은 늦는 길에서 굳이 굳이 꺼내온
구두는 생각보다 높았다.
"지각이야?"
"..응"
그래도 새내기 검사라고 출근 정시 마이너스 사십분으로 이른 출근도장을 찍었는데, 운빨로 재판은 미뤘으나
불편한 걸음으로 불편한 사람과 마주해야 하니 도로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또한 바닥난 인성 더 긁는 버스는 이리저리 사람에게 채여 욕지기라도 한 번 내뱉으려니
권순영은 내 팔을 꾹 쥐고 뒤로 끌어 당겼다.
"..기대"
고맙다는 인사를 까먹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어린 시간에 내가 너를 보고 성장을 실감했을 때, 아니 그것보다 더, 너는 어른이 되어있었고
너에게 기대 가는 출근길이 마냥 불편했을까? 불편하기만 했는지도 모르겠는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
"영화 볼래?"
슬리퍼를 신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그것도 실내 사무용 슬리퍼를 신고, 수많은 인파와 함께
짤린 거 아니에요라고 등에 붙이고 갈까. 이어폰은 지하철역에서 사라졌고 태양이 사라지는 참이었다.
부장검사는 닦달을 했고, 피의자는 욕을 했고, 나는 사표를 쓸 뻔했다.
한 마디로 지친 하루였다, 덤에 흔한 공백을 달고 걷다 조용히 울린 알림은 조금 크게 귓가에 굴러들어왔다.
- "영화 보자, 데리러 갈게"
"나 저녁 안먹었어"
- "살게, 어디야?"
"길거리"
사실 부장검사의 닦달이야 조용히 머리를 내리고 귀마개를 작게 꼽으면 되는 것이고
피의자의 욕지기는 조용히 녹음 후 들려주면 되는 것이었으며
사표는 항상 가지고 다닐 뿐 폼밖에 더 되는 그런 거 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밀고 들어와 지치게 할 때가 있더라.
아침 이후로 권순영과는 하나의 연락도 없었다, 해야 하나 뭐 고맙다고?
버스비를 대신 내줘 고마운 건가, 대신 헝클어진 머리를 묶어줘서 고마운 건가, 발목이 부러지지 않게 기대간 게 고마운 건가,
우리는 이게 당연한 일로 넘어가는 사이였는데 그 사이는 나에게 언질도 없이 어디 저 먼 타국까지 늘려두곤
'멀어졌다' 통보하는 것만 같았다.
길거리라고 했는 데, 최승철은 왔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대충 벽에 기대선 나에게 와 볼을 움켜 쥐었다.
"흐즈므르,느 히드르"
(하지마라, 나 힘들어)
"오늘은 대체 뭐 때문인데 복어가 됐어"
"느 때무에 그른 그 즈느, 은느?"
(너 때문에 그런 거 잖아, 안놔?)
결국 웃었다. 복어복어 거리며 앞머리를 사정없이 헤치는 큰 손바닥에,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루종일 속도 없이 비행하던 마음은 제멋대로 가라앉았다. 가자, 밥 사줄게.
꽃이 피는지도 지는 줄도 모르고 여름이 왔다.
땀이 맺힌 손을 제 옷에 대충 닦아주곤 손목을 끌었다. 그래 밥 먹으러 가자.
"그래서 슬리퍼를 신고 거기까지 오신 거고?"
"몰라, 짜증나서 사무실 쓰레기통에 집어넣었어. 하필 집은 게 왜 그거냐고
그 많고 많은 신발 중에"
"점심시간에 얘기하지"
"또 그 아직 나오지도 않은 컬렉션 하나 들고 나오게?"
"내가 한 거니까"
됐습니다. 그런 구두 줘도 나갈 곳 없고 나갈 약속 없어 안타깝게 잊어가는 인생을 선물할 수는 없으니까.
하늘이 아득해져가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멀어지다보니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정도 투정을 뱉고 배를 채우니 금방 시간은 흘렀다, 이대로 자면 어떡하지.
"그럼 그냥 자"
"돈 아깝잖아"
"내일 네가 영화보여주던가 그럼"
응, 자본주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잠도 오지 않을 정도의 공포 혹은 귀가 앵앵거리는 액션이 아닌 이상
백프로 삼분의 일도 못가 잠에 들 거 같았다. 내일은 제대로 보자는 심산으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조명이 금방 사그라들며 스크린 자리를 잡았다. 분명 시작은 연인이 헤어졌고,
- 너는 내 기억에서 죽었어
내가 기억한 처음이자 마지막 대사였다.
(작가 시점)
ㅇㅇ는 정말 잘 잤다, 처음부터 고개가 혼자 끄덕이며 흔들거리더니 이내 새근새근대며 가끔 몸을 움츠렸다 펴곤했다.
이따금 커지는 스크린 볼륨에 승철은 불안한 기색으로 ㅇㅇ를 살피고 다시 또 살폈다.
클라이맥스로 갈 수록 커지는 음성엔 결국 조심스럽게 그녀의 귀에 손을 대어 막았다. 괜히 잠든 ㅇㅇ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종국엔 승철의 손을 베개 삼아 고개를 묻고 잠이 들었고 후에 끝까지 그는 ㅇㅇ에게 손을 내어 주었다.
"이제 일어나자"
손가락으로 ㅇㅇ의 코를 톡톡 치니 그녀는 부산스레 잠에서 깨어 두리번거렸다. 나 진짜 잤어?
"응, 처음부터 끝까지"
승철은 꾸역꾸역 웃음을 집어 넣었다, 귀여워 죽겠네 진짜.
조그만 손으로 얼굴을 부비다 가자며 벌떡 일어선 ㅇㅇ는 졸음의 여파일까 비척비척 걷기 시작했다.
거긴 계단인데,
제대로 넘어지기 전에 승철은 급하게 따라가 팔을 잡았다. 하루종일 그녀의 다리는 다리가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품으로 자꾸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였어?"
승철은 두 번 정도 듣지 못한 척을 했으나 실패했다. 무슨 내용이였냐고,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크게 질러주는 ㅇㅇ덕에. 무슨 내용이었을까, 결말은 어땠더라? 엔딩 크래딧에 박힌 주연의 이름은 뭐였지.
그가 본 영화는 생각보다 아름다웠으나 돌발적이었고 또한 귀여운 거였는데,
뭐였냐니까?
"가. 그냥"
그는 실없이 웃으며 그저ㅇㅇ를 밀었다.
***
"ㅇ검- 3시 재판이지?"
"안타까운 어조가 아니네요, 선배. 오늘도 승소했어요?"
"뭐,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는 거지. 항소한다더라,
그쪽도 만만치 않은 거 같던데 이번에"
"언제는 뭐 수월했나요, 뭐"
검사복은 너무 더웠다, 이른 감이 있지않나 싶었지만 하루종일 냉방시설을 켜두어도 앞둔 재판의
한 몫으로 셔츠를 두 개나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갑갑하기까지 했으니.
말 그대로 이길 때도 질 때도 있는 게 재판이고 그게 최선이다, 그러나 온 힘을 쏟아 법정에서 제대로 된 역활을
해야한다는 사명감이 아직 가시지 않은 나이라 너무 열렬한 제스처가 문제였을뿐.
- 근처인데, 커피 마실래?
판결이 끝나고 서류를 정리하는 동안에 날아온 신발을 아주 직격으로 맞았다. 손쓸 새도 없이 짙은 욕배기와
날아온 신발이 생각보다 아팠다. 협박은 받아봤어도 폭력은 처음인지라 얼이 빠져 서있었다.
들어가, 들어가. ㅇ검 뭐하고 서있어! 등 떠밀려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 다른 한쪽이 날아와 반대쪽 볼에도 푸른 멍이 생겼을까.
땀에 절은 옷을 갈아 입고 거울을 확인하니 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소란스러웠던 법정이 일단락 되고
모두 빠져나간 탈의실에서 정말 문뜩 울음이 고였다.
"..씨 왜 울고, 지랄이냐"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건데, 벅벅 눈가를 문지르고 아무래도 이 상태로 돌아다는 것은 아닌 거 같아
약국이라도 들릴 참으로 일찍히 가방만 들고 밖으로 나왔다. 습하다, 눅눅하고 덥다. 방금까지 서 있던 법정만큼 덥다.
그리고 언제나 비는 온다고 기척 하나 없이 빠르게 추락할까.
"ㅇㅇㅇ"
또, 언제나 너는 온다고 기척 없이 빠르게 나에게로 올까.
"너 맞았..야, 얼굴 봐"
"너 왜 여기 있어?"
"뭐야 이거?"
"뭔데 이거?"
이 날씨에 아메리카노는 뭐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아니고.
권순영이나 나나 서로 같은 문장으로 다른 맥락을 묻고 있었다. 급하게 턱을 쥐어 올리는 턱에 나도 놀래 그를 올려다 보니
나보다 구긴 인상으로 짧게 훑곤 다시끔 물었다.
"뭐냐고"
"좀 놓고 얘기해, 아파"
"야"
"아 그냥! 그랬어. 하지마"
"제대로 말해, 뭐냐고"
속이 상해도 내가 상하고 아파도 내가 더 아팠다. 그게 맞는 거다.
빗방울이 거세지고 있었다, 때이른 장마가 시작될 기미를 슬금슬금 내비추며 억세게 흐르고 있다.
짜증이 난 건지, 화가 난 건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는 어투로 몰아세우니 괜히 나역시 짜증이 올랐다. 근데 그건 그냥 날씨가
텁텁해서, 실내보다 더 끈적하고 더워서 그런 거였음 했다. 그냥 그런 거였음 했다.
"야"
"ㅇㅇㅇ"
"그만해라, 비켜. 나 갈거야"
비틀거려 조심히 잡아준 손목의 힘이 아니라 정말 억세게 손목을 쥐었다. 정말 아파 울고 싶었다, 너까지 보태니.
마구잡이로 뿌리쳐도 다시 잡았고 다시 뿌리쳐도 또 잡았다.
아, 장마가 싫다. 그래서 네가 이러는 것도 싫은 거고 장마가 너무너무 싫어서 눈물도 베어 나오는 거다.
"저번에도 그랬잖아, 오바 떨지마. 그냥 다친 거야"
"너는 그냥 다쳐서 그 얼굴에 손바닥만한 멍을 달고 다니냐?"
"ㅇㅇㅇ"
비가 내리면 먼지가 씻겨 흐르고 땅이 가라앉는 것처럼 그렇게 본래 것이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의문이 자꾸 씻겨 내려갔다. 권순영이 나를 쥐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렇게 비가 내리고 내릴수록
의문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 돌아왔다.
너는 나를 좋아하니
딱 목구멍에 울음을 먹어 막혔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튀어나가진 않았다, 사실 듣고 싶은 건지도 모를 의문이었다.
그냥 두고 싶어 덮고 덮었을까,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속 나에게 묻고 싶었다.
물어보려 했었어?
너는 답이 없었다. 어쩌면 이 폭우에 먹혀들어가 내가 듣지 못했는지도 모를 그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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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만입니다.
복숭아의 기억, 복숭아의 감동, 그때 느끼셨던 모든 것들을
감히 깨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필력으로
조심스럽게 글을 들고 찾아와 어쩌면 죄송스럽습니다만,
아직도 제 글을 감사하게 기억해주시고 기다리는 분들께
이렇게 보답하는 것이 맞는 거 같아 글을 올립니다.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이해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쩌면 빠르게 조금은 천천히 숨 쉬며 완결까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