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어스름을 버릴 줄 몰랐다. 푸른 청량함은 어디서 물이라도 섞었는지 밍밍한 색을 띠었고 밤하늘은 구름이 흐드러지게 박혀 깊은 맛을 잃었다. 어설픔. 이 모든 것을 형용할 수 있는 말이었다.
걱정이네. 요 며칠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땅이 마르지는 않았을까, 물길이 성하게는 흐르고 있을까. 혹 내일 궐 밖에 나갈 일이 생긴다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지 보고 와주게.
크지 않은, 어쩌면 작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을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꼭 십 년이 지나버린 마을은 큰 변화가 없었다. 얼굴 없는 왕과, 흉흉한 입소문이 가득한 곳.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입의 주인들이 사라졌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마을, 한번 둘러보심이 어떠하십니까.”
주인 없는 소문에 왕은 괴로워했다. 입이 사라져도 그들이 남겨놓은 숨결이 바람에 싸여 왕의 귓전을 때렸다. 간수와 행위 한 왕비. 왕비를 쫓아낸 전왕. 매춘부가 되어버린 왕비와 그녀의 아들. 전왕의 죽음. 숨결은 농 짙고 끈적였다. 끈적임은 네 개의 사건을 오묘하고 교활하게 붙여나갔다. 하나로 뭉쳐진 이야기. 왕은 옷깃을 여몄다.
“아직은, 아직은 조금 두렵네.”
“직접 보시면 또 다를 것이옵니다.”
왕은 손가락 끝으로 잔을 매만졌다.
“단 한 번도 궐문을 잠가둔 적이 없네. 경비병을 세워본 적도 없고 어느 날은 조금 열어두기도 했네.”
기다림, 그것은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잠기지 않은 문은 그 본연의 의미를 망각한 채 근 십년동안 열리지 않았다. 왕은 저 스스로를 가두었다. 불어오는 바람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시선. 그것은 모래알 섞인 바람보다 거칠게 생채기를 만들어냈다. 자잘한 상처들이 겹쳐 왕의 살갗을 깊게 파고들었다. 살가죽이 벌어지는 고통을 왕은 내지르지 않았다. 혹 어쩌다 저도 모르게 난 신음은 왕의 얼굴을 감싼 가면에 닿아 다시금 입으로 삼켜졌다. 뜨거운 숨결을 다시 삼켜내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미련하게도 가면을 벗을 줄 몰랐다.
“모두들 그러한가? 모두, 짐을 싫어하나?”
왕은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음 뒤에 찾아온 짧은 정적. 왕은 그것마저 괴로웠다.
“모든 사람들이 폐하를 좋아할 수 없듯 모든 사람이 폐하를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누가 짐을 미워하지 않는가?”
생기 잃었던 눈빛이 살아나고 남자는 그 눈빛을 오롯이 수용했다. 찢긴 상처가 울컥울컥 뱉는 울음을 눌러 참는 것에 지쳤던 왕은 둘 사이의 거리를 기대감으로 채워갔다.
“폐하 앞에 있지 않습니까. 단 한 번도 미워한 적 없습니다.”
그 수많은 이가 폐하께 가진 반감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그만큼, 폐하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덧대어 말했다. 정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마왕 같은 존재가 이 사람을 칭하는 게 맞을지, 사실이라면 허구의 가면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 속에 한껏 제 자신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은 십년 전 이마까지 내려앉는 왕관을 붙잡으며 서럽게 울던 아이와 무엇이 다르다는 건가. 예나 지금이나 이 여린 사람에게 내려진 형벌이 너무 크고 무거움을 느꼈다.
“자네 방에서 서찰을 보았네.”
왕은 제 품에서 허름한 종이를 꺼내고는 손에 꼭 쥐어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단정치 못한 기분이라며 잘 마시지 않던 술을 오늘따라 자주 들이킨다. 남자는 잔을 찾는 왕의 손길에, 그 반대편 손에 단단히 움켜잡힌 종이에 불안함을 느꼈다.
“이런 건 숨기지 말게. 자네는 내 눈이 되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더구나 나를 사랑해 주시던 분, 나를 낳아준 분의 소식이라면 더더욱 그러지 말게. 혹 그것이 여생을 여백으로 채우는 온점 같은 것이라고 해도. 왕의 입이 미적지근한 알싸함에 취했다. 알알하게 취한 혀가 뒤늦게 매무새를 정리하려 들었지만 그 마저도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자네는 이제 가려줄 수 없네. 아니, 자네가 가려준다 한들 내가 숨을 수 없네.”
그 분은 나를 사랑해주셨으니까. 왕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숙여진 고개가 무거운 왕관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마주한 왕관은 쨍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울음소리가 곳곳을 매워갔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왕이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궐 밖으로 가 숲으로 가게. 숲에 어린 안개가 멎을 때쯤이면 다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걸세.”
남자가 왕좌 쪽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부정의 의미였다. 가까워져 오는 남자를 왕의 입이 막았다.
“어명일세.”
말의 의미가 멈추게 한 것은 아니었다.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물기 오른 목소리가 그를 멈추게 했다. 그는 왕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어깨와 몸체는 슬픔에 잠겨 내려앉은 형태였지만 두 손은 단단하고 결의가 있어보였다. 바닥에 꽂힌 발을 억지로 빼다시피 왕에게서 뒤돌았다. 가릴 수 있을 만큼 사랑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퍽 내 잘못일 테요, 전하지 못한 나의 실수이어라.
“잠시, 잠깐만 뒤돌아서지 말고 그대로 내 쪽으로 오시오.”
공허함을 뚫는 다부진 목소리가 남자의 귀를 파고들었다. 남자는 천천히 발걸음을 뒤로했다. 남자의 뒤꿈치가 왕좌의 계단에 닿았을 때 왕은 남자의 등을 감싸 안았다.
“가끔 자네를 어찌 불러야 할지 막막했다네.”
병사도, 신하도 아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곁에 머물겠다던 그대는.
“십년 전처럼 그저 그대를 홍빈아, 라고 불러도 되는가?”
멀리 두기엔 마음이 따르지 않고 가까이 하려드니 나를 밀어내던 그대는.
“그냥 마지막으로 홍빈아, 고마워. 하고 싶었네. 그대 기억 속에 내가 친한 벗으로 남고 싶었네.”
남자를 품에서 놓은 왕은 남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이제, 가게. 달빛마저 어스름해지는 새벽녘이 되면 길을 찾기 힘들 테니. 남자는 달려가 문을 열었다. 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달빛이 영롱하게 왕좌를 비추었다.
“탈 없는 얼굴을 모두가 축복하리.”
남자의 눈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유난히도 빛났다. 꼭 냇물에 반사되는 빛과 같이 밝았다. 남자는 뒤돌아 눈을 보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오래된 궐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닫히자 남자는 그제야 눈에서 빛나는 물길을 거둘 수 있었다. 부디, 택한 그곳에서는 평생 행복하소서. 역사에는 내가 남기겠소. 어린 왕은 무서움에 도망친 것이 아니라 마땅한 행복을 찾아 떠난 것이다. 후세가 그렇게 알게 하겠소.
왕은 손에 든 서찰을 폈다. 왕비의 설움이 획마다 넘실거리게 담겨 가슴을 때리는. 왕은 품에서 서슬 시린 단도를 꺼내들었다. 변함없이 그의 손은 결의에 차있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현명하셨던 분,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현명함은 잃지 않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 곳은 평안한가요? 반겨주세요. 이 여린 정신마저 당신께서 주신 것이라 가면을 벗었습니다. 달빛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밉지만 아버지가 계신 하늘이 보내준 천사와 같은 벗에 아버지께 마저도 감사를 올립니다. 궐 안엔 이제 저 혼자입니다. 마치 십년 전과 같습니다. 새로이 시작합시다. 제 눈과 귀를 대신해 주고 일생을 함께 걷겠다던 좋은 벗을 보낸 대신 그곳에서 더욱 행복할 수 있기를 빕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그 벗에게도 평생의 행복이 있기를.
남자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늘어진 구름이 달빛을 탐하려 들었다. 안 된다, 하늘마저 울어버리면 그대 가는 길이 힘겨워 질 것이오. 그대가 행복에 손닿는 그 때까지 만이라도 눈물을 참으소서.
왕은 달빛이 반사되는 단도를 저를 향해 쥐었다. 가는 달빛, 위험하지 않게 내 품에 숨어 가시오.
부르기에도 먹먹한 많은 분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