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물들다
혼잣말 하나 _ 아주 느린 파동
감정이 키워지는 순간에는 꽤 그럴듯한 정황증거가 나타나는 법이다.
만약 밤이 밀려오는 속도가 평소와 다른 것 같고 창으로 스며드는 공기의 서늘함이 전과 다르게 느껴진다면,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긴 건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네 생각을 하며 카페에 앉아서 노래를 듣는데, 가사 하나가 귀에 딱 꽂히는 거 있지? 달달한 사랑 노래도 아니고 길을 걷다 보면 자주 들리는 최신곡도 아니었는데. '진짜 사랑이란 어쩌면 아주 느린 파동'이라는 가사였어. 네가 이 노래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네 생각이 날 이유가 전혀 없는 곡인데, 이 가사를 듣는 순간 네가 딱 떠오르더라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네가 이미 내 일상의 전부가 되어 버렸나 봐.
아주 느린 파동이라는 가사를 곱씹어 보니 머릿속에 그림 하나가 그려지더라. 불어오는 바람 하나 없이 잔잔하던 연못의 표면에 갑자기 작은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수많은 잔물결을 그려내는 그런 풍경 말이야. 돌멩이가 떨어진 바로 그 지점을 중심으로 동심원들이 천천히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장면을 계속 상상하니까 그 모습이 지금의 나와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작은 주름 하나 없던 내 마음에 어느 날 네가 날아 들어오고 나서부터, 나는 밀려드는 파동에 정신없이 흔들렸거든. 처음엔 그 파동이 아까 말한 가사에서처럼 참 느리게 퍼질 거라 생각했는데, 또 그렇지만은 않더라고. 너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된 파동은 퍼지고 퍼져서 눈 깜짝할 새에 나로 하여금 너의 주변까지 사랑하게 만들어 버렸어. 잔잔하던 연못에 파동이 하나 생겨나고 나면 그 때문에 생겨난 물살이 연못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게 한순간인 것처럼.
나라는 연못에 너라는 돌멩이가 퐁당 빠져 작은 파동을 만들어낸 그 날 이후로, 내 마음은 계속해서 커지고 커져 이젠 바다라고 불러야 할 상황에까지 다다른 것 같아. 내 마음이 호수와 강을 거쳐 바다에 이르는 동안, 너 또한 작은 파동을 일으키던 존재를 넘어서서 이젠 커다란 파도를 불러오는 존재가 되어버린 거야. 참 신기하지? 작고 느린 파동에 불과할 때에는 기껏해야 연못의 표면만 요동치게 하던 그 물결이 이제는 파도가 되어 바다 전체를 한바탕 뒤집어 놓고 있다는 사실 말이야. 이 파도가 내 마음을 계속해서 못살게 굴어도, 나는 계속해서 너에 대한 이 마음을 키워갈 것 같아. 아니, 내가 굳이 마음을 키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아마 그 크기가 자꾸만 더 커질 것 같아. 네가 만들어낸 작고 느린 파동은 결코 작지도, 느리지도 않으니까.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내 모든 걸 뒤흔들어놓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물살이 나를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지내보려고.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어떠한 바람도, 돌멩이도 없이 온종일 멈춰있는 외로운 연못보다는 거센 바람과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행복한 바다로 살아가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일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거든. 왜, 그런 시도 있잖아.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라고 말하는 시.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가? 난 비슷한 것 같은데. 네가 연못에 빠진 돌멩이든, 그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느린 파동이든, 큰 바다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파도이든 간에, 나는 네가 밀려오는 대로 너를 받아들일 테니 너는 네 모습 그대로 내 주변에 머물러만 줘. 지금처럼 그저 가까운 친구 사이일 뿐이어도 좋으니까.
사랑에 빠진다는 건, 누군가에게 느리고도 빠른 속도로 물들어가는 것 같아. 마치 연못 표면을 순식간에 뒤덮어버린, 느린 줄로만 알았던 파동처럼 말이야.
상대를 제외한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는 순간은 그야말로 예고 없이 다가온다.
어쩌면 예측이 가능한 감정은 사랑이 아닌지도 모른다.
- 이기주, 언어의 온도 中
+ 원래 다음 주쯤에 오려고 했는데
여러분이 너무 보고 싶어서 일찍 돌아왔습니다^0^
이번 글은 준비 중인 새 장편의 미리보기 격 글이에요.
시점은 여주 시점입니다!
++ 새 시리즈가 시작된 만큼
당분간은 댓글에서 암호닉 신청 자유롭게 받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