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 거야.
Murakami Haruki - 〈Norwegian wood> 중에서
문을 열어제꼈을 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망할, 내 인생도 같이 제꼈구나.
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Chapter 22.5 <첫 만남>
#40.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정장과 왼쪽 손목시계만 봐도 외제 차 한 대 값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하던 거구의 남자는 그녀가 넘긴 백을 안고 석고상이 되었다. 한결 자유로워진 그녀가 팔짱을 끼고 옅게 웃는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건 나뿐일까 싶기도 했다.
- “누구니?”
- “저는…….”
- “여자친구?”
겪어본 사람만 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상황에서, 그것도 키스할 타이밍에 찾아와 여자친구라 묻는 상대방의 어머니를 만난다면 쉽게 입을 뗄 수 없다는 것을. 더군다나 내 꼴은 그 짧은 순간에 예의를 차린답시고 묶은 산발 머리와 세수도 안 한 얼굴이다. 심지어 그녀의 눈빛은 ‘네가 여자친구라면 당장 끌어내겠다’라는 강단이 보였다.
그래, 절대 안 된다. 여자친구라 말할 수 없다. 지훈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사시나무처럼 고개를 좌우로 떨었다. 지훈아, 말하지 마. 아니야. 하지 마. 간절한 텔레파시가 아침부터 닿는 건 무리였을까, 그가 웃는 걸로 보아 분명 말할 태세다. 그래서 내 마지막 자존심을 여기에 걸기로 했다.
- “여자친…….”
- “어머님! 저는 같은 과 동기입니다!”
- “……뭐?”
- “아침부터 이러고 있으니까 오해하실 만 해요, 하하.”
지훈의 팔을 가볍게 밀고 하얀 이를 보이며 독심술을 쓴다. 믈흐즈므 즈블. 그는 인상을 구기며 눈치 없게 귀를 갖다 댔다. 안 들려. 뭐라고 했어. 안타깝게도 그는 오직 내게 집중된 터라, 가자미 눈으로 지켜보는 그녀를 홀로 감당해야 했다. 또각또각 안으로 들어오는 구두소리, 침을 꿀꺽 삼키는 내게 다시 묻는 그녀였다.
- “여자친구 아니야?”
- “아닌데요.”
- “아니면 아침부터 여긴 왜 있니?”
- “목, 목공 풀 빌리러 왔는데요?”
그녀가 잠시 당황한 듯 보인다. 그건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건축의 ‘건’자도 모르는 나는 지훈의 서랍을 뒤지며 목공 풀을 찾고 있다. 괜히 옷장도 열어봤다가 주방 선반도 확인했다. 어처구니없는 내 동선을 말없이 지켜보던 지훈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 “갑자기 왜 왔어.”
- “아들 집에 약속이라도 하리?”
- “지금 좀 바빠.”
- “너보다 쟤가 더 바빠 보이네.”
그녀가 지훈을 지나쳐 주방으로 다가온다. 목공풀을 찾아 주방 서랍을 샅샅이 뒤지던 나는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다가오는 상대를 알아차리고 급히 뒤를 돌았다. 목공풀이 여긴 없네요.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 대답이었다. 의외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동조했다.
- “없을 만 하지.”
-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밥은 먹었니?”
- “……네?”
- “지훈이 친군데 같이 먹고 가.”
주름 한점 없는 정장 마이가 식탁 의자에 걸린다.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확인하는 뒷모습을 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내 어제 끓여 놓은 보양식까지 본 그녀가 지훈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건넸다. 지훈은 생각하는 듯 말이 없다, 울 것 같은 내 표정을 보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 “내가 끓였어.”
- “……누가 해?”
- “내가.”
-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구나.”
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 후 자연스레 불을 올리고 밥을 담고 식탁에 둘러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하필이면 그녀와 마주 보는 자리다. 밥을 코로 먹어도 이상할 게 없는 구도였다. 밥 한술에 물을 몇 번이나 비웠는지 모른다. 나처럼 계속 물을 들이키던 그녀가 숟가락을 놓는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지만, 이 자리는 그렇게 되는 자리였다. 숨을 잊은 건지 잃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지금, 그녀의 질문 공세에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 “그래, 같은 과면 자주 만나겠네?”
- “자주는 아니고, 같은 조였을 때는 많이 만났어요.”
- “지훈이 학교생활 열심히 하니?”
- “어우, 그럼요. 교수님뿐만 아니라 선배님과 동기들도 다 좋아하는 아이예요.”
국어 봇이 5학년 2학기 슬기로운 생활 32페이지 참고 자료를 읽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정석과도 같은 대답에 그녀는 미소 지으며 지훈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밥을 흡입하는 그였다. 식탁에 마주한 순간부터 골이 난 얼굴로 밥에만 집중하는 그의 상태는 묻지 않아도 알만했다. 승관이 본다면 ‘왜 여자 친구라 말을 못 하냐고! 네가 파리의 연인이냐!’ 따위들로 지훈 대신 기함을 쳤을 것이다.
- “어머니도 아시겠지만, 지훈이 얘가 처음에는 내성적이라 그렇지 친해지다 보면…….”
- “이거 먹어.”
- “……어?”
- “다리 별로 안 좋아해.”
그가 자신의 몫 반절 이상을 떡 하니 내 그릇에 옮겨 닮는다. 기대치 않던 돌발 수에 두 눈이 맞은편 그녀에게 향한다. 알 수 없는 표정과 묘한 눈빛에 식탁 아래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긴장감을 감췄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멈출 마음이 없었다. 덜덜 떨리는 다리가 식탁을 흔든다. 근원지는 이지훈의 곧은 두 다리, 그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 “무슨 짓이니?”
- “이래야 소화가 잘 돼.”
- “너 정말 이럴래?”
- “멈출 수가 없어.”
이케아 식탁에 강진이 일어났다. 당황한 그녀와 달리, 그는 세상 누구보다 평온하게 밥을 넘겼다. 이대로 가다간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만 같아 식탁 밑으로 지진 운동 하는 그의 다리를 밀어냈다. 그러자 그가 눈꼬리를 접으며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 “하지 마?”
- “어머님이 싫어하시잖아.”
- “너는?”
- “뭐?”
- “다리 떠는 남자 싫어?”
- “지금 여기서 그런 얘기가 왜 나와?”
- “네가 싫으면 안 하고.”
불현듯 강진이 멈췄다. 대신 판이 뒤집혔다. 이건 빼박캔트 이지훈의 노림수였다. 골이 난 걸 알아챘을 때부터 이 집에서 도망쳤어야 했다. 마지막 숟가락까지 비운 그가 뒤로 의자를 끌었다. 우리 지금 나가봐야 돼. 익숙하게 주방 선반에서 꺼낸 막대 사탕을 내게 내민다. 망했다.
- “아침부터 어디 가려구?”
- “학교.”
- “이 친구랑?”
- “어, 목공풀도 사고.”
지훈은 상의를 훌러덩 벗어 던지며 그녀를 재촉했다. 옷 갈아입을 거야. 이제 가. 그녀가 말없이 내 쪽을 본다. 너도 나가야 할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넓은 등을 보이고 옷장을 열던 그가 타이밍 좋게 대신 답했다. 그것도 야무지게 씨익-, 웃으면서.
- “걘 괜찮아, 여.자.친.구.니.까.”
문 앞에서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고 그녀를 배웅한다
말없이 내 어깨를 쓰다듬던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 “다음엔 소금 적당히 쳐.”
- “…….”
- “삼계탕이 짜다, 얘.”
#41.
옘뱅! 망할! 젠장할! 침대에 머리를 박고 속으로 악을 썼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왜 하필, 오늘, 아침에 이 사단이 일어나냔 말이다. 이건 이불 킥 정도가 아니라 지구 밖으로 튀어나가야 했다. 옆에서 쌩 난리를 지켜본 그가 양치질을 하며 고구마 같은 위로를 건넨다.
- “괜찮아, 뒤 끝은 없는 사람이라.”
- “여자친구라는 말을 왜 해!”
- “여자친구를 여자친구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 “말하지 말라고 복화술까지 했잖아!”
- “숨길 게 뭐가 있어.”
- “그렇게 티를 내고 싶든?”
- “당연하지.”
그가 치약 거품을 물고 유유히 사라진다. 여자 친구라 말 못 해서 죽은 귀신도 아니고 그 순간을 못 참냐고. 다 이유가 있었다니까아아악! 아직까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천장에 이불을 날렸다. 먼저 단장을 끝낸 그가 창문을 열어 환기한다. 이내 침대맡에 걸터앉아 내 안색을 살폈다.
- “괜찮아?”
- “하나도 안 괜찮아.”
- “왜 숨기고 싶은데.”
- “지금 내 꼴을 봐! 너 같으면 우리 엄마 이런 차림으로 만나고 싶어?”
-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래야겠지. 오늘처럼.”
- “또 다큐 나온다.”
- “안녕하세요. 여주 남자친구 이지훈입니다.”
- “잘났다 진짜.”
- “따님을 제게 주세요.”
그가 공손히 두 손을 받들어 고개를 숙인다. 놀리는 스킬도 날이 갈수록 높아진다. 다 필요 없어. 오늘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줘. 손을 붙잡는 그를 뿌리치고 소파로 직행에 이어폰을 꽂았다. 일렉을 틀어 마음 안정을 취한다. 포기하는 법을 모르는 그가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쪽 이어폰을 뺏어 제 귀에 꽂는다. 그때 걸려오는 한 통의 전화가 거대한 불씨를 피웠지.
- “여보세요.”
- “누나, 잘 잤어요?”
- “……소년?”
- “누나 때문에 지금도 허리 아파요.”
……예? 허리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하마터면 콧물이 나올 뻔했다. 소년은 바깥 소음을 뚫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지훈의 빡침을 보게 되었지.
- “누나 때문이니까 누나가 책임져요.”
- “너 누군데.”
- “뭐지? 남자 목소리?”
- “누구냐고.”
정답게 한쪽씩 나눠 낀 이어폰이 파장을 불렀다. 앞서 보다시피 지는 걸 싫어하는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외치며 지훈의 존재를 물었고, 지는 법이 없는 지훈은 소년을 자근자근 밟아 댔다. 눈빛은 말할 것도 없이 사나웠고, 흡사 맹수와 다름없었다.
- “이 찬? 뭐 어쩌라는 거야.”
- “아저씨는 누군데요?”
- “네 허리를 왜 책임져.”
- “누나랑 그때 과외…….”
- “관리도 못 한 게 어디서 행패 질이야.”
오늘 이지훈 때문에 미칠 것 같다. 고작 열아홉 핏덩이에게 관리 타령이라니. 소년은 무시 받는 느낌이 들었는지 자신의 허리는 백만 불짜리나, 팔자에도 없는 과외 덕분에 오래 앉아 있어 허리가 아프다 쏘아 붙였다. 때문에 병원 청구서라도 들이밀까 전화를 했던 참이었는데, 아저씨가 왜 자신을 무시하냐며 버럭 화를 내는 것이다. 불타오르는 맹수의 시선이 내게 박힌다. 드디어 발언권이 생겼다.
- “내 제자야. 고등학교 3학년. 요즘 영어 과외 해.”
- “…….”
- “거짓말 아니야. 승관이도 알아.”
- “부승관은 아는데 왜 나만 몰라.”
실시간으로 듣고 있던 소년은 상황 파악 후 대차게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집순이도 남자친구가 있어요? 한 달에 몇 번 만나요? 달팽이관을 강타하는 열아홉의 호기심에 부글부글 화가 끓는다. 반대로 전보다 가라앉은 지훈은 자세를 고쳐 앉고 소년에게 다정함을 날린다. 어디선가 툰드라의 바람이 부는 것 같지 않니.
- “수험생.”
- “이 찬이거든요?”
- “수특은 다 돌렸냐.”
- “뭘 돌려요? 수투요?”
- “전화할 시간에 영어 스크립트나 봐.”
- “뭐래? 스크림을 왜 봐요?”
- “보니까 듣기도 엉망이고.”
- “와, 이 아저씨 인성 완전 엉망이네?”
- “네가 말할 자격은 없어 보인다.”
쓸데 없이 힘 빼는 건 자랑인가. 소년의 육두 문자를 제치고 지훈이 먼저 종료 버튼을 누른다. 뚝 끊겨버린 전화, 저장되지 않은 열 한자리 번호를 눈에 담는 이지훈의 독함에 할 말을 잃었다. 마치 또 하나의 적을 없앤 장수의 모습이다. 승리를 기념하듯 음악을 튼다. 블루투스 스피커에 웅장하게 울리는 그 노래는 Maroon 5의 ‘Sugar’. 첫 가사부터 자신의 마음을 대신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귀여운 질투쟁이.
I`m hurting baby, I`m broken down.
나 상처받았어 자기야. 무너져 버린 거야.
I need your loving, loving. I need it now.
난 너의 사랑이 필요해. 지금 당장 말이야.
- “영화 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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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밥 먹으러 갑니당. 다음화는 지훈이랑 데이트 해용 :) 아프지 말구 ㅠㅠ 힘내요 (하트 전 글 쓰고 독자님들과 만나는 일이 제 유일한 낙이랍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 목공풀보다 글루건을 더 많이 씁니다. 여주는 바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