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학창시절에 한국지리 '김도영'을 심어드립니다.
1.
나의 구원자 도영쌤을 처음 만난 건 그러니까 고3 개학하고 2주 뒤였을 거임. 가물가물한 척 하지만 사실 정확하다고 봐도 됨. 3월 21일 오전 10시 13분... 내 인생에서 가장 뜻 깊은 시간이라 다이어리에 표시도 해둠;;
매년 기념할 거야. 도영쌤이 좋아하는 치즈케이크에 초 꽂고ㅠㅠㅠㅠㅠ
"안녕, 얘들아. 나는 김도영이라고 하고. 원래 너희 반 한국지리 담당인데, 집안 사정 때문에 이 주 정도 늦었어.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보다 어색하겠지만, 잘 지내보자."
하면서 웃는데 당신... 내 월요병을 낫게 했어... 이번 여름이 유난히 덥다면 그건 김도영의 미소에 지구가 흥분해서 그래. 지구온난화의 주범 그거 도영쌤...
그래서 난 결심했지. 내 고3 최고 성적을 담당할 과목은 한국지리라고. 한국인이면 지리 정도는 알아줘야지. (사회 젬병)
"영호 쌤한테 여쭤보니까 아직 부장은 안 뽑았다며. 그래서 지금 뽑을까 하는데. 할 사람?"
말 끝나기가 무섭게 손 들었는데 난 솔직히 애들이 생기부 생각해서 좀 들 줄 알았다고; 근데 왜 나만 들어? 존나 수치스러웠는데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어 그게 바로 사랑의 시작...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하는 폼생폼사의 삶...네, 아무말입니다. 지나가주세요.
"야, 너네 너무하다. 어떻게 한 명밖에 없냐? 이름이 뭐야?"
"이름이요... 성이름..."
"그래, 이름이. 그냥 숙제 걷어오고 수행평가 공지하고 그런 거 하는 거야. 뭔지 알지."
"알다마다요..."
엄마, 나 지리학과 갈까. 어떻게 생각해.
2.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쌤!"
밑도 끝도 없는 덕질 하고 있지 뭐...
"이름이 너 한국지리만 공부 한다더니 점수 무슨 일이야?"
"...보셨어요?"
"네 것만 친히 먼저 봤다."
김도영 이 잔망스러운 사람...ㅜㅜㅜㅜㅠㅜㅜㅠㅜㅠㅜㅠㅠㅜㅠ 국가에서 김도영을 행복부장관으로 임명해야 하는 거 아닐까 얼굴만 봐도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데 그런 능력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드물잖아. 아무튼 드물어.
"그게 공부 열심히 했는데 선생님 얼굴만 보면 계속 개안을 해서 잊어버려요. 선생님 덕분에 늘 새 사람으로 삽니다."
차마 그게 제일 잘 본 거라는 말은 못 하고 태연하게 웃었음. 다른 과목 점수는 못 보겠지. 누구든 그걸 저 상콤하니 사랑스러운 눈동자에 그 점수들을 담기게 한다면 죽음 뿐.
큽. 내가 웃는다고 그렇게 따라 웃으면 또 개안할 수밖에 없잖아...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저 사람은 왜 내가 사랑할 것처럼 생겼지...
"진짜 말이나 못 하면."
"말이라도 잘 하는 게 다행이죠. 그리고 사람 보자마자 성적 얘기 하는게 더 너무한데요. 전 할 말 있어서 온 건데."
"너 할말이야 뻔하지 뭐. 오늘도 좋아해?"
세상에나... 그렇게 뽀얗고 새침한 얼굴로 묻는 거 반칙. 내가 세상의 끝까지 당신과 함께하고 싶잖아. 우리 나중에 선생님과 찰떡인 해왕성에서 결혼식을 올려요 엉엉. 한국지리고 나발이고 우주지리를 배우는 배우자가 되자 김도영ㅠㅠㅠㅠㅠㅠ
"내일도 좋아할게요 선생님. 당장 눈 앞에 혜성이 떨어져도 선생님만. 뭔지 알죠?"
도영쌤이 아이돌 했으면 덕후 살상 각인데. 그랬으면 난 학교를 자퇴하고 저 얼굴만 보러 다녔을 거야. 선생님이라 감사하다 미친... 이렇게까지 인생에 도움 되는 사람은 처음 만나봄.
3.
난 도영쌤도 좋고, 도영쌤 목소리도 좋고, 얼굴도 좋고, 한국지리 시간도 좋고, 도영쌤이 있는 장소의 공기와 먼지까지 다 좋은데.
"그래서 감입곡류하천은..."
한국지리가 싫어 sibal... 존나 잠이 오는데 안 자겠다고 약속해서 그럴 수도 없어. 이래서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라니까여. 아니 근데 저 얼굴보고 누가 잘 것 같다고 당당히 말해? 데려와 미친. 폭풍때찌임.
내 의지랑은 상관 없이 자꾸 눈이 감겨서 송곳으로 허벅지라도 찔러야하나 고민하는데, 그래 고민을 했는데 그러다 잠들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ㅎ 머리에 뭐가 턱 올라오길래 존나 화들짝 놀라서 깸. 욕 안 한 게 다행이긔...
"잠은 집에서 자거라, 부장아."
"선생님 목소리가 너무 감미로워서 그만..."
"그래, 그러셨겠지. 왜 아니겠어."
"아하하..."
"수업 필기해서 노트 검사받으러 와."
또잉... 당신을 사랑한 죄 치고는 너무 가혹한 벌인데 그거... 당신의 그 별처럼 반짝이고 호수처럼 깊은 눈에는 저 칠판에 빼곡히 적힌 필기와 대비되는 내 공책이 보이지 않는 거야...? 내 공책은 당신 피부처럼 하얗기만 한데...
"아~ 애들 거 다 걷어오라구여?"
제발. 제발 이번만 넘어가 주세요.
"아니, 너만 오라고요. 너만."
큽... 와중에 너만 오라는 말에 설레버린 나는 정말이지 김도영의 늪에 이미 머리까지 담궈서 이제 헤어나올 수가 없어. 원래 늪이랑 갯벌은 나오려고 할 수록 더 빠지는 거잖아요.
4.
아무튼 그래서 가게 된 교무실은 얼마나 찬바람이 쌩쌩 불었게요? 우리보고는 에어컨 온도 조절하라고 하면서 교무실은 시원하게 두다니...ㅂㄷㅂㄷ 그래도 우리 도영쌤 이 뜨거운 날씨에 덥지 않게 일해서 다행인 환경이구먼. 우리학교 최고. 교장선생님 노벨평화상 받아야 함;
"선생님 저 왔는데요..."
"어, 그래. 여기 앉아."
그러면서 의자를 내어주면 우리 대화가 길어질 것 같고, 너무 날 생각해주는 것 같고,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 보는 건 처음이라 심장이 아픈데 부정맥 보다는 사랑에 가까운거겠지 이거.
슬금슬금 의자를 당겨서 가까이 앉는데 그걸 또 기가 막히게 눈치 채고 뒤로 가라고 하는 게 나의 한국지리 선생님이시다... 한국이 아름다운 이유는 도영쌤이 한국지리를 가르치기 때문임...
"노트."
"예?"
"노트 달라고."
"아, 여기..."
반장 노트 급하게 빌려서 기계처럼 옮겨 쓴 필기가 빼곡한 공책을 건네자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다이나믹한 표정변화를 보여주는 도영쌤이 너무 귀여워서 저는 웃음 참느라 허벅지를 꼬집을 수밖에 없었다고요. 아니 자기가 쓴 거 그대로 필기한 건데 저렇게 진지하게 보는 건 뭐야 너무 섹시해...
"넌 글씨도 이렇게 잘 쓰면서 왜 필기를 안 해."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선생님 목소리가..."
"너 계속 그렇게 자면 부장 자격 박탈 시킨다."
앙대...! 안 그래도 요즘에 내 뒤에 앉은 시준희가 계속 한국지리 부장 자리를 노리는 것 같다고요ㅜㅜㅠ 정신 병이 아니라 진짜 그랬다니까 학기 바뀌면 부장 새로 뽑냐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그랬는데 그런 말을 하면 내 심장이 쿵 떨어져 안 떨어져.
"선생님 그거 진짜 오바..."
"그러니까 열심히 해."
"진짜 바뀌면 안 돼요... 한 번 부장은 영원한 부장... 한부영부... 네?"
"그냥 한 소린데 또 진지하게 받는다. 안 바꿔, 안 바꿔. 평생 네가 부장 해."
"선생님 지금 저랑 평생을 약속하신 거예요?"
내가 원래 눈물이 잘 안 나는 사람인데... 날 감동시키다니.
감동 받았다고 눈물 닦는 척 하니까 부담스럽다고 빨리 가래 ㅋㅋㅋㅋㅋㅋㅋ 뭐야... 존나 귀엽기까지 해... 미친... 도영쌤 매력 적는 게 서술형으로 나오면 맞추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거임. 무한해서.
"아, 쌤. 저 진짜 안 잘게요. 필기 안 하는 애들 등짝을 때려서라도 하게 만들게요!"
"본인이나 잘 하세요."
그러면서 쉬는시간 끝나기 전에 가라고 막 그러는데 이상하다 왜 발이 안 떨어지지 이건 필시 교무실 바닥이 바퀴벌레 끈끈이로 되어있기 때문일 거다. 확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