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과외알바 경험에 '나재민'을 심어드립니다.
1.
때는 바야흐로 고딩들의 방학이 찾아올 때였음. 재민이네 어머님께서 수업 끝나고 상담을 하자고 하셨고... 나는 드디어 내가 잘리나보다 했습니다. 밥줄이 끊기는구나...
"큰 일은 아니구요, 이제 재민이가 방학이니까 선생님만 괜찮으시면 과외일수를 늘렸으면 해서요."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요. 인류가 멸종하지 않은 이유는 극강의 생존력 때문이시다 하하하. 절대 돈 더 받아서 신난 거 맞구요. 돈이 최고야 늘 새로워 짜릿해.
나도 바쁜 거 하나 없는데 안 된다고 할 거 뭐 있습니까. 안 그래도 이번 달에 엄마 생일 때문에 돈 필요한데 신의 가호가 늘 재민이 집에 함께하기를...
근데 제가 너무 신난 나머지 어머님과 대화를 마치고 시작한 수업에서 재민이한테 그 얘기를 전달하는 걸 까먹었다 이거지요. 물론 내가 말 안 해도 어머님이 잘 전달 해주시겠지만서도...
"오늘따라 집중을 못 하는데."
"엄마랑 무슨 얘기 했어요?"
"응? 뭐가, 아."
그제서야 생각이 나서 주절주절 말해주니까 애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거임; 내가 뭐 좋은 소리 한 것도 아니고 과외 더 많이 한다고 하면 싫다고 드러눕는게 평범한 학생 아니니? 나재민은 애초에 평범함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걸 이렇게 종종 잊는다 내가 그래...
"아, 선생님 잘리는 줄 알고 걱정했어요."
"내가 수업을 그렇게까지 개판으로 하진 않잖아..."
"아니, 선생님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너 왜?"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말을 하다 마는 거지만 우리가 앞으로 더 자주 오래 봐야 하기 때문에 참을게. 절대로 널 못 이길 것 같아서가 아니라 내가 쟤보다 어른이고 해서 참는 거임 진짜로.
"근데 너 아까부터 왜 그렇게 웃어?"
"이제 선생님 매일 볼 수 있는게 좋아서요.
나재민이 나보다 미적분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그 날 내가 전국민에게 치킨을 쏘겠음. 진짜 맨날 허파로 박수치는 소리만 해 쟤는...
2.
그렇게 시작한 여름방학 맞이 매일과외는 나를 늙게 했음. 왜냐고요? 사실적으로 매일 같은 애랑 둘이 앉아서 머리 싸매고 씨름해야 되는데 안 늙는 사람이 어디 있읍니까. 안 그래도 여름이라 평소보다 두 배는 빨리 늙는 것 같은데.
"선생님 오늘 저랑 옷 커플티."
집에 있는 분홍색 옷을 다 불 질러야 되나...
자기랑 똑같은 분홍색 옷 입었다고 저렇게 웃으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정말 너무 고민이 돼서 그냥 무시하고 자리에 앉는게 나의 최선임. 내가 성격이 더러운 게 아니라 솔직히 그렇잖아 안 그래요? 어머 정말 커플이네 오호호 같은 건 썸타는 사이에나 하는 말이고요.
"오늘은 장난하면 안 돼. 진짜 중요한 문제만 풀 거야."
물론 구라임. 수업 패턴은 어제랑 비슷한데 그냥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오늘도 내가 나재민한테 말려서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엄마 난 다 자라려면 멀었나봐 열아홉한테 휘둘려서 가끔 정신을 못 차리곤 해 흡.
"장난 아닌데."
"아니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할 필요는..."
"저 한 번도 장난으로 얘기한 적 없어요."
갑자기 웃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무섭잖아. 나 겁 개많단 말이야ㅠ 우리 집에 고도리(강아지임)가 왜 있는 줄 알아?ㅠ 혼자 자기 무서워서 있는 거야 내가 그 정도로 겁쟁이란 말이야...
"매번 말할 때마다 심장이 얼마나 떨리는데."
아. 엄마 아마 이번 여름방학 매일과외는 망한 것 같아. 나한테는 저 시무룩한 고딩을 이길 힘이 개미 페로몬만큼도 없어... 생일 선물은 내년에 두 배로 줄게...
3.
과외라는 건 아무래도 둘이서 꼭 만나서 해야 하는 것이라 이렇게 갑작스레 중요한 일이 생기면 그것을 어머님께 전달하기 까지는 아주 많은 용기가 필요함.
재민이한테는 대신 좀 전해주세요 하며 웃는 나를 어머님은 이상하게 보지 않으셨지... 솔직히 여우주연상 급의 연기였다. 입 앞까지 재민이한테 직접 얘기하면 또 휘둘릴 것 같아서요가 나왔지만 난 태연하게 잘 해냈다고! 깔깔
근데 그렇게 피하면 뭐합니까...? 바로 전화가 이렇게 오는데요. 요즘 애들은 정말이지... 너무 스마트 하다니까.
결국 주절주절 변명하는 건 또 나야. 나는 이 세속적인 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유능한 변명 봇이다 시바.
"내가 그 날 일이 좀 생겨서, 응. 너희 집까지 갈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올 시간이 없는 거예요?"
"응. 미안해, 다음에 보강 해줄게."
"올 시간만 없는 거죠?"
그렇게 말하는데 뭔가 뒷골이 서늘하니 느낌이 구린게 나재민 머리에 전구가 하나 켜진 것 같기도 하고 애 목소리가 왜 저렇게 텐션이 높아졌는지 누가 설명을 좀 해주세요.
"어, 그렇긴 한데... 왜?"
"그럼 제가 갈까 해서요. 선생님한테."
다비치는 천재야. 슬픈 예감은 다 맞는단 노래 가사도 쓰고...
4.
그래서 내가 우리 집에 나재민을 들인 것이다 이말입니다.
청소하느라 허리 부러지는 줄 알았고요? 잃어버린 줄 알았던 머리끈만 스무 개는 찾은 것 같음. 고마워 재민아 나의 한 시대를 장식했던 아이들을 다시 만나게 해줘서..^^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지...
우리 집 구경하는 나재민 눈이 너무 빨라서 서둘러 자리에 앉히는 것도 나의 몫이요, 그 이후에 수 많은 말들을 받아치는 것도 나의 몫이니 마마 어찌 제 인생이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혼자 살면 안 무서워요? 선생님 겁도 많으면서."
"어, 그래서 강아지 키워. 지금은 친구 집에 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강아지 보고 싶다고 하는 건 또 영락없이 애라서 웃음이 난다고요. 이게 설마 제가 단단히 미쳐있음을 뜻하는 건 아니겠죠. 저 인생을 그렇게 가볍게 살진 않았습니다. 범죄자가 될 순 없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과외 첫 날 공부 할 때는 쉬는 시간이 꼭 필요한 법이라며 나를 위해 10분씩 꼭 쉬었던 과거의 나를 원망해. 10분이 10시간 같은 기분을 어디 사는 누가 알겠어. 도봉구 사는 제가 압니다.
그냥 두런두런 떠들다보면 시간이 가겠지 싶어서 그냥 대답만 하고 있는데
"근데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저 눈 밑에 붙은 속눈썹 하나가 너무 거슬린다 미친... 집은 그렇지 않지만 저 생각보다 되게 깔끔하거든요. 믿어주세요. 이게 개수작 그런 게 아니라
"오늘 집에 일이 좀... 어, 잠시만."
제가 못 참아서 직접 떼준 겁니다. 분명히 말해줬으면 어디 붙은 건지 못 찾거나, 나재민이라면 떼어달라고 했을 수 있다. 그럴 수 있어 충분히.
손에 있는 속눈썹은 그냥 후 불어서 날려버리면 그만이지 싶어서 날려버리고 나재민이 조용하길래 봤는데 날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혹시 내 얼굴에도 뭐가 묻어있나 했음. 뭐 묻은 애가 속눈썹 붙은 애 나무란 건가요 지금.
"...왜 그래?"
"사람 설레게 하는데 뭐 있어요, 선생님은."
"또 뭐가."
"간질간질한 거요. 그거 사람 잡는데."
"..."
"죽겠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