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
written by. Thames
그렇게 새벽에 아이에게 거친 태도로 일관한뒤 나의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계속 뒤척뒤척, 울던 아이가 생각나서 잠에 들다가도 깨버리고 속상했다. 베개를 다리사이에 끼우고는 침대에 엎드려서 잠을 청했지만 곧 머릿 속에서 떠오르는건 잘못했다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여린 피부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느라 눈가가 짓물렀을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일단 피곤했다. 너무 신경을 많이 썼다.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아 미칠거같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것 같아서 손가락으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커튼으로 가져진 창밖이 푸른빛을 띄는것으로 보아 아침인듯했다. 결국 4시간 동안을 그냥 누워서 보냈다. 아아-목소리를 내어보았지만 역시 원래 낮던 목소리가 더 낮아서 내 귓가와 머리를 울렸다. 오늘 백현이는 학교에 보내지 않을것이다. 자주 아픈 아이였고 학교도 보내기싫었지만 부모님과 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백현이는 예술고등학교 피아노과 학생이었고 수준급의 피아노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꼭 저처럼 여리고 부드러운 곡들을 자주 치는 백현이 때문에 렌트한 펜트하우스에는 방음처리를 완벽히 갖추어 놓은 피아노방이 따로 존재했다.
저혈압에다가 천식까지 곁들여 살기 아주 힘든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아이에게 아침잠은 최대의 적이었다. 그래서 항상 혼자서 일어나는 날은 일년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이의 방으로 들어가서 몸을 벽쪽으로 돌려서 잠을 자고 있는 아이를 무릎에 눞히고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동그란 이마에 차가운 입술이 닿이자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 정도로 일어날 아이였다면 처음부터 깨우러 와주지 않았을것이다. 그대로 눈, 코, 입, 볼에 차례대로 키스를 하고 아이를 안아들어 어린아기를 달래듯 귓가에 속삭였다. 백현아, 일어나야지.
"백현아, 일어나야지."
".........."
"일어나서 죽먹고 다시 자야죠, 그래야 형이 걱정 안하지."
".........."
조그마한 눈꺼풀이 떨리는게 눈에 보였다. 틀림없이 내가 새벽에 약간 화가 난것을 의식하고 있는것 같았다. 그럴때일수록 더욱 다정하게 대해줘야한다는걸 알기 때문에 거실 소파에 아이를 눕히고 이마에 입술을 대어보았다. 아직도 머리가 뜨거웠다. 열 한번 오르면 잘 안내리던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매우 요리를 잘하는 편이었다. 고등학교때부터 자취를 한 탓도 있겠지만, 2년 전 백현이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아픈 아이를 위해 여러 보양식을 잘 챙겨주다보니 어느새 요리의 달인이 되어있었다. 가끔씩 어머니께서 전화하셔서 밑반찬을 보내달라고 하실 정도니 말 다했지뭐. 내 요리 중에서 백현이가 가장 좋아하는건 새우그라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을 만들어야 했다. 쇠고기죽, 전복죽, 버섯죽 등 여러 죽을 만들어 줘봤지만 입이 짧아서 한그릇도 채 다 못비우는 아인데. 뭘 끓여줘야 좋을까. 야채죽. 육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에게는 야채죽을 끓여줘야겠다. 저번에 한번 끓여줬을때 그나마 적게 남겼던데 야채죽이었다. 생각을 끝낸 나는 소파에 백현이를 뉘이고 그 위에 춥지 않게 모포를 덮어주었다. 방에다 놔두면 또 혼자 울고 나 찾을게 분명하니까 내가 보이는곳에 아이를 눕혀둬야한다.
냄비에 고슬고슬한 밥을 적당량 퍼서 넣은뒤 물을 부어서 펄펄 끓이고 있었다. 아픈데 간을 하면 건강에 별로 좋지않겠지 싶어서 채소에도 밥에도 간을 하지 않았다. 여러가지 예쁜색깔로 섞인 채소들을 잘게 썬뒤 냄비에 한번에 부어넣으니 치이익- 하며 타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주걱을 이리저리 휘둘러 눌어붙지 않게 잘 갈무리를 했다. 그릇에 옮겨담으니 소름끼칠정도로 딱 한그릇 분량이 나왔다. 트레이에 미지근한 물과 알약을 함께 얹어서 소파로 들고갔다. 저혈압 환자들은 일어나서 10분 정도를 그냥 멍하니 보낸다고 한다. 백현이가 꼭 그 유형이었다. 자신이 지금 깨어있는지 자고있는지도 모르고 숨을 쉬는지 안쉬는지도 모르고. 소파 옆 콘솔 위에 트레이를 올려다두고는 소파옆에 앉아 아이의 뺨에 코를 박았다. 애기냄새난다 우리 백현이.
"현아, 형이 야채죽 만들었어."
".........."
"먹어야지, 그래야 약먹지."
"....응...."
"손으로 숟가락 들고, 떠서 먹어."
"..손에...힘이..안나.."
아프면 투정이 늘어나는 우리 아이는 아직 덜떠진 눈동자로 먹여달라는 뜻이 함축되어있는 문장을 내뱉었다. 나는 할수없이 숟가락을 들고 적당량을 퍼서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작은 입이 묽은 죽을 씹기위해서 오물거리는것을 보며 새벽에 잠시 감정조절을 못한것을 다시 한번 후회했다. 어떻게 화를내,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예쁜데 왜 형 속을 썩이니, 백현아. 핏기가 싹 가셔서 창백해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반 정도 비운 그릇을 콘솔 위에 올려다 두었다. 아픈데 이정도 먹으면 많이 먹은거지. 백현이는 먹고나서야 조금 말할 기운이 생겼는지 내 허벅지 위에 앉아 내 목에 얼굴을 부비며 아기가 옹알이를 하듯 옹알댔다. 싱거워써...근데 형이 만든거라서 다 먹어써...나 잘했지...정신없이 내뱉는 아이의 발음새는 말투에 귀여워 미칠것 같았다. 으응-고개를 들어 나를 보게하자 강아지같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때문에 아픈 몸에 금방이라도 박아넣을수 있을것같았다. 하지만 이 몸상태로는 도저히 못할짓이었기 때문에 콘솔 위에 있는 물을 아이의 입에 흘려보내고 알약을 넣어서 삼키게 하는 것으로 욕구를 대신했다. 욕구에 비하면 너무나도 사소한 것이었지만 백현이가 건강하다면, 그걸로 된것이었다.
"백현아, 이제 코 자자. 형 오늘 백현이가 아파서 월차썼어. 그래서 회사안가."
"...그러지마..."
"왜, 너보다 중요한거 어딨어."
"나때문에 결근하고 그러지마, 그런거 싫어."
항상 백현이는 내가 자신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것을 싫어했다. 자신때문에 나의 삶이 불규칙적으로 변해가는걸 싫어했다. 하지만 나의 삶에서 가장 규칙적이고 변하지 않을것은 변백현이었다.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안고, 아이를 만지는것은 이제 나의 규칙적인 일과가 되었고 아마 영원히 변하지도 않을것이다. 아이를 받아들일때 아이의 인생도 함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 정도의 능력이 있으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백현이는 그것을 불편해했다. 괜찮대도.
"그래, 다음부터는 안그럴게. 백현아 형 침대에 누워서 자자."
".........."
저도 약효가 돌아 잠이 오긴 왔는지 가만히 안겨오는 아이를 내 침대에 눕혔다. 퀸 사이즈의 침대는 백현이와 나를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만한 크기였다. 오늘 하루동안은 꼭 눈앞에, 손닿으면 바로 닿을곳에 놔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얀 이불에 묻혀서 고르지못한 숨소리로 잠을 청하는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올려주며 입에 살짝 입맞춤했다. 곧있으면 해외출장을 가게 될것이기 때문에 좀더 많이 봐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백현이는 4일을 내리 앓았다. 그때문에 나의 해외출장은 뒤로 미뤄지게 되었고 마침내 해외출장을 떠나게되던 그날 백현이는 공항까지 와서 나를 배웅해주었다. 한손에는 여권과 보스턴행 비행기티켓을 들고 한손으로는 백현이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그렇게 헤어졌다. 아이의 세끼는 모두 아주머니가 챙겨주시리라 믿고 일주일간의 긴 출장의 시발점인 비행기 퍼스트클래스에 내 몸을 맡겼다. 기억은 안나지만 아주 달콤한 꿈이었다.
아 어제쓰다가 다 날아가가지고ㅠㅠㅠㅠㅠㅠㅠ헣
지금에서야 올리네요, 기다리게 해서 정말죄송합니다ㅠㅠ
궁금하신 점은 바로바로 댓글에 질문해주시면 스토리에 차질이 없는 이상은
다 대답해드릴수 있구요, 댓글달아주신 스무분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중편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7편정도 생각하고 있구요, 빠르게 완결낼 생각이니까
너무 기다리지 않으셔도 될것같습니다! ㅎㅎ
리퀘스트는 언제나 댓글로 받습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