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물들다
혼잣말 셋 _ 보름달
“일어났어?”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다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너의 미소. 모든 게 완벽한 아침이었어. 내가 사랑하는 네가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이거 꿈 아니지?”
하고 물으니, 아직 잠에서 덜 깬 탓에 두 눈만 끔뻑이고 있는 내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들려온 너의 다정한 목소리.
“꿈 아니야. 이거 꿈 아니고, 나 시우도 아니고, 재환이 맞아.”
“진짜?”
“응, 진짜. 그래도 못 믿겠으면 내 볼 만져볼래? 자, 여기. 오랜만에.”
“콕. 김재환 진짜 맞네.”
“흐흫. 거봐. 나 맞다니까.”
특유의 웃음소리를 작게 흘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네 눈빛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나 몰라. 우선 드는 안도감과 행복, 그리고 뒤늦게 밀려들던 미안함과 죄책감까지. 차마 네 눈을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겠더라. 어젯밤에 분명 서로 미안해하지 않기로 너와 약속해놓고 자꾸만 그런 생각만 가지는 내 자신이 너무 미웠어.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고, 너와 행복해질 일만 남았는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암흑뿐이었던 그 시간의 연장선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무 말 없이 내가 먼저 입을 떼기를 기다리고 있던 너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어.
“나 조금만 더 자도 돼? 너무 졸려.”
사실 하나도 졸리지 않았는데 말이야. 너도 아마 알고 있었을지 몰라. 너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모른 척해줘서 고마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로 나가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어. 언제 저렇게 어른스러워졌지.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너는 내게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남자친구였거든. 그런 네가 어느 순간 너무 성숙해져 나타난 거야. 물론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아. 그래서 괜히 마음이 아팠어. 내가 괜히 천진난만했던 너를 망가뜨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방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 네가 문 닫아줄까? 하고 묻길래 그냥 열어두라고 했어. 잠들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문이 닫히고 내가 방안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 괜히 무서운 기분이 들 것 같았거든. 그러자 알겠다는 대답 뒤에 네가 덧붙였던 말 기억나?
“네가 다시 자고 일어나도 나 여기 그대로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자. 꿈에 내가 또 나오면 반갑다고 인사 꼭 하고.”
분명 네가 웃으면서 건넨 말이었는데, 그 말이 왜 이렇게 슬프게 들렸는지 모르겠어. 그냥, 네가 그 2년간 얼마나 걱정했을지, 또 우리가 다시 만난 이후에는 널 알아보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얼마나 속상했을지 짐작이 가서 그랬나 봐. 네가 나간 이후에 내가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방문을 등지고 누워있었던 것 같아. 그냥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거짓말을 했던 건데, 막상 돌아누우니 아무 생각도 안 나는 거 있지? 차라리 아까 일어나서 너랑 떠드는 게 나을 뻔했다니까. 거짓말한 게 미안해서라도 아무 생각이나 해야 할 것 같아서 너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려봤어. 진짜 풋풋했더라, 우리. 그때를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패기가 나왔나 몰라. 잘 모르는 사람이랑 카페에서 어쩜 그렇게 신나게 떠들 수 있는지.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우리 다시 만났을 때도, 그러니까 내가 기억을 잃은 이후에 너를 처음 만났을 때도 카페 갔던 거 알아? 카페가 무슨 만남의 장소야, 그지. 그 생각을 시작으로 너와 여기저기 놀러 다녔던 기억들, 너와 함께한 나의 첫 생일, 그리고 너의 생일, 함께 봤던 겨울 바다, 뭐 별별 기억들이 다 떠오르는 거야. 왜 이 기억들을 더 빨리 불러오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우울해지다가도 행복했던 너와의 시간들이 덕에 슬픈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 만나기만 하면 사소한 것들에도 깔깔대며 웃던 우리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더라. 그러다 괜히 너는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져서 뒤척이는 척하며 문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세상에.
“이여주.”
너랑 눈이 딱 마주친 거야. 팔짱을 낀 채 장난스레 화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너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막 벅차오르는 기분이 드는 거 있지? 아, 나 정말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다시는 너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달까.
“너 하나도 안 졸리지 지금.”
“…들켰네.”
“거짓말쟁이.”
“나 안 자는 거 언제부터 눈치챘어?”
“네가 더 잔다고 했을 때부터.”
“근데 왜 순순히 자라고 했어?”
“네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진 않았을 테니까.”
이거야.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 말이야. 이 세상에 너만큼이나 나를 이해하고 보듬어줄 사람이 있을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다 믿고 받아들일 사람은 너 말고 없을 것 같은데.
“재환아.”
“왜, 이 거짓말쟁이야.”
“삐졌어?”
“안 삐졌어, 이 거짓말쟁이.”
“삐졌네, 삐졌어.”
“알면 얼른 풀어줘야지, 거짓말쟁이 이여주야.”
일부러 입을 삐쭉 내밀고는 화를 다 풀어줄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 말하는 너는 왜 그리 귀엽던지. 그제야 실감이 나더라고. 맞아, 내 남자친구가 원래 이렇게 귀여운 사람이었지, 하고.
“화 안 풀어줄 거야? 나 아직도 여기 있는데?”
“어. 너 지금 너무 귀여워서 그냥 그대로 놔두려고.”
“와, 거짓말쟁이에다가 완전 심술쟁이네.”
“그걸 지금 알았어?”
“아 뭐야~ 나 화낸다!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야, 나.”
나는 가끔 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너 같은 사람을 만났나, 하는 생각. 기억을 잃기 전에도 그랬고, 모든 걸 겪고 난 지금은 더더욱.
“재환아.”
“뭐.”
“어? 그냥 말하지 말까?”
“아니. 왜 불렀는데?”
“올라올래?”
“…어?”
“거기 그만 서 있고 이리 와서 나 좀 안아주라. 내가 거짓말쟁이에다가 심술쟁이라 싫으면 말고.”
기다렸다는 듯 침대 위로 올라와 나를 빈틈없이 꼭 껴안아 주는 너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가 너 안아주고 싶었던 건 어떻게 알고.”
“다 보이지. 그러려고 삐진 척 한 거 아니었어?”
“역시 나를 너무 잘 알아. 가끔 보면 진짜 내 생각을 읽는 게 아닌가 싶다니까, 아주.”
네 품에 안겨있으면 항상 풍겨오는 향이 있어. 네가 뿌리는 향수 때문인지 몰라도 뭐라 정확히 이름 붙일 수 없는 달콤한 향 말이야. 네 가슴팍에 얼굴을 대고 가만히 있으니 어김없이 그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더라고. 그 향만 맡았다 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더라? 그 향이 난다는 건 네가 가까이 있다는 뜻이라서 그런가.
“여주야.”
“응?”
“나 이렇게 아침에 눈 뜨자마자 너 보고 이렇게 너 안고 있는 거 너무 좋은데,”
“좋은데?”
“우리 그냥 같이 살까?”
“갑자기? 나 지금 프러포즈 받은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너 그냥 여기서 지내면 안 되냐구.”
그땐 너무 갑작스러워서 대답을 제대로 못 했던 것 같은데, 사실 엄청 기뻤어. 나도 밤마다 너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그 시간이 너무 아쉬웠거든.
“나는 당연히 좋은데, 아마 안 될걸. 우리 집 난리나.”
“부모님은 내가 설득해 볼게. 나 할 수 있어!”
“몇 번이나 뵀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해? 우리 아빠 진짜 엄청 엄한 분이셔.”
“나 아버님이랑 둘이 술 마신 적도 있어, 여주야.”
“뭐? 언제? 나 몰래?”
“응. 우리 제주도 여행 전에. 말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아아. 우리 아빠 술 엄청 잘 드시는데 너 괜찮았어? 술 잘 못하잖아.”
“절대 취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마셨더니 꽤 멀쩡하던데?”
“대단하네. 그럼 다음에 또 우리 가게 도와드리러 온 척하면서 슬쩍 말해보자. 난 그래도 안 될 것 같은데.”
“에이, 나만 믿어. 내가 아버님 잘 설득해 볼게.”
도대체 우리 부모님께 얼마나 잘 보인 건지, 너는 기어코 아빠에게까지 허락을 받아냈고, 지금 내 옆에 앉아 있어.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던 네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내 손을 덥석 잡네? 또 무슨 일이지.
“여주야, 오늘 슈퍼문 떴대. 빨리 보러 나가자.”
“진짜? 대박. 요즘 달 보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생각하는 기쁨을 공유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인 것 같아. 다들 맨날 똑같은 달 사진 찍어봐야 뭐 하냐며 핀잔을 줄 때 이렇게 먼저 내 손을 이끌고 달을 구경하러 가자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와, 오늘 달 진짜 크다. 크기도 크기지만 엄청 노래! 너 아니었으면 못 볼 뻔했네.”
“그러니까. 여주야,”
“응?”
“내가 여기서 뽀뽀하면 싫어할 거야?”
“진짜 너는, 전생에 뽀뽀 못해서 한 맺힌 귀신이냐?”
“…싫으면 안 할게.”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니고. 오늘은 달이 예쁘니까 봐주는 거야.”
“그러면….”
“또 뭐.”
“뽀뽀만 돼? 다른 건 안 되고?”
“…알아서 잘 해. 어차피 뽀뽀만 할 거 아니었으면서 새삼스럽게 묻지 말고.”
“분명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
“뭐해. 얼른 눈 감아야지.”
그렇게 달빛 아래에서 내게 부드럽게 입 맞추던 네가 건넨 한 마디.
“나는 하늘에 뜬 초승달이 보름달이 될 때까지 너를 생각해. 네가 달을 좋아한다고 말한 그 날부터 오늘은 달이 어떻게 떴나,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습관이 됐거든.”
“나도 뭐 하나 말해줄 거 있는데.”
“뭔데?”
“나 이제 초승달보다 보름달을 더 좋아하게 됐어. 이유는 아마 너인 것 같아.”
“응? 내가 왜?”
“네가 비어있던 내 초승달을 동그랗게 메워줘서.”
“너는 진짜…….”
“왜, 또 뽀뽀하게?”
“아니, 더한 거 하게. 달 충분히 본 것 같은데, 이제 들어갈까? 으으, 춥다 추워.”
아직 여름인데 춥긴 뭐가 추워. 핑계도 참. 아무튼, 온 우주에서 저 달을 뺀 것만큼 사랑해.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는 달을 굳이 뺀 이유를 묻겠지만, 그건 앞으로의 우리를 위해 비워두기로 하자. 나는 날이 갈수록 너를 점점 더 많이 사랑할 예정이니까. 나에게 와줘서, 그리고 머물러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재환아.
+ 이제 정말 '기억이 지나간 자리' 시리즈 끝!!!
우리는 금요일에 후기 및 메일링 공지에서 만나요:)
재환이도 여주도 앞으로는 행복만 하기를💓
++ 혹시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이 있으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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