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 다 모두 재생해주세여
01
소나기와 함께 온 고양이었다.
겨우 합격했다. 처음 대학교에 합격 조회를 할 때만 해도 청심환까지 먹었던 기억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입학을 했다. 잘난 것 하나 없던 내가, 대학생이 되었다. 네 살 터울로 먼저 대학에 들어간 오빠는 여적 복학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군대를 갔다오고 나서도 2학년의 꼬리표를 달고 사는 걸 보면. 더군다나 제 동생은 입학 준비한다고 아침부터 정신없어 죽겠는데 밤새 술냄새를 풍기고 온 오빠란 새끼는.
"야, 나 학교 가는 길 알려준다며!"
"있다 여덟시 반쯤에 내 친구 올거야. 성우랑 가."
언제는 친히 자기가 학교에 데려다주겠다고 해놓고선 고작 꺼내는 말이 저따구였다. 올 때 초코우유 좀. 숙취제거제도 하나 사다주면 좋고. 이름만 오빠일 뿐 그닥 오빠 같지도 않은 놈을 있는대로 째려보다가 본 시계는 이미 시침이 8을 지나 9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잠깐만 여덟시 반쯤에 온다고 하지 않았나. 난 오빠의 인생에 관심이라곤 1도 없는 사람이었다. 황민현, 이 놈이 어떻게 살든, 뭘하고 살든 무신경으로 일관한 난 무릇 우리 오빠의 의무를 대신 해주기 위해 온다는 오빠의 친구를 알 길이 없었다. 아홉시가 다 되갈 때 그런 걸 말해주면 되냐고! 결국엔 오빠를 때릴 수밖에 없었다. 등짝에 닿는 손자국 소리가 경쾌했다.
급한대로 아파트 현관을 향해 뛰어갔을 때 쏴아아-, 하는 빗소리가 들렸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나. 난 그런 소리 들어본 적이 없는데. 첫 개강이랍시고 입은 치마부터 구두가 쓸모 없어졌다.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하던데 지금 내가 그런 꼴인듯 싶었다. 다시 집으로 올라가야 될 것 같아 현관문 비밀번호 키를 누르고 있자 삐비빅, 하는 기계소리보다 더 먼저 날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너 민현이 여동생 맞지?"
"네?"
그러니까 소나기와 함께 온 고양이었다. 나는 문득 내 머리 위로 검은색 우산을 씌워주는 그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하도 안 나와서 나는 먼저 간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작게 웃는 입가를 따라서 볼우물이 생겼다. 말을 할 때마다 더 동그랗게 떠지는 눈도 그렇고 까만색 머리가 썩 잘 어울리는 것도 하나같이 저번에 길가에서 보았던 검은색 고양이를 닮아 있었다. 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 잘못이라고 하기엔 황민현의 부주의함이 있었지만 핏줄이었으니 먼저 사과하자.
"괜찮아. 우산 안 가져왔어?"
착한 사람이었다. 천성이 우리 오빠와는 매우 달랐는데 어떻게 친구가 되었지 싶었다. 다정함이 그득히 묻어있는 말투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산 하나를 가지고 나란히 걷고 있는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내가 걷는 복폭에 맞추어주는 것도 어색했다. 여중, 여고를 나와 여초과를 가는 나에게 남자를 겪을만한 교집합은 없었다. 스무살이 되고나서 처음 겪는 남자치고는 너무 이상적인 거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기도 그러는게.
"그럼 있다 수업 끝나고 나서 전화해."
데리러 갈게.
금세 내 폰을 가져가 자신의 번호를 저장했다. 뭐라 할 말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멍하니 있는 나를 재촉하면서 그가 내 어깨를 감쌌다. 내가 이렇게 열이 많은 사람이었나. 가는 내내 내게 닿는 시선이 부러 낯간지러웠다. 처음 느끼는 남자라 그래. 이성으로 만난 사람은 그가 처음이어서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고작 만난 지, 십 분도 안 된 사람에게 심장이 뛰어대는 것은. 별 의미도 없이 코 끝을 매만졌다. 걸어서 금방 도착하는 거리라고 그랬던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너무 먼 것 같았다. 자꾸만 닿아오는 그의 어깨가 신경 쓰였다. '내 친구 올거야, 성우랑 가.' 순간 오빠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생각났다. 성우, 성우라….
"있다가 봐."
인문관 앞에서 날 바래다 준 그는 손을 흔들었다. 그럼 성우 오빠의 성은 뭘까. 김성우, 강성우, 박성우?
이게 뭐라고 첫 대학교 생활에서 그의 풀네임이나 고민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의문만 남겨진 순간이다.
02
옹성우다.
"전화라도 하지. 많이 기다렸어?"
소나기와 함께 온 검은색 고양이를 닮은 성우 오빠는 옹성우라고 했다. 굳이 여기저기 묻지 않아도 그는 교내에서 유명했다. 연영과 과대, 옹성우. 웬만해선 혼자 아싸로 살자고 다짐하는 나와 달리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에 과대 정도까지 되었다고 하면 아마 내 예상컨데 그는 인싸일 것이다. 그것도 인싸 중에 인싸, 핵인싸. 연영과랑은 전혀 연관이 없는 내 학과까지 알려진 걸 보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걸. 하고 생각을 할 뿐이었다.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했고.
"아까 저도 기다리게 했는데요. 뭘."
그래도 김성우, 강성우, 박성우보다 옹성우가 훨씬 잘 어울렸다. 옹씨라는 성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지만 옹성우, 옹성우. 입에 착착 감겼다. 내 말을 듣던 그는 습관적으로 웃었다. 저희 오빠 때문에 죄송해요. 사실 오빠가 학교 데려다준다 해놓고 갑자기 술에 떡이 되어가지고선.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솔직히 수업을 듣는 내내 고민을 한 바로는 내가 만약 옹성우였다고 하면 황민현이든, 나든 매우 성가실 게 분명했다. 남의 동생을 학교에 데려다준 것도 모잘라서 이제 또 집까지 같이 가야 한다니. 가는 길에 우산을 먼저 사고 오빠를 보내줘야겠다.
"난 좋았으니까 사과 안해도 돼."
세상에. 누군가가 효과음을 넣어준다면 지금 내 머리 위로는 뾰로롱, 소리가 나야했다. 성우 오빠는 착한 게 병이라고 하면 중증이었다. 한낱 불쌍한 중생에게 오히려 괜찮다는 말을 저렇게 달콤하게 하는 사람이 어디있어. 내게 기울어진 우산 덕에 그의 왼쪽 어깨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차도의 안쪽으로 자연스레 날 이끄는 손짓도 그러다가 내 팔을 잡는 그의 손도 다 달콤했다. 문득 난 내가 그동안 모쏠이라는 점이 무척이나 감사했다. 내가 겪은 첫 번째의 이성이 이렇게나 완벽해서. 꼭 고등학교를 끝으로 그만두었던 덕질이라도 다시 할 수 있다면 난 당연히 두 팔 들고 할 것이다. 옹성우의 덕질을.
봄의 초입부터 쌀쌀한 날씨와 소나기는 아무래도 소나기가 아닌 것 같았다. 금방 그칠 줄 알았던 비는 밤이 되어서 새벽이 될 때까지 내리 내렸다. 봄비라면 봄비이고 때아닌 장마라고 하면 장마일 정도였다. 아, 빨리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원래 난 비라면 혐오라는 표현이 들어 맞을 정도로 싫어했다. 아니 싫어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날씨든 다 좋았다. 성우 오빠를 만난 뒤로 비가 내리는 날이고 화창한 날이고 나에게 있어 날씨는 언제나 '좋음'이었다.
'길은 한 번 봐서 잘 모르니까 이번 주까지는 같이 가자.'
나 어차피 너랑 강의 겹치는 것도 있거든. 해사하게 웃는 모습이 기억에서 잊혀지질 않았다. 침대를 거칠게 쳐대는 손길이 멎질 않았다. 그냥 뭐랄까. 성우 오빠를 생각하면 침대 뿐만이 아니라 아파트도, 지구도 다 부수고 싶어질 정도였다. 최애 덕질을 할 때도 이런 마음은 아니었는데. 이건 너무 현실감이 넘쳐서 그런가. 첫 인상은 좀 더 고양이를 닮아서 도도하고 친해지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모두 내 첫 인상이라는 선입견이었다. 그 다음 날, 다다음 날, 다다다음 날. 일주일 중에서 학교를 가는 날이 5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이번 주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짧았다. 성우 오빠를 만나는 날이 이제 딱 하루만이 남았을 땐 울고 싶었다. 현실감이라곤 전혀 없는 그를 현실에서 만나고 난 이후부터.
옹성우. 이 세 글자는 내 죽음의 메세지였다. 다잉 메세지. 아임 다이. 유 킬미.
03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을 푹푹 떠서 먹을 때마다 좋아함에 대한 걸 점쳤다. 내가 옹성우를 좋아하는 가. 이걸 깨닫는 건 너무 쉬운 문제였다. 근데 그가 날 좋아하는 가, 에 대해선 너무 고난이도의 문제였다. 내 선에서 풀 수가 없었다. 고삼 때 풀었던 수능 문제집보다 어려웠다. 그래서 난 지금처럼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뿐만이 아니라 학식을 먹을 때도, 신호등을 건널 때도, 계단을 오르고 내릴 때도 좋아한다와 아니다를 붙여서 고민을 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누군가 날 바다에 빠트린 것 같았다. 물을 흠뻑 먹는 것도 모자라 미처 너무 깊어서 발도 닿지 않은 그런 바다 속에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뱉어낼 때처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아야 했으니까.
엊그제. 그러니까 수요일 날 성우 오빠는 우리 집 바로 아랫층으로 이사를 왔다. 혼자 자취를 시작했다고 우리 오빠한테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 좋아할 때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의 두 가지 중 하나만이라도 충족이 되면 사랑에 빠진다고 하던데 난 이미 그가 내 아랫집으로 이사올 때부터 게임 오버였다. 바로 계단을 내려가면 그가 있었고 내 마음은 이미 그의 것이었으니까. 가끔씩 재활용을 버리는 날에 그를 만나면 뒷머리가 뻗쳐서 졸린 두 눈을 비비는 모습이 퍽이나 귀여웠다. 왜 꼭 고양이가 그루밍을 하는 걸 보는 것마냥. 하는 행동마다 안 예쁘고 안 귀여운 게 없었다.
"나 사실 오는 길에 고양이 주웠다?"
이번주의 마지막. 내가 학교를 성우 오빠와 함께 갈 수 있는 마지막 날, 금요일. 한참이나 아쉬워 가는 발걸음을 평소보다 더 늦추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고민 있어?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이라면 오빠와 함께 하는 오늘이 너무 아쉽다는 거고 고민은 오빠가 날 좋아해줄까, 가 고민이에요. 속에서 제멋대로 말들이 뒤섞였다. 하고 싶은 말은 굴뚝 같은데 또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없어서 가만히 그를 올려다 보고만 있었다. 요즘 고양이들은 집사들 마음도 해아려 준다는데 성우 오빠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그가 고양이었다면 내가 친히 두 손, 두 발 다 들고 집사가 되어볼 요량도 있는데. 물론 그가 날 간택해 줄 지는 모르겠지만.
"나 어제부터 고양이 키우게 되었어."
"고양이요?"
"응. 어제 길고양이가 하도 나 쫓아와서 데려왔는데 아직 애기인가봐."
작고 예뻐. 그는 두 손으로 제가 주워온 고양이의 크기를 재고 있었다. 저는 그런 오빠가 더 귀엽네요. 라고 하면 좀 그렇겠지. 고양이도 제 동족을 알아보고는 쫓아온 건가. 아니면 그의 미모가 길을 거닐고 있는 고양이마저 홀리는 것일까. 그래봤자 망상일 뿐인데 성우 오빠가 키우는 고양이가 마치 그를 닮은 검은색 고양이면 좋겠다. 골목 약국에서 본 그 작은 검은색 고양이처럼.
"우리집에 올래?"
"네, 네?"
"민현이가 너 고양이 좋아한다고 그래서."
"아…."
"바쁘면 괜찮아."
"아니요! 괜찮아요! 저는 너무 너무 좋은 걸요!!!"
그럼 집에 가기 전에 우리집에 있다가 가. 급하게 대답을 하는지라 목소리가 커졌다. 머쓱해져 뒷머리만 매만지고 있는 내 손을 잡는 그의 손이 느껴졌다. 몇 마디 정도는 더 클거라고 생각했는데 성우 오빠의 손은 나보다 꽤 많이 컸다. 내 손을 다 덮고도 남았다. 순간적으로 모든 피가 손에 집중되는 것 같았다. 손에 땀이 났던 적은 한 번도 없었거늘 유독 오늘은 땀이 날 듯했다.
그가 제 집의 도어락을 열자마자 성우 오빠의 발치로 오는 고양이가 있었다. 검은색 고양이. 약국 근처에서 거닐다가 본, 등에 작은 흉터가 있는 고양이. 그 고양이가 성우 오빠가 키우는 고양이었다니. 이렇게 말하면 안되겠지만 고양이가 고양이를 키우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 눈엔 그랬다. 그의 머리 위에 고양이 귀만 있다면 진짜 딱 고양이인데. 나는 이미 오고 가면서 내 손을 탔던 고양이를 안고선 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지금 얘라도 쓰다듬지 않으면 자칫하다간 성우 오빠를 쓰다듬을 것 같았으니.
"고양이가 ㅇㅇ 좋아하나보다."
"얘가 길냥이일 때 제가 밥 챙겨주고 그래서 그럴 거예요."
"어? 어디서 봤어?"
"하늘 약국이요. 거기 근처만 맴돌고 있어서."
신기하네. 어쩐지 사람을 잘 따른다고 했더니. 그는 고양이를 안고 있느라 현관에서 머물고 있는 날 제 집 안으로 이끌었다. 들어와. 깔끔하게 정리된 거실은 몇 개의 가구들을 빼놓고 대부분 하얀색이었다. 검은색과 하얀색 옷만 입고 다니더니 무채색 계열을 좋아하는구나. 갸르릉, 쓰다듬어 줄 때마다 작게 그릉거리는 고양이의 소리가 유일한 집 안의 소음이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사는 공간에 들어오는 건 색달랐다. 뭐라도 마실래? 하얀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묻는 말에 난 조용히 아무거나 주세요. 라는 말만 뱉었다. 오빠가 주는 거면 뭐든지 다 좋아요. 나는 차마 성우 오빠를 안을 수 없어서 거세게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까만 고양이를 품 안에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밝게 빛나는 고양이의 눈동자가 매번 날 볼 때마다 시선을 마주쳐오는 그를 닮았다. 여러모로 닮은 게 참 많구나. 무엇보다 미모 하나는 뛰어난 고양이처럼 검은색과 햐얀색. 아주 단조로운 색들도 성우 오빠 곁에만 가면 화려한 색채감을 자랑했으니.
04
나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강아지도 사랑스럽긴 매한가지였지만 유독 도도하면서도 또 간간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집사를 반겨주는 것이. 흔하지 않는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만 같아서 고양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성우 오빠를 좋아하는 건가. 그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그의 집에 있는 고양이를 더 예뻐했다. 원래도 예쁜 아이었지만 사람 손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난 뒤로 윤기나는 털도, 점점 커지는 몸집과 동시에 더욱 반짝이는 눈동자가 점점 예뻐졌다.
그리고 그맘때쯤 성우 오빠는 나에게 제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이번에 알바 시간 때문에 저녁 밥을 못 챙겨 줄 것 같아서.' 그러더니 친히 제 도어락 비밀번호까지 알려줬다. 0825. 자신의 생일을 따놓은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비밀번호를. 그에게 고양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무렵 난 뒤늦게 밀려오는 설레임으로 잠을 못 잤다. 성우 오빠와 같이 학교를 가는 금요일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가끔 지나가다 만나는 이웃집,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비밀번호를 전해받고 아무도 없는 저녁, 오빠의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의 끈이. 정확히는 나 혼자 하는 짝사랑의 끈이 아직은 끊어지지 않았구나 싶었다.
"미안. 너무 늦게 왔지."
성우 오빠가 오는 발걸음 소리는 밖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오는 속도. 차분한 성격이 발걸음에도 묻어 있었다. 그러면 난 그의 발소리가 멀리서 들리기가 무섭게 먼저 문을 열었다. 오늘은 일찍 왔네요. 밥은 먹었어요? 알바는 어땠어요? 와 같이 꽤나 친해진 것 같은 말들을 내뱉었는데.
"오늘 집주인 아주머니가 나 결혼한 줄 아시더라."
"네?"
"요즘 네가 매일 나 반겨줬잖아."
그래서 새댁이랑 잘 지내냐고 물어보시더라고. 순식간에 나는 결혼한 새댁이 되어 있었다. 성우 오빠는 대체적으로 밥을 밖에서 먹었다. 혼자 자취하는 사람이 다 의례적으로 그러기는 한다만 유난히 오빠가 그렇게 먹고 다닌다고 하니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조그마한 마음에서 비롯한 게 어느새 빠른 행동으로 변질이 되어서 집에서 엄마의 반찬을 몰래 퍼나르기 시작하다가 미숙하지만 밥을 짓고. 고양이를 돌보다가 그가 오면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의식하지 않았을 땐 몰랐다가 문득 남의 입에서 듣는 '결혼'이라는 단어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선 내 옆에 앉아서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는 성우 오빠를 보니까. 아, 뭐라고 해야하지. 기분이 묘했다.
"앞으로 고양이 밥만 챙겨주고 바로 갈게요."
"응?"
"괜히 오빠도 오해받고 그러니까 좀 그래서…."
"괜찮아."
씻고 나온 오빠한테서 특유의 시원한 향기가 났다. 쿨워터 향인가. 향수를 쓴 것 같진 않은데 무심코 맡으면 기분이 좋았다. 나는 ㅇㅇ랑 같이 밥 먹고 같이 있어서 좋은데. 자취하면서 혼자 사니까 되게 외로웠거든. 지금 오빠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나 아는 걸까. 예고없이 심장에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그래,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진 알았다. 그저 제 친구의 동생. 윗집에 사는 여자애. 자신의 고양이를 돌봐주는 후배. 그가 말한 의미들은 다 이 정도의 선 안에서 내포되고 있는 말이겠지. 그렇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그 이상의 선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처음으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진 나로서는 그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ㅇㅇ는 싫어?"
내게 고개를 돌리고선 묻는 말에 가만히 입술을 앙다물었다. 싫다기보단 너무 좋아서 문제인데. 그가 제 영역의 반을 내어주면 그 안에서 만족해야 하는 게 당연한 난 자꾸만 더 많은 걸 원하게 되었다. 이따금씩 그가 내일은 알바 일찍 끝나니까 같이 밥 먹으러 나가자. 같은 말을 하면 정말이지 이미 한 번 빠져버린 바다에서 영영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빠."
"응?"
"혹시 여자친구 있어요?"
무의식 중에 나온 말이었다. 내가 하고 나서도 내가 놀란 얼굴을 했다. 없어. 그 와중에 친절하게도 대답까지 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에게 여자친구가 없다니. 되게 신나서 어쩔 줄 몰라야 하는 상황이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샌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느라 여력이 없었다.
"ㅇㅇ는?"
"어, 어. 네?"
설마.
"ㅇㅇ는 남자친구 있어?"
05
남자친구와 여자친구의 여부를 묻는 건 그저 흘러가듯 꺼내는 말일 수도 있다. 안부처럼 너 사귀는 사람은 있냐? 같은 뭐 그런거.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있냐고 묻는 건 충동적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성우 오빠를 좋아한다는 거나, 그에게 여자친구가 없어서 행복하다는 거. 그것들은 모두 진심이었으니. 그럼 그는, 성우 오빠는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꺼낸 걸까. 어느새 봄이 다 지나가고 중간고사를 봤다. 중간고사를 다 끝내고 나오는 길에도 온통 성우 오빠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던지라 이번 중간고사를 잘 봤을지에 대해선 그닥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름을 뭐라고 짓지."
시험을 보고 나온 오늘도 어김없이 성우 오빠네 집으로 왔다. 한 손에는 엄마가 더이상 몰래 훔쳐가지 말고 미리 말을 하라며 싸주신 밑반찬들을 가지고선. 자연스럽게 그의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정리하다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내가 집 안으로 들어오면 금세 내 발 밑에서 고양이는 제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이 고양이를 키운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갔다. 보통 고양이들은 안자마자 뛰쳐 나가기 바쁜데 얌전히 내 손길을 받고 있는 이 아이는 여전히 이름이 없었다. 마땅히 지어줄 이름이 없다고 고민을 한 성우 오빠는 고양이를 그냥 냥이라고 불렀고 난 까망이라고 불렀다. 까망이, 까망이….
"그냥 까망베르라고 지을까."
매우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간 이름이었다. 멀쩡히 예쁜 애한테 치즈이름이나 붙이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고양이의 등에 뺨을 대고선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오빠가 이 조그마한 아이한테 이름을 붙어주는 날이 오면 날 좋아하게 될까. 용기는 쥐뿔도 없어서 고백도 못하는 주제에 꿈은 컸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다들 연애한다고 난리던데 난 아직도 솔로였다. 고등학교 애들을 볼 때마다 띠링, 하고 울려대는 핸드폰의 문자 알람 소리는 모두 다 남자친구의 것이었다. 나한테는 없는, 남자친구. 그래도 괜찮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에겐 성우 오빠가 있었으니까. 아마 그 누구에게도 비할 데 없이 잘나고 멋진. 다정하고 매너까지 갖춘 남자. 그 앞에 딱 내 남자라는 소유격 대명사만 넣어도 완벽할텐데.
"그래도 까망이,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간만에 간식이나 줘야지 싶어서 츄르를 꺼내다가 손이 멎었다. 띠링, 문자 메세지가 왔다.
[ㅇㅇ야. 저녁에 시간 괜찮으면 나랑 영화 볼래?]
헐. '성우 오빠♥'라고 저장되어 있는 번호로 온 문자는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영화를 보자니. 그것도 성우 오빠랑 단둘이? 이건 너무 데이트 같잖아.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그의 문자에 답장하는 내 손보다 더 빨리 입가가 씰룩거렸다. 오빠랑 둘이서 영화를 보면 같이 밥도 먹고 그럴 수 있는 건가. 김칫국이라고 해도 좋았다. 내 상상 속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영화를 보며 저녁까지 같이 먹는, 그런 사이가 되어 있었으니. 소파를 주먹으로 팡팡 쳐대다가 문득 이 집이 내 집이 아니라는 걸 알고선 그나마 정신머리를 붙잡을 수가 있었다.
[좋아요]
되게 단답형의 답 같지만 나는 이걸 보내기 위해 삼십분을 잡아 먹었다는 건 오빠한텐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정신을 잠깐이라도 놓으면 저는 오빠랑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라고 보낼 것 같았다. 이왕이면 예쁜 옷 좀 입고 올 걸. 중간고사를 보고 바로 집으로 올 생각에 청바지에 셔츠만 입었더니 이게 또 되게 밋밋해 보였다. 집으로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와도 괜찮을라나. 시간을 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슬쩍 본 시계 밑으로 제 털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는 까망이를 보니까 그냥 밋밋한 차림으로 데이트를 하러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조만간 천둥에 소나기까지 온다는데 잠깐 사이에 혹시라도 무서워 하면 어떡해.
아니나 다를까 일찌감치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깃털로 놀아주고 있자니 천둥이 쳤다. 창문 밖으로 세게 들이치는 빗줄기가 거셌다. 비바람에 천둥까지 몰아치니 잘게 몸을 떨고 있는 까망이를 품에 안았다. 오빠는 잘 오고 있을라나. 아직 여섯시밖에 안되었는데 하늘이 까맸다. 조만간 까만 밤이라도 될 것처럼 희뿌연 하늘이 우중충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면 성우 오빠를 처음 만났을 때도 비가 왔었구나. 꽤나 오래된 추억 같았다. 그 때의 난 알았을까. 내가 오빠를 좋아하게 되고 그의 집에서 그를 쏙 닮은 고양이를 돌보고 있는 게 이렇게나 당연하게 될 거라는 걸. 이젠 그의 집이 내 집보다 더 편했다. 엄마한테 혼나거나 민현 오빠랑 싸우고 난 이후엔 피신처로 그의 집에 도망온 적도 많았다. 거진 반나절을 성우 오빠네 집에서 있다보니까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지루하진 않았고 무엇보다 잠을 자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ㅇㅇ야?"
그래서 까무룩 정신을 잃었나보다. 까망이는 따뜻했다. 작은 생명체에게서 나오는 안정감 있는 온도랑 빗소리, 적막한 공간. 그를 기다린다고 해놓고선 잠을 자다니. …오빠? 근데 눈을 뜨자마자 성우 오빠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보네."
평소보다 목소리가 유난히 더 낮았다.
"비가 너무 와서 영화는 다음에 봐야될 것 같은데…."
내가 본 성우 오빠는 항상 단정하게 머리를 넘기고 다녔었다. 학교 내에서도 집 안에서 마주칠 때도. 언제나 흐트러짐 없던 사람이 빗물에 젖어서 앞머리를 내리고 있는 게. 비를 그대로 맞고 온 듯이 가득 물기가 서려있는 얼굴이. 어느 타이밍에 숨을 내쉬어야 할 지 막막했다. 자다가 넘어지려는 날 받쳐주려고 했는지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내 모습이 아까 전, 내 품에 끌어 안았던 까망이와 흡사했다. 한 팔로 바닥을 지탱하고 남은 손으로 내 등을 받치고 있는 성우 오빠한테서 비 냄새가 났다. 내가 비를 맞은 것도 아닌데 젖은 그의 옷이 점점 나와 가까워질수록 꼭, 내가 비를 맞은 것 같았다. 온 몸으로 피할 수 없는 비를.
"비가 엄청 많이 왔나보네요."
"……."
"오빠 때문에 나까지 다 젖겠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품에 안긴 채로 이도저도 못하는 내가 먼저 일어서려고 하자 그런 날 붙잡는 것 외엔. 여전히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1분이 한 시간 같은 정적을 깨고선 성우 오빠가 날 불렀다. ㅇㅇ야.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목이 잠겼다.
"싫으면 피해."
그리고 입이 맞춰졌다. 살짝 닿은 입술의 선이 간지러웠다. 싫으면 피하라니. 너무 비겁하잖아. 나는 순간 울컥하고 치솟은 마음을 그의 목에 팔을 두르는 걸로 대신했다. 이미 나는 그에게 빠질대로 빠져서 숨도 한 번 못 쉬어보고 죽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그렇게 죽으면 호상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애초에 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걸 과연 그가 알고 있을런지. 코 끝이 닿고 작게 송곳니로 내 아랫입술을 물어오는 그의 숨결이 닿았다. 처음 하는 키스여서 퍽이나 어색하고 꾹 참은 숨을 가뿐히 몰아 내쉬기도 어려웠지만.
"좋아해요."
이젠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단지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모아서 꺼낸 내 말이 무색해졌을 뿐. 어떤 말도 못하게 다시 한 번 더 날 안는 그는 여러번 입을 맞춰왔다. 한 번은 아주 가볍게. 또 한 번은 조금은 거칠게. 그러면 난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수도 없이 이어진 키스는, 내 첫키스이자 내 첫사랑이었고. 이건 어떤 영화보다도 아주 색달랐다.
06
소나기와 함께 온 고양이었다.
스물 넷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은 검은색의 머리카락. 여름이든 겨울이든 사계절 내내 대부분 함께 하는 검은색의 옷. 비가 오는 날이면 나란히 쓰고 간 그의 검은색 우산. 그리고 그를 닮은 검은색 고양이.
너 민현이 여동생 맞지?
날 보고 웃을 때 선하게 휘어지는 눈가와 보조개. 그게 뭐라고 자꾸 설레고 왜 자꾸 수줍었는지. 그게 도대체 뭐라고 난 검은색만 보면, 고양이만 보면. 그가 생각났는지. 떨어질 기미도 모르던 입술이 붉게 물들었을 때, 내 두 볼도 같이 빨간색으로 물이 들고 있었다.
"좋아해."
그의 입에서 나온 세 음절. 단, 세 음절 때문에.
그를 닮은 내 행운의 고양이
まねきねこ
Behind Scenes |
"하고 많은 고양이 이름 중에 까망베르가 뭐냐, 까망베르가." "야, 뭐가 어때서. 예쁘기만 하구만." "ㅇㅇ가 지어준 이름에 토 달지 마라."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
★라이터입니다★
성우 단편을 도중에 쓰다가 인티의 서버 문제로 아주 깨끗이 날려먹고 난 뒤에 처음부터 다시 초심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원래 성우 생일날에 맞춰서 올리려던 글이었눈데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여러분들의 새학기를 응원하는 기념으로 오게 되버렸네요;
오늘 글의 결론은
성우는 고양이를 닮았다. 그 중에서도 검은색의 고오급스러운 냥이센세를 닮았다. 그리고 성우가 주운 고양이의 이름은 결국 여주가 아무렇게나 뱉어버린 까망베르 치즈이다 뭐 이정도네여....ㅎ
일본에서 마네키네코는 복을 가져다주는 고양이라고 해요. 그리고 검은색 마네키네코는 액운을 물리쳐준다고 하는데 뭔가 떵우의 얼굴만으로도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을 척결시켜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입니다. 진지하게 공감하시지 않나요. 독자님들.
왜 때문에 왕국을 건립하시지 않는 건지 의문일 정도;;;;;;;;
♥♥그럼 우린 또 좋은 밤을 보내고선 다음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