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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전정국] 그대야 안녕 8화 | 인스티즈 

 

 


 

 

 

 

 

BGM - 슈르르카 (Sally) 


 


 


 


 


 


 


 


 


 


 

8화 

: 꽃잎 둘 


 


 


 


 


 


 


 


 


 


 

 셋. 

 둘. 

 하나. 


 

 땡. 


 

 '띠리리 띠리리리-♪' 


 

 체육 시간의 끝을 알리는 경쾌한 음악보다 더 빠른 템포로 달리는 내 두 발. 음악 쌤의 엄포가 두려워 원래는 뛰어가며 윗도리를 갈아입을까 했었지만, 음악실에서 나오는 정국이를 포착하는 게 급선무였기에 일단은 보고 난 뒤에 갈아입는 쪽으로 정했다. 혹시나 가야금을 여유롭게 정리한다거나 호석이랑 장난친다고 늑장을 부리게 된다면, 내 누적 벌점은 하늘을 찌를 테고 그러면 당장 전교의 복도를 락스로 닦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뒤탈을 걱정해 몸을 사리기엔, 어제 내 문제를 풀어주던 정국이의 손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꼴딱 새버렸고 그 탓에 이성의 끈을 놓은 지 오래였다. 될 대로 되라지. 지금 난 먼 미래보다 눈앞의 실리가 중요했다. 쉬지 않고 달려가 순식간에 다다른 계단은 위로 끝이 안 보였고 내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두 칸씩 성큼성큼 올랐다. 4층이라는 멀고도 먼 여정에 결국 아파오는 뻣뻣한 다리 뒤쪽 때문에 한껏 인상이 찌푸려지는데 거칠어지는 숨이 감당이 안 되기 시작한다. 이러다 심장이 멈추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몸 전체가 터질 것 같이 뜨거워지며 계단이 끝이 나고 긴 복도를 미친 듯이 질주하니, 그제야 복도 끝에 보이는 음악실 문. 꾹 닫혀있는 걸 보니 아직 끝이 안 난 모양이다. 다행이라고 안도함과 동시에 느껴지는 희열감에 콧구멍이 커지고, 막판 스퍼트를 발휘하며 우다다 뛰어가는데 순간 어긋난 발목에 속도를 잃어버렸다. 여태 뛰어오느라 힘이 풀릴 대로 풀려버린 발목을 그만 접질리고 만 거였다. 누가 발목을 망치로 풀스윙으로 빡 때린 듯 묵직하고 느긋한 고통에 안 다친 다리로 깽깽이를 하며 벽을 짚고 멈춰 섰다. 벽에 의지하여 잠깐 발목 관절을 조금씩 돌려보려 노력했지만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멈추기엔 너무 허무해 악을 쓰며 접질린 오른쪽 발목을 조금씩 옮기기 시작했다. 끝나고 4반 애들이 이쪽으로 온다면야 그냥 그 자리에 서있을 테지만, 분명 더 가까운 음악실 바로 앞 계단으로 올라갈 게 눈에 훤했기에 더욱 기를 쓰고 다가갔다. 고통에 허덕이느라 반쯤 풀린 눈으로 몸을 축 늘어뜨리며 슬금슬금 향하던 그때. 저 앞에서 열려서는 안 될 음악실 문이 열린다. 하.. 벌써 끝난 건가. 음악 쌤은 종 쳐도 학생들 안 끝내주는 게 특기면서 꼭 이럴 때만..! 일빠로 잽싸게 문을 열고 나온 어떤 애는 역시나 바로 앞 계단으로 자취를 감춰버리고 혹여 정국이도 저렇게 연기처럼 사라져버릴까, 다급한 맘에 한쪽 발로 깽깽이를 뛰며 내 다리 내놔 귀신처럼 달려갔다. 정신 나간 좀비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웃기고 섬뜩한 모양새에 스스로도 잠깐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정국이 나오기 전에만 그 앞에 도착하면 될 일이었다. 남자애들이 낮은 수다 소리와 함께 우르르 빠져나오며 불규칙하게 달려오는 내 발소리를 듣고는 이쪽을 보는데,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사라져버린다. 내가 많이 무서운가 신경 쓸 새도 없이 무거운 다리를 오로지 힘으로 끌고 오느라 점점 바닥나는 체력 때문에 헉헉대는데, 불과 몇 발자국 앞두고 있는 음악실 안에서 반가운 호석이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직.. 안에 있다.. 폐가 터질 것 같은 압력으로 올라오는 숨을 내뱉기에 정신이 없고, 심장이 당장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았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숨을 가라앉히려 온신경을 집중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꺄르륵 소리에, 한가하게 걸어 올라온 척하기 위해 얼른 얼굴의 땀을 훔치고 승무원 같은 미소를 준비하고서 대기타기 시작했다. 이 얼마 만에 보는 음악실 정국이인가. 


 

 "어! 안녕!" 

 "오. 하이~." 


 

 조작된 우연은 꽤나 자연스러웠다. 앞에서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한 앵무새가 친구들과 딱 맞는 타이밍에 여유롭게 걸어 나왔고, 그에 난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인사했다. 눈썹이 올라가며 내 인사를 받아주고서 다른 친구들은 가고 호석이는 걸음을 멈춘다. 


 

 "체육이었어?" 

 "응." 

 "오늘 체육 뭐해?" 

 "탁구해." 

 "으유, 지겨워~ 진짜 맨날.." 


 

 자긴 축구하고 싶은데 자꾸 실내에서 탁구만 시킨다며 낯이 시무룩해진 정호석은 이따 7교시를 걱정하고, 그런 애의 등 뒤는 이상하게 휑하다. 가볍게 맞장구를 치며 시선은 정호석 어깨 너머를 향해있는데 왜 아무도 없을뿐더러 그 뒤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건지. 혹시.. 빠른 정국이는 벌써 갔어? 


 

 "근데 밖에 되게 더운가 보다. 그늘 아니면 덥지?" 

 "응. 체육복 무조건 반팔 입어야 돼." 

 "그래야겠다. 역시 챙겨오길 잘했어." 

  

 닦는다고 닦은 건데, 아직도 삐질삐질 땀이 나고 있는 내 이마를 둘러보고는 또 걱정 가득한 말투로 묻는다. 누가 우리 호석이 안 더운 날에 축구 좀 시켜주면 좋으련만. 


 

 "아, 얘는~!" 


 

 길지 않은 대화가 끝이 나고 정호석이 이내 내게 '그럼 빠이~.' 하고 금방 몸을 틀려다가, 아차 하고 다시 되돌아와 음악실에 고개를 들이민다. 


 

 "착한 척 작작하고 빨리 가자." 

 "넌 반장이라는 게.. 역시 널 뽑는 게 아니었는데. 그치?" 


 

 호석이의 불퉁한 목소리가 음악실 안을 울리고 그 안에서는 가야금을 정리하는 듯 어디에 살짝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정국이 목소리가 들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틀림없이 네 목소리가 맞았기에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음악실 쪽으로 다가가 기웃대는데, 넌 저 안쪽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야, 그래도 나온 애 중에 그나마 내가 제일 사람이었다." 

 "그게 화근이었지. 사서 고생은 다 하겠다던 사람 어디 갔냐. 뽑힌 후로 보이질 않네." 

 "쓰읍! 생기부에 좋은 줄 한 줄 쓰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짜식아?" 

 "난 잘 써주시던데. 작년에." 

 "하.. 이 자식이. 쌤들이 너 좋은 대학 한 번 보내보겠다고 영혼 갈아넣는 거 모르냐? 자꾸 짜잉나게 할래?" 

 "아, 알았어~ 간다, 가. 뭔 말을 못해." 


 

 핑퐁대는 대화가 오가며 우리 앵무새가 얼마 전 반장으로 뽑혔다는 소식과 함께, 삐죽 입이 나와있을 것 같은 정국이의 말소리가 귀에 박힌다. 뭔 말을 못한다면서 툴툴대는 모습을 밖에서 상상만 해도 귀여워서 숨이 안 쉬어질 것 같다. 목소리를 들으니 빨리 보고 싶어져 급한 마음에 자연스럽게 안으로 입장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정국이가 음악실을 나서는 기척이 들린다. 땀이라도 더 닦아보려 손을 올리니 벌써 많이 가까워진 슬리퍼 소리에 다급히 내렸다. 


 

 "..." 


 

 손을 어정쩡하게 내리자마자 드디어 나타나준 오늘의 정국이. 내 예상대로 뾰로통한 얼굴로 나오다 밖의 내 존재를 몰랐던 듯 멈칫 놀라서 눈이 잠깐 크게 뜨이는데, 그때 서로 눈이 마주치고 그 짧은 순간 둘만의 공기마저도 어색하게 굳어버린다. 눈꺼풀을 살짝 덮는 네 앞머리가 동그란 눈을 비스듬이 가리고 그 눈은 정말 잠시나마 멀뚱히 나만 응시하는 순간에 멈춰있다. 순간 닿은 눈길에 불현듯 어제가 떠오르는 것도 모자라 스쳤던 정국이 손까지, 어지러울 정도로 모든 장면이 생생해져 뛰어왔을 때보다 더 크게 심장 소리가 귀를 울리고 순식간에 가슴께가 후끈해진다. 떨리는 맘에 손에 땀이 나기도 잠시, 둘 다 주춤주춤 갈 방향을 내어주려 물러서다가 결국엔 정국이가 날 비껴 지나간다.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데, 안 숙였을 때보다 나랑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웠던 거에 왠지 모르게 또 한 번 가슴이 쿵쿵대고 침이 마른다. 


 

 "깨빵, 학원에서 봐~." 

 "..응~." 


 

 정국이가 말없이 계단으로 향하고 미리 저만큼 내려가있던 호석이가 인사를 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니 둘이 사라지고 그제야 저 멀리에서 우리 반 애들이 빠른 걸음으로 오는 소리가 들린다. 드문드문 ‘정국이 갔을까’라는 말소리가 작게 들리는데 난 정국이 이름이 들릴 새도 없이 네가 떠나고 남아있는 것 같은 섬유유연제 향에서 헤엄치는 중이었다. 


 

 "야, 너 진짜 빠르다. 전국체전 나가볼래?" 


 

 뒤늦게 음악실 앞 계단으로 나타난 나영이가 땀을 닦으며 내게 진지하게 말한다. 듣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손을 벌리고 뱅글뱅글 도는 날 보고 왜 그러냐며 심각한 얼굴로 말린다. 그에 어디서 좋은 냄새 안 나냐며 감격에 겨운 얼굴로 거의 눈물을 흘리니, 내 어깨를 툭 치고 ‘네 암내’라며 음악실 안으로 사라진다. 짝사랑이 애를 버려놨다고 구시렁대며 나영이가 가야금을 고르러 가고서도 아직도 혼자 정신없이 떨어대는 주접은 계속됐다. 아픈 발목을 이끌고 벽을 잡고 돈다든가, 우두커니 서서 가만히 실실 웃는다든가. 반 애들도 한 번씩 나를 잡고 내 상태를 확인하고서야 안으로 들어간다. 모두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아는 모양이다.  


 


 


 


 


 


 


 


 


 


 

 아까 점심시간에 혼자서 쏜살 같이 매점에 다녀온 나영이 손에 쥐어져있던 꽉 찬 젤리 봉지가, 이젠 하릴없이 책상에 나뒹군다. 회의 때문에 자습을 주고 사라지신 5교시 한국지리 쌤 덕에 나영이와 짝꿍인 맨 뒷자리에서 줄처럼 생긴 젤리를 게걸스럽게 빨아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우리 반 애들도 딱히 공부할 생각은 없는지 저마다, 혹은 분단 전체를 단위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명당 자리에 앉은 애가 창문으로 혹시 담임 쌤이 지나갈까 치밀하게 망을 보며 얘기하다보니 어느새 끝나버린 50분. 떠들며 놀 때는 왜 이렇게 행복하고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달아나버리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반에 미련 없이 짐도 안 두고 간 쌤이기에 종이 치자마자 아이들은 제 볼 일을 보려 드문드문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정신없이 먹어치우느라 지저분하게 젤리 가루를 묻힌 손가락을 한 번 털어내며 엉거주춤 일어날 채비를 했다. 


 

 "물티슈 있어?" 

 "없어서 오늘 똥꼬 데미지 장난 아님." 

 "그 정보까진 필요 없었는데. 손 씻고 온다." 


 

 큰일을 보러 갈 때면 반드시 주머니에 물티슈를 챙겨가는 나영이의 입에서 과다한 정보가 흘러나왔다. 진짜 그거까진 안 궁금했는데. 불결하다는 눈빛으로 나영이를 한 번 흘겨주니 나영이가 작은 주먹을 치켜든다. 이에 보자기를 펼쳐 보이며 내가 이김, 하고 잽싸게 우당탕 복도로 뛰쳐나오니 안에서 ‘나도 휴지!’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묘한 승리감에 미소를 지으며 깨끗한 손으로 치마에 묻은 가루를 털고 세면대 앞으로 향했다. 남녀 화장실 칸이 나오기 전, 성별 구분 없이 쓸 수 있게 크게 트여있는 세면대는 정말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온몸으로 박수쳐주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고 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뿐해졌지만 현실은 오른쪽 다리를 저는 불규칙한 발자국이라는 것에 살짝 눈물을 머금고 4반 앞에 다다르니, 조건 반사로 또 들어지는 한쪽 까치발 때문에 순간 중심을 잃을 뻔했다. 아까 접질려 당분간 못쓰게 돼버린 발목을 깜빡 잊어버리다니. 나는 과연 멍청이였다. 넘어질 뻔한 탓에 크게 뛰어대는 심장을 추스르고 필사적으로 왼쪽 다리만으로 지탱하며 신속하게 4반 안을 들여다봤다. 증.. 증구기가... 어디... 저기.. 저기.. 호서기는 보이는데.. 


 

 "..." 


 

 정국이가 어디 있을까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몸짓으로 이리저리 눈을 돌려 찾아보다가, 뒷모습으로 보이는 호석이와 대화하던 어떤 남자애랑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아무도 모르게 찾아본다는 게 들켜버린 것이었다. 헙, 하고 놀라 얼른 뒤로 돌아 최대한 빠르게 세면대 앞으로 향했다. 혹시나 그걸 보고 호석이가 뒤돌아 날 보게 된다면, 저번에 이어서 내가 또 누군가를 훔쳐보는 장면처럼 비춰질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뜨는 게 무엇보다 상책이었다. 4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고 그제야 한숨을 돌리니, 다급하게 절뚝이며 오느라 아파오는 발목에 그대로 세면대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오늘 병원 가보면 빨리 나을 수 있으려나. 깁스하는 건 싫은데. 가볍게 든 생각에 오늘 병원 갈 시간을 내보려 머리를 굴려보지만.. 아무래도 없다. 학교가 끝날 시간이면 병원도 거의 문을 닫을 때였고 그렇다고 절대로 학원을 늦게 가거나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생각보다 아픈 발목 때문에 조금 아쉬운 맘은 들었지만 그래도 이 고통과 맞바꾼 결과가 그 누구도 아닌 정국이를 한 번 보는 거였으니 꼭 손해 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서있던 세면대 앞, 남자 화장실의 불투명한 문이 묵직하게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열릴 기미가 보여 슬쩍 옆으로 비켜줬다. 가끔씩 여기서 볼일 보고 나오는 남자애와 손 씻던 내가 눈이 마주칠 때면 조금 민망해진다. 저번에 한 번은, 어떤 남자애가 어두운 낯빛으로 배를 잡고 나오다가 본인도 모르게 내 앞에서 방귀를 팡! 뀌어버리고는 다시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후로 그 남자애는 나만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금방 사라진다. 세면대를 공유하게 됨으로써 점심시간 양치질 줄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남녀 화장실 경계가 허물어지니 이런 부작용 또한 존재했다. 새삼 그때 상황이 떠올라 사람이 나와도 못 본 척, 그대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물을 틀었는데. 


 

 "..어." 


 

 등 뒤에서 애타게 찾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순간 뇌리를 관통하는 신경 자극에 빛의 속도를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는 거짓말처럼 정국이 네가 있었다. 

​ 

 "안녕!" 

 

 너를 발견하자마자 밀물처럼 밀려오는 기쁨과 반가움에 눈이 무섭게 번뜩이고 콧구멍이 추하게 벌렁거렸지만 입꼬리만큼은 기분 좋게 올라갔다. 

 

 "안녕." 


 

 아는 체를 하고 싶어서 기척을 낸 건지 아님 자기도 모르게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정국이는 부자연스러운 눈동자로 내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받아줬고, 난 며칠 만에 다시 성공한 인사에 광대가 하늘에 닿을 듯이 행복을 티냈다. 이번엔 그래도 아까처럼 마냥 어색해만 하다가 사라지지 않아줘서 천만다행이었다. 전 같았으면 정국이의 불편이 곧 나의 불행이니 내가 나서서 피하는 편을 택했을 테지만 그러기엔 어젯밤에 네 생각을 하면서 도달한 이전과 다른 결론이 있었다. 난 이제 정국이가 날 불편해한다고 해서 무작정 피해줄 수만은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어제 학원 일만 생각해보아도 터질 듯 화끈거리는 나와 괜히 헛기침하던 너, 둘이서만 꽉 막힌 공간 안에 떨어진 것처럼 뜨거워진 내 숨은 강의실의 열을 올렸었다. 그곳에 같이 있던 선생님과 여러 여고 애들은 벽이 되었나 싶을 정도로 귀를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에 정국이 말고는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널 좋아하는 데 있어서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기 시작했기에 난 어쩔 도리가 없던 것이었다. 손 스친 거 하나로 내 손발이 모두 꽁꽁 묶여버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고 그렇기에 이왕 이 지경까지 돼버린 거, 틈이 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정국이 일상에 스며들어보자는 취지의 결론이었다. 그렇다고 네 반응마저도 개의치 않는다는 건 이기적인 행동이 될 수 있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묻혀 너에게 부담스럽지 않게만 다가간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다른 아이들에게 묻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학원 차를 타고 다니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이 맘이 끝이 보이기 전까진 이렇게 좋아하겠다는 결심이 섰다는 뜻이다. 게다가 오늘은 학교에서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애를 두 번이나 봤을 뿐더러, 마침 그 상황도 성공적으로 우연하고 자연스러운 기회여서 더할 나위가 없는 결심 이행 첫 날이었다. 


 

 "체.. 체육이야?" 

 "응. 영어 끝나고." 

 "아, 그래?" 

 "응." 


 

 안녕, 하고 그냥 가버리는 건 아닐까 싶어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말을 걸었다. 조심스레 몸을 돌리려다 멈칫 돌아보는 걸 보니 얼른 말을 건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보니 시원하게 풀려있는 하복 셔츠 안으로 체육복을 입은 정국이의 손에는 검은색 티가 들려 있었다. 아마도 체육 시간이 되면 셔츠만 벗고 바로 나가려고 안의 티를 갈아입고 나온 것 같은데 여전히 완벽한 준비성.. 전정국이다. 오랜만에 네가 체육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는 꼭 너랑 체육을 같이 해보고 싶단 소망이 생긴다. 짝피구를 해서 내가 세상의 모든 풍파로부터 보호해주고 싶다. 너라면 내 온몸을 던져서라도 지켜줄 텐데. 


 

 "..영어?" 

 "응."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영어 시간이구나. 그렇게나 네 뒤에 앉는 숱한 상상을 하던 영어 시간을 잊고 있었다. 


 

 "헙, 이따 봐!" 

 "응, 응." 


 

 젤리에 정신 팔렸는지, 너에 정신이 팔렸는지. 잊고 있던 영어 시간과 함께 떠오른 내 노트북 도우미라는 역할에 헐레벌떡 손을 대충 물로 씻고 복도로 나섰다. 처음으로 나눈 대화다운 대화가 끝이 나는 게 아쉬워 죽겠지만 너 찾는다고 보내버린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기에, 이 다리로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게 분명했다. 다급한 맘 때문에 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인사하고서, 저돌적인 좀비가 되어 붐비는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으로 향했다. 찌릿찌릿 아파오는 발목과 같이 얼굴도 달아오른 채였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의 아침. 등교 시간 버스에는 언제나 애들이 많다. 그래도 오늘은 운 좋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어제 조금 줄어든 수학 오답노트 문항 수 생각에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혼자 픽픽대며 왔다. 버스가 학교 앞 육교 아래 정류장에 정차하고, 그 안을 꽉 채우고 있던 교복 입은 아이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내렸다. 후텁지근한 숨을 후아, 뱉어내는 애들 중 하나였던 나도 한쪽 발로 천천히 땅을 짚었다. 아직도 뻐근하게 아파오는 오른쪽 발목과 무게를 거의 혼자 지탱하고 있는 왼쪽 다리가 힘겹다. 아까 바삐 현관문을 나서기 직전 오늘 병원에 꼭 가보라는 엄마의 걱정 어린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아무래도 이따 학원 가기 전에 병원에 들러야겠다. 거추장스러운 걸 달게 될 것 같은 예감에 더디더라도 혼자 나아보려 했지만 딸내미 걱정 가득한 엄마의 얼굴에 주름이 하나 더 늘게 하는 건 싫은 일이었다.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정류장 바로 앞 횡단보도에 섰다. 분명 학생들 안전하게 다니라고 생긴 육교였지만 과연 아무도 올라가지 않는 곳이었다. 앞에 조금만 기다리면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가 있는데 급한 사람 아니고서야 누가 저 많은 계단을 오르내리고 싶어 할까. 학부모 성화에 못 이겨 추진한 육교 설치 사업이었지만 결국 거대한 고물 덩어리로 전락해버린 느낌이 역력했다.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평론가가 된 듯 혼자서 혀를 끌끌 차다가 지금 내 속도로는 지각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신호등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막 새로 도착한 버스에서 애들이 우르르 내린다. 나영이랑 태형이가 사는 아파트 1단지 쪽에서 오는 버스였는데 저기도 사람이 왜 저렇게나 많은지. 그러다 혹시나 싶어 나영이를 찾아볼까 했지만. 


 

 ‘야, 언제 와? 다리 절다가 늦는 거 아니야? 늦으면 안 돼!’ 


 

 금방 도착한 문자에 다시 신호등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시는 어머님 차를 타고 등교하는 나영이는 시간관념이 투철하신 분을 어머니로 둔 덕에 항상 같은 시간에 학교에 있었다. 오늘따라 교실로 순간이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수천 번 들며 쌤 오면 화장실 갔다고 해달라고 급하게 답장을 한 뒤 조금 마음을 놓고 아직도 바뀌지 않은 신호를 기다렸다. 


 

 "..." 


 

 근데 자꾸 내 옆에 선 누군가에게서 어딘가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든다. 눈길을 뺏는 호기심 때문에 고개를 돌릴까 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이면 다행인데, 모르는 사람이랑 눈이 정통으로 마주치면 그렇게 뻘쭘한 상황이 없을 게 분명하다. 근데 너무 궁금하다. 궁금해 미치겠다. 아직 바뀌지 않은 신호에 혼자 눈치를 보다가 결국 곁눈질로 재빠르게 누군지 훑어보는데. 


 

 "..." 

 "..." 


 

 놀랍게도 슬쩍 이쪽을 보고 있던 사람과 서로 곁눈질로 눈이 마주쳐버렸다. 하얀 가자미 같은 윤기 형이었다. 


 

 "안, 안녕하세요.." 


 

 갑자기 일어난 당황스런 상황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어렵사리 인사를 건네니, 나른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이게 내 인사에 대한 반응인지, 잠시 딴 곳을 본 건지 모를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답을 못 찾고 있는데 이내 신호가 바뀌고 윤기 형은 미련 없이 자리를 뜬다. 그에 나도 지각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윤기 형의 뒤를 따랐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랑 마주치는 게 나았을 뻔했다. 


 


 


 


 


 


 


 


 


 


 

나는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든다. 선생님의 총애를 받지 않는다는 건 무슨 기분일까 하는. 


 

 "그럼 부탁할게~." 

 "네. 갔다 올게요." 

 

 선생님.. 저 다리 아픈데요.. 작은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날 반겨주는 영어 쌤의 부탁에 그저 알겠다며 종이 몇 장을 들고 복도를 나섰다. 어제 헐레벌떡 교무실로 향했을 때 내가 다리를 절었던 사실을 새하얗게 잊어버리셨는지, 내게 영자 신문 동아리 홍보 종이를 게시판에 붙여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복도에 있는 사물함에서 휴지를 꺼내다가 마주친 영어 쌤이 왜 그렇게 나를 환하게 맞아주시나 했더니만. 기뻐하시며 교무실에 날 데리고 들어와서는 연신 미안하다고 어색하게 웃는 선생님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긴 했지만 혼자 갔다 오기엔 역부족이었다. 밥 먹고서 양치도 안 하고 바로 잠에 든 나영이를 깨워볼까 했지만 어제 잠을 잘 못 잤다며 오전 내내 피곤해하던 게 마음에 걸려 그냥 빨리 혼자 다녀오는 쪽으로 정했다. 하릴없이 비어있는 지금 점심시간이 적기였기에 종이를 받아들고 나오자마자 느릿느릿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나오는데 혹시 늦게나마 절뚝거리는 내 다리를 발견하시고 놀라 더 미안해하시며 종이를 가져가실까봐 안 아픈 척하느라 발목이 더 욱신거린다. 오죽 바쁘시면 아쉬운 소리를 하며 부탁하실까 하는 생각에 가볍게 머리를 비우기로 하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당당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겠나 싶어 어깨를 펴고 게시판이 있는 1층에 무사히 내리니 1층 현관 한 벽면을 장식하는 초록색 게시판에 붙어있는 많은 동아리 홍보 종이들이 보인다. 신문 동아리, 모의법정 동아리, 바둑 동아리, 토론 동아리.. 토론 동아리? 종이를 들고 한 번 쭉 둘러보다가 눈에 들어온 ‘토론 동아리’. 단어를 보자마자 뇌리를 스치는 중요한 기억에 눈이 크게 뜨였다. 여기는 다름 아닌 정국이 동아리가 아니었던가.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접수처에 눈동자를 굴리는데 3반의 어떤 동아리 회장 여자아이에게 인적사항과 포부를 적어 내면 된단다. 아, 왜 미처 정국이 동아리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에 탄식이 나오고 미간이 좁아졌다. 그래도 아직 하루가 남아있는 접수 기한에 한숨을 돌리고 당장 올라가서 내야겠단 생각에 얼른 종이를 들었다. 여기가 나을까, 여기가 나을까. 그래도 이왕 붙이는 거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잘 보였으면 좋겠는 맘에 멀리서 전시회를 감상하듯 이리 보고 저리 보다 보니, 가장 좋을 것 같은 자리를 찾았다. 사람들 눈높이 위치는 이미 빈틈없이 종이가 붙어있었고 남은 자리는 조금 위쪽 바둑 동아리 옆이었다. 바둑 동아리 종이를 조금만 옮겨 붙이면, 그 정도면 눈에 잘 띌 것 같아 보였다. 절뚝절뚝 다가가 바둑 동아리 종이에 박혀있는 압정을 빼는데, 저 위에가 손에 닿을 듯 말 듯 한다. 종이 모서리마다 하나씩, 총 네 개의 압정 중 밑에 두 개는 빼는 데 성공했지만 나머지 두 개가.. 안 닿는다. 힘겹게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도 닿지 않으니 점점 답답해져 그냥 점프해볼까 하는 위험한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얼른 끝내고 가서 종이 내야 되는데. 조급한 맘에 어떡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엔 그냥 점프를 뛰기로 결심하는데 그 순간 잡힌 이성의 끈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점프했다가 압정 틈에 손톱이 잘못 끼이면 그대로 빠지는 거 아닐까, 압정을 어찌 뺀다고 해도 못 잡고 빠른 속도로 내 이마에 떨어지면 내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착지 잘못하면 자칫 남은 한 다리도 보낼 것 같은 불길함이 닥쳐와 결국 다시 그만두기로 하고 그대로 게시판에 붙어서 처연하게 바둑 동아리 종이를 어루만지는데, 불현듯 내 손 위로 나타난 어떤 큼직한 손이 별거 아니라는 듯 위쪽 압정을 쉽게 뺀다.  


 

 "뭐, 이거?" 

 "..어? 어.. 그거." 


 

 갑작스레 생긴 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씩 웃으며 날 보고 있는 태형이가 있었고 가까운 얼굴이 당황스러워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바둑 동아리 들어가게?" 


 

 태형이는 순식간에 압정 두 개를 다 빼고서, 멀뚱히 서있는 내게 바둑 동아리 종이를 건넨다. 


 

 "아니~ 이거 때문에." 


 

 어디서 온지 모르게 바람처럼 나타난 애 때문에 아직도 놀라서 눈을 끔뻑거리니 의외라는 듯 묻는다. 살면서 바둑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손사래를 친 뒤 갖고 있는 종이를 들며 웃었다.  


 

 "뭔데? 영자 신문?" 

 "응. 영어 쌤 심부름이야." 

 "아항. 이거 붙여야 돼?" 

 "응. 그렇긴 한데.." 

 "줘. 붙여줄게." 


 

 바둑에 이어 영자 신문은 더 의외라는 듯 눈이 잠시 커졌다가 ‘심부름’이란 말에 눈 크기가 제자리를 찾는 태형이 반응 때문에 자괴감이 몰려올 뻔했다. 나 영어 잘해.. 물론 너보다는 아니지만.. 순간 시무룩해져서 어깨가 축 늘어지는데 도와주겠다며 내밀어주는 손에 맘이 사르르 녹아버렸다. 내가 의도적으로 시키게 된 것 같은 상황에 미안해서 망설이고 있으니 내 종이를 새침하게 뺏어서 빈자리에 압정을 꽂아주는 태형이다. 근데 얘는 까치발 안 들어도 되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아까 체육 시간에 운동장에서 학생증을 잃어버려 찾으러 나왔다던 태형이를 우연찮게 만났고, 그 덕에 남은 게시판 두 곳을 더 돌고서도 남은 한 다리를 멀쩡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태형이의 도움으로 임무를 빠르게 끝내고 내려와, 붐비는 매점에서 어렵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골랐다. 오늘 내 일을 도와준 보답으로 초코맛 콘을 사주니 싱글벙글 고맙다며 신난 얼굴로 포장을 뜯고서 나를 따라온다. 아직 좀 남아있는 점심시간에 매점 앞 그늘에 위치한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옆에서 걱정스러운 말투가 들린다. 


 

 "바보 같이. 그걸 혼자 하고 있냐." 

 "아, 이게 다 쌤한테 인기 많은 내 탓이야." 

 "인기 많으면 좋을 때도 있긴 한데 귀찮을 때도 제법 생기는 것 같아. 나 저번에 과학실 기구 정리도 해봤어." 

 "그거 쌤이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응. 원래는 그렇지. 너도 원래 이거 쌤이 해야 되는데 네가 했잖아. 똑같은 거지.." 


 

 말을 마치고 씁쓸하게 웃는 태형이에 애잔함이 밀려왔다. 동병상련이란 이런 거구나. 어제 학원에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다리를 보고 꽤나 걱정해주던 아이의 얼굴에 잠깐 먹구름이 드리우니 맘이 안 좋아졌다. 


 

 "우리 다음엔 쌤들이 우리 안 좋아하게 만들어보자." 

 "어떻게?" 


 

 그러다가 비장하게 고개를 숙이며 무언가를 작당하듯 말하는 태형이의 말에 집중했다. 어떻게? 


 

 "모르는 문제마다 물어보러 가는 거야. 답지 안 보고." 

 "오." 

 "어때. 좋은 생각이지?" 

 "좋긴 한데 그러면 그러는 나도 귀찮아지지 않을까?" 

 "..아. 그렇지, 참." 


 

 심각하게 말을 꺼내던 낌새가 누그러들었다. 선생님을 귀찮게 하려다가 내가 먼저 나가떨어질 것 같은 묘안이었다. 내 말에 멋쩍은 듯 허허 웃으며 금방 녹아내릴 것 같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물고 음미한다.  


 

 "근데 진짜 영자 신문 동아리는 누가 들어가는 걸까." 

 "그러게.. 음. 영어 잘하는 애들?" 


 

 네 생각대로 그게 나는 아닐 거야.. 가만히 눈길을 허공에 돌리다 고개를 내민 화제가 반갑지 않아 다시 자신감을 잃었다. 너 같은 애들이 하겠지, 그런 거는.. 


 

 "넌 거기 안 들어?" 

 "응.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왜. 잘할 것 같은데." 

 "..어?" 

 "나 아까 너 거기 들어가려는 줄 알고 진짜 놀랐었는데." 

 "..." 

 "..아아. 오해하지 마. 아무나 들어가는 거 아니잖아. 대단하다 싶어서." 

 "아, 그랬어?" 


 

 아, 그런 뜻이었어? 착한 의도를 혼자서 잘못 받아들여놓고 잠시나마 우울해했던 스스로가 미워져 속으로 욕을 했다. 이런 애를 내가 그렇게 남 쉽게 무시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니. 태형이는 그 입술 빨간 여고 애가 아니잖아.  


 

 "왜, 영화 보면 그런 거 알아? 비행기에서 막 영자 신문 꺼내 읽고 알지도 못하는 옆 사람이랑 정치, 경제 얘기하고. 초등학교 땐 영어 잘해서 그래보는 게 꿈이었는데 포기했어. 정치도 모르고 경제도 모르고 심지어 영어도 몰라. 히힛." 

 "왜~ 너 영어 잘하잖아." 

 "입도 뻥끗 못하는데 그게 무슨 잘하는 거야아." 

 "그건 다 똑같아~." 

    

 잠시 어렸던 기억을 더듬어 꺼내보며 원대한 소원이었던 일을 말해주는데, 나도 그런 장면이 멋있어보인 적이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다 자기가 영어를 못한다는 해괴망측한 말을 하는데 이건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 중에서 자기객관화를 잘 못하는 애도 있구나. 


 

 "어, 종 치는데!" 

 "헐!" 


 

 그때 매점 앞 작은 광장을 울리는 종소리. 믿을 수 없었다. 종소리가 귀에 들리자마자, 번뜩 아픈 다리와 아직 자고 있을 나영이가 떠올랐다. 먼 엘리베이터까지 언제 가나 싶은 생각과 나영이는 교과서 준비는 미리 하고 자고 있던 걸까 하는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소리를 듣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난감해지고 서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에 욱여넣기 시작한다. 이가 시리다며 고통스러워하다가 이 상황이 웃겨 결국 웃음이 터진다. 


 


 


 


 


 


 


 


 


 


 

 난 이제 학교에서 정국이를 한 번도 못 보더라도 전처럼 많이 슬프진 않았다. 물론 어제의 경우처럼 내가 노력해서 볼 수 있는 거라면 계속 시도할 테지만, 좀처럼 네가 교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오늘 같은 평소라면 어쩔 수 없기에 이제는 적응이 될 만큼 돼가는 것 같았고, 학교에서 못 보면 학원에서 귀라도 실컷 보면 될 일이니 마음을 긍정적으로 먹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중요한 건 뭐다? 남들에게 묻히는 거다. 그렇게 묻히고 묻히려고 노력했던 어제, 다행히 학원에서도 딱히 이렇다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제도 내게 꽂히는 네 시선이 왠지 좀 긴 것 같았고, 주책바가지처럼 미치도록 떨렸던 수학 시간은 순탄하게 흘러갔었다. 순탄했던 거에 한편으론 아쉬운 맘도 들었지만 중요한 건 뭐라고? 남들에게 묻히는 거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정국이의 안정된 일상의 일부가 되는 건 좋은 일이었다. 

 원래는 석식 전 자습을 빼고 병원에 갈 계획이었지만, 엊그제 병원 간다고 조퇴증을 끊은 애가 편의점 앞에서 노는 걸 담임쌤한테 걸린 탓에 그건 어렵게 됐다. 학원에 테스트를 보러 갈 땐 다행히 그 일이 있기 전이라 무리가 없었지만, 지금처럼 쌤이 사람 모양의 벽이 되어버린 상황엔 얘기가 달랐다. 진짜 아파서 쌤을 찾아가도 꾀병으로 의심받을 것이 뻔해 애초에 포기한 마음이었다. 아파서 갔는데 안 믿어주면 서러울 것 같아.. 아, 단체 생활은 이래서 조심해야 한다고. 한 명이 잘못하면 전체가 싸잡혀서 피해를 보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국 석식을 빠른 시간 안에 조금만 먹고 저녁 진료를 보는 정형외과에 가는 걸로 계획을 수정했다. 버스 타고 그렇게 멀지 않던데 잘 하면 학원에 늦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정류장에 나가자마자 학원 쪽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해 운 좋게 탔던 어제가 생각이 나, 오늘도 제발 버리는 시간 없이 딱 맞게 학원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뻑적지근한 발목이 최대한 바닥에 살살 닿게 조심하며, 아까 게시판 괜찮은 자리에 붙인 종이를 한 번 뿌듯하게 봐주고 1층 현관을 나섰다. 야자 감독하는 쌤만 아니면 저녁 시간까지 남아있는 선생님이 거의 없기에 조금 마음을 놓고 그대로 슬리퍼를 신은 채 걷기 시작했다. 걷는다기보다는 '다리가 다리를 끌고 간다' 정도지만 그래도 열심히 안 아프게 걷는 방법을 개척해나갔다. 생각해보니 그때 호석이랑 부딪혔던 어깨도 생각보다 오래 뻐근했던 것 같은데 이번엔 얼마나 갈는지. 저번엔 빨리 걸어오던 호석이라도 얕게 탓해볼 수 있었지만, 이번엔 그 누구 탓도 아닌 나 혼자 접질려버린 것이니 미워도 내가 미웠다. 조금만 정신 차리고 뛰었으면 안 다쳤을까 싶은 생각에 스스로를 자책해본다. 그랬으면 어제 정국이를 찾을 때 까치발을 안정적으로 들 수 있었을 거고, 운 좋게 세면대 앞에서 만났을 때 얘기를 조금이라도 더 하다가 헤어질 수 있었을 텐데. 발모가지와 맞바꾼 사랑은 생각하면 할수록 진한 아쉬움만 남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데, 멀찍이 뒤에서 누군가의 운동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뭐지. 왜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초여름의 푸르스름한 저녁, 밥을 먹고 운동장을 산책하는 몇몇 애들의 평화로운 말소리와 함께 공간을 울리는 걸 보면 그냥 걷는 애들 발일 수도 있겠다. 또 내 고개를 똑똑 두드리는 호기심에 뒤돌아볼 뻔하다가 번뜩 아침에 있었던 어색해 죽을 뻔한 상황이 떠올라 얼른 단념했다. 아침 일은 내게 교훈을 주었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고. 순식간에 뒤를 훔쳐보고 모르는 척하고 싶은 충동이 들다가도, 됐다며 작게 도리질을 하고서 다시 앞에 집중했다. 끊임없이 들리는 발소리와 함께하다 보니 어느덧 교문에 다 와가고 더욱 힘을 냈다. 그런데 다리를 저느라 속 터지게 느린 나를 앞지르지 않고, 이상하게 내 걸음과 속도를 맞추는 것 같던 발걸음이 이내 빨라진다. 뭐야.. 산책하는 거 아니었나. 왜 내 쪽으로 오는 거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뭔가 무서워져서 움찔하는데, 그때 들리는 목소리에 더 놀란다. 


 

​ "차 안 타?" 

 "..억?" 


 

 점점 빠르게 커지는 발소리에 왠지 겁이 나 가만히 멈춰 서자마자, 예상치 못하게 귀에 녹아드는 목소리 때문에 하마터면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고 돌아보니 그곳엔 향긋한 냄새와 함께 온, 덩그러니 서서 살짝 가쁜 숨을 뱉고 있는 정국이가 있었다. 내가 정국이 걸음 소리조차 알아채지 못했다는 거에 자존심이 팍 상하려고 하다가, 네 말을 듣고 말문이 턱 막혔다. 처음으로 네가 나한테 물음표로 끝나는 말을 한 거다.   


 

 "..." 

 "아.. 응. 걸.. 걸어다니려고." 


 

 반가움도 컸지만 네가 나한테 뭘 궁금해한다는 사실이 얼떨떨해서 눈이 자주 깜빡여졌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해보지만 좀처럼 내 맘대로 되질 않아 결국 말을 더듬고 말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며 잠시 나를 보던 정국이가 제 신발코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나를 본다. 다시금 서먹하게 마주보는 눈이 떨려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짧은 순간에 그 모든 시간의 분위기가 모두 꿈처럼 느껴지기 시작하고, 점차 모습을 감추려는 해가 물들인 하늘도 꿈의 한 배경처럼 스며든다. 


 

 "..." 


 

 사실 지금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학원이 아닌 병원에 가는 길이고 학원 차는 앞으로 안 타고 걸어 다닐 거지만, 다리가 낫기 전까진 버스를 타고 다닐 생각이야. 라고 이미 외치고 있는 마음이지만 그대로 전해줄 만큼 내 심장이 튼튼하지 않아 최대한 짧게 줄여 말했다. 내 영혼은 이미 너와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정작 육체는 제 몸이 아닌 것처럼 온몸에 오르는 열을 감당할 수가 없어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국이는 수긍하듯 약하게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그냥 가만히 나만 볼 뿐이다. 방금 석식 때 먹은 김이 추하게 어디 붙어있는 건가 싶어 불현듯 불안감이 닥쳐오는데, 그때 네 시선이 머뭇거리며 내 신발 쪽을 가리킨다.  


 

 "..그 다리로?" 


 

 작게 고갯짓을 하고서 금방 고개를 돌려버리고는 또, 헛기침을 큼큼 한다. 네 눈이 닿았던 발목을 괜히 내려다 봤다. 한참을 절뚝이며 고생하고 온 다리를 정국이가 알고 있었다. 


 

 "어어.." 

 "..." 

 "그, 그럼 탈까?" 


 

 병원에 가려 했던 계획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표정에 함축된 정국이 말을 따랐다. 멈췄던 발길을 돌려 어색하게 정국이와 걷기 시작하는데 둘 다 아무 말 없이 조용하다. 느린 내 걸음에 맞춰 더 느리게 오는 정국이 발소리가 내 마음을 쿵쿵 울린다. 

​ 

 "..." 

 "..." 


 

 눈을 여러 번 깜빡여보지만 내 옆에서 같이 걷는 사람이 너일 리가 없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기고 싶어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너도 고개를 숙인다. 


 


 


 


 


 


 


 


 


 


 

호수에 앉은 꽃잎이 수면에 얕은 파동을 일으켰다. 잔잔하던 호수가 여울진다. 
















 
라잇나잇
9월 전에 올 것처럼 말해놓고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ㅠㅠ 앞으로 제 목표는 1주 1편입니다!!(당당) 꼭 일주일 안에 다시 올게요..💜 그리고 댓글 진심으로 감사해요 비루한 제 작품에 정말 큰힘이 됩니다ㅠㅠ!! 독자님들 짱짱💕
6년 전
독자1
으아 ~~작가님 기다렸어요!! 오늘도 너무 평화롭고 설레네요 ㅎㅎ 글 읽으면서 제 발목도 접지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다리 끌고 다닌 것 같고.. ㅎㅏ핫 ; 오늘 작가님 오신 기념으로 정주행 한번 해야겠어요! 오늘도 소소하고 설레는 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
6년 전
독자2
작가님! 완전 기다렸어요 ㅠㅠ! 오늘도 글 속 여주와 정국이는 참 잔잔하고 평화로운게 너무 좋아요!!💜💜 좋은 글 너무너무 감사해요~!
6년 전
독자3
아진짜 힐링물 보고있는거같아요ㅜㅜㅜㅠㅠ
6년 전
독자4
정주행 하고 왔는데
진짜 제가 첫사랑 하는 거 같아요ㅠㅠㅠㅠ
너무 설레요ㅠㅠㅜㅜㅜ

6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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