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도경수를 만난 건 10년도 더 된 일이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정확히 날짜까지 기억한다. 대구는 다른 지역보다 꽤 더운 지역이었다. 교실에 비치된 선풍기 밑에서는 치열한 자리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6월 초였기에 아직 에어컨은 무슨, 간혹가다 선풍기까지 끄라고 하는 선생도 있었다. 그렇게 더운 여름날 도경수와 처음 만났다.
“이름은 도경수고, 서울에서 왔다.”
“서울?”
“경수는 저 백현이 옆에 앉자.”
“네.”
선생의 낯선 서울말에 애들의 반응은 모두 같았다. 답지 않은 서울말 쓰지 말라고. 무튼 일단 서울 애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관심거리를 독차지했다. 도경수에 대한 첫인상은 깔끔하게 생겼다였다. 답답해서 절대 하지 않는 넥타이를 다 갖추고 온 차림이었다. 덥지도 않나. 첫 날이라 교과서가 없다고 같이 보라는 선생의 말은 짜증을 돋궜다. 푹푹 찌는 날씨에 딱 달라붙어 책을 봐야한다니…
“야, 닌 이 봐라. 낸 빌리면 된다.”
“어? 그래도 돼?”
“준다 칼 때 보지? 확 뺐아 가는 수가 있으니까.”
고맙다고 작게 말한 도경수가 책을 자기 책상으로 가져갔다. 우선 옆 반에 아무한테나 빌려오고는 선풍기 아래 전쟁터로 뛰쳐 들어갔다. 아까부터 교실이 뭔가 시끌벅적했다. 남녀 분반인 학교였고, 분명 여기는 남학생 반이었음에도, 우리 교실은 여자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쉰 내난다며 투덜거리면서도 나가라고 뭐라 그러면 절대 나가지 않았다. 아마 저 전학생을 구경하러 온 것이겠지.
“아, 안 가나!! 가뜩이나 쫍은 교실 터지겄다!!”
“꼬우면 니가 가든가.”
무튼 경상도 가시나들은 굽히는 맛이 없다. 그 답지 않은 서울말을 써가면서 서울 어디 살다 왔어? 대구는 왜 온 거야? 라고 물을 땐, 정말이지 뒷통수를 한 대 갈겨버리고 싶었다. 종이 치고야 여자애들은 사라졌다. 그렇게 지루한 2교시가 가고 있었다. 복도 창 가 맨 뒷자리. 뒷 문과 가장 가까운 자리는 잠자기 좋았다. 앞자리에 한 덩치 하는 놈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한 몫 했지만. 책상에 다인 볼이 시원했다. 그도 잠깐 체온 때문에 금방 따듯해져 버렸다. 역사는 저 혼자 주절주절 거리더니 종 땡 치자 나가버렸다. 다음시간은 체육이었다.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더운 날 체육은 딱 질색이었다.
“저기…”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도경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체육복이 없어서 그런데…좀 빌려다 줄 수 있어? 빌려다 줄 수는 있었다. 도경수 덩치에 맞는 체육복이 있을까가 문제였다. 친구라고 해봤자 이 학교에는 박찬열이 다였다. 매일 나보고 키 작다고 놀리는 놈의 체육복이 나보다 작은 도경수한테 맞을 리 없었다. 그때 문뜩 떠오른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박진희. 찬열의 누나였다. 기다려 봐라. 빌려는 볼게. 진희누나의 반으로 가자 우리 백현이 왔냐며 엉덩이를 두드리는 누나에게 체육복 좀 달라고 했다.
“니 짐 입고 있는 거 체육복 아이가?”
“전학 온 아가 체육복이 없단다.”
“찬열이꺼 빌리지?”
“키.”
“푸핫-우리 백현이만 한기가?”
놀리지 말라며 진희누나가 가져온 체육복을 낚아 채 반으로 돌아와 도경수에게 던져 주었다. 고마워. 고맙다고 인사한 도경수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주번인 놈이 빨리 나가라며 재촉하는 소리에 일부러 더 뻐길까…하다가 나왔다. 축구나 하라며 축구공 하나를 던져 준 체육이 에어컨 나오는 체육실로 튀어버렸다.
씨발, 내가 짜증나서 선생하련다. 애들의 불평이 한창이었다. 익숙하게 난 내 자리를 찾았다. 체육창고 옆 심어져 있는 나무 그늘 아래였다. 그나마 시원한 곳이었다. 바닥도 보도블럭이라 시원하고. 혼자 어쩌지도 못하고 있는 도경수가 보였다. 야, 일로 온나. 쭈삣쭈삣 내가 앉은 쪽으로 다가온 도경수가 왜 불렀냐고 물었다. 도경수의 손목을 잡고 훅 끌어내렸다. 걍 앉아가 쉬라고. 저 덩치한테 공 쳐맞았다가 피 볼 일 있나. 가시나처럼 무릎을 세우고 무릎을 끌어안은 도경수가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렸다. 4교시가 끝나면 전쟁통이 시작된다. 이 놈의 학교는 레이디 퍼스튼지 뭔지 무조건 여자 반 먼저였다. 더워서 입맛도 없었던터라 그냥 박찬열이라 매점으로 향하기로 했었다. 우리 교실로 온 박찬열의 얼굴은 지겹도록 밝았다. 가끔 뭔 생각을 하고 사나 싶기도 했고.
“어? 니가 그 소문의 전학생!”
“지랄 좀 고마하지?”
농담도 못하냐며 실실 쪼개는 박찬열의 뒷통수를 한 대 쳤다. 가방에서 지갑을 챙겨 교실을 나섰다. 맛있는 게 나오는 날인지 매점은 꽤 조용했다. 박찬열의 미친 친화력 덕에 매점 아줌마에게 얻어먹은 게 한 두 개가 아니다. 학생이 몰릴 때 키 큰 박찬열이 눈에 띄면 박찬열 먼저 계산을 물론이요, 가끔 학생 없을 때면 초코파이를 하나 쥐어주기도 한다. 그러면 저 놈은 초코파이보다 몽쉘이 좋다나 뭐라나. 무튼 정신세계가 정상인 놈은 아니였다. 그렇게 빵과 우유를 사고 의자에 앉았을 때 매점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도경수였다.
“어? 전학생!!”
“…아, 안녕.”
쪽팔린다. 하지 마라. 긴 팔을 휘휘 저으며 실실 쪼개는 박찬열이 쪽팔렸다. 뭐, 한 두 번은 아니지만. 도경수도 급식 먹을 생각이 없었나보다.
크림빵하나라 초코우유하나.
빵과 우유를 든 도경수를 데려와 앉힌 건 박찬열이었다. 와, 니. 박찬열의 감탄사에 도경수가 박찬열을 힐끗 쳐다보았다. 졸라 초딩 입맛이네.
저 병신. 그냥 내가 박찬열에게 내린 결론은 저거였다. 병신. 또라이. 그 이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박찬열과 내가 빵을 우거지로 입에 집어 넣는 한 편 도경수는 초코우유에 빨때까지 꽂은 채로 한 입씩 오물오물 씹어 삼키고 있었다. 진짜 오물오물. 그래 먹어가 배가 차나. 내 물음에 도경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 위가 약해서 꼭꼭 안 씹어 먹으면 배가 아파서. 뭐 대충 납득 가는 이유였다. 빵과 우유를 해치운 우리 셋은 손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쥔 채 매점을 나왔다.
교실로 올라가는 와중에 퍽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은 나는 짐작했다. 분명 진희누나다. 뒤를 도니 제 목에 매달려 있는 진희가 보였다. 누나, 지금 고목나무에 딱 붙어 있는 매미 같은 거 아나? 피식 웃은 누나가 목에 감은 손을 풀었다. 어? 아, 그 체육복? 도경수를 보고 진희가 한 말이었다. 순간 당황했다. 여자 옷을 줬다고 말 한적 없어기에, 괜히 자존심 상했을까봐. 다행히 그런 눈치는 아니었다. 그냥 쭈삣거리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넬 뿐.
“아, 안녕하세요.”
“이름 뭔데?”
“도경수,”
진희야! 뒤에서 누나를 부르는 소리에 손인사를 하고 진희누나는 사라졌다. 도경수는 엄청 어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그 날 하루가 지나갔다. 오후수업은 꽤나 무료했다. 국어, 수학, 영어라니. 정말 최악의 시간표였다. 꾸벅꾸벅 고개는 자꾸 아래로 쳐졌고, 눈꺼풀은 박찬열 한 명 매단 듯 무거웠다. 7교시가 끝나는 종이 치자 눈꺼풀은 빠르게 가벼워졌다. 하지만 담임은 정말 느려 터졌다. 종례를 하루 종일 할 생각인지 다른 반은 다 마쳐서 운동장을 벗어 날 동안 종례 중이었다. 담임을 잘못 만나도 한 참 잘못 만났다고 생각했다. 기나긴 종례가 끝나고 교실 밖에는 박찬열과 진희누나가 서 있었다. 늘 셋은 함께 다녔다. 어렸을 적부터. 잘 가. 인사소리에 뒤를 도니 도경수였다. 검은색 백팩을 맨 도경수가 손 인사를 하고 누나한테는 꾸벅 인사를 하고 총총총 계단을 내려갔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도경수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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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아아, 잘 갔다 와아. 졸려서 눈을 다 뜨지 못한 채로 배웅하겠다고 현관문에 서있었다. 그게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경수야, 뽀뽀. 입술을 쭉 내밀자 도경수는 짧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나름 재미있게 살고 있다. 매일 도경수의 얼굴을 보고, 매일 도경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매일 도경수와 입 맞추며. 똑같이 매일 보는 박찬열이나 진희누나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그들은 맘 터넣고 지낼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같은 존재라면, 도경수는 나에게 평생 함께 가고 싶은 배우자 같은 관계랄까.
하...작품 하나 쓴지 얼마 됬다고...묵혀 뒀던 글 꺼내 오고 싶어서...하하..ㅜㅠ
비루한 글이지만 댓글쓰고 포인트 받아가세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