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바뀌고 어제와 같이 백현은 경수의 집에 와 있었다. 태영은 여전히 골아 떨어져 있었고 웬일로 수진도 쌔근쌔근 잘 자고 있었다. 백현은 그런 수진 옆에서 자고 있었고. 종인의 아침밥을 하고 있는 와중에 밀고 들어온 두 사람 덕에 한 공기만 뜨면 되는 밥을 한 공기 더 떴다. 그렇게 두 사람을 보내고 난 뒤 경수도 한숨 더 잘까 싶어 방에 들어와 태영 옆에 누웠다. 아침에 잠깐 깬 태영을 다시 재우느라 종인의 바닥으로 쫓겨나고, 태영이 경수와 종인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늦게까지 늘어지게 잔 네 사람이 일어난 건 점심때였다. 제일 먼저 일어난 경수가 잠에 취해 눈을 끔뻑거리고 있을 때, 태영이 일어났다. 경수와 똑같은 자세로 눈을 끔뻑끔뻑. 피식 웃은 경수가 태영을 안아들고 거실로 나왔다.
“이모랑 수진이 자니까 조용히 하자.”
“수지니!”
“응. 수진이.”
얼마 안 가 수진이 깨고, 백현도 깼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수진의 칭얼거림이 오늘따라 심했다. 백현이 걱정스런 얼굴로 수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경수야, 수진이 열나는 거 같아…경수가 달려와 수진의 이마를 짚었다. 열 좀 나는 거 같은데…병원 가 보자. 울상을 지은 백현이 수진에게 겉옷을 입히고 저도 겉옷을 입었다. 수진은 백현의 옷을 꾹 쥐고 있었다. 경수도 백현을 따라가려고 했으나 태영 때문에 집에 있었다. 아직 병원에 막 데려가기엔 태영은 아직 아기였다. 병원에 가는 게 좋을 리 없었다. 할 수 없이 백현 혼자 병원으로 향했다.
“수진이 진료실 들어갈게요.”
백현이 수진을 안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칭얼거리느라 수진의 눈가는 발갰고, 고사리 같은 손에는 백현의 두꺼운 점퍼가 가득 쥐어져 있었다. 겨우겨우 수진을 의사 쪽으로 돌린 백현이 수진의 윗옷을 살짝 들췄다. 청진기를 이리저리 대보고, 여기저기를 살핀 의사가 컴퓨터에 무언가를 치더니 귀에서 청진기를 빼며 말했다. 감기네요. 좀 심한 거 같은데, 모르셨어요? 백현이 심하다는 말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즘들어 엄청 칭얼거리진 않던가요? 항상 칭얼칭얼 울었던 수진이기에 백현은 요즘 심해졌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백현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그렇게 심한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시고, 약 지어드릴테니 먹이시고, 3일 뒤에 한 번 더 오세요. 고개를 끄덕인 백현이 수진의 옷을 정리하고 점퍼 재킷을 올린 뒤 수진을 고쳐안고 꾸벅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 들러 약을 타곤 경수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프다는 걸 알고 나니 수진이 힘없이 축 처져있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픈지 쌕쌕 숨만 내쉬며 백현의 옷깃을 꾹 잡고 잠들어 있었다.
경수가 백현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태영이 쪼르르 따라 나와 경수의 다리를 잡고 서있었다. 백현이 방에 수진을 눕혀두곤 밖으로 나와 쇼파에 털썩 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로 백현이 얼굴을 파묻었다. 경수가 흠칫 놀라 백현의 옆에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백현이 훌쩍거리고 이었다.
“난 우리 공주님 아픈 것도 모르고, 나 막 말 안 듣는다고 갖다 버려야겠다고 했단 말이야아…”
결국 울음이 터진 백현이 무릎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큰 울음소리에 경수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태영이 움찔했다. 경수가 태영을 안아들어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러자 태영이 작은 손으로 백현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얼마 후 찬열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경수의 집으로 들어왔다. 수…수진이 아프다고? 많이?! 엄청 달려 온 모양인지 찬열이 헉헉거리며 물었다. 경수가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댔다. 쉿, 애 깰라. 합 소리를 내며 입을 손으로 막은 찬열이 백현의 옆에 앉았다. 백현이 움찔하며 슬쩍 고개를 찬열 쪽으로 돌렸다. 현아. 많이 울었어? 다정한 찬열의 목소리에 백현은 또 다시 울음 터져버렸다. 흐엉, 찬열아아. 그렇게 한참 훌쩍이던 백현의 울음은 수진의 울음소리에 묻혀들었다. 후다닥 달려간 백현이 수진을 안아들었다. 수진과 백현 모두 눈가가 발갛게 변해 있었다. 수진이 칭얼거리며 백현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힘이 없는지 어깨에 축 기대 한 손은 백현의 옷을 꼭 쥐고, 한 손으론 백현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공주님, 맘마 먹고 약 먹고 코 자자. 백현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수진 때문에 찬열이 이유식을 데워 와 백현을 마주보고 앉아 한 숟갈씩 떠 먹여 줬다. 다행히 수진은 따박 따박 잘 받아먹었다. 그것도 잠시 곧 먹기 싫어진 것인지 다섯 숟갈 쯤 남기고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그러곤 백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찬열에 입가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자 우엥하며 또 울음을 터뜨렸다. 앉아 있던 백현이 벌떡 일어나 수진을 이리 저리 얼렀다.
“찬열아. 거의 다 먹였으니까, 좀 이따 약 먹이자.”
“우리 공주님 얼굴 빨간 것 봐.”
“아, 속상해에”
그새 백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찬열이 울지 말라며 백현을 토닥거렸다.
어마, 태여이! 태영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경수가 고개를 내려 깔았다. 태영이 안아달라는 듯 팔을 쭉 뻗었다. 경수가 태영을 안아 올리자 태영이 손가락으로 백현을 가리켰다. 경수가 백현에게 한 발 다가서자 태영이 수진의 등을 토닥였다.
“수지니 낸내!”
“…태영아, 수진이 아프데.”
“으?”
“아야. 수진이 아야한데.”
아야? 태영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리고 곧 으엥 소리를 내며 울어버렸다. 태영이 우는 것이 낯선 경수가 깜짝 놀라 태영을 얼렀다. 등을 토닥이며 이리 저리 바쁘게 걸어 다녔다. 뭔가 웅얼웅얼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울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울음을 그친 태영이 입에 손가락을 물고 훌쩍거렸다. 경수가 손가락을 입에서 빼며 태영과 눈을 맞췄다. 우리 왕자님 왜 울었어요? 경수의 물음에도 태영은 그저 경수의 품을 파고들었다. 경수는 이유도 모르고 그냥 품을 파고드는 태영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약을 먹이는 것도 전쟁이었다. 백현이 수진의 팔을 붙잡고 가만히 앉히려 했지만 이리 버둥 저리 버둥 찬열이 약을 한 번 먹여보겠다고 난리였다. 어쩌다 입에 한 번 들어가면 약이 쓴지 엉엉 울어재꼈고, 그 울음에 마음이 약해진 백현이 약통을 입에서 빼내기를 반복했다. 한숨을 쉬며 찬열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할 수 없이 분유에 태워서 쓴 맛을 어느 정도 없애 먹였다. 진이 빠진 찬열이 쇼파에 널부러졌다. 그 한 바탕 전쟁이 수진에게도 벅찼는지 백현의 품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태영도 경수에게 안겨 잠이 들었다. 둘을 모두 방에 눕혀 놓고 거실로 나왔다.
“종인이한테 전화해둘게. 좀 쉬어.”
고맙다고 손을 흔든 찬열이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백현도 터덜터덜 걸어 찬열 위에 털썩 엎어졌다. 찬열이 팔을 올려 백현의 등을 토닥거렸다. 수진이 약 안 먹으려고 한참을 땡깡부리다가 먹고 잠들었어. 응. 응. 응, 알겠어. 응, 빨리 와. 주방에서는 경수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으면서 주방에서 나온 경수가 한 숨 자라고 했다. 백현은 올 때부터 편한 차림이었지만, 찬열은 정장차림이었다. 조심히 방에 들어가 종인의 옷을 가져다 주면서 갈아입고 한숨 자라며 이불도 던져줬다. 작은 방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은 찬열이 거실로 나와 벌써 골아떨어진 백현 옆에 자리하고 누웠다. 배까지 덮여진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려 주곤 찬열도 눈을 감았다. 혹시 추울까 보일러 온도를 살짝 올린 경수는 장을 보려 지갑과 차키를 챙겨 나왔다.
카트에 이것저것 주워 담다보니 벌써 한 짐 이었고, 가격도 20만원을 훌쩍 넘겼다. 머리를 긁적이며 카드를 내민 경수가 하나하나 카트에 다시 옮겨 담고 커다란 박스를 만들어 하나씩 차곡차곡 담았다. 끙끙 거리며 차에 실은 뒤 집으로 향했으나 어떻게 들고갈지가 문제였다. 분명 찬열과 백현은 자고 있을테니. 형? 트렁크 앞에 서있던 경수 뒤로 종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인아! 갑자기 반가워진 종인의 얼굴에 경수가 종인을 확 끌어안았다. 급작스런 스킨쉽에 놀랐지만 금새 꼭 안아준다. 결국 상자 두 개를 나눠들고 온 두 사람이 주방에 상자를 내려두곤 하나씩 정리를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찬열이 잠에서 깨고, 눈을 비볐다. 저녁 먹고 갈꺼지? 찬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이 툭툭거리는 소리에 경수가 방문을 열자 태영이 뒤뚱뒤뚱 걸어 나왔다. 아쁘! 휴지를 작은 방에 가져다 두려던 종인을 발견했는지 우다다 뛰어가려다 걸음이 서툴러 퍽 엎어져버렸다. 깜짝 놀란 종인이 손에서 휴지를 놓고 태영에게 달려갔다.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차 있는 태영이 입을 쭉 뺐다.
“아야 했어?”
“태여이 아야아.”
“어디보자, 괜찮아. 태영이 하나도 안 아프다!”
“아야아아-”
결국 눈물이 터져버렸다. 그래도 태영은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며 부딪힌 무릎을 만지고 있었다. 우는 소리에 놀란 경수가 냉장고 정리를 하다 거실로 나왔다. 종인에게 안긴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태영에게 다가가 손을 뻗자 태영이 경수에게로 손을 뻗었다. 경수가 태영을 받아들자 태영에 경수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우리 왕자님 아팠지? 기저귀도 다 젖었네. 기저귀 갈자. 얼마 안 가 눈물을 그친 태영은 손에 과자 하나를 쥐곤 쇼파에 앉아 있었다.
“태영아.”
“으?”
“너 삼촌 아들할래?”
“으?”
뜬금없는 찬열의 발언에 경수가 찬열의 어깨를 툭 쳤다. 어디서 감히 남의 집 귀한 아들을. 결국 다시 드러누워 백현의 허리를 끌어안은 찬열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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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다음편 부터는 애기 태영이, 수진이가 아니라 유치원생으로 나올 꺼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