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준면아 생일 축하해 :)
그리고는 너와 같이 누워 눈뜨는 날이 몇 번 더 지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5월이었다. 학교는 온통 초록색으로 변했고, 입학할 때 앙상했던 나무들은 연두색 빛 잎사귀들로 빈틈이 매워져있었다. 그맘때, 내게도 그리고 찬열이 너에게도 꽤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이상하게도 강의실이 없는 정경대학 1층에 위치한 내 사물함에 계속 언제부턴가, 매일매일 새로운 자유시간과 우유속의 모카치노가 들어있었다. 며칠은 그저 사물함에 자물쇠가 없기에 친구들의 호의인가 했었고, 또 며칠은 찬열이인가 했지만 나와 거의 24시간 붙어있다 보니까 그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몇몇 친구들은 나를 좋아하는 학과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놀렸다. 그래서 찬열이는 괜히 기분이 나쁘다며 자물쇠를 걸어버렸다. 내 생일로 비밀번호를 맞추고는 사물함을 잠가놓았는데 첫날은 그 어떤 것도 없더니, 둘째 날은 이틀 뒤가 상영날짜인,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표가 두 장 들어있었고 셋째 날부터는 다시 자유시간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틀 뒤 영화를 볼 때 누가 내게 매일 관심을 보내는지 눈치 챘다. 물증은 없었지만. 아주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난 그날 영화관에서 네 뒷모습을 보았다. 내가 그동안 네가 범인일 가능성을 잊고 있었다. 나는 그 점조차도 네게 미안했다. 나는 그날 그 영화관에서, 그리고 내 두 번째 뒤 열에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네 갈색 머리를 보았다. 내 계절이었던 사람이, 내게 많은 사랑을 줬던 사람이 그 곳에 앉아있었다. 나는 아주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사실은 너임이 확실했지만,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다음 날 아침 아주 일찍 집에서 나왔다. 수업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강의실에 도착했다. 가방을 내려놓고는 일층으로 내려가 사물함 근처에 있는 우리학과 과 학생회 실에서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네가 아닌 그 누군가이기를. 그리고 이어폰을 꺼내 핸드폰에 연결하고는 복도를 바라보며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십분 쯤 지났을까 네 사물함인 것처럼 능숙하게 내 자물쇠를 여는 너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복도를 바라보다가 혹시나 네가 나를 볼까봐 문에서 멀어진 후 의자에 주저앉았다. 네가 얼른 이 곳을 벗어나기를 바라며. 누군가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에 나는 다시 문 쪽으로 다가가 복도를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내 사물함을 열었더니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유리병에 담긴 사과주스가 들어있었다. 나는 백현이의 뒷모습을 그리면서, 아주 많이 슬퍼졌다.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했던 내 바람이 네게는 아주 나쁘고 이기적이게 느껴졌을 것 같아서. 너는 아직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그동안 내가 행복했던 게 조금 많이 미안해졌다.
그런데 미안하다고 해서, 나는 백현이에게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찬열이 옆에서 느끼는 행복이 백현이의 옆에서의 그것보다 컸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동물임을 여기서도 느꼈다. 그리고 찬열이에게 마저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행동으로 인한 상처를 주는 것은 한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기에, 나는 그저 정경대학 402호에 엎드려 찬열이를 기다렸다. 얼른 내 앞에 네가 나타나서, 내 이런 생각들을 밝게 비추어 없애주길. 그리고 내게 편안함을 주기를 빌었다. 다시 내 머릿속을 채우고 들어와서 내가 네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기를. 너는 내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어느새 내 옆에 앉아있었다. 너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 범인은 잡았어?”
“ 아니. 내가 한 시간 전에 왔는데 그 것보다 훨씬 부지런 한 것 같더라.”
“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 그래서 오늘은 뭐 받았어?”
“ 이거.”
나는 가방에서 사과주스 한 병을 꺼내며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리고는 아주 쉽게 병을 열어서 한 모금 마셨다. 백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사탕 맛이 여기에서도 나는 것 같았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찬열이에게 내가 한 거짓말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대한 어제와 똑같이 행동하고 싶었다. 책에 밑줄을 그었고, 공책에는 필기를 했으며 교수님의 눈을 바라보며 수업 내용을 머릿속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한 여자 선배가 나를 불러내었다. 내 등을 치는 손길에 내가 너무 화들짝 놀라서 본인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복도를 지나 자판기 앞에서 멈춰 섰다. 항상 교수님 질문에 답도 잘하시고, 긴 생머리에 항상 청바지 그리고 기본 디자인의 운동화를 즐겨 착용하는 참 예쁜 대학생이다, 라고 그녀를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나와 찬열이가 뭔가를 물어보면 항상 웃으면서 대답해주고, 후에는 이해했냐고 따로 연락을 해줄 만큼 친절했다. 음료수를 두 개 뽑아서 하나를 나에게 건네며, 그 선배는 나에게 찬열이와 친하냐고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수업 끝나고 우리 둘이 밥을 먹을 수 있냐고 묻고는 웃으며 자신이 사겠다고 말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같은 사람이라면 아주 여러 번이라도 친해지고 싶었다. 나는 찬열이를 집으로 먼저 보내고 그녀와 학교 근처의 부대찌개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내가 아는 밥집 중에는 여기가 제일 맛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밥을 먹기 전에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는 나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물었다. 학교생활이 힘들진 않은지, 어떤 다른 수업을 듣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는 밥을 한참 먹다가 내게 부탁했다.
“ 내가 부탁이 있는데, 경수야.”
“ 뭔데요? 웬만하면 다 들어드릴게요.”
“ 찬열이랑 나랑 사귀게 도와주면 안 될까? 만나는 여자는 없는 것 같던데.”
나는 먹고 있던 밥을 뱉을 정도로 크게 사래가 들렸다. 그녀는 내게 휴지와 물을 가져다주면서 괜찮은지 물어봤다. 나는 대체 어떻게 말해야할지 몰랐다. 분명 만나는 여자는 없다. 근데 만나는 사람은 있고, 그게 나라는 것을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내 친구가 알려준 번호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는 방법을 써야겠다고, 번개처럼 생각했다.
“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던데. 한번 물어는 볼게요.”
그녀는 좋아하는 사람 없었으면 좋겠는데, 하고는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는 헤어지기 전 내 손을 잡으며 꼭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짜증났지만 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체했다. 그녀와 먹었던 밥을 내 속에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변기를 붙잡고 토해내려고 노력했다. 내 등을 게워주려 도우는 찬열이의 손길이 기분 나빴다. 웃음 좀 흘리고 다니지 말지. 나는 그녀도, 왜인지는 모르게 찬열이도 미웠다. 결국 나는 모든 걸 게워내고는 내가 항상 화나고 답답할 때 전화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오라고 소리 질렀다. 전화에서 걔는 나에게 소리 지르며 서울대입구역으로 오라고 욕을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지갑과 핸드폰을 챙기고는 집을 나섰다. 찬열이가 어디 가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소리 나게 닫고는 길로 뛰어나가서 택시를 잡아탔다. 그냥 빨리 걔를 만나고 싶었다.
혈육인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사이. 나와 가은이의 사이를 말하자면 딱 그렇다. 이종사촌인데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닮은 점이 없었다. 나는 욕을 선천적으로 싫어했고, 걔는 욕을 잘했다. 나는 사람을 사귀는 것이 어려웠지만 걔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기운이 있었다. 걔 옆에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사람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의 공통점을 하나만 뽑자면 아주 깊은 외로움에 종종 빠진다는 점이었다. 뭐, 걔는 쉽게 벗어났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또 우리의 차이점이겠지만. 아, 그리고 그녀는 백현이가 부모님께 소개시킨, 인생에서 두 번째 친구였다. 그 아이를 아는 또래의 친구라면 고민이 있을 때 항상 걔를 먼저 찾아가고는 했다. 누가 봐도 또래보다 인생 경험이 많았고, 넓게 생각할 줄 알았으며 무엇보다도 남의 취향을 존중할 줄 알았다. 우리 나이 때는 다 그런 거라고 혹은 내 고민이 별거 아니라는, 걔 말을 들으면 왠지 논리가 부족해도 진짜인 듯 느껴졌고 기분이 나아졌다. 걔는 자기가 항상 좀 예쁘고 몸도 날씬했다면 세계를 제패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어본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걔는 서울대에 들어갈 때 남들의 반도 안 되는 노력으로 들어갔고, 그 곳에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벌써 학생회에서 학생회장 감으로 얘기되고 있다고 이모가 말했다. 이모는 원래 자랑을 잘 안하시는 분이니까, 아마 사실일 것이다. 서울대입구역 앞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걔는 나를 기다리며 아이스커피 두 잔과 함께 앉아있었다. 이상한 안경을 쓰고 있기에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 야 너 KFC 할아버지 같아.”
“ 나도 알아. 큰 안경 쓰면 얼굴 작아 보인다고 해서 샀는데, 미친. 안경 집 테러할거야.”
나는 자리에 앉으며 요즘 뭐하고 사냐고 물었다.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내게 그냥 학교를 다닌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스커피에 꽂혀있는 빨대를 물고 커피를 마셨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속이 뚫리는 기분이다. 가은이는 나를 보다가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 나 일주일 전에 변백현 만났어. 깨졌다며. 걔 죽어가던데. 그리고 어제 변백현 어머니 만났어. 우리학교에 로스쿨 특강 오셨더라. 서울에 한 달 정도 계실 거라던데, 셋이 같이 밥 먹자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 그런 건 본인이 하시지. 어쨌든 변백현도 오케이 했어. 다음 주 수요일에 신라호텔 일식당 일곱 시야. 태어나서 처음 그렇게 비싼 밥 먹을 듯.”
나는 먹던 아이스커피를 뱉었다. 나는 쟤한테 아무 것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백현이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 우리 모습을 보고는 눈치 챘겠지. 참 무서운 애다. 가은이는 나를 바퀴벌레 보는 표정으로 보다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내 앞으로 던졌다. 나는 그 휴지를 주워서 내 옷을 닦고 탁자를 닦았다. 그리고 가은이는 내게 너도 나 그래서 만나자고 했냐며 욕을 했다. 자기들 필요할 때만 찾는다고.
“ 백현이 어때? 잘 지내?”
“ 걔 좀 있으면 얼굴 소멸될 것 같던데. 원래 헤어지는 건, 주위에 누가 계속 끊임없이 얘기를 해줘야 그제야 실감하는 거야. 내가 맨날 카카오톡으로 헤어졌다고 보내니까 걔 나한테 어제 전화해서 욕했어. 미친 새끼. 내가 지랄이라고 말했어. 지랄 작작하라고. 혹시 너 변백현한테 요새 선물 받은 거 없어?”
“ 네가 어떻게 알았어?”
“ 그거 걔가 뭐 어떻게 하냐고 자꾸 물어보니까 그냥 짜증나서 뭐 선물이라도 사다 바쳐봐 이랬더니 진짜 했나보네. 걔는 항상 창의력이 부족해. 그게 뭐냐. 유치원생이냐.”
나는 가은이의 표정을 보면서 오랜만에 정말 웃겨서, 아주 크게 웃었다. 우리에게는 세상이 끝날 것 같이 슬픈 일이었으나 아마 쟤 같은, 제 3자에게는 그냥 하나의 사건일 뿐이겠지. 계속 언급하면 짜증이 날만한 그런 별거 아닌 사건. 이상하게도 나는 그 때부터 가은이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고. 걔는 이상한 추임새를 넣으며 내 말을 계속 들어주었다. 그리고 목이 마르다며 이상한 음료수를 하나 더 사먹더니 내게 말했다.
“ 원래 인간은 다 이기적인거야. 그리고 다 그러니까 너는 네 생각만 하면 돼. 변백현도 너를 위하는 게 아니라 지가 네가 좋고 만나고 싶고 그러니까 미련 떠는 거지. 그거를 네가 왜 매번 걔한테 미안해해야 돼? 나는 변백현이 나한테 똑같이 물어봐도 똑같이 대답했을 거야. 너를 내가 가족이라 그래서 옹호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또 막 너는 바람피운 것 같아서 미안하다며. 그럼 그냥 미안하구나 하면 되는 거야. 이미 피운 바람이 뭐 네가 미안해한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변백현한테 돌아가고 싶은 건 또 아니라며. 지금 만나는 그 찬열이라는 사람이 좋다며. 그럼 좋은 대로 그냥 살면 되고. 누가 걔 좋다고 고백해서 짜증이 나면 그거 꼭 그 사람한테 말해라. 어떤 관계든지 소통, Communication 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냥 지금 있는 사람한테나 잘 해. 집 가서 꼭 말하고. 그리고 나 신라호텔에서 밥 꼭 먹고 싶으니까 다음 주 수요일 일곱 시에 꼭 나와. 살면서 이런 기회 흔치 않다.”
나는 가은이의 말을 하나하나 잘 새겨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별거 아닌 일상 얘기를 조금 더 하다가 밤 열한시쯤 헤어졌다. 그리고 가은이는 내 택시를 잡아주고는 나를 태우면서 말했다. 내 동생 사랑한다고. 나는 그래서 나보다 고작 몇 달 빨리 태어난 그 애에게 누나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주 밝은 기분으로 집으로 달려가는 차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 얼른 찬열이 얼굴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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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이는 제가 되고 싶은 저고, 제 일부분을 형상화 시켰다고 해야할까.
백현이 미련떠는 모습도, 경수의 질투하는 모습도, 찬열이의 일상도 모두 사랑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