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美
w.리조트
호석의 집으로 갔던 그 날,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다. 그녀의 슬픈 눈에선 호석이 보였다. 울먹이며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겠냐며 나를 안아오는 그 품에서 또 한참을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의 품에선 익숙한 누군가의 향기가 났다. 오래 전 어렴풋이 맡아본 듯한 친모의 향기였다.
"아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
"여기서 살자. 응? 여주야 이제 다 잊고 여기서 살아.."
그날, 우리는 어슴푸레한 새벽이 방을 밝힐때까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춤을 춘다고 했다. 비록 형편이 형편인지라 학원은 다니지 못했지만 그는 어디서든 춤을 추고 싶어했다.
학교 동아리던지 춤을 추는 사람들과의 모임에서든지.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춤을 배워본 적이 없었지만 그는 사람들이 소위 일컫는 '재능'을 가진 아이였고, 실제로 그 어떤 누군가의 손길도 거치지 않은 정호석만의 색깔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타지로 이사를 갔지만 정호석의 아버지는 함께 내려가지 못했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는 내려가지 않았다. 이혼을 했다나 뭐래나, 무심하게 남일처럼 말하는 호석의 표정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애써 잊으려고 하는 그의 얼버무림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색한 웃음.
생계유지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그의 어머니마저 집에서 머무는 시간은 저조한 듯 했다. 하늘의 색깔이 푸른색에서 검은색으로, 다시 푸른색으로 총 두 번이 바뀌고 나서야 그의 어머니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와 아침을 준비하셨다.
"진짜 어렸을 때부터 봤는데. 시간 참 빠르다."
"응."
"하도 매일 붙어다니다가 갑자기 떨어지니까 학교생활 더럽게 재미없더라."
"나도."
"대도시 살다 온 기분이 어때? 여긴 그렇게 삐까뻔쩍한 곳이 아니라서."
"너도 같이 살았었잖아."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해. 그때랑 지금이랑 같냐."
"한결같았지."
넓은데 시끄럽고, 365일 잿빛으로 물들어있는곳.
"넌 어때?"
"여기? 큰 도시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족함 없지."
"맞다, 오면서 경운기 3대 봤다?"
"최고네. 이 마을에 몇 대 있는지 알면 소원 들어준다."
"이장님 찬스 쓰면 되지."
잠에 취해 몽롱한 와중에도 가벼운 농담을 던지니 실없이 웃으며 바닥에 이불을 깐다. 느리게 눈을 깜빡일때마다 그의 잔상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가만히 누워 바라본 호석은 십 몇 년 전과는 전혀 다르게 커 있었다. 어릴 땐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이젠 아마도 좀 더 올려다 봐야 할 듯 싶었다. 헤어질 땐 둘 다 어렸는데. 언제 이렇게 컸대.
"왜 또 울어."
"그냥. 이게 사람 사는 일상이구나. 이렇게 살아왔구나. 싶어서."
"여지껏 혼자 이불 깔다 남이 하는거 보니까 그렇게 신기해? 눈물날 정도로?"
"따뜻하고 간지러워. 마지막으로 언제 느꼈는지 모르겠다."
"자다 추우면 말해. 보일러 온도 높여줄께."
"그래."
"필요한거 뭐 없어?"
"....필요한 거?"
필요한 것이라.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입각해 수중에 얻고자 하는 것. 어릴적부터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쥐어본 적이 없는터라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머뭇거리고 있으니 살짝 당황한 듯 눈을 도로록 굴린다.
"물 마시고 싶다거나, 사소한 거라도 괜찮은데."
"꼭 지금 당장 필요해야돼?"
안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었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것.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을 택함으로써 나는 소생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몸은 그대로였지만 마음은 다시 태어났고, 눈 앞의 모든것이 두려웠다. 갓 태어나 일어서기 위해 의지하여 잡을 수 있는 지팡이가 필요했고, 호석은 기꺼이 자청했다.
17년 동안 단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것.
"이따 생기면 바로 얘기해. 일단은 자자."
나는 사랑이 필요했다.
열정과 땀에 흠뻑 젖은 티셔츠를 정호석이라고 표현한다면 나는 반으로 깨져 파편이 주위에 널브러진 맥주병들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날카롭고, 위태로웠다.
정호석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있어 아빠의 죽음은 불행의 끝이자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가 내밀어준 손은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살아보자는 최후의 설득이자 위로였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꽃 한 송이에 조심스레 물을 먹여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
[010-XXXX-XXXX]
11자의 숫자를 눈 앞에 두고도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이면 스피거 너머로 그토록 보고싶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건만, 이상하게 그 단순한 행동이 참 어렵다.
어린 아이처럼 어리광 피우며 당장 돌아오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면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와 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호석이 있었다면, 그렇게 갑자기 아픈 곳을 찌르는 전정국에게도 상처받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처럼 보살핌을 받았겠지. 그의 품 안에서, 비참하게.
"....."
홈버튼을 눌러 화면을 종료시키고 멀리 던져 버렸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뒤집힌 휴대폰의 틈새 사이로 빛이 새어나왔다.
예전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알을 깨고 직접 내 눈으로 세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겠다고 다짐했건만.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두려웠다. 제 앞에 내밀어진 손조차 함부로 믿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상처를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은 들지만 막상 눈 앞에 내밀어진 낯설음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호석에게 전화를 거는 순간, 이 모든 다짐과 결심은 수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매 순간 그가 떠오르지 않은 적이 단 일 분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이 괴로웠고, 홀로 남겨진 나의 공간이 하염없이 추웠다.
-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
거울 앞에서 눈에 띄게 휑한 정수리를 꾹꾹 눌러보았다. 비어있는 두피의 맨살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발모벽이랜다. 들어는 봤냐?"
강박증의 일종이라 덧붙인 남준이 화장실 문 앞에서 거울 너머에 비친 나의 얼굴에 대고 핀잔을 주었다. 탈모가 온다고 인간아! 거울에 비친 남준이 빽 소리를 지르기에 그에 대고 보란듯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분노를 짓씹다 이내 보란 듯이 한숨을 쉰다.
최근의 상태를 알고 있던 터라 더 이상의 일갈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목소리로 그만 좀 뜯어, 하고 걱정스러운 푸념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밥 좀 거르지 말고. 거의 뭐 거식증 수준으로 밥을 안 먹고 계시잖아요 예?"
"억지로 먹으면 토할 것 같단 말이야."
"그런 놈이 빈 속에 술은 잘만 퍼붓고? 딱 보니까 오늘 아침도 안 먹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나 정호석한테 혼나."
"나한테 혼내라 그래. 내 잘못인데 뭘."
"연락도 먼저 안하는게 무슨... 목소리 들을 자신은 있고?"
"아 진짜 따박 따박 말대꾸...."
깊은 빡침을 삼키는 표정을 짓자 그제서야 한 발 물러나는 남준이었다. 빗을 쥐고 있던 내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아 맞다, 정국이랑 얘기 나눴어. 상처 주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었다고...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더라."
"나 괜찮아. 이제 별로 안 아파."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하자 그제서야 쓴웃음을 짓는다.
여튼 아침 딱 먹어라, 하고는 수업을 들으러 미련없이 떠난 남준의 발소리를 마지막으로 자취방엔 또다시 적막이 내리앉았다. 남녀합방이 불가능한 기숙사 때문에 대학 근처에 작은 원룸을 구해다 호석과 함께 살았다. 시골에서 살다 서울로 함께 대학을 지원해 상경했다.
기회의 땅, 적어도 호석에겐 많은 경험이 필요했고 호석의 그러한 목표가 곧 나의 목표였다. 그가 행복하는것.
잊혀진 호석의 온기가 점점 옅어져 갔다.
가려진 커튼 사이로 비친 햇살 한 줄기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몸 위에 길쭉한 선 하나를 그었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남준이 두고 간 지갑을 발견했다. 하여튼, 자기 자신 하나 똑바로 간수 못하는게 어디 훈수를 두는지.
어렴풋이 잠이 들려는 찰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튕겨나가 전화를 받았다.
[누나! 같이 아침 먹으러 가요!]
원하는 목소리가 아님을 깨닫고 아무도 모르게 실망한 것은, 그 나중의 일이었다.
망할 김남준의 저 지랄맞은 훈수와 오지랖을 언젠가는 꼭 박멸하고 말겠다는 다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