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우연한 만남을 갖는다.
옛날에 사랑하던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났다.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려 노력한다. 어쩌다 은근하게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안녕하세요." 이 말만을 하며 지나치려 했다.
"잠깐 얘기할래요?"
"좋아요."
멍하니 내 앞에 서있던 그의 옆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가려는 내 손목을 황급히 붙잡은 그가 내뱉은 말에 나도 모르게 그의 제안을 허락해버렸다.
"카페모카 두 잔."
그는 내게 묻지도 않고 커피를 시켰다. 그런 그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직 우리의 기억을 기억하고 있음을 , 연애시절 항상 카페모카를 시켰던 것을 기억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득 우리의 첫만남을 먼지가 가득쌓인 앨범을 조심히 꺼내어보듯 이제는 닳아빠져버린 머릿속에서 꺼내보았다.
"마실 것은 어떤 것으로 하실래요?"
"카페모카요."
"그럼 저도 같은 걸로."
레지에게 같은 것으로 가져다 달라고 주문한 뒤 날보며 풋풋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앳된 그의 모습이 눈가에 선해진다.
그랬던 그가 어느날 내 앞에 나타났다. 저렇게 눈가에 자글한 주름이 생긴채로.
그래도 큰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는 그대로구나. 그런 점에서 여느 청년들 못지 않다고 생각했다.
커피가 곧 나오고, 커피를 홀작대는 중에도 우리는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보다 오히려 이제 더 이상 젊지도 예쁘지도 않은 날 그가 어떻게 보고있을지 신경쓰이는게 더 컸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어떻게 지내세요?"
그의 말에 대답 대신 화사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내가 처한 상황보다 과장된 미소였다.
"당신은 어때요?"
이번에는 내가 묻는다. 그에게는 과장이 없는 것같다.
순간 나는 내가 패배를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선 정말 행복이 보였다.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신경쓰지 않고 있다는 것처럼 나는 일부러 그의 눈을 피하며 커피가 담긴 머그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요즘 덥죠."
카페 창 밖, 아스팔트 위로 올라오는 아지랑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내가 말했다.
"이제 곧 여름이 되려나봐요."
"여름은 싫어요. 더위를 잘타서요."
"그랬었죠. 더위를 잘타셨죠."
그의 말에 아차했다. 말을 잘못 꺼냈다.
서로 아는 이야기는 하지 말았어야했다. 요즘 일어나는 이야기,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를 해야한다.
옛날에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지금 처음보는 사람처럼. 우리의 옛이야기는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가 함께 보고 들었던 그 모든 것들, 같이 걸었던 익숙한 길, 함께 지냈던 옛친구들의 이야기. 모두 묻어두어야한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 이야기들이 밤하늘의 별이 되어 반짝일지 모르는 일이다.
그는 목이 타는지 커피를 한번 들이킨후 잔을 놓는다. 약간 거칠게 잔을 놓았다.
"형님은 잘 지내시고 있나요?"
"그럼요. 오빠는 잘지내요. 결혼까지해서 아이가 벌써 중학생인걸요."
"시간 참 빠르군요."
예전에도 보았던 그의 따뜻한 눈웃음을 나는 그 때 다시 보았다.
정말 다시는 볼 수 없을 줄만 알았는데...우연,아니 인연이란 정말 대단한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다 물어본건가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던 그의 고개가 옆으로 꺾여지더니 시선이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타일 바닥으로 향한다.
그래 알고 있어. 네가 진정 궁금한 것이 뭔지. 내가 네게 묻고 싶듯 너도 내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너는 지금 행복한가. 나 없이 얼마나 불행했는가. 헤어진 후 내가 보고 싶지는 않았는가. 괜한 날씨 얘기나 시시한 가족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겠지.
내가 그랬듯 너 역시도. 결혼은 언제 했는지, 아이는 몇이나 되는지, 아내가 잘해주는지,그리고 행복한지. 물론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여태껏 내가 그의 앞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금세라도 딱딱해질 것만 같은 표정을 억지로라도 풀려고 노력하는 것 뿐이었다.
"이제 물을 것이 없나요?"
재차 그에게 물었다. 내 물음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부러 손목에 건 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일어날 생각은 없었다.
커피잔은 거의 비워지고 대화는 끊겼다.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침묵은 견디기 힘들다.
"우리 우연히 만났죠?"
고심 끝에 한 말이 겨우 저것이다.
내딴엔 신기한 일이였으니 그가 공감할 것이라 감히 생각했다.
그는 내 말에 그제사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 우연히 만났어."
그는 갑자기 말을 놓았다. 그의 반말이 내 가슴을 가르듯 지나갔다.
"나중에 이렇게 몇 번 더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죠?"
되도록 장난기 어린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만나는건 원하지 않아."
그는 일어섰다. 카운터에 가 계산하는 그를 두고, 거리에는 내가 먼저 나와 그를 기다렸다.
우리는 각각 얼마의 시간이 남아있는 사람들일까.
'행복해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다시는 우연이라도 만나지 않기를...'
다시 한번 속으로 말했다.
계산을 다한건지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난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덥긴 해도 좋은 날씨죠?"
"그렇군요. 좋은 날씨예요."
"안녕."
"안녕."
우리는 내일 다시 만날 반 친구와 헤어지듯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마치 아무일도 아닌것처럼.
내 약속시간은 30분이 지나있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세상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신달자 에세이 스케치 각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