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 제발 드레스로 갈아입으시라니까요”
“싫어!!!! 약속 취소하기 전까진 계속 말 안 들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상견례 자리에 입고 갈 의상을 두고 비서와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다. 공주님 이거 보세요, 전에 연회자리에 입고 싶다하셨던 드레스입니다. 비서가 전신 거울 앞에 나를 세우곤 어디 레드카펫에서나 입을 법한 드레스를 대보며 말했다. 안 입어. 절대 안 입어. 후드티, 아디다스 트랙팬츠에 삼선슬리퍼까지 신은 내 모습에 비서는 애원하다시피 한 시간째 설득 중이었다. 언니에겐 미안하지만 팔짱까지 끼며 완강하게 거절했더니 결국 비서언니가 백기를 들었다. 후드를 뒤집어 쓰고 주머니에 손을 꽂고 복도를 배회하자 복도에 있던 직원들이 공주님...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나를 걱정어린 눈으로 보았다.
굳이 밉보이게 입은 이유라면 있었다. 우리나라와 나나국 왕자의 상견례 자리였고, 나는 나나국 왕자인 나재민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먼저다.
본래 나나국과 마국은 우리나라와 우호적인 관계 속에 있었다. 계절에 한 번씩 세 나라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연회자리를 갖기도 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연회에 가고싶어했지만 만 15세가 되기 전까진 절대 궁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하셨던 아버지 덕에 나는 중학교 3학년(사실 학교를 다니진 않지만)이 되어서야 연회에 갈 수 있었다. 궁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생활했던 나에게 연회는 새로운 세계였다. 새로운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 나눴던 대화도 새로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국의 왕자 민형을 처음 봤다.
나와 동갑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민형은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차분한, 조금 어두운 색상의 정장을 입고 있었으며 그와 비슷한 까만 머리카락, 또 까만 눈은 얼핏 심해와도 같았다. 나를 데리고 연회장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나재민과는 달리 민형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박수만 치고있었다. 친구라곤 나재민과 비서, 궁 안 직원들밖엔 없던 나는 모든 관심이 민형에게 쏠렸다. 그도 그럴게 눈이 안가는 외모가 아니었다. 내가 뚫어져라 본 탓인지 어쩌다 눈이 마주쳤는데 “hi, beautiful”하고 인사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왕자님 같았다. 아니 왕자님 맞구나… 어쨌든 처음으로 사람을 보고 심장이 뛴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툴게도 나는, 아닌 척하며 민형이 자리를 옮길 때마다 따라다녔다. 식탁에 앉을 때도 나재민이 옆자리를 비워둔 걸 보았지만 굳이 민형 옆에 앉았다. 스테이크를 썰어본 적이 없던 나는 칼을 쥐는 것 마저 어설펐다. 그렇게 칼과 스테이크를 두고 홀로 사투를 벌이다가 민형이 정갈하게 잘라진 스테이크 접시를 내게 넘겼다. 그러곤 손수건 있어요? 물었다. 고개를 가로 젓자 제 주머니에서 파란 손수건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곤 제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나는 순간 손수건으로 제 볼을 닦아달라는 뜻인 줄 알고 기분이 나빴다. 잘생기면 다냐? 그래 너 다해라; 속으로 생각하면서 더러운 기분으로 민형의 볼을 닦았다. 그러자 민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뒤로 빼는가 싶다가, 피식 웃더니 손수건을 도로 가져가 내 볼을 닦아주었다. ...아, 나한테 닦으라고 준 거였구나. 그제서야 의미를 알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정적으로 폴인럽했던 이유였다. 차가울 것 같았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다정했다. 나재민도 나에겐 한없이 다정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후 연회자리를 몇 번 더 가졌지만 마국과 나나국이 무역문제를 두고 사이가 틀어져 결국 내가 19살이 되던 해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나는 마국의 총리만큼 마국 상황을 알 정도로 매일 마국과 관련된 기사를 보았다. 마국과 우리나라는 연회를 끝으로 별다른 만남이 없었다. 하지만 나나국은 꾸준히 만남을 이어왔다.
어째 불안불안하더니 결국 이 사단이 났다. 나나국이 우리나라에게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고, 아버지는 수락할 기세였다. 여기까지도 멘붕이었는데, 나나국과의 동맹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나나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혼인을 맺는 거란다. 그러니까, 나재민과 내가 결혼을 해야한다는 뜻이다.
몇날며칠 아버지한테 찾아가서 결혼할 일은 절대 없다고 말했다. 지금이 고려시대, 조선시대도 아니고 21세기인데, 더군다나 당사자의 의사도 듣지않고 결혼이라니. 그러나 평소엔 하나뿐인 외동딸 해달라는대로 다 해줬던 아버지가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며 기자까지 섭외해놓았다는 거다. 나는 몇번이고 가출시도를 했지만, 비서에게 잡혀 오히려 궁밖을 지키는 사람 수가 많아지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나나국 나재민은 어릴 적부터 자주 우리 궁에 들러 친한 사이였다. 올때마다 내가 가지고 싶어했던 나나국의 잡다한 것들을 들고왔다. 나재민은 나를 끔찍이 챙겼다. 연회자리에서도 먹어보라며 접시 위에 음식을 가득 담아주거나, 입가에 묻은 소스를 굳이 제가 닦아주기도 했다. 나재민은 나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옷이 그게 뭡니까?”
도영에게 덜미가 잡혔다. 저 김여주 아닙니다, 얼굴을 급하게 가리며 목소리 변조를 했지만 눈치 백단 김도영 집사에겐 어림없다.
“얼른 갈아입으시구요- 머리 안 감았습니까 설마?”
“머리는 감았어어..”
그렇다. 나는 도영에게 찍소리도 못한다. 내가 민형을 마음에 두고있다는 걸 알고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반항이라도 하면 “그럼 전하한테 전해드릴게요~”라고 말하거나 또는 “민ㅎ, 민혀에취”하면서 재채기를 하는 등 얄밉게 협박을 한다. 도영이 아까 비서가 골라둔 드레스를 건넸다. 드레스 불편해서 입기 싫은뎅.. 작게 투덜댔지만 결국 갈아입기는 했다. 도영이 나를 화장대 앞에 앉히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해줬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럼요, 명색이 상견례인데”
“.. 나는 결혼하기 싫어”
도영은 내말을 묵묵히 들으면서 엉킨 머리를 살살 빗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단 말이야”
다 빗었어요. 도영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잘갔다와요, 사고만 치지 말고. 도영의 잔소리가 담긴 인사를 마지막으로 차를 타고 궁을 나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기하던 기자들이 플래쉬를 터뜨렸고 기분이 어떻습니까, 따위의 질문세례가 이어졌다. 어떻긴요, 아주 나쁜데요. 눈 앞이 번쩍거려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나나국 궁에 들어가기 전에 비서가 옷 매무새를 정리해주며 당부의 말을 전했다.
“공주님 오늘은 기분 상한 티 내지 마세요, 네?”
어린아이를 강가에 내놓는 듯한 표정이었다. 알겠어. 하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견례’라는 말은 정말 껍데기에 불과했다. 적어도 내가 생각했던 상견례는 결혼을 중점으로 대화를 하는 결혼 준비 과정인데, 개뿔이. 아까부터 군사협정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파스타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내 앞날에 대해 심히 고민했다. 나재민이랑 결혼하면 휴대폰에 저장된 이민형 사진 300장은 삭제해야겠지…
“입에 안 맞아?”
나재민이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곤 말했다. 아마 표정이 좋지 않았나보다. 솔직히 아버지 앞이라 꾸역꾸역 먹는 척할 뿐 무슨 맛인지 생각하진 않았다. 배불러.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 말에 나재민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왜 안 먹어?" 내 물음에 나재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안 먹는데 내가 어떻게 먹어" 차라리 나재민이 싸가지라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국 공주, 상견례 자리 어두운 표정… ‘등 떠밀려 하는 혼인’ 소문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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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나나국 궁 앞 차 안 가득 비명소리가 울렸다. 소리의 근원은 체통을 지키지 못하는 공주였다. 요근래 나는 이렇게 느닷없이 소리지르는 일이 많았다. 나재민과의 결혼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소리가 익숙하다는 듯 운전을 하던 도영이 “또 무슨 일이에요?” 물었다.
“거짓말이야..”
오늘 일정을 보려 켠 휴대폰 캘린더를 가리키고 말했다. 결혼식 D-1. 비서언니가 표시해둔 오늘의 일정이었다. 굳이 이렇게 환기시켜줄 건 뭐람, 안 그래도 화딱지 나서 죽겠는데. 나는 결혼식 전까지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했고, 결국 내일 나재민과 백년가약을 맺게 생겼다. 그럼 마국과의 관계는 끝이 나고, 전쟁이나지 않고서야 민형과 엮일 일이 전혀 없어진다는 거다. 가출을 감행해서라도 벗어나야한다. 민형 없는 세상이라니.. 아직도 내 방 액자엔 연회 때 민형과 손잡고 찍었던 사진이 걸려있는데. 휴대폰을 던지는 시늉을 하다가, 내 몸과 같은 물건을 차마 던지진 못하고 소파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난 또 뭐라고" 도영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니잖아.. 아니라고 해줘”
“뭐가 아니에요. 내일 결혼식 맞아요”
매정한 도영의 말에 볼을 잔뜩 부풀리곤 가자미눈으로 째렸다.
“그래 빨리 결혼 했으면 좋겠다- 24시간 따라다니면서 잔소리 하는 사람도 없어지고”
“허, 맨날 따라다닐 거 거든요?”
도영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정작 결혼하면 제일 슬퍼할 것 같은 사람이.. 다 왔네요. 잠깐 입장허가 받고 올테니까 가만히 계세요. 도영이 한 손으론 안전벨트를 풀고, 다른 한손으로 문을 열고는 말했다. 나 애 아니야. 내 말에 도영은 피식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라며 되게 오래 걸리네”
입장허가만 받고 온다더니, 아마 입장허가서를 만들고 있는게 분명했다. 도영은 30분째 오지 않았고 내일 있을 결혼식에 대한 뉴스가 라디오에서 지겹도록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내일 있을 공주님의 식 준비가 한창입니다.식을 보기위해 벌써부터 인파가 몰려들고 있는데요, 현장에 계신…’ 신경질적으로 라디오를 꺼버리고 잠깐 눈을 붙이려 목베개를 찾던 중, 창문을 두어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얼굴이 민형의 비서임이 틀림 없었다. 눈이 마치 코팅을 꿰뚫어 쳐다보는 듯 했다. 창문을 내렸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저는 마국의 왕자님 비서 서영호입니다”
“네 알긴 아는데.. 왜 여기 계세요? 아니, 어떻게 여기 계세요?”
“지금 말씀드리긴 어렵고, 일단 급하니 용건부터 말씀드려도..”
“빨리요!! 곧 있으면 김도영 온다구요”
“네, 저희 왕자님 관련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길게 말 안하겠습니다. 어떻게든 데려오라는 전하의 말씀에 따라…”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금세 차에서 내렸다. 내용을 정리해보자니 나를 납치하겠다는 소리인 것 같은데, 나재민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마국에 잡혀가는 게 내겐 더 좋은 선택이었다. 신속한 내 행동에 당황이라도 한듯 비서는 어벙벙하게 한참 작은 나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내리라는 뜻 아니었어요?" 묻자 그제서야 "아아, 맞습니다. 이쪽으로…" 하며 마국에서 보낸 것이라고 의심조차 못 할 작은 하얀 마티즈에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