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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찬디/찬백] 장미에 가시가 있는 이유
written by. 돼지저금통






 10. 폭풍의 눈


 “형. 정신 좀 차려요.”


 백현이 반쯤 정신이 나간 찬열을 툭툭 쳤다. 멍 때리면서 어느 한 구석을 응시하던 찬열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어, 어? 하는 멍청한 소릴 낸다. 백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찬열의 반쪽이 된 얼굴을 봤다. 눈에는 초점이 없고 살이 쪽 빠진게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시체 같았다. 헤어졌다, 고 울면서 전화가 온 이후로 내내 이 상태다. 백현은 그 날 만나 찬열과 술을 마시면서 위로를 해주었고, 반쯤 예상 했던 소릴 들었다. 그 날, 너랑 있었던 일을 다 봤대. 그 말에 백현은 예상 했으면서도 가슴이 쿵 떨어졌다. 역시 봤구나. 그래서 헤어졌구나. 그러나 찬열이 이렇게 힘들어 할거란 것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헤어진 당일 그 이후로 찬열은 더이상 울지는 않았지만 멍때리는 일이 잦아졌고 어디에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폐인이 됐다. 백현과 있었던 일 때문에 헤어진거니 백현을 원망할 만도 한데, 착하다 못해 병신같은 박찬열은 변백현을 미워 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옆에서 위로를 해주는 백현을 고마워 하기까지 했다.


 “경수 보고싶다….”


 한숨처럼 뱉어지는 찬열의 말에 백현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쩌면 찬열은 지금 저한테 복수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백현은 그 때의 일을 조금 후회하는 중이었다. 경수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그 날 일의 전말은 이랬다.


 찬열은 할 말이 있다는 백현의 말에 공원에서 만났고 평소와 다름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경수랑 사이가 좀 나아진 것 같아. 신나서 조잘거리는 찬열을 보며 백현은 심란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었다. 찬열을 얻기 위해서 가장 큰 직격탄을 오늘 던질 예정이었다. 모든 총대를 저가 맨 것이나 다름 없었다. 종인이 하는 꼴을 보자니 답답했고, 이렇게 하다가는 영영 뺏지 못하겠다 싶어서. 거절 당할 각오를 하고 모든 것을 준비 했었다.


 “저, 형. 할 말 있는데요.”
 “어. 응, 응. 말해봐.”
 “…….”


 백현은 망설였다. 워낙에 남의 남자 뺏는데에는 자신이 있는 터라 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찬열은 여태까지의 시시했던 놈들과는 뭔가 틀렸다. 백현은 자신의 마음이 조금 진지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찬열의 꾸밈 없이 순수하고, 진정 경수에 대한 사랑으로 들뜬 눈을 보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렇지만 그런 만큼 더 갖고싶었다. 그랬기 때문에 갖고 싶었다. 찬열이 경수에게 주는 저 사랑을, 자신도 받고 싶었다. 그건 확실히 경수보다 백현이 먼저였다. 그 때, 골목에서 구해주기도 훨씬 더 전에. 서로 이름을 알기도 전 마주쳤을 때 매너 있게 웃어주던 얼굴, 가지런한 하얀 이. 백현은 그 때 부터 찬열을 꿈 꿔 왔다. 경수가 낚아 챘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은 백현이 찬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결국 망설이던 말을 뱉었다.


 “저, 형 좋아해요.”


 그리고 대답을 듣기 전에, 어떤 마음이었을까. 저 멀리서 경수와 종인이 걸어 오는 것을 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다짜고짜 찬열의 목을 끌어 입을 맞춘 것은 백현이 미리 계획했던, 그렇지만 마음에 따른 일이었다. 찬열은 당황했다.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당황했는지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백현은 그럴수록 더 안달이 나서, 경수가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찬열에게 매달렸다. 날 좀 봐줘요, 형. 온 몸으로 그렇게 말했다.

 한참은 아니지만 경수가 충분히 그 장면을 보고 멀리 사라졌을 때 쯤 정신을 차린 찬열이 백현을 밀쳐냈다. 예의 없는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현을 밀어내는 그 손길은 거칠지 않고 다정했다. 잔뜩 당황한 찬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는 백현의 타액이 묻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 그랬다.


 “저… 백현아.”
 “…….”
 “그니까, 나, 나는, 경수가….”


 경수가 좋아. 그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눈치도 없고 직설적이라 그 말을 돌려서 할 줄도 모르고 그대로 뱉어 버릴 찬열의 성격을 알아서 더 그랬다. 백현은 찬열의 말을 막았다.


 “알아요. 미안해요. 그냥 고백 하고 싶었어요, 내 마음.”
 “미안. 미안하다.”
 “형이 미안할게 뭐 있어요. 제가 멋대로 행동해서 더 미안하죠. 그냥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백현은 눈을 휘어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맞대고 있던 입술의 감촉이 생각났다. 마지막일까? 갈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예전처럼 지내요, 형. 멀어지는 거 싫어요.”


 나에게 틈을 주세요. 백현의 뜻을 눈치 코치 없는 박찬열이 알아 챌 리는 없었고, 그저 딱해보이는 쳐진 눈꼬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미안해.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는, 제 앞에 어떤 일이 펼쳐 질 지도 모른 채. 그렇게 찬열은 한참 백현에게 미안해 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그 일 때문에 저가 경수와 헤어 진 것을 알면서도 찬열은 백현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백현이 죄책감에 시달려 미안하다고 울며 사과를 할 때도 괜찮다고, 너 때문 아니라고. 그냥 그 말만 할 뿐이었다. 내가 바보라서 그래. 내가 경수한테 믿음을 주지 못한거야. 착하고 병신같은 박찬열은 세상에서 제일 아픈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찬열과 백현은 그러면서도 만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찬열에게는 백현의 위로가 필요했다. 천성이 부드럽고 곰살맞은 성격의 백현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기대게 해줬다. 엄청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은 찬열은 그런 백현의 위로를 뿌리 칠 수가 없었고, 백현 또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그런 찬열을 위로했다.


 “고마워. 백현아.”
 “…네?”
 “이렇게 위로해줘서 고마워.”


 니가 아니면 나 벌써 죽었을지도 몰라. 찬열과 종인이 한 판 떴다고 했던 그 날에 찬열은 평소보다 더 힘들어했다. 경수는 김종인 옆에서 행복해하겠지. 다행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더 많은 술을 마셨다. 그래서 백현도 더더 힘들었다. 찬열의 힘든 모습을 보는 일은, 백현에게 의외로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한살 더 많지만.”
 “…….”
 “그래도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친구. 그 말에 백현의 가슴이 쾅 무너져 내린다. 눈치 코치 없는 박찬열. 지금 박찬열보다 변백현이 더 울고 싶다. 알고 이러는 걸까. 알고 이렇게 사람 가슴에 못을 박는 걸까. 다 말했는데. 그 때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데. 백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힘든 찬열을 보는 일은 찬열을 가지지 못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힘들다. 찬열을 집 앞 까지 바래다주고 오면서, 백현은 굳은 다짐을 했다. 형. 내가, 구해 줄게.




***




 “우리 경수. 오늘은 오빠 없어서 어떡해.”
 “지랄하고 자빠졌네.”


 도도하게 코웃음을 팽 친다. 오늘은 종인이 집에 일이 있는 바람에 조퇴를 하고 일찍 간다. 원래 야자를 안했지만 경수때문에 야자를 따라 했었는데, 오늘은 사정이 생긴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오랜만에 생긴 자유라 즐거워 했을텐데 요즘 들어 부쩍 종인과 있는 시간이 즐거웠던 경수는 못내 섭섭했다. 내일이면 또 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경수의 가뜩이나 좁은 어깨가 오늘따라 더 좁아보이는 느낌이 들어 종인의 기분이 안좋아졌다.


 “할머니 오신다구?”
 “응. 그냥 가족끼리 저녁만 먹는거야. 그리고 곧바로 집으로 갈거야.”
 “…….”
 “못 데리러 와서 미안해. 내일은 같이 야자 할게. 응?”


 입술이 불퉁하게 나온 경수가 귀여워 못살겠다는 듯이 종인이 경수를 숨막히도록 끌어 안는다. 애정 어린 스킨쉽에 결국 기분이 풀린 경수가 그럼 카톡 해야 돼. 하면서 또 징징거리는 소릴 낸다. 아, 우리 장미 이렇게 예뻐서 어떡해. 밥을 못먹는 한이 있어도 1초에 한번씩 카톡을 하겠노라 스스로 굳게 다짐한 종인이 알겠어, 알겠어 하며 경수의 엉덩이를 토닥이다 등허리를 한대 맞는다.


 “나 갈게.”


 종인의 칭얼거림에 교문 앞까지 바래다 주러 나간 경수가 힘 없이 팔을 휘적이며 인사를 한다. 콩만큼 멀어져 가는 종인도 마음이 편하지 않는지 오래도록 손을 흔든다. 치치치치치치. 혼자 학교에 덩그러니 남겨져 야자를 하러 다시 반으로 올라가는 경수의 걸음이 축축 쳐진다. 괜히 종인이 미워지는 날이었다.

 지이잉, 하고 폰이 울리는 소리에 경수가 황급히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확인했다. 벌써 김종이니가 카톡이 왔나? 아, 종인의 카톡이 온 것은 맞았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에게서 온 카톡도 하나 있었다.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찬열이 형 일인데. -변백현』


 별로 반갑지는 않은 인물이다. 찬열이 형? 누구 마음대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전혀 꼴도 보고 싶지 않은 이름 석자에 경수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그렇지만 찬열이 형 일이라는 말에 마음이 자꾸 흔들렸다. 어떡하지. 손톱 끝을 툭툭 뜯으며 경수는 눈을 굴렸다. 이럴 때 종인이 옆에서 붙잡아 줬음 좋겠다. 왜 하필 종인이 없어서. 이제 박찬열 생각 안하기로 했는데.


 『니가 꼭 들어야 할 일이야.』


 같은 번호로 문자가 하나 더 왔다. 결국 경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답장을 보냈다. 『어디로 가면 돼』 그리고는 교실로 들어가 곧장 가방을 챙기고, 선생의 눈을 피해 조용히 학교를 빠져 나왔다.


-


 경수에게는 백현의 첫만남이라거나 사자대면 등의 안좋은 추억으로만 가득 찬 카페에서 경수와 백현이 마주 앉았다. 그 뺀질뺀질하고 허여멀건한 재수 없는 얼굴이 오늘따라 약간 수척해보여서 경수는 속으로만 꼬방시다고 생각했다. 뭐라도 시키자. 백현이 가라 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키려던 참이었거든. 경수는 그렇게 툴툴거리며 늘 먹던 요거트 빙수는 눈도 안주고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저런 놈 한테 어리숙하게 보일 수는 없지. 괜히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경수는 허여멀건한 개새끼를 닮은 백현을 노려보는 눈길을 멈추지 않으며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잔뜩 넣었다. 그 모습이 괜히 귀여워서, 왜 찬열과 종인이 경수에게 목을 매는지를 알 것 같아서. 백현은 피식 웃었다. 저
와는 반대의 매력이었다. 여우 같은 짓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귀여운 곰돌이 같았다.


 “무슨 일인데.”


 경수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딱딱한 목소릴 냈다. 백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니가 오해 하고 있는 게 있어서.”
 “그 소리라면 됐어. 박찬열이 부탁하디?”


 끝까지 실망스럽다. 변백현에게 부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더이상 들을 가치도 없었다. 경수는 화가 나는 것을 참지 못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갈래. 하는 경수의 말에 백현은 꿈쩍도 안하고 차분히 뒷 말을 이었다.


 “화내지 말고 들어. 원래 이거 말하면 안돼는데 찬열이 형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말하는 거니까.”
 “…뭐?”
 “이거 다 나랑 김종인이 짜고 친거야.”


 경수의 안에서 뭔가 무너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빳빳히 굳었다. 짜고 친거야, 라는 말의 주어. 「나랑 김종인이」. 

 김종인. 김종인. 김종인. 곱씹었다. 백현의 입에서 나온 세글자가 경수의 머리를 뎅 울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경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백현은 목이 탄 듯, 앞에 있는 음료를 한모금 들이켰다. 이게 무슨 소리지. 경수는 지금 백현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늘 휘어져서 사람을 놀리는 듯 했던 그 눈꼬리는 전과는 다르게 딱딱했다. 진지했다. 백현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박찬열 꼬시기로 했어. 김종인이 너 채가기로 했고. 그 때 스파게티 집으로 너 부른것도 나고, 데리고 온 것도 나야. 일부러 찬열이 형이랑 거기서 약속 잡은거고.”
 “…….”
 “찬열이 형은 너한테 다 진심이였어. 단지 성격이 너무 바보같아서 너 화 풀어주는 법 몰랐을 뿐이야. 그냥 서투른거지.”


 니가 너무 좋으니까. 박찬열은 니가 너무 좋아서, 니가 너무 소중해서 여태까지의 다른 여자애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다룰 수가 없었던 거야. 그게 더 상처가 되는 줄은 모르고. 박찬열은 너무 바보였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경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그래도 동그랗게 큰 눈이 더 커질수가 없겠다 싶을 정도로 커져서는 그 안에 당혹스러움을 가득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때 공원에서, 내가 기습 키스 해서 찬열이 형. 당황해서 가만 있었던 거 뿐이야. 너 가고 난 뒤에 바로 밀쳐내고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어. 너 있어서 안된다고. 내가 고백했거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둔감한 경수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만 백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찬열의 눈이 생각났다. 착하고, 선량한 두개의 눈. 씩 웃으면서 미안. 하고 사과하던 그 입과 아이스크림을 흘렸을 때 물티슈를 건내주던 손.
 그리고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묻던, 그 박찬열. 힘들게 할 수가 없었다. 백현은 울고 싶어 졌다.


 “그것도 내가 너 데리고 오라고 김종인한테 시킨거고, 일부러 타이밍 맞춰서 키스 한거야.”
 “지금… 무, 무슨 소리…….”
 “찬열이 형이 지금 엄청 힘들어 해. 바보같이 눈치도 없고 소심해서 너한테 사실대로 말도 못하고 그냥 끙끙 앓고 있는데 그게 안쓰러워서 내가 말하는거야. 김종인한테 미안하긴 한데 그건 걔 일이고 난 찬열이 형이 더 중요하니까.”
 “김… 김종인이….”


 그 김종인이. 힘들 때 항상 옆에 있어주고, 그 때 그 자리에서도 먼저 나서서 경수를 위해 싸워주려던 그 김종인이. 항상 위로해주고 아껴주던 김종인이. 경수가 아프면 자신이 아픈 것 보다 더 아파해주던 그 김종인이. 그 김종인이….


 “널 너무 좋아해서 그렇게 한거야. 둘 다.”


 그 말을 들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 김종인이. 경수의 머릿속은 온통 김종인으로 가득찼다. 내가 너무 힘들때마다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던 김종인이, 사실은 죽을만큼 아프게 한 장본인이었다니. 옆에서 위로 해주면서도 모든 상황을 알고 속으로는 기뻐하고 있었을 종인을 생각하자 미칠 것 같았다. 치가 떨릴 만큼의 배신감이 물밀듯이 밀려 들었다. 이건 사실이 아냐, 말도 안돼.


 “찬열이 형 미워하지마. 내가 잘못한거니까. 나랑… 김종인이.”


 마지막까지 확인 사살을 하듯 내뱉는 그 말을 더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경수는 벌떡 일어섰다. 눈 앞이 가물가물했다. 백현도 붙잡지 않았고, 뭐라 말 할 겨를도 없이 그냥 빠르게 그 곳을 뛰쳐 나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목구멍까지 뭔가가 차올랐다. 숨이 턱 막혔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경수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몸을 웅크리고 꺽꺽댔다. 정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눈 앞이 하얘졌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일시적인 쇼크 증세가 온 것 같았다. 머릿 속에서 뭔가가 끊긴 느낌이 들고, 경수는 삐걱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질어질하고 온 몸의 피가 다 빠진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경수는 달리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




 종인은 그 때 벌써 집으로 돌아 와 경수에게 백통째 카톡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오늘 저녁이 취소됐어, 할머니 안 올라 오신대. 너 데리러 갈까? 언제 마쳐. 카톡을 몇개나 보냈는데 단 하나도 읽지 않았다. 종인은 초조해져서 손톱을 뜯었다. 그리고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학교 앞으로 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거울 앞에 서서 옷 매무새를 다듬고 머리도 손질을 한 다음 신발을 신고 현관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 일어 날 지는 상상도 못한 채로 종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눌렀다.

 그리고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을 때, 그곳에는 눈물 범벅이 된 경수가 서 있었다.


 “어? 경수야. 여긴 어쩐 일이야.”
 “너.”


 왜 울어. 종인이 손을 뻗으며 한발자국 다가서자 경수는 두발자국 뒷걸음 쳤다. 경수에게 집을 가르쳐 준 적은 있지만 경수가 직접 찾아 온 적은 처음이다. 그런데 저렇게 울고 있다니. 무슨 일이 있는건가. 종인은 점점 초조해졌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경수의 동그랗고 눈물에 젖은 눈이, 어쩐지 원망을 가득 담고 종인을 보고 있었다.


 “니가 그랬니.”


 경수의 목소리가 눈물에 젖어 떨리고 갈라졌다. 무슨 소리야. 당황한 종인이 되묻는다.


 “박찬열이랑 헤어지게 한 거. 변백현보고 박찬열 꼬시라고 한 거! 니가 그랬냐구!!”


 경수의 몸이 덜덜 떨렸다. 지금 경수를 휘감은 배신감은 찬열과 백현의 키스장면을 봤을 때 보다 더했다. 그때도 이만큼은 아니었다. 그정도로 경수는 종인을 믿었다. 종인만은 믿었다. 누구도 데려 온 적 없던 집에, 심지어 종대도 데려오지 않은 집에 종인을 데려 간 것도. 화장실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종인을 받아 준 것도. 종인에게 진심을 표현하고 좋아한다는 말을 한 것도, 다 종인을 믿어서, 종인이 자신에게 주는 사랑에 감동을 해서 그런 거였다. 항상 자신의 옆에서 힘들때 기댈 수 있어서, 그게 고마워서. 힘들 때. 힘들 때 김종인이….

 그런데 힘들게 한 장본인이 종인이었다. 종인은 경수를 그렇게 만들었고, 그랬으면서도 뻔뻔하게 연기를 하면서 옆에 있었다.


 “…….”
 “왜 말을 안해!! 니가 그랬냐구 묻잖아!!!”


 경수가 소리를 지르며 종인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작은 주먹에 힘이 실려 있지 않아 분명 아프지 않아야 할텐데 이상하게 엄청 아팠다. 맞아서 아픈게 아니라 경수가 울면서, 아니 경수가 모든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게.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게 눈빛에서 전해져서 아팠다. 종인이 그제서야 두려움을 느꼈다. 아, 잘못 되었구나.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너 그렇게 힘들어 하는 내 모습 보면서 우스웠겠구나. 어. 울고 불고 죽을만큼 힘들어 하는 거 보고 좋았겠다 그치.”
 “…아니, 그거 아니야….”
 “니가 날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도 씨발… 나는 엉뚱하게 찬열이 형을 원망하고 미워했어….”
 “……경수야.”
 “뭐라구 변명이라도 해. 이거 아니라고, 이거 니가 그런거 아니라고…….”


 경수의 몸이 덜덜 떨렸다. 눈빛은 간절했다. 정말 진심으로 그게 사실이 아님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종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이 넘어갈 만큼 끅끅대며 우는 경수의 앞에서,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다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종인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잘못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은 자신이 미웠다. 이 모든것을 스스로 망쳐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처음부터 정정당당하게 고백 할 걸. 경수를 아프게 한 벌을 지금에서야 받는 것 같았다. 경수의 얼굴을 뒤덮는 눈물을 지켜보던 종인의 눈에서도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어떡해, 어떡해. 경수가 종인을 향해 투닥이며 주먹질을 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너무 아팠다. 죽을 것 처럼 마음이 아팠다. 너무 미안했고, 그런데 경수가 너무 좋았다. 니가 너무 좋은 걸 어떡해 경수야.


 “니가… 좋아서… 그랬…”


 우는것에 서툰 종인이 띄엄띄엄 말을 다 잇기도 전에 경수는 주먹질을 멈추고 눈물을 닦은 채, 매섭게 종인을 쏘아봤다. 경수의 눈에는 더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종인은 두려워졌다. 안돼, 경수야. 그 말은 안돼.


 “그 딴 말 안믿어. 니가 날 정말 좋아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개새끼야….”
 “미안. 미안하다. 미안해 경수야.”
 “다신 보지말자, 응? 꺼져. 꺼져버려 쓰레기 새끼야.”


 쓰레기 새끼야.
 경수는 그 말을 남기고는 냉정하게 뒤를 돌아섰다.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종인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끝? 이게 끝? 안돼. 안되는데. 그러나 종인의 발은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발이 바닥에 붙은 것 같았다. 미안했다. 경수가 받은 배신감이 얼마나 클 지, 그게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경수가 자신보다 더 힘들 걸 알기에 그게 너무 미안해서, 종인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허망히 눈물만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쓰레기 새끼야. 꺼져버려 쓰레기 새끼야. 그 말이 자꾸 종인의 머리에 맴돌았다. 다신 보지말자.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그 말. 사라지는 경수의 뒷모습. 늘 안아주고 싶던 작고 가녀린 등.

 항상 넓고 당당했던 종인의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그 자리에, 마치 그 전에 경수가 그랬던 것 처럼 웅크려 앉아 종인은 눈물을 뚝 뚝 흘렸다.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 단 세번만 울어야 한다가 인생의 신조였던 김종인이, 도경수가 그랬듯이 계집애처럼 웅크려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경수가 그랬을 때와는 다르게 종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


 경수는 집으로 와 미친듯이 흐느끼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눈이 퉁퉁 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왜그러냐며 경수의 방으로 따라 들어왔지만 가만 내버려 두라고 소리를 질렀다. 혼자 있고 싶었다. 경수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면서 종인을 집에 데려 온 것을 후회했다. 왜 가장 편안해야 할 집에 이딴 추억을 만들어서 집에 와서까지 종인을 생각나게 하는지. 침대 위에서 했던 첫 입맞춤이 떠올랐다. 이 방을 뛰어다니면서 쿠션을 휘둘렀던 것도. 액자에 꽂힌 경수의 어릴적 사진을 몰래 가져 가려다 딱 걸린 일도. 정말로 쓸데 없이 추억을 만들었다. 종인을 믿어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그런 양아치 새끼가 좋다 했다고 그새 거기에 홀딱 넘어 가버린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경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주먹으로 침대를 마구 쳤다. 종인의 연락인지 누구의 연락인지 자꾸만 핸드폰이 울렸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종인의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에서 불현듯 누군가가 불쑥 솟아 올랐다. 내가 잘못한 거 있어? 다 고칠게, 다 미안해. 헤어지자고 하지 마. 왜그래. 오해야, 경수야 오해야. 그니까 내 말 좀…. 말 좀 들어달라던 그 목소리. 눈물로 일그러졌던 얼굴. 핼쓱해진 얼굴과, 옥상에서 내려 오다 만났을 때 이름을 부르려던 것. 그리고…… 그 바로 다음에, 김종인의 얼굴에 난 상처.
 모든게 아귀가 맞아 떨어 지는 것 같았다. 경수는 눈물을 삼키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자꾸만 울리던 진동이 누구의 연락인지 확인 할 생각은 않고 그저 떨리는 손으로 하나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 버튼을 누르고 신호음은 세번이 채 가기 전에 끊겼다. 들려오는 목소리. 여보세요?


 “찬열이 형…….”


 말을 잇지 못하고 경수는 눈물을 터뜨렸다.



오늘은 분량이 조금 적은 것 같네용 ㅠ.ㅠ 이번편이 가장 힘들었어요..
감정표현을 잘 못해서...흐규흐규 너무 어렵네요
이제 좀 행복해지나 했는데 우리 불쌍한 경수만 또 충격 받고..일이 자꾸 꼬이는 것 같아요
쓰면서도 경수한테 미안..ㅎㅎㅎㅎㅎㅎㅎ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해요!!!! 달아주시는 댓글 보면서 항상 힘내고 기쁜 마음으로 쓰고 있어요!
읽어 주시는 분들도 모두 감사합니다
카디 찬백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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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안돼ㅜㅜㅠㅠㅠㅠ변백현너왜그랬오ㅠㅠㅠㅠㅠㅠㅠ다시찬ㄷㅣ만나면어떡해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비회원119.4
으으 ㅜㅜ 카디에 위기가 왔네요 백현맘도 이해도 가고...ㅠㅠ 사랑듬뿍줘서 경수잊게해주지 바부 ㅠㅠㅠㅠ
그래두 작가님 오늘도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진짜짱감사해요

10년 전
비회원28.136
아 진짜 일났네ㅠㅠㅠㅠㅠㅠ 드디어 터져버렸군요ㅠㅠㅠ 백현이는 어떤 마음으로 경수한테 사실을 말했을까ㅜㅜㅜㅠㅠㅠㅠ
10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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