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찬디/찬백] 장미에 가시가 있는 이유
written by. 돼지저금통
8. 충분히 예뻐
바람이 시리다. 옆구리를 베어 가는 것 같다. 경수는 오늘따라 하늘이 반짝거린다는 쓸데 없는 생각을 했다. 경수는 그 날, 공원에서 두사람을 본 이후로 찬열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경수의 화가 풀렸다고만 생각했던 찬열은 수도 없이 카톡을 보냈지만 경수는 모두 씹었다. 이제 더이상은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랬어야만 했다. 너무 좋아하는 마음에, 사실을 부정하면서 미뤄왔던 것이 이런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제 경수는 모든것을 담담히 받아 들이고, 포기한 상태였다.
연락을 모두 무시한 3일째가 되는 아침 경수는 눈을 뜨자 마자 생각했다. 오늘이다. 오늘이야 말로 찬열에게 말해야겠다고, 경수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오늘, 야자를 마치고 얘기를 좀 하자고 했다. 드디어 경수에게서 카톡이 왔다고 찬열은 기뻐했지만 경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어디서 만날래? 카페 갈래? 스파게티 먹을래? 경수는 모두 거절했다. 형 우리 늘 만나던 그 공원 앞에서 봐. 기다릴게. 그냥 그렇게만 보냈다.
3일 동안, 경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힘들어질수 있구나 생각했다. 정말로 처음 겪는 고통이었다. 손이 귀한 집에 독자로 태어나 갖고 싶은 것은 모두 가지고, 하고 싶은 것 못한적이 없이 곱게 커와서 그런지 자신의 손에 찬열의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에 상실감이 컸다. 많은 사람들의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데, 정작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다. 차라리 찬열이 물건이면 떼를 써서라도 가질 수 있지 사람 마음을 사람이 어떡하겠는가. 경수는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찬열을 처음 만났던 그 때로. 자신이 마음에 든다며 환하게 웃던 찬열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함께 했던 추억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도저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차라리 공원 쪽으로 가지 말걸, 모르는 척 하고 그냥 잘 지낼걸. 후회해봤자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경수는 그 장면을 보고 말았고, 그렇게 된 이상 더이상은 만날 수 없었다. 찬열의 마음이 모두 확인된 것이나 마찬가진데. 붙잡고 있어 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경수는 찬열이 사준 하얀 목도리를 하고 공원 앞에서 찬열을 기다렸다. 멀리서 키가 큰 찬열이 걸어 오는 것이 보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런 모습을 봐놓고도 얼굴을 봤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심장이 뛰고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경수는 눈물을 꾹 참고, 입술을 꾹 깨물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찬열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경수야! 많이 기다렸어? 날씨 추운데, 왜 여기서 만나자고 했어.”
눈치 없는 찬열도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것 같았다. 경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찬열은 괜히 평소보다 더 오버해서 웃으며 경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어디라도 들어가자. 그러나 경수는 정말로 평소와는 다르게, 냉정하게 그 손을 쳐내는 것이다. 찬열은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겨, 경수야?
“형.”
“경수야, 왜그래. 화난 거 있어?”
“…우리 헤어져.”
어? 하고, 찬열은 멍청한 소리를 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헤엄쳐? 수영장에 가자는 건가. 태워줘? 오토바이를 태워 달라는 건가? 대체 「헤어져」 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게 있는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론… 경수가 뭔가 화난게 있어서 사이가 안좋긴 했지만, 그래도 사과를 하고 잘 풀지 않았던가? 서먹한 것이 좀 길게 간다 싶긴 했는데 3일 전까지만 해도 매점에서 만나 초코우유도 사줬고……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찬열은 그저 경수의 결연한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 보기만 했다.
“…그게…무슨….”
“그만하자. 나 갈게.”
그리고는 목에 감겨 있던 목도리를 빼내어 찬열의 발 앞에 내려 놓는다. 찬열은 그것을 집어 들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팔목을 붙들 틈도 없이 경수는 그대로 돌아 집 쪽으로 걸었다. 붙잡아 주길 기대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찬열은 정말로 붙잡지 않았고, 경수는 눈물이 터질까봐. 제가 헤어지자 해놓고 제가 매달릴까봐 그냥 발걸음을 재촉했다. 뛰다 싶이 했다. 빠르게 사라지는 경수의 동그란 머리통을 가만히 지켜보던 찬열은 경수가 점이 되어 사라지고 나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지금, 뭐지? 헤어진건가? 헤어지자고?
“…안돼.”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싫어… 싫어, 경수야…….”
이대로 끝은 안된다. 찬열은 이를 꽉 깨물고는, 경수가 사라진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경수야!! 경수야!!!!”
경수가 집 앞에 막 도착했을때, 뒤에서 찬열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기다렸고 듣고 싶었던 목소리지만 경수는 돌아 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떨리는 손으로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 때, 찬열의 손에 경수의 몸이 훽 돌아갔다. 경수의 눈에 찬열이 들어왔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 왜? 그 애랑 키스까지 해놓고, 이제와서 왜.
“너 그게 무슨소리야… 갑자기 왜그러는거야……어…?”
“…….”
“내가 잘못한거 있어? 다 고칠게, 다 미안해… 헤어지자고 하지 마, 왜그래….”
찬열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찬열의 큰 손에 붙들린 팔목이 경수의 마음처럼 아려왔다. 그 울음에 경수는 자꾸만 기대가 생기려고 했다. 오해일지도 몰라. 내가 본 게, 사실이 아닐지도 몰라.
그렇지만 경수는 그 장면을 똑똑히 봤다. 그 장면은 그 때 경수의 뒤에 있던 종인도 봤다. 그 장면이 머릿속에 다시 떠오르자 경수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찬열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찬열을 믿지 못하는 자신도 싫다. 백현과 만나게 된 이후로, 그렇게 일이 꼬인 이후로 찬열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 하고, 그 생각을 하며 슬퍼하는 것이 지친다. 이제는 모두 그만두고 싶었다. 경수는 찬열에게 정말로 지쳐 버린 것이다.
“나 그때 공원에 있었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제는 울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이 또 눈물이 흘렀다. 이제는 우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경수의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에, 한가지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필요한 사람. 그건 종인의 얼굴이었다.
“3일 전에. 형이랑 변백현이랑 키스하는 거 봤다구.”
그 말에 경수의 팔을 붙들고 있던 찬열의 팔이 스르륵 떨어졌다. 눈은 동그랗게 커졌다. 뭔가를 말하려는 입술이 움찔댄다.
“그러니까, 꺼져.”
미워하고 싶지 않았는데. 함께 했던 추억이 너무 소중하고 예뻐서, 정말로 나중에 헤어지게 되더라도 미워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경수의 눈에서 눈물이 두세줄기씩 마구 흘러 내렸다. 킁, 하고 흘러 나오는 콧물을 들이키면서 경수는 소리 없이 울었다. 분명 지금 얼굴은 추할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창피했지만, 눈물이 나오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오해야, 경수야. 오해야… 그니까 내 말 좀…….”
뭐라고 사실을 말해야 하는데. 분명 오해인데 뭔가가 목을 꽉 막고 있는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다. 찬열은 답답했다. 동시에, 머릿속에 그동안 자신이 했던 행동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경수가 화가 났었다. 그리고 자신은 풀어 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경수가 스스로 화를 풀 때 까지 경수를 피했다. 경수가 먼저 연락이 올 때 까지 기다리기만 했고 먼저 만나자고도 안했다. 집에 데려다 주지도 않았다. 위험했을텐데.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이 생각났다. 그 때 뭘 했을까, 나는? 백현이랑 만났고, 백현이랑 놀았고, 백현이랑 연락을 했고. 자존심이 세고 무뚝뚝한데다가 표현을 잘 못하는 경수는 속으로 쌓아 뒀을 것이다. 알아도 모르는 척 귀를 막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리고 혼자 삭혔을 것이다. 경수의 아픔을 생각하니까 도저히 뭐라고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 일」 만 오해를 풀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경수는 「그 일」 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의심하고 있다.
“들어 갈게.”
경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오해라는 말만 반복하는 찬열에게 실망했다. 조금이라도 뭔가, 찬열이 정말로 오해라고 상황 설명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힘 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경수는 뒤를 돌아 다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뒤에서 찬열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왜? 왜? 왜? 더 묻고 싶었지만 더이상 물을 수 없었다. 묻고 싶지 않았다. 물을 힘이 없었다. 이제는 지쳤으니까. 이제 그만 힘들어 하고 싶다. 마음의 짐을 내려 놓고 싶다.
울고 있는 찬열을 뒤로 하고 경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찬열의 앞에서 경수의 집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겼다.
굳게 닫겨 버린 문은 경수의 마음 같았다.
이제, 모든게 끝이 난 것이다.
***
학교엔 소문이 퍼졌다. 우리학교 공식 게이커플 1호, 박찬열 도경수 깨졌다더라. 깨졌대. 3학년 박찬열 제정신 아니라던데. 학교 분위기가 우중충하다……. 아이들의 수근거림을 경수는 모두 들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처음 얼마간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 여전히 마음이 많이 아프고 학교 구석구석에 녹아있는 추억들을 생각할때면 눈물부터 나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나았다. 아마 계속 사귀고 있었으면 더 비참하고 더 힘들었겠지. 무엇보다 종인과 종대가 많은 힘이 되어줬다. 종인은 원래부터 그랬지만 찬열과 헤어졌다는 말을 들은 뒤로 조금도 경수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수업만 끝나면 경수의 옆으로 달려왔다. 보충수업 시간에는 아예 몰래 경수의 반에 와서 수업을 듣기도 했다. 선생에게 걸려 쫓겨나면서도 경수가 못내 걱정되서는 힐끔힐끔 돌아보고는 했다.
처음에는 그냥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를 마음에서 밀어 내고자 기를 쓸 정신이 없어서 그냥 종인이 하는 짓을 가만 냅뒀다. 솔직히 위로가 많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힘들게 하고 지긋지긋하게 구는데 저도 힘들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그냥 그 마음이었다. 원래 누군가 힘들면, 그 힘든 것이 주위로 전파되기 마련이다. 경수는 종인이 그걸 버틸 수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명백한 경수의 오산이었다.
종인은 끊임 없이 경수의 곁을 맴돌고 경수를 챙겼다. 아이들이 수군대면 꼭 응징을 해줬다. 함부로 도경수에 대해서 짓껄이고 다니지마. 그 주둥아리 찢어 버릴거야. 자신 앞에서는 마냥 웃으면서 순둥한 강아지처럼 굴었던 김종인은, 다른 아이들의 앞에서는 사나운 흑표범이 됐다. 경수는 그게 고맙기도 했다. 변백현의 친구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종인은 고마운 존재였다.
종인은 경수와 눈이 마주치면 항상 웃어줬다. 경수가 울때도 그랬고, 화를 낼때도 그랬다. 그냥 눈이 마주치면 사람 마음이 편해지도록, 활짝. 그 웃음을 보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자.”
“…….”
“노래 듣자.”
점심을 먹고 멍하니 벤치에 앉아 종인과 운동장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종인이 이어폰 한 짝을 내민다. 경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이어폰을 내려다 보다가 종인의 재촉에 못이겨 결국 귀에 꼽았다. 종인은 무슨 노래인지를 한참 찾더니 환한 웃음을 지으며 노래를 틀었다. 경수도 아는 익숙한 멜로디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온다. 눈을 감고 노래를 잠자코 듣던 경수의 눈꼬리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경수야.”
충분히 예뻐. 그런 남자 때문에 상처 받아 울기에는 넌, 너무 아름다운 걸.
감미로운 목소리의 가사가 흘러 나오고, 동시에 그보다 더 감미롭게 느껴지는 종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수는 황급히 눈물을 닦아 내다 말고 고개를 들어 올려 종인의 얼굴을 본다.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한 얼굴이다. 쌍커풀이 진한, 또렷하고 순수한 눈이 경수를 응시한다. 그 눈빛에 절절한 마음이 전해져서, 경수는 정말로 울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이 노래.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야.”
you deserve better love. 너는 더 큰 사랑을 받아야 해. 내가 줄 수 있어, 경수야. 종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왜 찬열은 경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지금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이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찬열이었으면 좋겠다. 경수는 종인에게 미안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
“재촉하지 않을게.”
언제나 그랬듯 경수의 마음을 읽어 낸 종인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든 니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너를 기다리는 건 죽을때까지라도 어렵지 않으니까. 경수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걸 볼 자신이 없어, 종인은 고개를 돌렸다. 운동장을 봤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막 고백을 끝낸 종인의 귓볼은 발갛게 달아 올라 있다. 경수의 코 끝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한참동안을 말 없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집중하며 그렇게 멍하니 운동장만 뚫어지게 봤다. 경수의 마음 어느 구석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 오르는 것 같았다.
-
이제 경수도 종인과 지내는 것이 일상처럼 됐다. 종인은 아침부터 경수의 집 앞에서 기다렸고, 저녁엔 야자를 마칠 때 까지 기다렸다가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즐」 로 일관하며 종인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경수가 이제는 종인과 조금 가까워져서 서로 장난을 하고 투닥거리는 사이로까지 발전이 됐다. 물론 그 옆에서 지켜보는 종대와 세훈은 그 둘에게는 안중에도 없었다. 종인과 세훈의 우정이야 원래부터 워낙에 길고 얕은 우정이라 그렇다 치고, 종대는 경수가 자신과 놀아 주지 않는 것이 그렇게 불만이었다. 매일 툴툴대고 특기인 찡찡거림을 시전한 덕에 오늘은 점심시간에 경수랑 농구를 하기로 했다. 점심시간마다 경수와 착 붙어서 놀러 다니는게 인생의 낙이었던 김종인은 그게 몹시 불만이라 키 작은놈 둘이 무슨 농구를 하냐고 툴툴댔지만 경수의 눈흘김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도 같이 할래, 라는 말은 씨알도 안먹힌다. 결국 종인은 멀-리서 몰래 구경을 하기로 결정하고, 농구 코트로 떠나는 (신난) 종대와 흔들림 없는 경수의 작고 귀여운 뒷모습을 그저 입맛 다시며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엔 없게 되었다.
“오~ 도경수 오랜만이다?”
“시끄러.”
“도도한 도경수 공주님께서 어쩐일로 여기 행차를 하셨대.”
오랜만에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놀림을 받으니 그것도 그것대로 기분이 괜찮다. 어쨌든 「공주님」 이라는 호칭에 발끈한 경수가 응징을 하기 위해 도도도 그 친구를 쫒아간다. 오랜만에 경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을 멀리서 무슨 스토킹하듯 지켜보던 종인의 입에도 미소가 퍼진다. 아 귀엽다. 저렇게 장난 치는 것도 귀여워.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어떻게 저런 표정으로 애들을 때리지……? 그 모습마저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서 심장이 벌컥거리는 종인이다.
농구 경기를 시작하고 며칠간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아 힘은 없었지만 그래도 경수는 제법 열심히 경기를 뛰었다. 작은 몸으로 이리 저리 날아다니는 꼴이 날다람쥐 같기도 하고 너무 귀여워서 종인이 계속 피식 피식 웃는다. 뒤늦게 밥을 먹고 뭘 하는지 운동장 나무 뒤에 숨어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김종인의 옆에 다가온 세훈은, 종인의 시선이 멀리 농구코트에서 날아다니는 경수에게 닿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뒤통수를 냅다 갈겼다.
“이 도경수 중독자 새끼. 너 변백현은 어쩌고 또 도경수 타령이야?!”
벌써 몇 주 째 도통 종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미루어 왔던 질문이었다. 분명 백현이랑 잘해보려고 번호를 따간 것이 아니었나? 그랬는데 별안간 도경수랑 박찬열이 헤어졌다는 소문이 돌더니, 호모씹게이 친구 김종인은 또 도경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 세훈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어안이 벙벙하던 참이었다. 호시탐탐 물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워낙에 경수에게 착 달라 붙어 있어서 쉽게 다가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경수에게서 떨어져 나와 (물론 눈은 경수에게로 가있지만) 물어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뭔 변백현? 그새낀 갑자기 왜.”
“너 걔랑 잘해보려고 나한테 번호 물은 거 아니었냐?”
“뭔솔. 걘 박찬열이랑 잘하고 있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게 있다. 난 우리 경수 봐야 되거든? 좀 나와줄래.”
“이 씨발! 넌 우리 우정이 그거밖에 안되냐!”
“언제부터 두터웠다고 지랄이야.”
갠 박찬열이랑 잘하고 있겠지? 눈치 빠른 세훈은 아니 이새끼가 설마, 싶은거다.
“야, 너 설마 변백현이랑…”
“어! 경수! 넘어졌어! 씨발!! 야!!! 나와!! 다비켜!!!”
세훈의 질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듣고 있지도 않던 종인이 후다닥 뛰쳐 나갔다. 농구코트에 있던 경수가 넘어진 탓이다. 결국 또 혼자 남겨진 세훈만이 질문의 마지막을 혼자 중얼거렸다. 너 설마 변백현이랑 짰냐. 뭔가 뒷골이 서늘한 것이 소름이 끼치려고 했지만 애써 그런 기분을 떨쳐냈다. 아니 그렇게까지 도경수한테 미쳤겠어. 설마 그러면 김종인은 싸이코패스 수준……. 아니 김종인이라면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세훈은 혀를 쯧쯧 차고는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한마리의 미친 흑마처럼 엄청난 속도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농구 코트에 도착한 종인이 경수를 둘러싼 인파들을 모두 헤치고 경수에게 다가갔다. 별 대수롭지 않은 무릎 까짐이었지만 종인의 눈에는 그게 다리를 다 갈아버린 걸로 보인 듯 했다.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진 김종인은 다짜고짜 경수를 들쳐 맸다. 야! 왜이래! 치욕스럽게도 종인의 어깨에 달랑 매달린 경수가 몸을 마구 비틀며 이거 놓으라고 소리를 쳤지만 김종인은 끄떡도 안한다. 너 지금 보건실. 한국인이 맞긴 한건지 존나 로보트같이 무뚝뚝한 한마디로 대꾸한 종인은, 무겁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보건실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지금 뭐가 지나간거지. 농구를 하다 말고 친구를 빼앗긴 종대와 나머지 아이들만이, 흔들림 없이 곧게 보건실을 향해 나아가는 무적의 김종인과 그 어깨에 매달려 울부짖고 있는 그들의 조그마한 친구 경수의 모습을 사라질 때 까지,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보건실에 도착한 김종인은 보건쌤도 무시하고는 일단 침대 위에 경수를 조심스럽게 내려 놓는다. 경수의 뿔난 눈이 질타를 하듯 종인을 노려봤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가만 있어 봐…….”
종인이 울상이 되어서는 분주히 보건실을 헤집으며 황급히 연고와 밴드를 가져온다. 그러게 왜 요새 몸도 안좋으면서 갑자기 농구를 하겠다고 해서, 이렇게 무릎이 까져서 와. 나 속상하잖아. 혼자 꿍얼거리면서도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상처를 닦아내고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인다. 그 모습이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했다.
“너 왜 이렇게 잘해?”
“맨날 하니까….”
하긴, 매일 쌈박질을 하니까 이정도 상처쯤은 혼자 치료하는게 일상이 되어 있을 법 하다. 자기 상처는 아무렇지 않게 치료를 할거면서 경수의 조그만 상처에는 무슨 큰 사고라도 난 것 마냥 안절부절하고 쩔쩔 매는게 귀엽고 조금 웃기다.
“별로 크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오버를 해.”
“아 씨! 이게 뭐가 안커! 나 진짜 미치겠네.”
“너는 이것보다 더 크게 다치잖아. 그것도 자주.”
종인이 경수를 몰랐을 시절, 경수는 종인을 알고 있었다. 수만고 2학년의 흑표범 김종인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찬열과 만나면서 찬열이 싸움을 하고 왔을때 마다, 종인이 도와줘서 일이 쉽게 풀려 이겼다는 소리를 거의 매번 들었었다. 그때만 해도 그냥 싸움 하는 양아치 정도로만 종인을 생각했었다. 그냥 찬열의 싸움을 도와줘서 고마웠고, 어쩔땐 찬열이 다치지 말고 종인이 다 다쳤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나쁜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김종인이 지금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작은 상처를 안타까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쓸어 내리고 있다. 어쩐지 경수는 기분이 묘해졌다. 지금 종인이 다친다면, 자신은 어떤 마음이 들까?
“그러지 말까?”
“뭘.”
“나 다치는거…….”
기대에 가득찬 표정으로 물었다가, 경수의 심드렁한 대답에 금새 축 쳐진다. 그 모습이 주인에게 거절당하고 꼬리 내리는 강아지 같아서 경수가 풋, 하고 웃는다.
“싸우지 마.”
“…응?”
“싸우지 말라구.”
그 말에 종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밝아졌다. 응! 하고 무슨 어린애가 엄마에게 대답하는 것 처럼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만약 싸우게 되면 다치지 마.”
“알겠어. 안싸울게. 다치지도 않을게.”
“니가 다 이겨. 꼭 다 이겨.”
너는 쎄니까 다 이길 수 있을거야. 경수는 속으로 종인이 싸움을 하는 상상을 했다. 저 멋지고 탄탄한 몸으로 날아다니면서 아이들을 때려 눕히는 상상을 하니까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종인은 확실히 멋있다. 흑표범이라는 조금은 부끄러운 별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멋들어지게 어울린다.
“꼭 다 이길게.”
“…….”
“너 지킬거야. 아무도 못건들이게.”
그 말을 하며 종인은 또다시 활짝 웃었다. 언제나 종인의 웃는 모습은 경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잠시 미소를 짓다가도 다시 정색을 한 경수가 종인에게 꿀밤을 먹인다. 나 다시 데려다 줘. 그 말에 종인은 예! 알겠습니다! 하고 무슨 돌쇠마냥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경수를 들쳐 매려다가 한대 맞았다. 그냥 부축해 달라는 말에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쩝 다시고는, 경수의 가녀린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고 신나게 보건실을 빠져 나왔다.
보건실에서 이 모든 상황을 그저 보고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던 보건선생만이, 대체 이 학교는. 하고 중얼거리며 무심하게 차트를 넘길 뿐이었다.
***
교실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종인은 수업을 하러 갔고, 종대는 잠을 자고 있다. 경수의 반은 자습시간이고 선생은 아이들에게 자습을 시키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폰만 만지작거리던 경수는 종인의 카톡을 받아 주는게 조금 시들해지던 참이었다. 아, 할 짓 없다. 지루하다. 옆에서 쿨쿨 세상 걱정 없이 잘만 자는 종대를 깨워볼까 하다가, 요즘 자신의 성격을 받아주느라 많이 피곤하겠다 생각이 들어서 한시간 정도는 봐주기로 했다. 그럼 이제 뭘 하지. 경수는 울상을 지으며 흰자가 많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화장실에 가야겠다. 별로 쉬가 마렵고 그런건 아니었지만 아까부터 손이 끈적해서 그냥 손이라도 씻으러 가기로 했다. 종대의 사물함에서 익숙하게 핸드워시를 꺼내 들었다. 나중에 종대가 알면 「아 왜에에에에에」 거리며 찡찡댈게 분명하다. 종대가 그 하이톤 공격을 할때면 경수는 종대의 목을 공격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갑자기 손에 쥐고 있는 핸드워시가 무서워졌지만 티 안나게 쓰면 되겠지, 좋게 생각을 하기로 하고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고의 화장실답게 담배 냄새가 배여 있다. 다른 반에도 자습인 반이 있는지 누군가 또 담배를 피우고 있기까지 했다. 경수는 담배를 피지 않고 담배 냄새를 엄청 싫어해서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경수가 들어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화장실 맨 앞쪽 칸 안에서는 왠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야. 그러고 보니 도경수 씨발.”
경수의 이름이었다. 경수가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쪽을 쳐다봤다. 씨발? 뭐지? 뒷담? 내가 잘못한게 있나? 누구지? 심장이 마구잡이로 쿵쿵쿵 뛰어댔다.
“존나 남자새끼가 걸레도 아니고.”
“아 맞아. 박찬열이랑 사귈때도 존나 좆같았는데, 낄낄.”
“이제 김종인까지 후렸잖아.”
킥킥. 명백한 조롱의 웃음. 경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번도 이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항상 찬열이나 종인의 보호 아래에 있어서, 그 때의 아이들의 눈빛은 언제나 순하고 다정했기 때문에 누구도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말을 할거라곤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너무 당연한 거였는데. 경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김종인도 존나게 불쌍하다. 왜 그거한테 꼬여가지고.”
김종인도 존나게 불쌍하다. 그 말에 경수의 심장이 쿵 내려 앉는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 하긴 모를리가 만무했다. 경수가 종인을 죽어라 밀어내고, 종인이 경수에게 매달려서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전교에 없을거다. 아, 딱 한명 있나? 박찬열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다. 평소의 경수 성격으론 당장에 문을 박차고 들어가 왜 뒤에서 뒷담화를 까냐며 소리라도 질러야 하겠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경수는 축 쳐진 어깨로 손 씻을 생각도 접은 채, 그대로 조용히 화장실을 나가려고 했다.
“야. 솔직히 김종인이 도경수랑 사귀는 것도 아니고. 도경수는 사귈 것도 아니면서 왜 그거 다 받아 주는데?”
그러나 마지막 말을 듣고는 우뚝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화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내가 따라다니랬냐고! 지가 따라다니겠다는걸 내가 어떡하는데! 억울함이 밀려 들었다. 경수도 밀어 낼 만큼 밀어냈다. 밀려나지 않는 건 종인이었다. 왜 종인때문에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할까. 왜 종인때문에 박찬열은 변백현을 만나서……. 경수는 나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성큼성큼 닫겨 있는 화장실 칸 앞에 섰다. 인기척을 느낀건지 안이 조용해진다. 경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발로 문을 뻥! 하고 깠다.
“으악!!”
“씨발 누구야!!!”
“개새끼들….”
사내 놈들이 치사하게 뒤에서 뒷담이나 까고.
경수는 울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으며 정말로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안에서는 경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어쨌는지, 쫄아서는 나오지도 않고 그저 종이 칠 때 까지 문은 굳건히 닫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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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는 기분이 최악이었다. 화장실에서 직접 제 욕을 그렇게까지 하는 걸 들었으니 정신이 온전할리 만무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또 득달같이 경수의 반으로 달려온 종인이 쩔쩔 매며 눈치를 본다. 아까까지만 해도 피식피식 미소도 잘 지어주고, 말도 조잘조잘 제법 잘 하고 했는데 또 예전처럼 도도해졌다. 아까 그 소릴 듣고 종인을 괜히 원망하게 된 경수는, 종인이 끙끙대는데도 눈길 한번 안주고 종대랑만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종인은 초조한 눈으로 자꾸 종대에게 눈치를 줬다. 결국 종인의 끈질긴 눈치 공세에 지친 종대가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매점 좀. 갔다 올게.”
일어나긴 했는데 마땅히 갈 데가 없다. 배는 안고픈데 일단 매점엘 간다고 하고는, 애절한 눈으로 자신에게 손을 뻗는 경수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미안해, 경수야. 난 니 옆에서 날 노려보는 김종인이 너무 무섭다…….
종대가 나가버리고 경수는 그게 종인의 소행이라는 걸 눈치를 챘는지 종인을 팩 쏘아봤다. 근데 그 얼굴이 생글생글 웃고 있다. 정색하면 무서운 얼굴인데 웃으면 딱 제 나이대 장난끼 많은 소년같다. 항상 경수를 위로해 주는 웃음. 괜히 경수의 귓볼이 발갛게 달아 올랐다.
“너, 너희반 가!”
갑자기 꿱 소리를 지른다. 주위 애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을 돌아봤다. 그래봤자 종인의 으르렁 한번이면 다시 고개가 돌아간다. 이제 종인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가시고 걱정스러운 표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게 분명했다. 한시간 사이에 이렇게 변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거다. 우리 장미, 왜 또 무슨 일인데…. 이제 겨우 조금 나아져서 하루하루가 꿈결같던 종인은 다시 경수가 돌아가버릴까봐 초조하고 애절했다. 그래도 경수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괘씸했다. 종인은 절대로 욕 안먹고, 오히려 피해자인 경수가 욕을 먹는게 너무 괘씸하고 얄미웠다. 힘만 쎄면 다야? 치 ……아무도 못 건들게, 다 이겨 준다고 해놓고.
결국은 툴툴거림으로 끝난 경수의 표정이 잠시 울상으로 바뀐다. 자타공인 장미 도경수 빠돌이 김종인이 그걸 눈치 채지 못할리는 없었다. 너 무슨 일 있었구나! 왁 소리를 지르는 종인때문에 경수는 없던 애가 떨어질 뻔 했다.
“누구야!! 어떤 새끼야!??!”
아니 뭐, 어떤 새끼라는 말은 안했는데……. 경수는 놀래 눈을 끔뻑거리면서 무슨 이런 병신같은 새끼가 다있나, 하는 표정으로 종인을 봤다. 볼수록 신기하다. 볼수록… 또라이 같아….
“시끄러워! 애들 공부 하잖아!”
“지금 공부가 문제야?!?! 어떤 새끼냐고!”
어떤 새끼인지 얼굴은 못봤다! 종인이 소리를 지르는 거에 골이 지끈지끈 거린다. 경수는 갑자기 종인이 귀찮아져서 그냥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아, 만사가 짜증, 짜증, 또 짜증! 종인은 경수의 동그란 뒤통수를 그저 바라만 보다가는 풀이 죽었다. 괜히 찔러봤는데 확실히 뭔가 있는 모양이었다. 당장 전교생의 목을 짤짤 털어서라도 경수에게 헛소리를 지껄였다고 추측되는 놈들을 찾아 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경수가 싫어 할 것 같았기에 그럴 수도 없다. 종인은 금방 꼬리가 축 쳐진 흑강아지처럼 되서는 경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경수야 경수야. 내가 웃긴 거 보여줄까?”
경수가 귀찮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종인은 함박웃음을 짓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는 네발로 뛰기 시작했다. 종인의 약간 길어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위아래로 날뛰었다. 응? 이 뭐 병? 웃긴 상황임이 분명한데 교실 안에는 싸한 기운만 퍼진다. 모든 아이들의 행동이 일시에 정지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종인은 신나게 네발로도 뛰다가 한발을 들고 뛰다가 짐승처럼 울부짖다가 혼자 혼연의 연기에 심취해서는 난리도 아니다. 쟤 진짜 뭐하지. 경수는 갑자기 종인의 정신이 훼까닥 돌아버린게 아닐까, 진지하게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친구 세훈과 매점엘 다녀오던 종대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까지 종인의 기이한 행동을 보러 반 앞에 몰려 들었을 때 쯔음에야, 종인이 그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는 거친 숨을 색색 쉬면서 경수에게 다가오는거다. 왜이래, 정신병자야. 저리 가……. 경수는 문득 공포를 느꼈다.
“자연인 연기.”
“…어?”
“솔직히 웃겼지? 어? 어? 너 웃으라고 한건데, 웃겼지?”
그 말에 경수는 벙찌고 말았다. 경수 하나 웃게 만드려고, 그것도 이유도 모르고 혼자 기분 안좋아서 토라져 있는데. 자기 체면이랑 체통은 다 내팽겨지고 그렇게 미친놈처럼 교실을 뛰어다닌 종인을 생각하니 경수의 코끝이 갑자기 찡해졌다. 종인은 정말로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경수 외에는 종인의 머릿속은 텅텅 빈 것 같았다. 경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결국 풋, 하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웃겼어….”
인심쓰듯 해주는 말에도 신나가지고선 어린애처럼 환하게 웃는다. 그 말에 주위 애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경수를 따라 어색하게 웃는 것을 택했다. 아하하, 아하하… 순식간에 경수의 반은 주고받는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로 가득찼다. 종인의 힘이었다. 경수는 마음 속으로, 앞으로 김종인을 자연미친놈이라고 불러야지, 하고 생각했다. 내츄럴한 미친놈은 그러거나 말거나 경수의 얼굴에 웃음이 떠있다는 생각에 흐뭇해서는 다시 앵콜 공연을 하려고 몸을 굽힌다. 경수는 질색팔색을 하며, 아냐, 너무 웃겨서 배가 터질 것 같아,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 하고 울상을 짓는데 뭐 어쩌겠는가. 너무 웃는것도 건강에 안좋다고 중얼거리면서 아니 모르는건지 아님 모르는 척 하는건지. 병신같은 김종인은 경수의 앞자리 의자에 양 다리를 벌리고 경수를 돌아 보고 앉아서는, 주위 애들에게 할 일을 하라며 윽박을 질렀다. 오늘따라 가뜩이나 미친 정신이 더욱 돌아보이는 2학년 흑표범 김종인의 기세에 질린 아이들이 덜덜 떨면서 각자 자기 할일들을 마무리하러 몸을 틀었다.
이제 교실은 다시 아이들 제각각의 소리로 시끌벅적해지고, 종인과 경수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경수를 보는 종인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경수야.”
경수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몽롱하다고, 꿈 같다고 경수는 생각했다.
“이제 나 좀 봐주면 안돼?”
재촉하지 않기로 수백번을 다짐했던 종인이었다. 경수를 힘들게 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물론 경수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앞으로 알아서도 안되겠지만 경수가 찬열을 많이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 당장은 자신을 받아 들이기가 벅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경수를 조이고 싶지는 않았다. 경수가 더 힘들어질까봐 두려웠다. 그냥 옆에 있는걸로도 충분했고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사이로 마주보고 있을 수 있다는 걸로도 충분했다. 벌어진 틈은 자신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티가 나지 않게 천천히 벌리고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 문득 경수가 예전처럼 돌아 간 것 같이 행동하자 종인은 초조해졌다. 찬열과 헤어진다고 종인에게 올거란 보장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다. 종인은 급해졌다. 경수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이 불안해졌다.
“재촉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항상 당당하던 목소리는 여전히 경수의 앞에서만 기어들어간다.
“너만 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
“울지 않게 해줄게. 매일 매일 웃게 해줄게.”
그러니까 이제 내 정원으로 옮겨와, 나의 작고 예쁜 장미야. 종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애정을 갈구하는 눈빛. 경수는 이 모든 상황이 꿈처럼 정신이 없어서, 그냥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분명 자신의 마음에서 찬열이 완벽하게 나간 것은 아니었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다. 그리고 그건 다, 김종인이 도와줘서 그렇게 될 수 있었던거다. 종인은 조건 없는 사랑을 줬다. 찬열의 일 때문에 힘들때, 아니 다른 일로 힘들때도 항상 자신을 웃게 해주고 옆에서 지켜줬다. 이래도 될까? 헤어진지 얼마 됐다고, 또 나 힘들다는 핑계로 이렇게 기대도 될까. 경수의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불안에 떠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간다. 솔직히 김종인이 도경수랑 사귀는 것도 아니고, 하던, 화장실 안에서 그 치사한 놈들의 목소리가 경수의 머릿속에서 뎅- 울려 퍼졌다.
“…잘 할 수 있어?”
잠시 생각하던 경수는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종인은 지금 내가 허락을 들은건가 뭘 들은건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어? 받아 주는 거야? 솔직히 기대도 안했었다. 그냥 마음을 전하는 수준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받아 줄 줄은 몰랐다. 대답해. 하는 단호하고 조곤한 경수의 말에 종인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경수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번졌다.
경수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종인이 예전만큼 싫은 건 아니었다. 뭔가 그저 버릇처럼, 밀어 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여서 이유도 없이 종인을 밀어 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종인은 끈질기게 다가왔고 이제 그 보상을 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을 뿐이었다. 솔직히 경수의 마음 속에서 여전히 많은 부분을 찬열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종인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끊임없이 마음 속 여러곳에서 꼼지락거리다가 불쑥 불쑥 고개를 내밀고는 경수를 복잡하게 했었다. 이제 그 찬열에 묻혀져서 빼꼼하게 머리털만 내밀고 있는 종인을 끌어 내야 겠다고. 경수는 신나서 자연인을 재연하는 종인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환기를 시킨다고 열어 놓은 창문으로 쌩쌩거리는 찬바람 대신, 약간의 온기가 담긴 봄바람이 불어 온다. 평화로운 교실 풍경에, 아이들은 저마다 굳고 얼어서는 뻣뻣한 몸으로 종인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경수는 약간의 병신스러움이 담긴 표정으로 종인의 재롱을 멍하니 지켜본다. 뒤늦게 들어온 종대만이 한숨을 쉬며, 정상적이지 못한 이 호모씹게이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종인과 경수가 처음 만난 한겨울이 지나고, 늦은 봄이 시작되려는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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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인은 담배를 피우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경수 때문에 몰래 몰래 피우고는 피존이랑 향수까지 뿌려야 한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경수의 옆에 붙어 있으려면 어쩔 수 없다. 끊으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오늘처럼 경수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 준 날은 기쁘기 때문에 마땅히 피워야 했다. 암, 그렇고 말고. 종인은 혼자 되지도 않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비어 있는 칸을 찾아 들어갔다.
뻐끔 뻐끔 담배를 피우며 폰에 저장된 경수의 사진을 보고 낄낄대던 중에, 옆 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발. 아까 간 떨어 질 뻔. 문 차고 간 새끼 누구지?”
“도경수 맞지? 우리 도경수 욕하고 있었잖아. 김종인이면 그냥 넘어 갔을 리 없고…. 도경수 목소리였어.”
“헐, 시발. 다 들은 거 아님?”
“우리 뭐라고 했었지?”
“존나 걸레라고 하고, 김종인 불쌍하다고 하고.”
“아. 사귈 것도 아니면서 왜 받아주냐고 까지 했네. 좆 됐다. 김종인한테 이르면 어쩌지?”
이르기는 개뿔. 니들이 다 순순히 다 자백을 해주는구나. 몰래 담배를 피우러 갔던 화장실에서 얻어낸 의외의 성과였다. 아까 제가 떠봤을때 말도 못하고 굳은 얼굴을 하던 경수가 생각났다. 김종인의 머리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종인의 표정이 울그락 불그락 바뀌었다. 걸레? 웃기고 자빠졌네. 너네 입이 걸레다. 경수는 세상 누구보다 순결하고 깨끗한 종인만의 장미다. 그런 경수를 모욕하는 것은 누구도 용서 할 수 없다.
문을 쾅! 하고 박차고 나온 김종인이 사뿐히 몇걸음 걷더니, 정중하게 살짝 허리를 굽혀 굳게 닫긴 옆칸 화장실 문을 똑똑. 노크했다.
“누, 누구세요…?”
“나와라.”
아주 잘 걸렸다, 씨발놈들. 종인은 경수에게 그렇게나 모욕적인 언사를 뱉은 놈들을 용서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얼른 반 죽여주고 가서, 이겼다고 경수한테 자랑해야지. 생각하면 신이 나기까지 했다.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고 종인은 손에 꼽혀 있던 담배꽁초를 한번 깊게 빨아 당긴 뒤 바닥에 던져 발로 짓이기고는,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오, 사, 삼, 이, ……쾅! 막 일을 하려던 참에 문이 열렸다. 비굴한 표정의 사내새끼 두 놈이 종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종인과 같은 반 놈들이었다. 오호라, 너네였구나. 종인의 입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우리 장미 마음에 스크래치 줬다 이거지. 가만 못두지. 내 장미는, 내가 지킨다.
수만고의 흑표범 김종인이 화려하게 날아 올랐다. 툰탁한 소리와 맞물린 주먹질 몇번에, 반항 없이 고꾸라진 두 놈들을 위에서 가만히 내려다 보던 김종인이 씨익 웃으면서 중얼거린다.
“사귈 것도 아니면서 왜 받아주냐고?”
“컥, 미, 미안….”
“사귄다 이 씨발새끼들아.”
그러니까 이제 도경수는 다 받아 줘야 해. 그리고 나도 도경수 다 받아줄거고.
끝 말은 혼자서만 중얼거리면서, 종인은 두 손을 탁탁 털고는 유유자적히 화장실을 떠났다.
화장실에 덩그러니 남겨 진 오늘의 운세 꽝 두 사람은 욱씬거리는 명치 부근을 움켜쥐고 한참을 컥컥대며 종이 칠때까지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 몸을 부비다가 교실에 늦게 들어가, 힘이 가장 세고 팔팔한 남자 선생에게 사랑의 매를 선사 받고야 말았다는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미리 써놓은 분량은 여기까지에요! 앞으로 더 열심히 써야겠어요ㅠ.ㅠ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드리고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점점 길어지고 말도 안되고 질질 끌고 재미도 없어지지만 그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흑..더 노력하겠슴다!
카디 찬백한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