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다시 멍하게 흘려보냈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러고 잠시동안 기다리면 그가 날 데리고 가겠지. 오늘도 달이 환했다. 곧, 곧 올것이다. 내 손을 꼬옥 잡고 빙긋이 웃어주겠지. 그러고 보면 그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한 달 전부터, 그는 나를 찾아왔고 그 순간부터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한솔아,"
아, 왔다. 드디어 왔다.
이번에는 도시였다.
큰 도시, 높은 빌딩, 옥상 끄트머리, 그리고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그와 나. 달빛은 차갑게 그와 나를 비추었다. 그는 나를 내려다 보며 웃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마주 웃었다.
매일 그 순간이 달콤하다 느꼈지만 항상 어딘가 모르게 음산하고 끈적했다. 오늘도 그랬다.
그의 눈에서는, 검고 차가운 형상이 비치었다.
"잘 있었어?"
"그냥 비슷했죠 뭐."
"그래, 근데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것 같았는데, 아니야?"
또 다시, 그를 만나기 전에 했던 생각을 그는 정확히 읽어냈다. 내가 무엇을 말하려 하든, 무엇을 물어보려 하든,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고 늘 내 질문을 듣기도 전에 답을 해버렸다.
오늘도 그는 그럴 것이다.
"맞아요."
"뭐가 궁금해?"
난간 위로 올라서며 그는 내게 질문을 했다. 위험할 텐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좁은 난간에 올라서 있다.
"알면서 물어보는 거죠?"
"아니, 이번엔 모르겠는데?"
"거짓말."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 사실 그건 알고 있었다. 매일 밤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그가 평범한 직장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빙글빙글 웃는 그는 오늘따라 묘한 느낌을 풍겼다.
타락의 끝, 그가 나를 볼 때의 사랑스럽다는 눈빛, 그리고 냉기어린 비웃음.
"맞아, 뻥이야. 아가도 이제 똑똑해졌어."
아가?
가끔 그가 내게 아가라고 부를 때가 있긴 했다. 부르지 말라고 하면 더 아가라고 부르고 싶어진다고 나를 놀렸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소름이 확 끼쳤다.
아가도 이제 똑똑해졌어-라고 했다.
무언가 있었다.
나만이 그를 봤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인간이 아니었다. 미친놈 아니면 진짜 악마나 그 비슷한 존재.
무섭다.
"이름은 두 개야. 한국에서는 진효상, 다른 이름은 키도."
K, I, D, O, H. 철자까지 직접 읊어주는 그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키는 나보다 크지만 마른 체구 탓에 조금 약하게 보였던 효상이 오늘따라 강하고 잔인하게 보였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효상이 나를 잡고 있었다.
"나요, 나, 묻고싶은 거 하나 더 생겼어요."
"뭔데?"
"사람, 아니죠?"
"아, 진짜 어쩌면 좋냐."
갑자기 나를 돌려 세우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웃는 효상에 순간적으로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 똑똑해졌어."
설마.
"맞아, 나 사람 아니고 악마야.
그리고 너가 꿈속에서 나랑 만났던 곳도 다 가짜야.
말도 안 돼.
효상은 내 표정을 보는 것이 즐거웠는지 약간 신난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그거 알아?"
또 다시 너무 똑똑해져 버렸다며 웃고있는 내 눈 앞의 효상은 나를 번쩍 안아올려 난간 위에 올려 세우더니, 자신도 난간 위에 올라가 내 손을 잡았다.
"사람이 꿈에서 몽마랑 마주친 것을 스스로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게?"
스산한 바람 한줄기가 나와 효상을 훑고 지나갈 때 쯤,
"죽어."
효상은 나를 안고 그리 속삭였다.
죽어, 라고 했다.
그가 나를 놓자, 다리에서 다시 한번 힘이 빠져나가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난이라고 해 주길 바라지만, 효상은 낮게 웃고 있다.
"이제 너 보러 안 올거야."
"왜요?"
"왜기는, 너가 꿈을 꿀 일이 없을텐데."
이해 할 수 없다. 효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때,
바람이 갑자기 세게 불었다.
그리고 눈 앞이 잠시 밝아졌다가 도로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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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볕 잘 드는 봄날 오후, 뉴스에서는 하나같이 오늘 새벽 4시경에 한 소년이 어느 고층 빌딩에서 떨어져 죽었노라고 떠들고 있다. 그리고 저 세상 어디쯤에서, 효상은 그 소년에 대해 떠드는 이들을 비웃고 있다. 머지않아 저 사람들은 소년의 죽음을 이유 모를 자살로 종결시킬 것이다. 그리고 잊어버릴 것이다. 당연한 일이고, 혹 당연하지 않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세상 사람 중 누구도 몽마가 나타나 소년의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망가뜨리다 이 가여운 소년을 한순간에 죽음으로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믿어 주지 않을 테니까.
지금, 이유 모를 소년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그저 그들의 세치 혀가 갖고 놀기에는 딱 그만인 장난감과도 같은 사건이 되어 가고 있다. 자신이 죽었다면 길길이 날 뛰었을 테면서 남이 죽었다고 저렇게 떠들어대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효상은 얼굴에 냉소를 비치었다.
"되게 웃기지 않냐? 지들 일 아니라고 저러는거."
"그치, 한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