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죄송한데, 건들지 말아줄래요?"
"아..."
까칠한 아이여서가 아니었다. 제 손을 쳐내던 눈에 담긴것은, 겁을 먹은 듯한 눈빛이었고, 또 그 중에도 내게 무언가 애원하는 눈빛도 있었으니까.
가만히 쪼그려 앉아있는 병주 옆에 가만히 서 있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남들 말에는 이름 깨나 알아주는 유명 연예인 쯤 되던 네가 이런 눈빛도 있었구나, 라고 새삼 생각했다.
그럴 만도 했다. 병주가 있던 자리는, 온 세상의 병주의 이름을 아는 이들이 높게 높게 쌓아올린 그 자리는 병주가 있기에는 너무 벅차고 잔인한 자리였다.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입에 발린 거짓말만을 뿌려대며 그가 더 높이 날기를 강요하고 불을 붙였지.
힘들어하는 병주를 보며 세상의 시선들은 그에게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한없이 차가워졌고, 날로 잔인해졌다.
이들의 시선에 병주가 선택한 방법은 스스로 날개를 부러뜨리는 것이었다.
사실, 진짜 원했던것은 그걸 넘어서 끝을 보려는 것이라는 것 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면 저를 건드렸던 모든 이들을 '죄 없는 사람을 죽인 천하의 개새끼들'로 만들 수 있는 확실한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신은 그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지독히 냉정하며 한편으로는 눈물 날 정도로 자비로운 이는, 병주를 한달만에 다시 돌려보냈고, 그렇게 그는 부러진 날개와 수없는 자상들을 끌어안은 채 다시 돌아왔다.
병주의 화려한 귀환을 바라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누가 보아도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다시금 자취를 숨겼다. 그렇게 그 곳에서 한참을 지냈다.
'비주'. 예명의 뜻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다지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 않을까.
사람들의 시선이 어찌하든 병주가 모든것을 잃고 돌아와서 숨어버린 지금, 그런 예명 따위보다는 세 글자로 된, 진짜 이름 '김병주'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지호는 병주를 한참동안 내려다 보더니, 이내 풀썩 앉으며 조심스레 병주의 어깨에 손을 올려왔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건들지 마세요, 좀"
"갈까?"
"아니, 그러니까.."
제 어깨에 올라온 손에 흠칫 하던 병주는 다시 한번 쏘아붙였지만, 지호의 말에 당황하여 표정까지 변했다.
속으로 골백번은 더 가지 말아달라고 외쳐댔을 병주임을 알면서도 지호는 모르는 척 했다.
"건들지 말라며,"
"아, 알았어요, 말 안할테니까 가지 마요."
아무리 일에 이골이 난 병주라지만, 짧고도 긴 시간동안 계속하여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 질타를 한 몸에 받았던 병주이기도 했다.
그 탓인지, 어딜 가도 누구 한명이라도 제 옆에 있어줘야 마음이 편했다. 이제는 혼자 있기가 두려워졌다.
애초에 체구가 큰 편도 아니었지만, 기분 탓인지 웅크려 있는 병주가 유난히 작아보였다.
병주야, 지호는 병주의 앞에 마주보고 쪼그려 앉아서 가만히 병주의 눈을 쳐다보며 이름을 불렀다.
다시 고개를 든 병주의 눈은 처음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지호는 무언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병주가 그토록 애원하던 것과 미워했던 것들. 아주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계속 이러고 있을거야?"
병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호는 그런 병주를 일으켜 세우고 밖에 나가보자며 팔을 잡아끌었다.
"나가보자, 아- 날씨도 좋네. 그치?"
"지금요?"
"응, 지금. 가자!"
"..."
"가자, 응?"
병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밖에 나간다는 말인가.
지호도 제 나름의 생각이 있겠지만 병주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도저히 그 사람들 앞에서 이전처럼 멀쩡히 웃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병주의 온몸을 꽁꽁 묶어 발걸음을 막았다.
지호는 그런 병주를 바라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병주야,"
입만 열면 터져나올 것 같은 말들을 애써 눌러 참은 지호는 이내 제가 졌다는 듯 웃어보였다.
"그래, 다음에 가면 되지 뭐."
"꼭 나가야 되는 거에요?"
"응? 어...그게,"
죽어도 나가기 싫다는 듯 물어오는 병주의 모습에 당황한 지호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던가 그런건 없어.
근데 니가 언제까지 여기에서만 있을 수도 없는거잖아.
기본적으로 어느정도 살아가는 건 상관없다 해도 외롭지 않겠어?
다시 사람들이랑 얘기도 해보고 그래야지."
지호의 말을 듣던 병주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누가 외롭다고나 했어요?"
"아니 그러니까, 병주야,"
"왜요, 누가 외롭다고 하기나 했냐구요."
"병주야."
"그런식으로 해놓고 나중에 은근슬쩍 컴백이니 뭐니 눈치주고 그럴거면서."
순간 지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지호의 진심이 무엇이든간에 병주는 믿으려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만서도 그런 말을 들었다는게 괜히 서운했다.
병주에게 행여 무슨 말이라도 잘못 할까 불안했는지 지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병주의 잘못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병주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호가, 돌연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병주야."
"왜요."
"병주는 나 모르지?"
"모르죠."
"안 궁금해?"
"네?"
다소 엉뚱한 지호의 질문에 병주는 이게 뭔가, 싶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궁금해?"
"어...궁금해요."
마치 궁금하다는 대답을 해달라는 듯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저를 쳐다보는 지호를 차마 외면하기가 어려웠던지, 결국에는 궁금하다는 대답을 내놓고 만 병주다.
"그치 궁금하지?"
"네..뭐"
"근데 그냥 알려주면 재미가 없잖아."
"그래서요?"
"나가자. 그러면 알려줄게."
결국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얼굴을 찌푸리던 병주가 허탈한 웃음을 얼굴에 띄워냈다.
"저기요,"
"응, 병주야."
"장난하세요?"
"아니, 진심인데?"
"싫다니까는 왜 자꾸 나가자고 그래요. 네?"
"음..."
지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나가기 싫은건데?"
"그걸 몰라서 물어요?"
"사람들이랑 만나기 싫어서지, 그치?"
"당연하죠, 그걸 말이라고.."
"그러면 사람들 많이 없는 곳으로 가면 되잖아."
병주는 말문이 막혔다. 속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가자, 알았지?"
지호는 병주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이미 문쪽으로 저만치 나가 있었다.
저 사람 믿어도 되려나, 싶었지만 없던 일로 무르기에는 글러먹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은 저를 잡아줄 사람이 너무나도 필요했다.
'설마 무슨 짓을 하겠어, 일단 기대보자 김병주.'
병주는 타박타박 지호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호는 그런 병주를 바라보며,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신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