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취향을 존중하라》
“야, 도경수.”
“응! 왜?”
변백현에게 빌렸던 파란색 리코더를 돌려주고 오는 길이었다. 중앙 계단 앞에서 김종인은 발을 툭툭거리고 있었다. 옆엔 오세훈도 있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우린 발을 떼었다(오세훈에겐 미안했지만). 8반까진 화장실과 교무실을 거쳐야 했다. 여학생들의 시선이 김종인에게로 집중되는 건 보나마나 뻔한 일이었다. 그래, 슬픈 일이지만 중학교 때 잠시 사귀었던 여자애도 하나에 속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녀의 안중에서 아웃이었다. 길고 긴 복도 끝에 다다르는 동안 김종인과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종인이 말을 꺼낸 건 7반 앞을 지나칠 때 쯤이었다.
“뭐하고 왔냐.”
“아, 저… 그… 뭐였더라. 어! 맞다. 리코더 주고 왔는데.”
“그래.”
난 김종인이 날 부른 이유를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럴 거면 왜 부른 거야? 그저 내가 지나가기에 불러보았는지도 모른다. 변백현 말마따나 자주 괴롭히고 싶게 생겨서라던가. 남학생들이 득실거리는 교실은 분필가루와 먼지가 정복하고 있었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책걸상이 넘어지더니 용의자는 급기야 밖으로 나가기 일쑤. 쟤 잡아! 하고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멀어져갔다. 그 와중에 김종인은 사물함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과학책을 꺼냈다. 그 때, 난 누구에게던 묻고 싶었다. 누구와 친해지면 이렇게 놀랄 일이 많을까요 하고 말이다. 돌아오는 대답이 어떻던간에 김종인은 이미 내가 아는 모습이 아니었다. 혹은 내가 보았던 모습들이 다가 아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앉아.”
“나 책 꺼내야 돼.”
생일로 맞춰둔 비밀번호는 간단했다. 열어본 사물함은 쓰레기의 소굴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놓여진 책들이 있었다. 그러다 과학책을 찾으려 뒤적거리는 순간, 위태위태 하던 책더미들이 쏟아지고야 말았다. 차곡차곡 담다가 과학책이 보이길래 옆으로 제껴두고 오랜만에 사물함 정리를 했다. 남들이 보면 남학생 치고 섬세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 정리를 마치고 자물쇠를 잠갔을 땐, 옆에 두었던 과학책의 행방이 불명해졌다. 혹시 책상에 있나? 하고 책상을 보았다.
김종인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과학책은 책상 위에 반듯이 올려져 있었다. 난 또다시 누구에게던 묻고 싶었다. 원래 남자끼리 친해지면 이렇게 잘 해줘요?
* * * * *
5교시가 끝나고, 박찬열은 내 옆자리로 오지 않았다. 오기는 커녕, 예전 그 습관을 똑같이 재현해냈다. 종이 치자마자 밖으로 나가더니 다음 수업을 시작하는 종이 칠 때서야 들어오는 게 아닌가. 덕분에 10분 내내 도경수가 돌려준 리코더를 받을 때를 제외하곤 앞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앞문으로 들어와 자기 자리에 앉을 때까지 녀석은 내게 눈짓 하나 주지 않았고, 난 모호한 기분으로 6교시를 들어야만 했다. 웬일인지 박찬열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업을 경청하고 있었다. 갑자기 녀석이 미워져서 다시 엎드리고야 말았다.
“…찬열아.”
내가 먼저 녀석의 자리 옆으로 간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적정선에서 타협을 보기로 했다. 찬열이 형은 적성에 맞지 않을 뿐더러 주인님이라 부르기엔 적성과 흥미 모두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남자 둘이서 쉬는 시간에 가만 앉아 얘기만 하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눈에 띄게 즐거워 하는 것도, 쌍욕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혈기왕성한 남학생끼리 눈을 마주하고 있는 꼴이라니. 타이밍 좋게도 박찬열의 짝궁은 바쁜 일이 있는 듯 허겁지겁 교실 문을 나섰다. 난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에 걸터앉아 박찬열을 보았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참 잘생겼다. 이마에서부터 오똑하게 내려오는 코부터 또렷하고 큰 눈에다가 입술과 턱선까지.
“……찬열이 형.”
박찬열은 그제서야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장장 한 시간만에 보는 녀석의 미소는, 뒤에서 역광으로 비추는 햇빛과 더불었다. 내가 XY였기에 망정이지, XX가 보았으면 첫눈에 뿅 가버릴 듯한 웃음이기도 했다. 난 박찬열에게 압도당했고 좋아하는 선배에게 고백하는 남학생마냥 쑥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전에 자비라고는 없는 박찬열의 눈이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난 그거 말고 다른 걸 원해. 그러나 사람 심리는 그렇고 그렇지 아니한가. 멍석을 깔아주면 더욱 쑥쓰러워진다고, 깔아놓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고. 아, 현기증 나.
“…….”
난 엄마가 돌아오시기 10분 전, 숨겨둔 폴더를 꺼내놓는 것마냥 중대한 결심을 했다. 좋아, 변백현. 하나 둘 셋, 하면 하는 거야.
하나, 둘, 셋.
“…주인님!”
이내 한마디를 끝으로 난 내 자리로 줄행랑을 치는 것 말곤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강아지가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
박찬열은 삐지는 것 만큼이나 풀리기도 잘 풀렸다. 그러나 내 머릴 쓰다듬고, 예나 다름없이 웃던 녀석의 기분을 다시 저하시킨 원인은 바로 야자였다. 내 기억엔 녀석이 밤늦게 남아 우리와 함께 공부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석식을 먹고 난 뒤, 내 옆에 있을 줄 알았던 박찬열이 다시 어딘가로 떠났음에 난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무리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러다 문득, 박찬열과 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친구였지만 결코 단순한 친구가 아니었다. 경수와 그 전의 다른 친구들을 떠올린다면 가끔은 남사스러운 얘기도 꺼내고, 지나가는 여자들의 몸매에 대해 평가하기도 했다. 서로의 입에 순하지 못한 말들을 담아내는 것도 보통일이었다. 박찬열과 그들의 다른 점이었다. 유난히도 제 머리를 쓰다듬기 좋아하는 박찬열에게는 혈기왕성한 소년이 아니라 수줍은 소녀가 되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이대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난 아직도 녀석을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아, 그런데 잠깐, 내가 박찬열 번호를 알던가…? 삼천포로 빠져버린 덕분에, 또 하나 할 일이 생겼다.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일어나 볼래?”
머릿속에서 잡다한 생각들이 실타래 엉키는 소릴 내며 굴러가고 있던 도중, 가녀린 목소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 무슨 일이야? 하고 고갤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주연희였다. 보충 설명을 하자면 우리 반 반장이기도 했다. 꽤나 청순한 외모는 여럿 남학생들을 홀리기에 충분했으나 그녀는 아직 애인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곧 있으면 체육대회잖아. 반티 시안인데, 넌 여기서 뭐가 제일 나은 것 같아?”
“난…… 이거.”
“그래? 나도 그거 골랐는데. 고마워!”
벌써 체육대회 시즌인가. 난 학교가 잡다한 종목 준비로 떠들썩한 걸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주연희는 수긍하는 투로 내게 말을 건네왔다. 그녀는 아직 날 공부만 꿰는 범생이로 알고 있으니까. 덜 풀린 실타래가 들어있는 머리로 고심끝에 고른 시안은 유치원복이었다. 내 머릿 속에 들어있던 주체는 박찬열이었으니까. 녀석이 유치원복을 입는다면 핫팬츠가 되어버리고야 말테다. 유치원 이름은 긴 다리 유치원, 원장은 변백현, 유일한 학생은 박찬열. 의외로 환상적인 조합에 킥킥대며 웃고 있던 도중, 박찬열이 들어왔다.
“뭐 재밌는 거 있어?”
“어! 저기 미안한데, 반티 좀 골라줘.”
“난 이거.”
주연희는 센서라도 붙여놓은 듯, 박찬열이 들어오자마자 녀석에게 달려가 반티 시안을 골라달라 했다. 녀석이 아무 망설임 없이 반티를 고른 탓에 주연희의 신나는 기분은 민망해지기 일쑤였다. 박찬열은 정말 제 자리라고 공표라도 한 듯 아주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길래.
“반티 뭐 골랐어?”
“5번.”
“나돈데!”
“무슨 생각 하면서.”
고민은 아주 잠시였다.
“너 생각 하면서.”
“…날 왜.”
“걍. 너 키도 큰데 꼬꼬마들 바지 입으면 웃길 것 같아서. 키킥.”
“나돈데.”
“엉?”
“나도라고.”
“뭐가?”
“나도 니 생각 하면서 저거 골랐다고. 유치원 놀러온 똥강아지 보고 싶었다고 하면 믿어라.”
믿어 줄래? 도 아닌 믿어라. 박찬열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쑥쓰러운지 그렇지 않아도 곱슬인 머리를 빙빙 꼬기 시작했다. 난 그런 녀석을 가만히 엎드려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시계를 보더니 5분이면 달콤한 휴식마저 곁을 떠난다더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설마 석식 대신 쥐약을 먹진 않았겠지. 오늘따라 횡설수설하는 박찬열은 지금 당장 유치원복을 입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철부지에 가까웠다. 안절부절 초조해하며 다리를 떨고, 손톱을 물어뜯고, 내 얼굴 한 번 보고, 어색한 웃음을 한 번 지었다. 난 경수와 내기를 하고 싶었다. 박찬열이 남은 5분을 쓸모없는 데에 허비할 것이다에 몇 푼 되지 않는 통장의 전재산을 걸 수도 있었으니까.
“나 공부한다.”
“주인님?”
웬일로 박찬열이 공부를 다 하신단다. 못된 맘이었지만 난 녀석에게 승부수를 띄우고 싶었다. 예상대로 녀석의 발걸음은 순간 멈추었다. 정적과 동시에 마주치는 서로의 눈. 작은 바늘은 곧 5를 가리킬 전망이었다.
“끝나고 보자.”
녀석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 쯤이었다. 아까만 해도 검정색인 것 같았던 녀석의 실내화는 하늘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 내 거랑 똑같은 색이다.
JARA님이 쓰신 글입니다. 많이 늦었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죄송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번엔 찬백 비중을 조금 더 늘려봤어요 맘에 드신지 ლ(╹ ◡ ╹ ლ) 맘에 드셨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3편에서 익인분이 뜬금없이!!! 문체 칭찬을 해주셔서!!! 특히 신경 썼는데 뚝뚝 끊어쓰다보니까 저번 화보다 못 나온 듯..
그래요.. 사람은 노력과 과정이 중요한 거니까요..? 그렇다고 믿을게요... 또르르☆★
BGM은 노리플라이-바라만 봐도 좋은데 입니다
ps1. 주간아이돌 김기범 너무 귀엽네요 도경수 변백현 저리가서 무찌르고WARA
ps2. 아 쓸 말이 있었는데 뭐였더라 까먹었어요 하여튼 good day~♡
ps3. 초록글가보고싶다ㅇ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