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하,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내가 그놈들을 콱-!”
종인과 혜수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산기슭에 울려퍼졌다. 남자라면 있건 없건 누구나 한번 쯤은 자랑하고 싶을 17:1 무용담을, 종인은 아주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혜수도 간간히 맞장구를 치며 종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려두기도 했고. 이만하면 거의 넘어온 거나 마찬가지라 종인은 생각했다. 잘만 하면 캠퍼스 CC가 될 수도 있겠지, 들뜬 상상에 바빴다.
둘은 방학을 맞아 찬열과 준면 같은 대학동기들과 함께 2박 3일, 외딴 산장에 방문했다. 바리바리 싸온 소주와 맥주에 의해 모두가 함께 거실에서 뻗어버린 그 다음 날, 종인은 혜수를 불러 산장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던 옆으로 길게 뻗은 나무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게 되고 자연스레 손까지 맞잡게 된 건.
“맞다, 요즘 보고 싶은 영화 있어?”
“…돈의 맛?”
“아, 뭐야 김종인! 완전 응큼해!”
그 후로 한참 영화 얘길 하며, 손 잡은 둘은 걸었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가까워지던 산장의 불빛은 점차 희미해지고, 기어코는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절부절 못하는 혜수를 대신하여 종인이 핸드폰을 들었지만, 워낙 깊은 산 속이라 스마트폰마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박찬열은 이럴 때 뭐하고 쓸데없을 때에만 찾아오는지. 애꿎은 찬열을 탓한 종인이 두려움에 떠는 혜수를 제 옆으로 잡아끌었다.
“종인아!!!!”
혜수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공포가 머릿속을 지배한 채 종인은 산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한참을 그렇게 미끄러졌을까, 혜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그녀는 누군가가 찾아주지 않고서야 종인처럼 고립될 것이 뻔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혜수고 뭐고 종인의 생사가 급했다. 옷은 나무에 긁혀 쇄골과 팔뚝, 허벅지가 드러나 있었고 신발 한 짝은 옆에 나뒹굴어 있었다. 주섬주섬 신발을 신은 종인이 정리할 필요 없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산 속을 헤메기 시작했다.
산을 타본 적도 없을 뿐더러 시기는 또 밤이 되니, 종인은 슬슬 정말로 자신이 고립되어 산사나이처럼 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의 첫걸음을 떼었다. 만약 그런다면 제 의식주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여자 한 번 만나보지 못하고 쓸쓸하게 여생을 마감해야 하나. 게다가 산의 날씨는 워낙 변덕스러워 찢겨진 부분을 비롯해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종인은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이 점점 비탈을 내려가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
얼마를 걸었을까. 종인이 생각을 되찾은 건 장황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나서부터였다. 비록 밤이었지만 드문드문 보여지는 길을 감싼 나무들, 그리고 종인과 마주보고 있는 오두막, 나무들의 끝자락에 위치한 두 집. 종인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이미 누군가가 내어놓은 듯한 산길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장황한 그 곳’을 향해 걸어갔다. 입구에 선 순간, <청명 과수원>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과수원에 들어서는 순간, 과장된 표현으로 사과 냄새가 종인의 코를 찔렀다. 시작부터 쭉 이어지는 사과나무에 종인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마냥 흙이 깔려있는 길을 정처 없이 걸었다. 몇 분 전 산 위에서 보았었던 것처럼, 과수원은 길고 넓었다. 서울에서 온 터라 이런 풍경은 처음 보았지만, 만약 비유를 할 수 있다면 ‘사과 목장’이라는 비유를 하고 싶다고 종인은 생각했다. 그리고 우선은 집이 있으니 사람도 있겠지. 생각을 하고나자 허기가 졌다. 다행히도 종인은 현재 과수원에 있었으므로, 나무 곳곳에 열려있는 사과를 따먹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먹었다는 말이 적절할 정도로 말이다. 아삭, 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 살겠다.”
기어코 종인은 한 그루의 나무에 열려있던 사과의 대부분을 먹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배를 가득 채우는 포만감 속에서 종인은 사리분별을 시작했다.
우선은 혜수가 걱정이었다. 혜수 역시 종인처럼 산을 타 본 경험이 없다고 가정할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날이 밝아질 때까지 기다린 뒤 구조신호를 요청하거나 제 발로 산장까지 찾아가는 것 외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만약 혜수도 조난당한다면… 우선은 산장에 있던 친구들을 믿어보아야겠다고, 종인은 생각했다. 자신이 구해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혜수가 종인의 이런 모습을 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혹은 제3자가 아닌 종인의 상황에선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종인은 산 속에 두 시간 여 고립되어 있었다고 짐작했다. 혜수와 함께 산장을 나섰을 때가 밤 열 두시, 얘기를 나눈 시간은 대략 한 시간. 그리고 짐작한 두 시간을 더하면 지금은 새벽 네 시였다. 우선은 어디서든 잘 곳을 찾아야 했는데… 아. 오두막이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길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종인이 찢어진 옷가지를 끌고 길의 끝으로 향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이 있으니, 사람도 있을테다. 그럼 내일 어떻게든 말해보면 되겠지.
당신은 동 틀 준비를 하는 새벽, 외딴 시골의 과수원에서, 찢어진 옷을 입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과를 먹어치운 뒤, 오두막에 올라가 번데기 모양으로 잠을 청하는 사내를 본 적이 있는가. 만약 yes의 답이 나온다면, 당신은 그 날 종인을 지켜보던 청설모이거나 귀신일지어다.
* * * * *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달칵.
경수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아침 여덟 시, 어렸을 적부터 아침을 함께 했던 자명종 덕분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이불 정돈을 하고, 화장실로 건너가 세수와 양치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가 물 한 컵을 마셨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아버지가 친구 분 장례식에 가시고, 어머니는 핑크색 포스트잇에 메모 한 줄을 써놓으시고 어딘가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경수는 메모를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아침부터 혼자 있는 집은 적당히 찬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날은 밝았다.
“엄마 장 보러 간다. 아빠 장례식 가신 건 알고 있지? 빨리 올게. 밥은 차려놨다. 먹어라… 아이씨! 이게 뭐야! 다 풀이잖아!”
식탁에 있던 천을 뒤집어본 경수가 실망했다. 콩나물부터 시작해서 시금치로 끝나는 아침밥은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왜 장을 보러 가셨는지 알 법도 한 경수는, 다시 윗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가꾸지 못했던 몇 그루의 사과나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얀색 무지티에 편한 진을 입은 경수가 마지막으로 얇은 남방을 집어들었다. 서늘한 아침에만 입고 날이 더워지면 벗을 예정이었다. 아웃 오브 안중이었던 아침밥에 몇 초간 눈길을 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스니커즈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검은색 삼선 슬리퍼는 경수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그렇지, 경수에겐 나름대로의 패션 철학이 있었다. 옆집 백희가 오빠 멋있어요! 하며 잘 따라다니기도 했고.
“날씨 좋고! 우리 사과들 좋고!”
집 밖으로 나온 경수가 솔솔 부는 바람을 만끽했다. 어제 어디까지 했더라… 아마 저기까지였던 것 같았는데. 어제 나무 옆에 도구들을 남김으로서 표시해 둔 나무를 발견한 경수가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살충제를 뿌리고 가지를 치는 일을 몇 그루 정도 반복했다. 중간에는 경수에게 높은 사과나무도 있었지만, 도구를 담아둔 수레엔 발디딤대도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경수가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오두막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나무들 뒤에 빼꼼히 숨어서.
“사과~ 사과~ 맛있는 사과~ 난 우리 사과가 좋더라…… 으엥?!”
미쳤나봐! 경수가 눈을 의심했다. 어젯밤 종인의 손을 거치고 난 사과나무 한 그루엔, 사과가 없었다. 열려있지 않았다. 경수가 손수 살충제를 뿌리고, 반들반들하게 닦아놓아야 할 사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큰 경수의 눈이 더욱 커졌다. 아버지한테는 어떻게 말씀드리지? 어머니한테는? 잎사귀들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사과는…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종인의 뱃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경수가 우선은 다른 사과나무를 가꾸어야겠다며 바로 옆 사과나무로 향했다. 그 무렵, 종인은 어디선가 들려왔던 노랫소리를 환청으로 착각하고 계속 깊은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순간이 둘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오기 시작했다. 경수가 오두막에 거의 가까워진 것이다. 마지막 세 그루 째였다. 명탐정 코난이라도 된 듯, 손으로는 사과를 가꾸고 머릿속으로는 ‘아까 그 사과나무’를 생각하고 있던 경수의 눈이 오두막을 향했다.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오두막엔, 찢겨진 옷을 입은, 웬 아기사자를 닮은 남자가 곤히 자고 있었다. 경수의 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누구지? 내 생각이 맞다면, 남자는 낯선 사람이었다. 제 친척이 왔더라면 문을 두드렸을 것이고, 옆집 이장님의 몇 없는 친척분이 여기에 오셨을리도 없다. 길은 많았지만 끝은 하나였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외부인이 경수가 자고 있는 도중 사과나무 한 그루를 통채로 먹어버린 것이다! 경수의 흰자와 홍채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가만두지 않겠어!
“야!!!!!!!!!!!!!!!!!!!!! 너!!!!!!!!!!!!!!!!!!!!!!”
그 소리에 잠을 청하던 종인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종인의 옷차림을 본 경수의 눈이 더욱 커졌다. 쇄골과 팔뚝의 맨살은 드러나 있고, 그 와중에도 배는 뽈록 나와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멍해있던 종인의 눈이 점점 오두막을 향해오는 경수를 향했다. 무서운 외모도 아니었건만, 경수가 종인과 가까워질 때마다 종인은 움찔거렸다.
“당신 누구세요.”
“누, 누구?”
“당신이 우리 사과 다 따먹었죠!!! 그것도 한 그루씩이나!!!!!”
“배고파서 그랬는데, 왜, 왜 그렇게 화를 내!”
이 사람 봐라, 적반하장이네. 경수가 소매를 걷어올렸다. 조용하던 청명골에, 아침나절부터 큰 일이 하나 터지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