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미영이 정성껏 차려놓은 풀밭 밥상은 결국 종인의 입으로 인도되었다. 꽤 맛있네요, 하고 웃는 종인이었지만 살아생전 고기 없는 밥상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고역일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 구원자인 참치마저 없는 밥상은 잘 버무려진 ‘푸른 것들’에 의해 소생했다. 다르게 말하면, 입맛을 돋구기에 충분했다.
“아줌마, 한 그릇 더 주세요.”
미영이 뿌듯한 눈으로 종인을 보았다. 만약 경수가 백현에게 가지 않았다면 경수는 여기서 운명할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아니면 종인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거나.
*
경수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백현은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문장 하나를 쓸 때마다 피유- 한숨을 밷고, 머리를 긁적이고,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동동 굴렀다. 경수가 백현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백현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백현의 어깨 너머로 ‘우리 아빠는 이장님이다.’라는 문장이 지렁이가 기어가듯 씌여져 있었다. 경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고사리였지만, 미영이 백현의 손을 보고 “아유, 고사리 같네~”란 말을 한 뒤로 경수 역시 그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고사리는 아마 하얗고 길 것이라고, 경수는 추측했다.
“까꿍!”
“엄마야!!!!!!!”
놀랬어? 많이 썼네! 백현의 머릴 쓰다듬는 경수였다. 백현이 빙그레 웃었다. 뿌듯한 얼굴이었다. 경수의 예상으로는, 내일 아침 변이장 집의 문엔 문패가 하나 더 걸릴 것이었다. 문구는 이장님 집. 백현이 경수의 손을 톡톡 치며 말했다. 애교 넘치는 말투는 덤이었다. 사과 먹고 시펑…. 곧 공부는 그만 하자는 무언의 협박이기도 했다. 만약 한 문장만 더 쓰자 했다간 성질 하나는 최고인 백희에게 하루종일 투정과 심문을 당하리라. 귀찮은 기억에 경수가 고갤 절레절레 저으며 백현의 손을 잡았다. 나가는 게 상책이지 싶었다. 시계를 보았다. 대체 뭘 했다고 한 시가 넘어 있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감사히 먹었습니다.”
경수와 백현이 손을 꼭 잡고 계단을 내려왔다. 종인과 백현의 눈이 마주쳤다. 백현이 하얀 강아지처럼 웃어주었다. 종인의 머리에 든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귀엽다, 옆의 흰자부자 씨보다 더. 미영이 경수에게 물었다. 어디 가니? 백현이 사과 따 줄겸, 집에 데려다 주려고. 너 근데 배는 안 고파? 사과 먹으면 되지. 모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종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수의 눈이 종인을 향했다. 백현과 눈을 마주칠 때의 의식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저 흰자는 내니 맥피의 지팡이처럼 사람을 마법에 빠지게 하는 마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보고 있으면 정신이 멍해지는 것 말이다. 종인의 생각은 경수가 신발을 신으러 현관으로 가는 것에 의해 종료되었다.
“왜요? 따라오게요?”
“안 돼?”
“아, 아니! 돼요. 되고 말고.”
종인이 신발을 보고 멈칫했다. 아깐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흙을 비롯해 온갖 먼지가 뭉쳐 신발코에 붙어있었다. 경수가 뒤를 돌아 종인에게 말했다.
“빨래 할 때 그것도 같이 빨아요.”
끄덕이는 종인이었다. 그래, 우선은 찝찝하지만 신기로 했다. 제 앞을 걸어가는 경수의 신발 사이즈는 종인이 중학교 때나 신었을 법한 것이었다. 키도 작고 발도 작다고, 종인이 생각했다. 물론 경수는 이 말을 싫어했다. 가끔가다 아버지가 성질을 돋구기 위해 비슷한 류의 말을 꺼낼때 쯤, 경수의 흰자는 불타오르고도 남았다. 물론 경수가 반박할 내용 역시 있었다. 모든 것이 유전자 때문이라는 것.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경수의 아버지 역시 남자치고 큰 키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빨래는 언제 할까. 신발을 구겨신고 절름발이 걸음으로 앞서가는 경수와 백현을 겨우 따라잡았다. 백현이 종인을 가리키며 웃었다.
“어? 형아 친구 또 와따!”
종인이 알듯 말듯한 웃음을 지었다. 백현은 귀여웠지만 어린 아이를 상대하는 건 종인의 체질이 아니었다. 우는 조카를 달래다 종인 자신이 울어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까꿍 한 번만 해주어도 아이들의 눈물샘을 펑! 하고 터트리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에 비해 백현은 양호한 편이었다. 보아왔던 다른 아이들보단 큰 점도 종인에게는 감지덕지한 어드밴티지였다. 몇 주 혹은 몇 달을 봐야 할 사이인데 계속 울려봤자 좋을 건 없지 않은가.
“형아! 지금은 빠알간 사과 안 열려여. 나중에 와야 대여. 아직 소용 업서여. 그치, 형아?”
“으, 응! 당연하지. 지금은 사과 안 익었으니까.”
종인이 말에 숨겨진 뜻을 파악하는 동안 백현은 이미 경수의 손도 놓은 채 앞장서서 뛰어가는 중이었다. 졸지에 둘은 대공원에서 들뜬 아이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한 쌍의 부부 같은 꼴이 되었다.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자영이 보았다면 원래 부모가 자신이 아니라 종인과 경수라는 오버스러운 말을 늘어놓기에 충분할 만큼.
“아까 나중에 오란 말이 무슨 말이야.”
“아 그거요…. 백현이가 아까 그쪽, 아, 아니 김종인 씨 누구냐고 물어봐서 그렇게 대답해줬어요.”
“꼬맹이 이름이 백현이야?”
“변백현이에요. 누나도 있어요. 변백희라고, 앙칼진 애.”
경수가 묻지도 않은 백현의 호구조사까지 마쳤을 때, 백현이 울상인 표정으로 경수에게 달려왔다. 다름이 아니라, 사과나무에 달려있던 사과들이 모두 없어졌다면서 칭얼대기에 바빴다. 종인은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말했지 않은가, 아이 다루는 데엔 젬병이라고. 백현이 발을 동동 굴렀다. 형아, 어케 해?
“……형아가 백현이 놀라게 해주려고 다른 데로 옮겨놨지!”
경수가 원래의 사과나무가 위치해있던 곳과 전혀 엉뚱한 방향을 가리켰다. 진짜루? 형아가 진짜 나무 옴겨따구? 백현의 눈이 어느새 초롱초롱 빛났다.
“그럼 저 사과나무는 머야?”
“저건 형아가 아까 배고파서 먹었어.”
배가 고프긴 무슨, 한 끼도 먹지 않은 탓에 허기 진 뱃속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경수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종인에게 눈초리를 보냈다. 종인은 먼 사과나무만 바라보았다. 저게 원래 백현이 사과나무야, 하고 경수가 가리킨 곳에는 사과가 가장 탐스럽게 맺혀있는 나무가 있었다. 셋의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했다. 경수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혹시 들은 거 아냐?! 하고 종인을 보았을 때, 종인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