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2:00
백현이 눈을 떴다. 창밖은 어둠 뿐이다. 새로 구입한 아이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두 시. 짙은 어둠의 공기가 백현을 감쌌다. 짓누르는 무언의 것, 결국 갈 곳 없는 의식의 흐름은 자신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들고 섬광을 비춘다.
잔돈은 됐어요. 하고 내렸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도통 그 다음 구절을 잇지 못하겠다. 보나마나 고주망태인 채로 온갖 주정은 다 부리며 집에 당도했겠지. 그리고 갑갑한 마음에 넥타이를 풀어헤쳤을 거다. 늘 똑같은 패턴은 사람을 지치지도 못하게 한다. 결국 하나의 미완성된 인간인 나는 사막에 적응했다. 진화는 없다.
문자라곤 없다. 대리운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상업성 멘트는 진부하다. 구겨진 미간의 백현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AM 9:50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다. 아니, 갈아입는다기보단 매무새를 정리한다. 수염으로 까끌해진 턱을 거울에 요리조리 비추어본다. 면도는 귀찮아 생략한다. 현관에 난잡하게 방치된 갖가지 신발들 중 무광의 검정 구두를 골라 발을 구겨넣는다. 꼭 이럴 때, 시간에 제약 받지 않는 직업은 모든 직장인의 선망대상 1순위로 등극한다.
마지막으로 4층짜리 오피스텔 건물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선다. 살을 에는 겨울, 목도리라도 챙겨올 걸. 하고 백현은 생각한다.
“미친, 존나 추워….”
모양 빠지게 주머니에 주섬주섬 손을 넣어 차가운 금속을 느낀다. 선견지명인지,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불어 차를 가져가지 않았다. 덕분에 고생 좀 했지. 음.
버튼을 눌렀다. 저 멀리서 백현의 제네시스가 전조등에 빛을 낸다.
Retrograde 19
written by JARA
“너…, 벌점이야.”
“한 번만 빼. 모른 척 해.”
“넥타이도 없어, 바지도 줄였어, 명찰도 없지. 그리고 슬리퍼 신고 등교하지 마.”
“이렇게 실랑이 할 시간에 나 같으면 두 명을 더 잡겠어.”
“그래도 안 돼. 너 이렇게 들어가면 선생님한테도 걸려.”
“너한테 걸리는 것보다 나아.”
그럼 앞으로 용의복장 좀 단정히 하고 오면 안 돼?
입가에 맴도는 말을, 경수는 꿀꺽 삼켰다. 말 해봤자 듣지 않을 위인이라는 걸 알지만서도, 정말 그렇게 하고 올까봐. 그래서 단 몇 마디의 말조차 나누지 못할까봐 불안해. 오늘도 그냥 지나치려는 걸 간신히 붙잡았다. 그 전 단계에선 다른 선도부원이 잡으려던 백현을 가까스로 제 앞으로 끌고 왔다.
“…안 돼. 빨리 반이랑 번호 불러.”
나, 알아. 3학년 3반 18번 변백현.
“3학년 3반. 18번, 변백현.”
지금 나 들으라고 그러는 거지. 유난히 번홀 부르는 대목에서 발음을 강조한 백현이 그대로 정문을 통과해 걸어갔다. 경수가 멍하니 백현의 등을 지켜보았다. 얼핏 보기에도 들은 거라곤 축구화 밖에 없는 책가방, 마를 것 같지만 의외로 두꺼운 허벅지, 아직 다 말리지 않은 머리. 저러다가 어는데…. 뒤에서 보는 시선을 눈치 챌 만도 한데, 백현은 잠시 중앙형관에서 멈칫하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축구화라도 신고 오던가….”
백현의 이름을 수첩에 적은 경수가, 손을 호호 불며 등교하는 학생들을 향해 고갤 돌렸다. 거기, 너 딱 걸렸어. 난다 긴다 하는 문제아의 구렛나루를 잡은 체육 선생님이 경수를 보며 익살스럽게 웃는다. 변백현, 나한테 걸린 걸 다행으로 알아. 쿡쿡 웃는 경수를 보며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걸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곁을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제 2 외국어 시간에는 이동수업을 한다. 경수는 제 2 외국어로 중국어를 선택했다. 곧 미국을 뛰어넘는 강대국이 된다던가 하는 표면적 이유 말고, 진짜 속내는 맹목적으로 맨 앞자리에서 조는 백현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수의 꼬드김에 중국어를 선택한 종대가 경수의 등을 툭, 쳤다.
“안 가?”
“어, 나 필통 챙기고.”
“가는 길에 매점 좀 들리자.”
“왜?”
“나 짱깨 들으면서 과자 좀 까먹게.”
“나도 한 입 줄거지?”
“당빠.”
경수의 학교는 경수가 입학하기 몇 년 전, 매점을 비롯한 각종 시설이 있는 신(新)관을 따로 지었다. 1층은 매점, 2층은 외국어 교실. 그리고 대략 3층부터 5층까지의 높이를 차지하는 체육관이 주된 시설이었다. 그 해 3학년들은 울고불고 난리를 쳤더라지. 개의치 않기로 한다. 지금 좋으면 됐지, 뭐.
본관에서 신관으로 가려면 2층에 마련된 통로를 지나가야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통로를 ‘구름다리’라고 불렀는데, 발밑의 타일과 천장을 제외한 양쪽 벽면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운동장과 후문을 바라보는 쌍방구조가 되었다. 종대는 이를 두고 교장의 노림수라 종종 말하고는 한다. 그 머리좋은 인간이, 우리 허튼 짓 안 하나 하고 보는 거라니까. …CCTV 있잖아. 아, 야, 그건 그냥 장식으로 달아두는 거야. …진짜? 예스. 잇츠 레알 트루. 교장실에서 여길 어떻게 봐? 우리 경수, 자꾸 말대꾸 할래? 예. 죄송합니다, 하는 영양가 없는 대화.
그리고 그 구름다리를 지날 때에는 가끔 친구들과 스탠드에 몰려앉아있는 백현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백현이 구름다리를 보는 일은 흔치 않았으므로, 어쩌면 경수에게는 그곳이 아지트가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백현이 안다면 보나마나 더럽다고 말 하겠지. 그 때마다 경수는 스스로를 담금질한다. 나는 단지 남들보다 조금 더 어려운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성년이 되기 전, 조금 더 성숙한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자기 합리화 하지 마.
가슴 깊은 곳에서 정곡을 찌르고, 비수를 박는 원초적인 말이 들려와도 괜찮다.
“야, 됴, 뭐 먹을래.”
“나 마이구미. 아니다. 바나나킥? 아, 뭐 먹지. 나 베베.”
“존나 자기 같은 거만 먹어요…. 여기요. 800원 맞죠?”
“쌩유~”
“애새끼.”
“꺼져.”
10분의 쉬는 시간 중 8분을 할애했다. 경수가 포장된 상자를 뜯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두 묶음 중 하나를 종대에게 건넸다.
“종대야, 이거.”
“빨리 와라. 우리 늦는다.”
경수의 양 손에 들려있던 베베 봉지 중, 끙끙대며 필통과 책을 감싼 왼쪽의 것을 종대가 낚아챈 뒤, 꾸역꾸역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터지겠다!”
“베베 폭탄, 터지라우!”
“빵!”
“애새끼.”
“…아. 진짜.”
투닥거리며 계단 스무 개를 올라온 경수와 종대가, 뒤늦게 아이들이 몰려가는 교실로 직행했다. 때마침 들려오는 종소리에 일동 달려가 착석, 세이프. 아무리 느슨한 선생님일지라도 기본은 갖추는 게 예의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과잘 꺼낸 종대가 조심스럽게 봉지를 찢자, 경수가 따라 찢는다. 그 때, 백현이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 일동의 눈이 백현에게 쏠렸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슨 말을 작게 읊조린 백현이 책상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맨 앞, 교탁과 마주한 책상에 앉았다. 경수의 눈이 끝까지 백현을 좇는다. 백현이 엎드리고, 선생님이 들어오신다.
이제는 다 마른 머리칼, 여전히 없는 넥타이와 명찰에 안도한다. 자신이 모르는 변화가 백현에게 일어나는 게 싫다.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백현은 온전한 제 소유물이 아닌데도. 나는 내 역량 모두를 총동원하여 네 소우주를 탐닉하고 싶다. 더러워도 괜찮아. 무슨 말이 들려와도 나는 괜찮다. 괜찮아, 괜찮아.
네 말처럼 더럽지 않아.
더러운 건 없어.
“우리 저번에 4단원 끝냈지? 그럼 오늘은…”
“야, 우리 이거 끝나고 밥 먹냐?”
“응.”
경수가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백현의 등에게서 눈을 떼었다. 고르게 들썩이는 등. 미동이 없는 것보다야 낫다. 또, 1학기 첫 날부터 이렇게 정진하는 것에 대해 후회란 없다.
수업에 집중한다. 교실의 소란스런 분위기는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