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분 후, 종인은 백설공주와 그의 비서관 쯤 되는 난쟁이가 사괄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입에 사과 하나를 통째로 넣어버린 건지, 경수는 양 볼이 다람쥐마냥 빵빵했다. 종인이 지칭하는 난쟁이는 경수였으니, 공주는 바로 백현일 것이었다. 동화책에서나 보았던 아삭! 하는 소릴 내며 사과에 닿는 토끼같은 앞니가 도드라졌다. 종인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이 약 서너시간 쯤 되었을 터이니 경수가 저렇게 ‘게걸스럽게’ 먹는 현상도 그리 이상하지 않으리라. 하긴 산 속에서 조난당해 사과 한 그루를 통째로 먹을만한 위력의 식욕을 가지고 있던 ‘누구’와는 차원이 다르겠지만. 그래서인지 경수는 예의상으로라도 종인에게 사과를 권하지 않았다. 단 1%의 진심이라도 없다면 거짓말인 게 뻔하겠지만.
형아, 이리 오세여! 멀뚱멀뚱 둘을 바라보고 있던 종인에게 백현이 소리쳤다. 됐어, 종인이 고갤 저었다. 경수의 눈이 그제서야 종인을 향했다. 잠시 허공에서 마주치는 눈. 스물 평생 저렇게 ‘매력적인’ 눈동자는 마치 처음이었다. 백현이 쪼르르 달려와 종인에게 먹던 사과를 건네었다.
“형아, 이게 빨간 사과가 아니라두여, 이것도 마시써여!”
“아… 백현아. 형아 지금 배부른데.”
사실 네 사과, 내가 다 먹었어. 괜히 실토했다간 백현의 울음보가 터질 것이라는 걸 알기에 고이 묻어두었다. 아직도 미련하게 사괄 삼키고 있는 경수 역시 마음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시 고갤 숙여 눈 앞에서 상쾌한 소릴 내며 사괄 먹는 백현을 보며, 사과 CF가 있다면 컨셉이 무엇이던 백현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종인이었다. 그 옆에 도경수도 서면 참 좋겠지. 물론 헛된 망상이었다. 갓 상경은 무슨, 서울이란 단어를 아예 모르는 순진한 시골 청년일지어다. 클레임은 어마어마하게 걸려올 테고. CG처리 되거나.
“저기, 이제 백현이 집에 데려다 줘야 해요.”
“벌써? 얘랑 한 게 뭐가 있다고.”
“…한글 공부 하고, 그쪽 없을 때 많이 놀았는데.. 백현아, 형아 친구랑 더 노, 놀고 싶어?”
“웅! 난 형아 친구 조아.”
오늘은 아무래도 해가 서쪽에서 뜬 것 같았다. 고립되지를 않나, 사과를 그렇게나 먹고도 위장이 멀쩡하지를 않나, 초면인 아이는 별나게도 제가 좋다고 하지를 않나. 종인이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참. 생각해보니 4방위가 어디인지도 모를뿐더러 지금은 해가 중천이었다. 백현이 종인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아이의 본연의 순수함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에, 종인은 압도당할 수 밖에 없었다.
*
종인과 경수가 백현에게 잡혀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미영은 창고로 쓰이던 경수의 옆방을 종인의 방으로 개조해두었다. 변변치 않지만 후에 제 손으로 사올 옷들이 들어갈 옷장을 가장한 서랍부터 시작하여 어디 한 곳에 쳐박아두었던 매트리스까지. 대한민국 주부의 힘이기도 했다.
더러운 신발을 질질 끌며 녹초가 되어 돌아온 종인이 방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술판의 근거지가 되었던 민석의 자취방과 흡사한 방 분위기를 느꼈다. 누가? 물론 종인이. 추가된 것은 경수의 방과 같이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전망 정도였다. 그때였다, 종인의 눈에 세 단짜리 서랍이 들어온 것은. 잠깐만. 불길한 예감이 든 종인이 서랍을 열어보았다. 가지런히 정돈된 속옷까지는 좋았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지금 종인이 입고 있는 속옷과 같은 무늬에 색깔만 다른 속옷들 뿐이라는 점이었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엄마!! 새로 산 속옷 다 어디갔어!!!”
경수라고 해서 지치지 않는 백현에게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적어도 씻지 않고 잘 수는 없었다. 옷장에서 속옷을 꺼내려던 경수가 급히 미영을 호출했다.
“아, 그거? 옆방 총각 옷장에 넣어놨는데~?”
“엄마아!!!!!!!!!”
새 속옷은 내가 먼저 입고 싶었다고! 뒷 말은 생략한 채 경수가 응석받이 청소년처럼 미영에게 투정했다 -따지고 보면 그 시절을 갓 2년 정도 넘겼긴 했다-. 하지만 정작 미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던 일에 계속 매진하고 있었다. 하반신을 씰룩대며 흔드는 건 옵션이었다. 콧노래는 베이스로 깔아두는 사항임에 분명했고. 여튼, 경수가 소리친 대상은 미영이었으나 움찔한 건 오히려 종인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얼어붙어 꼼짝하지 않고 있는 종인의 방문을 경수가 쾅쾅 두드렸다.
“저기요! 저 드, 들어가요!”
종인이 대답할 틈도 없이 막무가내로 경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이게 무슨 일이람. 큼직한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종인이었다. 순간, 경수의 가슴이 뛰었다. 아버지가 저런 행동 하셨을 땐 몰랐는데, 꽤나 남자다운 느낌이 강했다. 경수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압도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의도치 않았지만, 타이밍을 놓치지 않게 되어버린 종인이었다. 단어 한 마디 한 마디가 경수에게는 직구로 던져지는 돌로 느껴졌다.
“나도 당신이랑 속옷 같이 입는 사이 되긴 싫어….”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리는 데에 나른함과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런데 뭐 어떡해. 같은 속옷 며칠동안 입는 건 더 싫은데.”
무대뽀처럼 들어올 것만 같았던 경수에게, 종인의 한마디가 제동을 걸었다. 격하게 공감하는 경수였다.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널어두었던 속옷이 바람에 날아가 나뭇가지에 찢기다니. 으으, 끔찍해라. 오늘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니 이만 하자아…! 종인이 그 차림 그대로 매트리스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바람에 종인의 티셔츠가 말려올라갔다. 크게 움찔하는 경수의 마음을 읽은 듯, 종인이 말했다.
“왜 그래. 새삼스럽게.”
문을 쾅, 닫고 나왔다. 경수의 볼께가 살짝 붉어졌다.
*
따뜻한 물이 피부로 닿아오는 느낌이 좋아, 한참동안을 샤워기 밑에 서있던 경수가 수도꼭지를 끄고 옆에 있던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어내기 시작했다. 21년 동안 외부인의 발자취는 한 번도 남겨진 적이 없었는데, 오늘 하루 종인은 이곳에서 샤워까지 하며 체취를 남겼다는다는 것에 또다시 놀라는 경수였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산이라는 울타리로 막아진 곳이라 정작 주인마저 외부로 나가는 일을 꺼려할 정도인 곳이 바로 청명골이었다. 외부인이 드나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자라나며 생각해왔다. 경수가 학창시절을 학생으로 보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백현의 초등학교 입학이 더욱 반갑고 한편으로는 아쉬운 것이었다. 백현의 가족이 청명골을 떠나지 않는 이상, 백현은 매일마다 새벽에 깨어 준비해야했다. 가끔 새벽에 마실을 나가는 미영과 백희가 마주치는 원인이었다.
경수가 속옷을 입으며 다시 한 번 자문했다. 애초부터 초점은 ‘왜’가 아닌 ‘어떻게’에 맞추어져 있었다. 경수가 자문으로 해답을 알 턱이 없음은 물론 당연했다. 산 속에서 몇 시간을 고립해있었던 것인지, 어떻게 버텼는지, 어쩌다 원래의 곳이 아닌 이곳으로 왔는지는 종인에게서 들을 수 밖에 없는 답이었다. 지금 종인은 자고 있겠지? 방문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는 빛에 경수가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물론 속옷만 입은 채였다. 만약 종인이 화장실이 급해 문을 열고 나왔다면, 경수의 비명소리에 의해 자고 있던 자영은 뒤척일 것이었다. 자영의 성격에 달려나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아… 힘들어.”
“힘드렁. 힘드렁.”
“옷 입는 것도 힘드냐….”
“도경수! 빨리 자자!”
경수가 점프하듯 침대 위로 뛰어들어 이불을 덮었다. 창문으로 새어드는 별빛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다. 별들이 혼란스러운 경수의 머릿속을 잠재워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경수의 눈꺼풀이 꿈뻑이며 키스하고 있을 때, 종인은 몸이 잠을 청하는데도 불구하고 별빛을 형광등삼아 생각의 나래를 펼쳐가고 있었다. 처음 일부터 생각해볼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혜수였다. 찬열이 발견했을까? 아니면 준면이? 아냐, 그곳 사장이 발견했을지도 몰라. 그러나 혜수가 나처럼 조난 당했다면?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상황은 심각하게 치닫는다. 스마트폰도 제대로 터지지 않는 외딴 산 속에서 소리지를 기력조차 없는 여자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리라. 그렇다면 혜수가 이리로 올 가능성까지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혜수가 경수네 집으로 오는 것은 반갑지 않았다. 종인은 이 생각을 치부했다. 그저 나같은 상황에 빠지지 않게 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마 이건 그 마법같은 흰자가 꾸며낸 일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결국 혜수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은 종인이 전지전능 신이 아니라면 알기 불가능한 것이었다. 생각은 벌써 2라운드를 향해 달려갔다. 2라운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종인의 눈앞에 펼쳐진 건 구릿빛의 잘빠진 각선미를 가진 라운드걸이 킬힐을 신고 유유히 링 위를 걸어가는 것이었다. 풍만한 가슴, 푹 파인 쇄골, 예븐 목선을 타고 올라간 얼굴엔… 도경수가 있었다.
“아.”
흡사 악몽을 꾼 사람처럼 종인이 벌떡 일어났다. 이건 분명 미친 짓이야. ‘흰자 소년 도경수’가 분명 여기 어딘가에 내니 맥피처럼 마법 지팡이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상큼한 사과향에 정신이 홀려 이렇게 된 것이리라!
그렇게 종인은 뜬 눈으로 뒤척이며 밤을 지새울 줄 알았건만, 어느새 그의 눈꺼풀도 열렬한 사랑으로 불타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종인의 소득 없는 첫날밤이 그렇게 하염없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