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아, 저 사람 누구야?”
“저 사람? 음… 혀, 형아 친구야! 빨간 사과 열릴 때까지 계속 있을 거야.”
“왜에?”
“어… 왜냐하면 있잖아…, 아, 그래. 형아 친구가 빨간 사과가 제일 좋대! 그래서 빨간 사과 열리면 제일 빨리 가져가려고 저기 있는 거야.”
“빨간 고는 내가 쩰~ 먼저 가져갈꼰데?”
“쉿! 조용히 해. 안 그러면 형아 친구가 듣잖아.”
“근데 형아 나 말고 친구 업짜나.”
“야. 꼬맹이, 너.”
종인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털 털며 나왔다. 적당히 근육 잡힌 상반신이었다. 경수가 준 속옷은 아직 입지 않은 듯, 큰 타월로 하반신을 가리고 있었다. 살짝 드러나는 치골이 매력적이었다. 습기 탓에 방금 전엔 잘 보이지 않았던 종인의 몸이 또렷이 경수의 눈에 들어왔다. 경수에게 있어서 모든 상황은 일시 정지 상태였다. 그 때, 백현이 두 손을 배꼽에 얹고 종인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차갑고 큰 종인의 눈이 백현에게 닿았다. 그에 겁먹은 백현이 경수의 다리 뒤로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종인은 그저 관심의 대상이라 생각하고 눈길을 준 것인데도.
“난 인사를 하라는 게 아니라… 너. 내 몸 봤어?”
“아, 안 봐써여!”
“그럼 됐어. 야, 도경수, 넌.”
“…….”
“도경수?”
“어, 어. 네?”
“내 몸. 봤냐고.”
“…떡하니 내놓고 있잖아요.”
아. 깨달은 종인이 오히려 경수에게 성질을 부렸다. 입을 옷을 줬어야지. 종인의 앞에선 경수는 그저 꿀 먹은 병아리일 뿐이었다. 난 분명 몸빼 줬는데… 당신이 빨래통에 벗었으면서…. 그것도 용케 찾아내서. 경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종인의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다시금 흘러간 정적은 경수가 발걸음을 옮김으로서 깨졌다. 옷 줄 테니까, 따라 오세요. 그제야 숨어있던 백현이 생글생글 웃으며 종인에게 말했다. 형아, 따라 오세요! 따라오라니 따라가야지. 종인이 둘의 뒤를 따라갔다. 참, 그 전에 욕실에 두었던 경수의 속옷을 꺼내어 손에 쥐고, 둘의 뒷꽁무니를 쫓느라 흘러내리는 수건을 꽉 잡았다.
*
밝은 블루톤으로 이루어진 경수의 방은 깔끔했다. 2층인 덕에 전망까지 완벽했다. 과수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강이 저 멀리 보였다. 집 근처엔 큰 느티나무 한 그루도 있었다. 어느새 아까의 포커페이스는 어디로 가고, 빛나는 눈동자로 경수의 방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증거를 수집하는 탐정마냥. 미스가 하나 있다면 아직까지 손에 속옷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 옷장에서 잘 개어진 옷을 꺼낸 경수가 종인에게 다가갔다. 나름 순수한 것도 같고, 경수가 생각했다. 경수의 인기척을 파악하고 멋쩍은지 큼큼, 헛기침을 하며 경수의 속옷을 넘겨주는 종인이었다. 백현은 이미 침대에 누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이라 그런지 귀여웠다. 이 집 옆에 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꼬맹.”
“네에?”
“너, 이 형아 옆집 살아?”
“네! 전 쳥명마을 파란 지붕 집 두울째 변백현인데요?”
“백현아. 쳥명이 아니라 청명.”
“쳐엉 명.”
쑥쓰러운 건지, 아니면 생각한대로 잘 되지 않아 화가 난 건지, 백현이 다시 엎드린 채 발을 굴렀다. 그러면 옆집 아이겠구나, 생각한 종인이 고갤 끄덕였다. 덕분에 치골께를 겨우 가린 수건이 내려갈까 맘 졸였지만. 아, 팬티 줘어!! 제 마음 속에서 울리는 외침을 들은 것인지 드디어 경수가 제 취향의 속옷을 골라주었다. 그래, 난 사각보단 삼각이 더 좋단 말이다. 종인이 경수의 손에서 속옷을 낚아챘다. 색깔도 무난하니 좋았다. 사춘기 여자애마냥 옷을 입으러 경수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려는데, 뒤에서 들려온 말은 제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근데요! 그거 좀 입은 건데!”
“아까 그거 줘.”
종인이 황급히 처음의 속옷을 꺼내간 뒤, 경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종인의 분위기에 풀 죽어 있었던 탓이다. 백현이 ‘아무 것도 몰라요’하는 눈으로 경수를 보았다. 경수가 웃어주었다. 백현아, 책 꺼내 와. 경수의 한마디에 백현이 분주히 움직였다. 한글 공부 책이 있는 책장 쪽으로 달려가 잠시 뒤적거리더니 곧 초록색 책을 꺼냈다. 풍선을 들고 웃고 있는 강아지의 얼굴엔 변백현 석자가 씌여져 있었다. 경수는 연필 두 개와 받아쓰기 공책을 꺼냈다. 깜지마냥 뒤덮인 종이들을 넘기는 새에, 백현이 의자를 끌고 경수의 옆에 앉았다. 학구열에 불타는 눈이었다.
우리 아빠는 이장님이다. 쓰여진 문장을 백현이 더듬더듬 읽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열 번씩 읽으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써내려갔다. 칸도, 띄어쓰기도 딱딱 맞추어서. 다 썻다! 하고 뿌듯해하는 백현의 입이 열렸다. 형아, 이건 비밀인데…
“나 아까 형아 친구 꼬추 봐써.”
“배, 배, 백현아! 쉿! 형아 친구가 들을라!”
경수의 얼굴이 사과마냥 빨개졌다. 속으론 백현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었다. 젊은 게 좋긴 좋은 건가, 습기는 어린이의 눈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까. 감탄하는 경수도 제3자가 보기엔 혈기왕성,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였지만. 종인이 없어 망정이지, 만약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경수가 머리를 긁고, 뒷목을 긁적이고, 다리를 떨고, 바짝 깎아 없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래. 응큼한 상상이었다. 당황한 경수에 비해 백현은 그저 차분했다.
달칵, 하고 방문이 열렸다. 종인이었다. 경수와 종인의 눈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먼저 고갤 돌린 것은 경수였다. 종인은 경수가 준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경수가 처음으로 백현을 탓했다. 너 때문에 상상가잖아. 형은 이런 사람 아니란 말야. 그러나 때가 늦은 걸, 이제 와서 무얼 탓하리. 경수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백현은 쉿! 입을 닫고 다시 아빠는 이장님이란 말과 글을 반복했다.
“너.”
“나, 나요?”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형아! 내가 있잔…… 읍!”
“더, 더워서 그, 그래요. 창문 열, 열자.”
종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5분 전의 경수와는 180도 다른 사람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때, 창 밖을 내다보던 경수가 두 눈을 비볐다.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기 머릴 볶은 통통한 아줌마는 분명 제 어머니였다. 확실했다. 손에 장바구니를 바리바리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어머니껜 어떻게 설명드리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게 좋을까. 경수가 달려나갔다. 적어도 느티나무 아래에 다다르실 때엔 마주쳐야 했다.
*
“어, 엄마!”
“아이고~ 우리 아들, 밥은 잘 먹었어?”
“어? 어, 아, 아니! 어? 어! 잘 먹었어.”
“…거짓말 아니야?”
“에이, 아니라니까! 근데 엄마, 우리 집 가지 마.”
얘가 무슨 소리야. 어머니가 걸음을 빨리 하셨다. 장바구닐 들어드리고 아들 노릇을 해보려던 경수였으나 결과는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경수가 쩔쩔매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징검다리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곧이어 풀 가득한 들판. 결국 어머니는 몇 시간 전 백현이 밟았던 발자국을 그대로 밟아버리는 데에 이르렀다. 경수가 쉬어가길 재촉했다. 엄마, 이 사과 좀 봐. 예쁘지? 참말로 예쁘네. 햇살에 어머니가 어서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경수야… 이 분은 누구셔?”
“헐.”
제 옷을 입은, 종인이었다. 종인 인생 최악의 삼자대면이었다. 물론 그와 경수의 관점에서만 그랬을 뿐이었다. 경수의 어머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시려 했다. 얼음마냥 굳어버린 둘을 어머니가 집 안으로 겨우 끌고 들어가셨다.
“그래서, 총각 이름은 김종인이고. 서울에서 왔는데 산 속에서 조난을 당했다구요? 그걸 경수가 발견했고 …그래요. 우리 사과 먹은 것 까진 이해할게요. 사람이 배고프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뭐.”
안도하는 둘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 들은 결혼 스토리는 허위가 아니었단 걸, 경수는 깨달았다. 간단히 간추리자면 시골 숫총각 도현규 군이 얼떨결에 황미영 양을 만나 사과 하날 주며 큰맘 먹고 고백했지만 성격 하나 시원하신 황미영 씨가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했다는 것이었다. 그에 한 번 더 반했다나 뭐라나.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었다. 따님 저 주십쇼! 라는 말에 나까지 덤으로 가져라. 하는 식이었다. 경수에겐 중요한 사과가 걸려있는데도 말이었다. 물론 경수 생각엔 이런 비유는 적절치 못했다. 경수는 따님이 아니었으니까.
“사과 열릴 때까지 여기 지내겠다구요?”
“네… 신세 좀 많이 지겠습니다.”
“그럼 진작 오지! 총각 옷도 사올 수 있었는데. 사올 때까진 우리 경수 옷 좀 같이 입어요.”
아들내미 속옷 고르는 센스시라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라고 종인이 오로지 마음 속에서만 말했다. 미영은 웃고 있었다. 경수가 비로소 안도할 때 한 숟갈도 먹지 않은 풀밭 밥상에 잔소리 몇 마딜 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