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세종] 차가운 숨 21
w. 발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수능점수가 발표되어 원하는 대학에 원서를 넣고, 불안감과 기대감 속에 합격자 발표가 났다.
상위권 등급을 받은 세훈과 종인은 원서를 쓸 때도 여유로웠고, 발표날마저도 여유로웠다.
그리고 그 자신감에 응하듯, 대학에서는 줄줄이 환영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거야 원~ 고르기가 어렵네 참."
"그 말, 학교가서 해봐봐. 니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찌그러질꺼같은데?"
만족감에 허세섞인 농담을 하는 종인에게 세훈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대답했다.
절망하고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 없이 고삼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있는 세훈과 종인은 한 껏 들떠있었다.
사회로 향하는 첫 발걸음이 너무나 순조로웠다.
이제야 세상이 자신들을 끌어안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남들은 목빠지게 추가합격통보를 기다리고 있을 때, 세훈과 종인은 거실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그 동안 보고싶었던 영화를 보았다.
밀려있던 만화책들도 빌려보고, 어차피 진짜 재미있는 기구는 못탈테지만 놀이공원도 갔다.
그리고,
"이 것이 지상낙원이구나~"
"노인네같애,"
"원하는 미래가 보장되어있고, 지금은 너랑 먹고자고싸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지상낙원이지 뭐야~"
"그 싼다 말이야, 고도의 언어유희같은데?"
"...너야 말로 발정난 노인네같애, 이 오씨할배야!"
그럼 말 나온 김에...
뭘, 뭘!
먹고 잤으니까 이제 싸는 일만 남았는데, 그래야 니가 말한 지상낙원-
아 진짜 너 왜케 능글맞아졌냐?!
원없이 사랑도 나누었다.
'내가 허락해서 돌아온거 아니라는 거 이해할거라 생각한다. 아빠한테 이 문제 상의해봤어. 너한테 말도 안하고 맘대로 그런거 미안한데, 아무리 그래도 난 니들 엄마야. 아빠 충격받아서 지금 난리도 아니셔.. 어떻게 안되겠니..? 당장 만나야 겠다고 지금 비행기티켓 예매하셨다. 3일 뒤에 가실거야. 말려도.. 니네 아빠 성격알잖아.. 미안하다..'
"왜그래?"
갑자기 거칠어진 세훈의 호흡에, 곁에서 게임에 집중하던 종인이 여전히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아무 대답없이 크게 숨을 들이마쉰 세훈이 흡- 하고 숨을 멈추었다.
그에 종인은 눈동자만 움직여 맞은편에 서있는 세훈을 바라보았다.
이런 얼굴은 또 처음보는데, 분류를 하자면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얼굴이다.
억제하는 감정을 컨트롤하느라 호흡이 불규칙해져서 얼굴을 시뻘게져 있었다.
"세훈아?"
당황해서 마음과는 달리 느릿하게 일어난 종인이 세훈에게 다가갔다.
세훈은 휴대폰 액정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왜..?"
설마 대학교에서 전산오류로 인한 입학취소문자라도 날라온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세훈의 휴대폰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볼 거 없어. 별 거 아냐."
세훈은 재빠르게 홈버튼을 눌러버렸다.
"...뭔데 그런 얼굴을 해? 혹시 입학취소문자 그런거야?"
"...아니."
"그럼?"
"..."
"..."
"내 점수가 몇 점인데 그런게 날라오겠냐? 밥이나 먹자, 나 갑자기 피자먹고싶어."
그새 표정을 바꿔 능청스럽게 배달책자를 가져와 뒤적이는 세훈이 수상했지만, 종인은 그냥 넘겨버렸다.
엄마는 우려했던 일 없이 다시 미국으로 갔고, 대학도 합격했고, 지금 딱 행복한 시기인데 뭐 별일있겠냐는 생각이였다.
그래도 그 순간 보여진 세훈의 표정이 무척 심각했기에 간간히 세훈의 동태를 살폈지만, 별다른 낌새는 못 느끼고 하루를 마친 종인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책읽는 세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먼저 잠이 들었다.
"..."
제 머리를 만지던 손이 스르륵 떨어지는 것을 본 세훈은 억지로 붙잡고 있던 책장을 덮었다.
인상을 쓰고 책에 시선을 고정한 세훈의 표정을 종인은 완전히 집중한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정 반대였다.
종인이 잠들때를 기다리면서 독서에 빠진 척한 세훈은 종인의 눈 앞에 손을 흔들어보고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엄마한테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통화는 짧았다.
마침 전화하려던 참이었다고 다급하게 전화를 받은 엄마가 처음 건넨 말은 아빠가 방금 취소표를 얻어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뭐라뭐라 흥분한 목소리로 몇 마디 더 하는 것 같았지만, 세훈은 맥이 빠져 스르륵 휴대폰을 든 손을 떨구었다.
엄마가 그렇게 돌아간 후 너무 평화롭다싶었다.
이젠 지칠 힘도 없다.
더는 악쓸 힘이 없었다.
지금 세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차가운 물 한 잔 마시고 방에 들어가서 종인을 끌어앉고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세훈아-"
",.."
"세훈아!"
"...으음..."
"..."
"몇 시야?"
"일단 약 먹어."
늦잠자서 저를 깨운 줄 알았던 세훈은, 제 앞에 물 한 잔과 알약을 내미는 종인을 보고는 약을 주시했다.
"..왜, 나 약 먹고 잤는데."
"너 조심해야겠다."
"왜,"
"전에는 끙끙거려서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소리도 안내잖아."
"어?"
"옆에 같이 있어도 소리가 안나니까 모르잖아..."
더운걸 못 참는 종인이 조금 답답한 감이 있어서 깼는데, 세훈이 참는듯한 표정으로 숨을 못 쉬고 있었다.
3년동안 같이 살면서 이런건 많이 겪어봤지만, 방금처럼 소리없이 혼자 끙끙거리는 것은 처음이라 내심 당황했다.
한동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예고없이 나타나는 증상은, 여전히 세훈이 환자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종인은 태연한 척 세훈에게 약을 건냈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서 세훈이 불안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미아-"
"쓸데없는 소린 입아프니까 하지 말고,"
"...어"
"몇 시지? 뭐야 4시밖에 안됬네? 더 자자."
"그래.."
그리고 세훈이 불안해하는 모습에, 자신이 불안하지 않기를 바랐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 타이밍좋게 종인은 즉흥적인 가족여행을 떠났다.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무슨 핑계를 대며 종인을 쫓아낼까 고민하던 세훈은, 종인을 위해서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다는 것에 적지 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터라 가기 싫다고 입을 삐죽이는 종인에게 효도 좀 하라고 충고했다.
내가 그런다고 진짜 안 가겠냐?! 떨어져있기 싫다던지 좀 그런 말 좀 해주면 안되냐? 엎드려 절받기도 안 해주냐?
세훈의 속을 모르는 종인은 그렇게 삐진 채 떠났고, 세훈은 종인의 마지막 말을 되짚으며 또다른 미안함을 가지게 되었다.
종인을 생각하다가, 아빠를 생각하다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그새 피곤해진 세훈은 쇼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들어버렸다.
일어나.
일어나!
쾅 닫히는 대문소리에 이미 잠에서 깼지만, 세훈은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말이 나올 지, 어떤 취급을 받을 지 뻔히 아는 상황에서 감정소모하기 싫은 탓이었다.
아빠는 오랜만에 부자상봉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은 거친 손길로 세훈의 어깨를 짚어 일으켜앉혔다.
장장 15시간을 달려온 얼굴에는 피로감보다는 분노가 짙었다.
아빠는 시작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엄마와 똑같은 말, 똑같은 취급.
세훈은 차분했다.
그런 모욕에는 이미 면역되어 있었다.
"너 당장 세준이네 집주소 말해, 그 집가서 세준이 데려오게."
"지금 종인이네 집 비었어."
"거짓말하지 말고 빨리 말해!"
"걔네 가족끼리 여행갔어, 못 믿겠으면 전화번호 알려줄테니까 전화해봐. 전화해서 그 화목한 가족여행 한 번 깨트려봐."
"너 이새끼 진짜 미쳤구나, 너 돌았어."
한참을 흥분해서 막말을 퍼붓던 아빠는, 그럼에도 미동없는 세훈의 태도에 덩달아 냉정을 되찾는 듯 했다.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물을 마시며 마음을 추스린 아빠는 세훈의 바로 앞에 섰다.
"너희 그렇게 되고 지금까지 니 엄마를 원망했어."
"..."
"내가 안 도와준 탓도 있지만, 어떻게 엄마라는 여자가 정신없다고 지새끼를 잊어. 그렇게 생각했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알아. 1차적인 잘못은 우리에게 있어."
"...알면-"
"그것때문에 정상도 아닌 너 이렇게 방치한 것도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해. 어떻게 보면 니가 최대 피해자지. 항상 죄스러운 마음이였다. 2차적 잘못도 우리 것이야."
"..."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것이 아니라서 니 엄마가 니가 남자애 사귄다고 했을 때 그리 놀라지 않았다. 니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애가 그토록 찾던 나머지 내 자식이라니까 내가 안 미치는게 이상하지."
"..."
"이건 우리가 허락한다고 될 일 아닌 거 알거야. 세준이 양부모님 돌아오시면 곧장 만나서 호적정리하자."
"아빠!"
"그쪽 엄마랑 엄마랑 이미 다 얘기 끝났다고 했어. 니네 수능끝나면 원래대로 돌려놓기로."
엄마가 종인의 어머니와 닿았다는 것은 몰랐다.
생각지 못한 전개에 세훈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건 정말,
엄마는 세훈이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당한 것은 본인이였다.
종인의 부모님이 아셨다면, 결론은 한 가지이다.
아빠말대로 종인이 세준이 되는 것...
저들이 아무리 양쪽 부모들 앞에서 사랑해녜 어쩌녜 해봤자 미친놈들 취급이나 당할 것이고, 그럼 더욱 형제로 붙여놓으려고 할 것이다.
정말로 길이 없다.
가시덩굴로 뒤덮인 길이라도, 종인과 함께라면 온 몸에 가시가 박혀 피투성이가 된다해도 기꺼이 헤쳐나갈 준비가 되있었는데.
그 길마저도 허락되지 않고, 허공에서 뚝 끊겨버렸다.
세훈은 되돌아갈지, 아니면 그대로 직진해서 추락해버릴지 고민하지 않았다.
애초에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
종인도 저와 같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도 밤에 도착할거야. 그쪽 부모 번호알고있으니까 엄마오면 바로 전화해서 만날거야. 그런 줄 알아. 갑자기 가족여행 떠난 것도 다 이 얘기하려고 간 걸거야. 엄마가 내가 비행기표 예약한 거 보고 그 쪽 엄마한테 전화했다그랬으니까."
"...뭐?"
"완전하게, 원래대로 돌려놓을거야. 우리 네 식구, 다시 시작하는거야."
"...뭘. 도대체 뭘 원래대로 돌려놓는다는거야?! 우리가 사랑하기 전으로? 우리가 만나기 전으로? 우리가 떨어지기 전으로? 아님 우리가 태어나기 전으로?"
"오세훈, 말같지않은 소리하지말고 아빠 말 들어."
"우리에게 이전이란 없어. 어느 순간으로 되돌려놔도 되풀이될거야. 차라리 태어나기 전으로 되돌려놔요. 아예 태어나지도 않으면 피차 서로 아플 일 없으니까."
"너 지금 그게 부모 앞에서 할 소리야?! 아빠가 얼마나 지금 당황하고 황당하고 슬픈지 니 눈에는 안 보여?! 너만 생각해?!"
"나만 생각해서 하는 말 아냐. 그게 안된다면 그냥 날 죽여.. 김종인한테 오세준이라고 절대 못하겠으니까...차라리 날 주-"
"엄마 잠깐만.."
최신가요까지 틀어놓고 신나게 달려서 펜션에 도착했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도 풀기 전에 잔뜩 무게잡힌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엄마를 저지한 종인이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왜그래?"
"... 갑자기 뭔가 좀.. 아녜요, 뭔 말하려고 했어?"
"너무 오래 차탔나보다.. 피곤하면 먼저 방에 들어가서 쉬어. 급한 말 아니니까. 좀 쉬다가 삼겹살파티하자."
"네, 내가 싱글침대있는 방 쓰면 되지?"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풀썩 누운 종인은 멍하게 두 눈을 깜빡거렸다.
아까 그 순간 온 몸의 기능이 마비된 것같은 암전상태를 겪었다.
마치 전에 사고당할 때 느꼈던, 차에 치이는 순간의 느낌이,
"기분나빠..."
잊고싶은 그 느낌이 자꾸 되살아나서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일어나앉은 종인은 휴대폰을 켰다.
아까는 세훈에게 서운해서 막 퍼붓고 왔지만, 믹상 이럴 때 생각나고 위로받고 싶은 사람은 세훈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괜히 찡찡거렸던 것 같기도 하고, 사과할 겸 잘 도착했다고 보고도 할 겸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가는데 연결은 안되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린 종인은 집번호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삐져서 연락을 거부하는것은 절대 세훈이스타일이 아니고, 깊게 자고 있나싶어 종인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내일 돌아갈건데 오늘만이라도 엄마아빠랑 재밌게 보내자 생각한 종인은 세훈에게 내일 보자는 짧은 메시지를 남기고 휴대폰 전원을 껐다.
벽의 절반이 통유리로 되어있어 붉디 붉은 노을이 방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노을빛으로 온 몸을 감싼 종인은, 노곤함에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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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오랜만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ㅋㅋㅋㅋ 바쁜 것도 있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빨리 못 올리겠어요흑흑ㅜㅜㅋㅋㅋ
아마도 23화를 끝으로 마무리지을 듯 하지만, 변수는 있답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