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좋아하니까.
쌉쌀한 아이스 커피가 혀끝에 닿는다. 오전부터 카페 창가에 앉아 데드라인이 코앞인 팀플 과제를 노려보며 빨대를 씹었다. 주옥같은 솔쿼드다. 막바지 심폐 소생술을 불어넣으며 잠수 탄 팀원들을 저주한다. 위키 백과사전을 통으로 넘긴 새끼는 동면에 잘도 들었을까. 개새끼들, 이것만 끝내면 자퇴한다. 가시지 않는 피곤함에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힌다. 내일이 없는 전공 교수는 하필이면 오늘 보충을 잡아 더욱 귀소본능을 자극했다. 후드 주머니 속 지랄 맞게 울리는 핸드폰에 감사함을 느낀다. 까딱하면 자체 공강에 양심을 팔아먹을 뻔했으니까.
— 전원우 너 이상한 개그 하면 죽는다.
— 작곡과 A반.
— 뭐?
— 오늘 3시, 본관 306호.
평소처럼 문예 창작과의 명예를 앞세워 시답잖은 말장난이나 던질 줄 알았다. 비밀 정보를 입수한 뇌가 생기를 띤다. 뇌가 얼굴도 아니고 생기를 띠다니. 엔돌핀이 돈다고 해 두자. 오늘 3시, 306호. 오늘 3시, 306호. 가방을 챙겨 카페를 뛰쳐나가는 순간에도 행여 잊을까 곱씹는다.
— 작곡과 A반, 오늘 3시 본관 306호.
— 오늘 이지훈 생일.
오늘이다.
하지 못한 고백.
OFF ON OFF
; Happy Birthday 1122
좋아한다는 건 무엇인가? 밤새 남의 연애 얘기만 들어주던 모태 솔로는 새벽 편의점 앞에서 라면을 먹다 우연히 만난 철학과 4학년에게 물었다. 여명으로 쓰린 속을 달래던 그녀는 깨우친 얼굴로 오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마음을 졸이거나 설레거나, 또는 좌절하다가 기뻐하는 감정을 한 사람에게만 동시다발적으로 느끼면 그게 사랑이지. 특별한 건 없어. 누군가를 봤을 때 여러 가지 맛 사탕이 느껴지면 게임 끝.
— 저도 언젠가 만날 수 있을까요?
— 당장 오늘일지도 모르지.
그녀가 징징거리는 핸드폰을 가리켰다. 공강만 믿고 지금까지 달린 듯한 전원우의 문자였다. 이윽고 홀연히 사라진 그녀는 예언자였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어깨너머 바라본 꽃이 내게도 찾아왔으니 말이다. 그날은 전원우가 애인에게 차인 역사적인 날이었다. 공대 이과 새끼와 바람난 애인 욕을 미친 듯이 하던 뼛속까지 감성 문과 전원우는 걸려온 전화에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했다.
이과 새끼 존나 싫어! 근데 이지훈 개새끼 너도 이과잖아? 개 싫어! 빨리 와! 절교를 원하는 건지 보고 싶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술주정뱅이는 눈물을 훔쳤다. 죽어도 나가기 싫다는 상대편의 목소리가 가까워진 건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 정도껏 해라.
— 정도는 정도전의 줄임 말?
— 입 좀 다물어.
— 왜 그 사람은 척화비를 세워서 백두산을……!
— 지랄하네.
맞은편에 앉은 그가 술잔을 채우며 꾸벅 인사했다. 얘 진짜 별로죠. 나도 싫어.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잠에서 막 깬 얼굴로 웃는 꼴이 내 것 같았다. 마치 후광이 비쳤다. 도대체 왜 그렇게 웃는건지 묻고 싶었다. 좌심방 우심실 할 것 없이 침투한 바이러스에 혼미했다. 먹지도 않은 콜라 맛 사탕이 입안에 감돈다. 달달함을 털어내려 술을 삼켰다. 하지만 전원우와 얘기하다 간혹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되려 이가 아렸다.
이지훈은 전원우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작곡과 2학년 과대였다. 어쩐지 목소리가 좋다 했다. 손가락이 예쁘다 했다. 눈물점이 귀엽다 했다. 웃을 때 휘어지는 눈망울에 홀린다 했다. 공강이라는 교집합 아래 아침부터 술을 빨던 그가 점차 흐트러지더니 불과 소주 넉 잔에 K.O.패 당하고 말았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 외롭던 셀프 만담꾼 전원우에게 든든한 파트너가 생겼다. 보조개가 양쪽에 쏙 박힌 이지훈이 볼을 감싸 쥐더니 곧 테이블에 뒹구는 종이를 말아 저렇게 술주정을 하고 있었다. 귀여워 뒤지겠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온 세상이 이지훈을 알아야 해. 이 귀여움을 봐!
— 우리 여주 예쁘지?
— 취했냐?
— 자리 피해 줄까?
— 닥쳐라.
힘 조절 실패한 검지가 내 볼을 강하게 누른다. 여주는 공부밖에 안 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그치. 이 와중에 약을 올리는 전원우보다 신경 쓰이는 사람은 슬며시 웃기만 하는 이지훈이었다. 시작도 못 하고 강제 이별을 당했다. 전원우 미친놈아 넌 내일 뒤졌다. 아구를 물고 애정 있게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좋게 말할 때 그만하라 타일러도 정신 나간 술주정뱅이는 실실거렸다.
— 야 지훈아, 이과의 명예를 걸고 말해 봐.
— 또 뭔 소리 하려고?
— 나 잘했지? 나오길 잘했지?
— 넌 내일 일어나기만 해.
그가 떨어트린 젓가락을 집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애인의 그리움 따위 멀리 보내 버린 전원우는 박장대소하다 테이블에 얼굴을 비볐다. 졸도한 제 친구를 보며 자신도 어이없는지 두 눈을 찡그린다. 옆에서 애인 꿈을 꾸는 전원우는 잠시 내버려 둬야 했다. 후드 모자를 벗어 뻗친 머리를 정리하는 그를 마지막까지 눈에 담아야 했으니까. 오전 일곱 시 반, 전원우를 업은 그가 핸드폰을 챙긴다. 알바생은 마감을 알렸다.
— 넌 어디로 가.
— 기숙사에서 눈 좀 붙여야지. 공강이라 시간 많잖아.
— 어, 나도 공강인데.
— 우리 공강이라는 거 아까 한 백번 말했을 걸?
— 그래? 나 진짜 취했나.
— ……저기, 있잖아.
*
— ……저기 있잖아.
— …….
— 아니야…….
굳게 닫힌 306호 앞에서 추위에 떨었다. 괜찮다. 이까짓 추위는 아무렴 괜찮았다. 첫눈에 반했다는 고백은 무슨, 영화 한 편 보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두 달을 흘려보낸 것보다 견딜 만했다. 그동안 짧게 스친 적은 많았으나 그때마다 입은 옴짝달싹 못 하고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본래 자신감도 없었고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에게 말을 거는 건 성격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두 달간 지독히 고생 좀 했다.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건 타인에게도 그렇다. 눈웃음을 날리는 뭇사람들이 신경 쓰여 밤을 샌 적도 있었고, 혹여 그가 뻔히 보이는 의도에 넘어갈까 마음을 애태운 적도 있었다. 여러가지 맛 사탕을 동시다발적으로 느낀다는 뜻을 이젠 알 것 같기도 했다. 저번엔 누가 이지훈 팔을 잡아서 한약 맛을 먹었거든. 졸라 써서 뒤지는 줄 알았는데!
— 안녕.
— …….
— 뭐해 여기서?
그렇게 기다렸건만 결국은 또 얼어버렸다. 자연스럽게 대화하자 되새겼던 지난날이 무색했다. 올라가는 입꼬리도 어색했다. 손바닥을 보여 인사를 하는 모습마저 꼭 오작동한 로봇 같았다. 아니, 그를 좋아한 그 날부터 줄곧 고장 난 로봇이었다. 말과 행동 모두 삐걱거리기만 하는 철통 덩어리였다. 긴장한 탓에 젖은 손바닥을 스웨터에 문지른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말을 하려고 했었냐면…….
— 누구 만나러 왔어?
— 그냥, 지나가는 길.
— 오늘도?
— 으응…….
— 우연히 자주 본다.
— 맞아, 진짜 우연히…….
— 예쁘게 입었네.
— 응…… 니요?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손으로 입을 막는다.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고 ‘응…… 니요?’라니! 나 때문에 웃지도 못하고 입만 깨물잖아!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을 옆으로 돌려 뇌를 굴린다. 불쑥 손에 들린 음료를 내미는 건 지금으로서 최선이었다.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를 향해 온 힘을 다해 웃는 것도. 다만 미친 자라 생각하지 않길 바랐다.
— 나 주려고?
— 목 마를까 봐.
한 손에 가볍게 잡히는 캔을 돌리며 웃는다. 고작 웃는 얼굴에 온 마음이 들끓는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번지점프라도 하는 것 마냥 간지럽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 감정, 느낌, 그리고 내 앞에 있는 달달한 사탕 같은 이지훈까지. 분명 오늘이 기회인 것이 틀림없다. 백퍼 하늘이 주는 시그널이다.
— 오늘 네 생일이라고 원우가 그랬는데.
— 아, 그럼 음료수 생일 선물?
— 아니 그거 말고…….
— 그거 말고 뭐.
— 오, 오늘…… 나랑 밥 같이…….
강의실 문 앞에서 경계와 호기심이 적절히 섞인 눈들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생일 기념 거하게 저녁 쏘겠다는 그들이 그에게 손짓한다. 그러면 어리숙한 나는 말도 못 하고 입을 꾹 다무는 것이다. ‘오늘 네 생일이니까 밥 같이 먹자’, 이 한 마디가 뭐 그리 어려워서 두 달 동안 맴돌기만 하는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대충 끝인사와 멀어지려 조금 전과 같이 녹슨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 아까 뭐라고 했어?
— 그냥, 생일 축하한다고.
— …….
— 먼저 갈게.
늘 하던 대로, 익숙한 대로 먼저 뒤를 돈다. 아무 일도 아닌 듯 무마하는 꼴이 웃겨, 내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꼴이 같잖아 눈물이 났다. 왜 어째서 난 이것밖에 되지 않는 것인지, 이지훈 앞에만 서면 거짓말투성인지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었다. 전원우가 애인에게 차였을 때 애초에 비웃는 게 아니었다. 그까짓 거 하나 잊지 못해 술이나 빨고 있는 병신 새끼라 욕하는 게 아니었다. 쓰라린 마음으로라도 보고 싶은 게 사랑이었다. 시작도 못 해본 나도 이렇게 아픈데.
— 이지훈, 빨리 와! 누구 보는 건데!
지훈아, 너는 왜 내게 들어와서.
*
— 속으로만 앓지 말고 고백을 해.
— 했다가 차이면?
— 차이면 뭐, 자퇴해야지.
—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내일이 없는 교수의 눈을 피해 가운뎃손가락을 모아 전원우에게 정중히 선물했다. 우와앙-, 받아먹는 늑대 새끼가 코를 찡긋거린다. 너만 모르는 이야기 알려줄까? 노트에 볼펜 똥만 잔뜩 묻히는 나를 살살 긁는다. 저러다 이상한 개그나 하고 말겠지. 교수님한테 걸려서 벌점이나 존나 받아라. 노트 가운데 큼지막한 산을 그려 수줍게 내민다. 그러자 답답한 듯 팔짱을 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뭐 인마,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 내가 이지훈을 고등학교 때부터 봤잖아.
— 그런데?
— 요즘 제일 이상한 애가 걔야.
— 왜? 어디 아파?
미묘한 표정으로 눈을 흘긴다. 동그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더니 슬쩍 귀엣말을 건넸다. 마음에 바람이 불었대. 그것도 완전 뿅뿅. 다시 안경을 쓰고 흐뭇한 얼굴을 끄덕인다. 응큼한 게 딱 그것이었다. 인간이 매일 추구하는 그것.
— 똥 마려워?
— 이지훈이나 너나 둘이 아주 똑같다.
— 됐거든.
— 아니, 왜 고백을 못 하냐고!
드넓은 강의실에서 늑대가 울부짖는다. 내일이 없는 교수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앞자리를 권유했다. 가방을 챙기는 와중에도 저녁은 어디서 먹을 거냐 묻는다. 식사는 무지하게 챙기는 놈이었다.
— 카레 먹을 거야.
— 베라 옆에 있는 가게?
— 넌 오지 마. 혼자 내버려 둬.
— 야야, 안 가. 지겨워. 맛 없어.
가오나시 같은 놈. 조용히 빡치게 했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놈. 금이라도 내놓고 가면 말이라도 안 하지. 당당히 앞자리를 차지해 교수의 관심 아래 수업 참여율을 높이던 늑대는 간간히 괴로워했다. 수석이면 뭐하나 하기 싫은 건 꼭 티를 내야 하는데.
— 자자, 십 분만 더 할게요.
— 교수님 밥 먹을 시간인데요.
— 십분 있다가.
— 그땐 자야 되는데요.
*
달이 떴다. 역시 십 분은 페이크였다는 소리다. 교수와 면담이 잡힌 원우는 귀찮다는 얼굴로 교수실로 사라졌다. 홀로 건물을 빠져나온 나는 곧장 사거리로 향했다. 금요일 밤 학교 앞은 별천지다. 술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롱 패딩에 얼굴을 묻는 척 정신을 묻는다. 빠르게 인파를 헤치며 가게 문을 열었다. 곧게 뻗은 검지로 카레 한 그릇을 알린다. 익히 내 얼굴을 아는 주인장은 반갑게 인사했다.
— 오늘은 학생이 먼저 왔네?
— 네?
— 원래 학생 오기 전 시간에 남학생 두 명이 꼭 오거든.
— 아아, 그래요?
한 대접 냉수를 마시고 노트북을 켰다. 바닥 친 정신력으로 마지막까지 팀플 과제를 정리하는 나를 보라. ‘진짜진심구라안치고ㄹㅇ최종’을 각자 이메일로 쏘고 나서야 긴 한숨을 뱉는다. 내 할 일은 다 했다. 핸드폰도 끌 거야.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완벽히 속세와 차단한다. 짙어진 카레 냄새에 후각을 집중한다. 저거 먹고 오늘 바보 같았던 거 다 잊어버리자. 진짜. 정말로. 근데 지훈이는 애들이랑 밥 잘 먹고 있을까. 뭐 먹을까. 아악! 또 생각해 버렸어!
— 무슨 일 있나? 얼굴이 말이 아니네.
— 저 고백도 못 해보고 차였어요.
— 누가 학생을 차? 눈이 겨드랑이에 달렸남?
— 카레 싫어하는 사람이요.
— 데리고 와! 우리 집 카레 맛있어!
— 안 돼요. 걘 카레 냄새도 싫어해요.
볼따구에 뜨거운 밥을 욱여넣는다.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의미 없는 식사였다. 온통 내 말에 끝까지 귀 기울이던 그의 생각뿐이었다. 그때 말할 걸 그랬다. 부끄러움 타지 말고 제대로 말할걸. 같이 밥 먹자고. 생일이니까 좋아하는 거 다 사주겠다고. 근데 내가 좋아하는 건 너라고.
— 안녕하세요.
— 학생 왔나? 오늘은 좀 늦었구만?
— 누구 좀 기다리다가…….
모든 감각이 입구로 향한다. 강의실 앞에서 눈 대신 죽어라 본 운동화가 내 앞에 있다. 오늘따라 잘 어울린다 생각했던 코트가 또렷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카레를 미친 듯이 싫어하는 그를, 그것도 카레 전문점에서. 목구멍을 막는 밥알을 꾸역꾸역 넘긴다. 아무렴 무엇이든 말을 붙이고 싶었다. 급히 밥을 넘기 탓에 콜록대자, 그는 바로 앞에 다가와 물을 건넸다.
— 괜찮아?
— 어? 아아, 어…….
— 저기, 저도 같은 거 하나 주세요.
— ……너 뭐라고?
주인장은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고기를 볶는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어도 그는 ‘카레’라는 두 글자를 발음했다. 넌 이지훈이 아니구나. 폴리 주스를 마신 게냐. 너 전원우지. 충격에서 나오지 못한 눈동자는 말없이 웃기만 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당당히 가슴을 펴고 카레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게 여간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 전원우가 너 여기 있다고 그래서.
— 아까 친구들이랑 저녁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
— 네가 먼저 말했잖아.
— ……어?
— 나한테 밥 먹자고 네가 먼저 말했잖아.
주인장이 그의 앞에 접시를 놓는다. 어쩌고 자시고 할 새도 없이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카레를 입안에 넣는다. 씹을 때마다 약간 움찔하는 기색도 보였으나 그건 이지훈이 카레를 먹는 것보다 기이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에 바람이 뿅뿅 불었다더니, 이 말인 즉 카레를 먹기 시작했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봐도 무방했다. 빠르게 반절이나 비운 접시를 자랑스레 보이며 물을 들이킨다.
— 학생도 이제 잘 먹는 구만! 처음엔 기다란 학생이랑 같이 와서 냄새만 맡아도 괴로워하더니 잘 컸어!
— 얘가 카레를 왜 먹어요?
— 좋아하는 사람이 카레 좋아한다고 해서 그때부터 먹는 거랴. 순정파네, 순정파여.
목이 턱 막혀왔다. 주인장에게 눈치를 주는 그를 보다, 감정이라도 들킬까 얼른 고개를 숙였다. 숟가락에 진득이 달라붙은 카레가 똥 같다. 맛대가리 하나 없다. 밥을 씹는 건지 종이를 씹는 건지 모르겠다. 당장 알 수 있는 건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뿐. 주인장은 놀러 온 옆집과 함께 밖에서 담배를 피웠다. 가게 안에는 나와 이지훈, 단둘.
— 야.
— 왜.
— 카레 너 때문에 먹는 거야.
— ……뭐래.
— 밥 먹을 때 네가 좋아하는 거 먹으려고.
갑작스러운 고백에 부서지는 정신을 알 리 없다. 눈을 둘 데가 없어 테이블 모서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침을 넘겼다. 강의실에서 말도 못 하고 사라졌던 나처럼 이번에도 입을 꾹 다문다. 그가 뒷머리를 매만지며 크게 숨을 쉰다.
— 너는 매일 나 만나러 강의실 오면서 왜 인사만 하고 가냐.
— 뭐, 뭘 만나러 가.
— 전원우한테는 맨날 놀자고 연락하면서 기껏 나한테는 같이 놀자고 왜 한마디도 안 해. 인사만 하려고 계속 기다린 건 아닐 텐데.
— ……무슨, 진짜 우연히 마주친 거야.
—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잖아, 너.
— 안 기다려! 진짜야!
— 그래?
— 어!
— 난 기다리는데.
입가에 카레가 잔뜩 묻은 대왕 토마토는 탈탈 털리고 있었다. 종합해보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그동안 영양가 없는 내 인사만 줄기차게 받아온 거다. 남은 밥을 입에 크게 넣고 오물거린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그였다.
— 수업 끝나고 나왔는데 너 없으면 좀 서운해. 그날 하루 완전 별로.
— …….
— 오늘처럼 금요일에 일찍 너 보면 그땐 좋고.
— …….
— 근데 계속 인사만 하면 내가 언제 너한테 말 걸고 언제 밥 먹냐.
두 눈꼬리로 귀엽게 웃는다. 두 달 동안 서로 번호도 없이 운명을 기다린 거였다. 부담스러울까 번호조차 묻지 못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녹녹한 달밤에 몇 달을 묵힌 이야기를 꺼낸다. 전원우의 억지에 불려 나와 만났던 날에 번호를 묻고 싶었으나, 피곤에 절어 차갑기 그지없던 내게 차마 할 수 없어 다음을 기약했다던 그는 그 다음이 돌아오지 않아 나처럼 애가 탔다고 했다. 그래서 부러 강의실에 찾아와서 인사만 하고 가는 내게 몇 번 말을 붙이려다, 쏜살같이 사라지는 내 뒷모습만 보며 복도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는 거다.
— 말이라도 하지. 나는 그동안 얼마나…….
— 좋다고 달라붙었는데 네가 싫어하면 어떡해.
— 누가 널 싫어해! 내가 좋아하……!
뒤늦게 입을 막아도 뱉어낸 건 어쩔 수 없다. 대왕 토마토와 걸맞은 색이 그의 귓불을 탐한다. 한바탕 수다를 마친 주인장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빈 그릇에 만족하며 주방으로 멀어졌다. 이제 우리 어떡할까. 금요일, 휘영청 밝은 달밤, 인파 많은 거리들. 가게 앞에서 시린 손을 주머니에 꽂고 궁리한다. 그는 제 목도리로 내 목을 감아 단단히 매듭을 엮었다.
— 칵테일 어때.
— 좋아하긴 하는데 술은 네가 안 좋아하잖아.
— 오늘 내 생일이니까 내 맘대로.
— 네 맘대로?
— 네가 좋아하는 거 다 해보자.
그가 패딩 소매 끄트머리를 잡아 쥔다. 너 잃어버릴까 봐. 한 발자국 앞서 걷던 그가 점차 발을 맞춘다. 소매 끄트머리가 손등이 되고, 손등이 깍지가 될 때, 광장 분수대 물줄기가 불빛을 받고 하늘 높게 퍼진다. 환호성에 묻히는 그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선명히, 더 선명히.
— 두 달이 아니고 일 년.
— …….
— 난 일 년 전부터.
+
— 야, 식는다 빨리 먹어.
— 카레 그만 먹고 싶은데 개새끼야.
— 그럼 하이라이스.
— 미친, 카레나 하이나.
— 강황을 갈아 먹던지. 생식이라서 몸에는 좋다.
— 너나 먹지 왜 나까지 여기 있는 건데!
— 혼밥 별로.
매번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메뉴만 시키는 지훈에게 진절머리난 원우는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거짓말을 조금 더 보태 학식보다 카레를 더 많은 것 같았으니까. 작년 8월, 교내 카페에서 팀플을 조지고 있다던 원우를 만나러 온 지훈은 당시 원우와 같은 조였던 여주에게 첫눈에 반했고, 원우를 통해 여주의 정보를 캐다 얻은 것이 바로 카레의 시발점이었다. 차라리 번호를 줄 테니 연락을 해보라는 말에도 부담스러워할 거라는 모태 솔로 이지훈은 그렇게 카레의 길에 발을 들였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언제든 밥을 먹는 기회가 온다면 자랑스레 카레를 외치겠다 마음 먹고서.
— 김여주 이제 카레 안 좋아한대.
— 그럼 뭐.
— 배그. 간디 메타로 존버 하기.
— 네가 좋아하는 거겠지.
— 야, 나 진짜 못 먹어. 안 먹어.
카레 집 주인장은 못 먹겠다 도리질하는 원우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며 용기를 북돋았다. 지금을 잘 견뎌내야 카레 왕이 될 수 있는 거야! 친구 학생을 봐! 코를 막으면서도 맛을 음미하려 애쓰는 지훈이 눈물겨웠다. 아무리 똑똑한 새끼라도 모솔은 답이 없었다. 답답함 절정에 치닫은 원우는 결국 견디지 못해 자리에서 분노했다.
— 내가! 지난주에! 걔 있을 때! 널! 일부러! 술자리에! 불렀는데! 네가! 번호도! 븅신 같이! 못 물어보고!
— 밥 먹는데 소리 좀 지르지 마.
— 기회를 줘도! 뭘 못해! 못 먹어! 눈이 없나 봐!
— 닥쳐. 카레 더 먹기 싫으면.
— 아아아아악!
지훈은 마지막 숟가락까지 비우며 굳건히 다짐했다. 이제 얼굴은 텄으니 다음엔 꼭 번호를 물어보자. 최대한 인사를 자연스럽게 한 다음에 핸드폰을 내밀자. 아, 인사한 다음에 갑자기 번호 달라고 하면 불편하겠지. 그럼 대화를 좀 하다가…….
— 내가 아까 중도에서 주간 베스트 셀러 '사람과 이성적으로 대화하는 법'을 빌렸거든?
— 그래서?
— 침묵도 대화라는데?
— 너 책 거꾸로 들었어 븅신아.
— 알아 븅신아.
— 으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