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한테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 사소하고 쓸데없는 데서 시작되는 거야.
오늘 날씨 죽인다. 썬크림 안 발랐는데 얼굴에 참깨 생기는 건 아니겠지. 겨울의 직사광선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산보를 시작하는 아침, 사방이란 사방에서 뛰쳐나온 교복들이 언덕으로 뜀박질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반댓길로 몸을 돌렸다. 종치기 불과 5분 전, 학교와 멀어지는 그림자를 느낀 반장이 불티나게 전화를 건다. 이럴 때만 귀신이라니까.
— 학교 오고 있지? 저번처럼 딴 길로 새는 건 아니잖아, 응?
— 가기 싫어. 신을 버리시옵소서.
— 결석하는 애들 한 명이라도 있으면 담탱이한테 나 죽어!
— 직책의 무게가 원래 그런 거야.
— 미쳤어?!
고막을 흔드는 소프라노에 멀찍이 핸드폰을 떼어 열을 식힌다. 오전 자습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직은 내 배경에도 포함된다는 사실에 김민규는 회유를 거듭했다. 지각하더라도 벌금은 면제해주겠다는 딜 따위에 혹할 뻔한 것을, 김민규의 핸드폰을 빼앗아 껄렁한 목소리를 내는 상대방 덕분에 이번에도 성실함은 글렀다 생각했다.
— 안 오냐?
— ……어.
— 나 때문에?
— 근자감 쩌네.
— 서 있어. 갈 테니까.
일방적인 전화가 끊긴다. 김민규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했다. 밍밍한 코를 비비며 주변을 살핀다. 불안함이 도졌다. 기분이 습했다. 얼른 학교를 벗어나야 한다.
— 너는 내가 왜 싫어?
— …….
— 말해 봐. 고칠게.
그렇지 않으면 권순영에게 또 끌려다닐 게 뻔했으니까.
OFF ON OFF
; 저돌적인 권순영
자고로 조용한 사람이 좋았다. 학교에 대입하면 정의가 꽤 쉬워진다. 학업에 성실히 임하고 말썽 없이 교사들의 관심을 받는 사람, 이를테면 등교를 행사처럼 생각하고 교사들의 또 다른 ‘관심’을 받으며 늘 이목이 쏠리고 항상 골이 난 얼굴로 사탕을 굴리는 권순영과 정반대인 DNA를 가진 사람. 태생부터 조용하고 말이 없는 나와 비슷한 사람을 옆에 두고 싶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으나, 돌연 인생에 나타난 권순영 때문에 신경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새 학기 기념 봄 소풍이었다. 무작위로 정해진 5조에는 나와 권순영도 속해 있었다. 까만 알갱이 같은 피어싱을 귀에 박고 만지작대던 권순영은 사진 포즈를 고민하는 아이들을 피해 내게 말을 걸었다. 같은 반이 된 지 한 달 만이었다.
— 무슨 생각 하냐.
— 점심.
— 나가서?
— 집에서.
— 가까워?
— 한 시간.
— 안 오겠다는 거네.
— 모르지.
— 말 되게 길게 한다.
권순영은 사탕 냄새를 폴폴 풍기며 어깃장을 놓았다. 아이들의 뒤통수에 둔 시선을 옮기자 얄쌍한 눈매가 나를 직시했다.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사탕을 아드득 깨물고 묘한 미소를 짓던 권순영의 첫인상은 무서웠다. 권순영에게 장난을 걸던 김민규는 안 맞은 게 다행이란 말을 흘리며 자리를 피했다. 웬만하면 말도 걸지 말고 눈도 마주치지 말자. 졸업할 때까지 조용히 살자. 속으로 한 다짐도 잠시, 인생은 생각보다 좆같았다.
— 어떤 맛 먹을래.
— 괜찮아.
— 많이 가져와서 다 털어야 돼.
— 다른 애들 줘.
— 안 친해.
— 나랑은 친해?
— 쟤네들보다는.
가재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흠칫 놀라 도망가는 그들 중 권순영을 유달리 무서워하던 아이는 권순영이 교무실에 내려간 틈을 타 옆자리를 꿰찼다. 쟤 분명히 무슨 꿍꿍이 있다. 진짜라니까? 학교도 얼굴만 비추고 빠지는 애가 왜 붙어있겠어? 그것도 너한테? 그 아이는 권순영의 이상행동을 곱씹었다. 나도 매일 학교에 붙어 있는 권순영이 신기할 지경이었는데, 쉬는 시간마다 옆자리에 앉아 볼록한 주머니를 뒤져 사탕을 권하거나 그 핑계로 말을 걸었다.
주말에 뭐하냐. 난 그냥 잠자는데. 게임은 잘 안 하고 약속 없으면 자거나 영화 봐.
혼자 주절대는 권순영이 어색했다. 대답을 굳이 안 해도 본인 말만 하다 조용히 자리로 사라졌다. 자신을 찾아온 다른 반 무리에게 바쁘다 눈길도 주지 않고 내게 다가와 필통을 구경한다 거나 잠금이 풀려 있는 핸드폰에 본인 번호를 찍는다거나 가히 이상 행동을 했다.
호기심 어린 주변의 시선과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꼭 교무실에 드나들던 권순영이 잠잠해졌다는 이유만으로 교사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더군다나 잠잠해진 이유가 나라고 생각하는 꼴이 얼마나 웃긴가. 교내 교사 학생 할 것 없이 권순영과 나의 관계를 파헤쳤다. 한번 해 봐라. 나올 게 있나. 화장실로 향하며 치약 거품이 잔뜩 묻어 있는 입가를 닦아냈다.
— 너는 내가 왜 싫어?
— …….
— 말해 봐. 고칠게.
어느 날은 하교하는 날 붙잡고 쓸데없는 말을 해댔다. 짧은 단답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내가 여간 불편한 기색이었다. 싫어하는 데 이유가 있나. 그냥 싫어할 뿐이지. 잡힌 가방을 당기자 비 맞은 햄토리처럼 풀이 죽었다. 무섭게 생긴 애가 저런 표정도 할 줄 안다니, 약간 귀엽…… 나 뭐래니.
화장실에서 나오는 나를 발견한 권순영은 느긋하게 다가와 입가를 둥글게 가리켰다. 산타 수염 같다. 어쩌라고. 계속 달고 다녀. 웃기지 마. 벌겋게 나대는 얼굴을 가린 채 화장실로 숨어들자, 권순영 친구들은 그만 좀 괴롭히라 타박했다.
— 김여주, 끝나고 기다릴게.
— 미친.
— 다 들린다.
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잠을 자면 정수리가 따끔거렸다. 불쌍하다, 걱정된다, 그래도 권순영한테 찍힌 사람이 김여주라서 다행이다. 아이들의 관심에 어쩔 줄 몰라 하면, 권순영은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사람을 집어 응징을 했다. 침 흘리고 자는 사람 처음 보냐는 말로. 그 순간만큼은 인중을 가격하고 싶었다.
*
— 학교 안 가고 여기서 뭐 해.
— 뭔 상관.
— 네가 안 오니까.
— 그래서?
— 뭔 말을 그렇게 하냐.
용케 학교 근처 맥도날드 구석에 앉아 맥모닝을 처먹는 나를 찾아낸 권순영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게걸스럽게 먹어야 정이 털리려나 입가에 잔뜩 소스를 묻힌다. 나이가 몇 갠데 다 흘려. 냅킨으로 닦아 트레이에 놓는 권순영은 의식 불명 상태 거나 최소 응급 상태라 확신했다. 내게 고백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쭉 응급 상황이었다.
— 불편해?
— 어.
— 눈 보고 얘기해.
— 불편해.
— 내가 왜 싫어?
가게 음악과 한데 엉켜 낮은 목소리가 배회한다. 왜 싫어하냐니. 넌 내 취향이 아니니까. 삐딱한 사람은 별로니까. 너라고 얘기하면 상처받을 거면서 왜 자꾸 묻는 건데? 악의적 문장들을 콜라로 잠재운다.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권순영은 머리를 헝클었다.
— 말해 달라고.
— 뭘.
— 고친다고.
— 그럴 시간에 공부해.
— 말해주면.
— 공부한다고?
— 엉, 대신 어디가 맘에 안 드는지 말해주면.
권순영은 내가 먹다 남긴 콜라를 마시며 눈을 맞췄다. 그래, 그거야.
— 하나부터 열까지?
— …….
— 맞네.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피하지 않아도 된다. 권순영은 골똘히 생각했다. 풀어진 셔츠와 오래전에 잃어버린 넥타이, 잦은 탈색으로 바랜 머리와 새로 뚫었는지 약간 부은 귓바퀴. 자신을 둘러본 권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매장 밖으로 향했다. 담배라도 피고 돌아올 줄 알았으나 그날은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
— 쟤, 권순영 맞아?
— 왜 저래?
— 정학 먹었나?
— 표정 너무 행복해 보이는데?
학교는 난리가 났다. 2학년 2반 권순영의 변신 때문에. 잦은 탈색으로 날아다니는 머리는 단정히, 피어싱으로 난도질한 두 귀는 매꼬롬했다. 얼굴을 반쯤 잡아먹은 동그리 안경과 어울리지 않는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노르웨이 숲’ 한정판을 들고 복도를 누비는 저 사람은 누구일까. 저 책이 뭔 뜻인지 알고는 읽는 건지, 지나가는 교사들과 학생들은 입을 쩍 벌리며 권순영을 주시했다. 복도 끝에서 마주친 그가 한 구절을 읊는다.
— 어떤 사람한테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 사소하고 쓸데없는 데서 시작되는 거야.
— …….
— 그치, 김여주.
권순영은 계단을 내려가다 뒤를 돌았다. 점심 먹고 교실로 와. 영어 문제 몰라. 처음부터 끝까지 어울리지 않는 말만 하고 사라진 권순영은 점심 후 정말 옆자리에서 교과서를 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밥을 만들어서 먹고 왔나. 볼멘 소리로 눈을 흘기며 날 쳐다본다. 진짜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얘기야?
— 수동태가 뭔지 말해봐.
— 정말 진심이야?
— 내가 시간 낭비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라.
권순영은 사탕 대신 꿈틀이 젤리를 씹어먹었다. 말할 때마다 불어오는 달콤함에 경계가 무너진다. 볼펜으로 여러 번 별표 친 문제를 보며 해답을 찾으면, 젤리를 음미하던 입술이 감탄사를 뱉어냈다. 우오와, 대단하네. 공부하겠다는 의지와 달리 별 감흥 없는 식으로.
— 수동태가 어떤 게 당한다는 뜻?
— The letter was sent to 순영. 그 편지는 순영에게 보내졌다.
— 내 이름 썼네.
— ……예시가 그렇다고.
— 그럼 이건.
남은 젤리를 털어 넣고 교과서에 글씨를 끄적인다. 악필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글씨체는 귀여웠다. 뭐래, 귀여웠다라니. 무너진 경계심을 세워 허리를 바짝 세운다. 교과서에 얼굴을 가까이해 무엇을 써 내려간 권순영은 책을 돌려 문장을 보였다.
— 여주 was loved by 순영.
— …….
— 수동태, 맞지.
달아오른 얼굴에 무작정 시선을 피했다. 학교에서 잘하는 짓이다. 김민규가 본다 치면 저런 말을 했을 것이다. 볼펜을 돌리며 답을 묻는 권순영은 내 시선을 따라 얼굴을 마주했다.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다. 뻔히 둘러대는 말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권순영이 살짝 손끝을 잡으며 머뭇거렸다.
— 야…… 그 뭐냐…….
— …….
— 집에 데려다줘도 되냐.
— …….
— 정류장에서 봤는데 나랑 같은 버스 타길래.
홍조가 피었다. 손끝에 닿은 뜨거운 열기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머쓱한 듯 귀를 만지작대는 권순영은 교과서를 덮어 제자리로 향했다. 종이 울리고 하나둘 교실로 모여드는 아이들의 모습 사이로 엎드려 잠을 청하는 권순영이 보인다. 목에 맨 걸 본 적 없는 새 넥타이까지도.
*
그네가 움직인다. 두 개가. 권순영은 발로 모래 장난을 쳤다. 동그란 달이 떠 있는 밤,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권순영의 제안을 받아들인 나와 집 앞 놀이터에서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척 내 얼굴을 훔치는 권순영이 있다. 내게 왜 이러는 것이며 사람 마음을 이상하게 만드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단정한 차림도, 나를 보는 표정도 이상하다. 긴장하면 속에서 폭 올라오는 감정이 순간 꺼지는 것처럼, 권순영과 함께 집으로 오는 내내 그랬다. 어느 한구석 마음에 들지 않고 이상형과 반대인 권순영을 좋아할 리 없다. 만약 그렇다면 스스로 배신감이 들어 2박 3일 이불에 묻혀 자아 성찰을 해야 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눈에 힘 빡 주고. 강렬하게.
— 나한테 왜 그래?
— 갑자기?
— 관심 있는 척 계속 말 걸잖아.
— 척이 아니라 진짜 관심이 있어.
말 했잖아. 척할 만큼 시간 낭비 싫어한다고. 날카로운 눈매가 가로등 빛을 투영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들지 않아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바꿔온 권순영이 이해되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내게 그런 마음을 품어왔는지 모르겠지만.
— 소풍 간다고 애들끼리 포즈 정할 때, 다른 애들은 내가 말 걸면 반강제로 대답하는데 넌 아니었으니까.
— …….
— 진짜 친구 같더라. 관심 없는 거 팍팍 티 내면서.
— …….
— 색안경 안 끼고 보잖아, 너는.
그러면서 씁쓸히 웃는다. 동정과 연민 따위를 바라는 얼굴이 아니다. 무척이나 외로워 보이는 얼굴, 그럼에도 개구지게 웃는 표정. 사람들의 편견 속에서 살아온 권순영은 삐딱했으나, 내 앞의 권순영은 뭐랄까……. 그냥 권순영이었달까. 지금도 어떤 맛을 먹을지 주머니를 뒤지는 그런 권순영.
— 늦었다. 가자.
— 벌써?
— 넌 집이 어딘데?
— 어?
— 집.
당황한 권순영이 주변 아파트 단지를 둘러본다. 초점 잃은 눈동자, 슬슬 냄새가 나는 거지. 같은 버스가 아니었다는 걸.
— 이 동네 아니지.
— ……엉.
— 근데 왜 같은 버스래.
— 반대라고 말하면 만날 수가…….
— ……일어나.
— 지금?
— 데려다줄게.
놀이터를 벗어나 엉겁결에 끌려온 권순영은 놓았던 정신을 차리고 손목을 움켜잡았다. 혼자 갈게. 너 먼저 가. 사거리 앞에서 먼저 가네 마네 실랑이를 벌이는 교복을 보며 사람들은 흠칫거렸다. 바로 뒤에 떡 하니 모텔 간판이 번쩍였으니. 하필 나와도 이 골목이라니.
— 그럼 버스 정류장 앞까지만.
— 야.
— ……왜.
— 손잡을래?
— 아니.
머쓱한 손이 내 것을 스치다 뒷머리로 향한다. 갑자기 어깨 운동을 하고 싶다는 멍청이 같은 말을 무시한 채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죽 찢어진 눈으로 눈치만 보는 권순영은 앞으로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피해 나를 당겼다. 꽁무니 빼는 운전자에게 욕을 하다 품에 안긴 나를 보며 입을 꾹 다문다. 차라리 손을 잡을 걸 그랬다. 가슴팍에 안겨 어떤 향수를 뿌렸는지 아는 것보다 나았을 텐데.
— 놔, 이제.
— 뭘?
— 놓으라고.
— 뭐라고?
일부러 귀를 닫는다. 몸을 숙여 팔 밑으로 빠져나와 길거리를 걷는 나를 쫓아 장난을 건다. 너 향수 뭐 뿌리냐. 울 누나 데이트 갈 때만 뿌리는 냄새 같던데. 정류장 다 왔다. 좀만 천천히 가면 안 되냐. 뒤에서 외투를 당기며 어색하게 웃는다.
— 나한테 뭐 바라는 거 있어?
— 아무것도.
— 그럼?
— 좋아하게 내버려 둬.
버스에 올라타 창을 연 권순영은 달밤에 뜨겁게 고백했다.
— 김여주! 주말에 뭐해!
— 놀자! 나랑!
*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 김민규와 영화 약속을 깨고 역 앞에서 권순영을 기다리고 있는 내가 굉장히 어색했다. 근데 얘는 왜 안 와. 동시에 3번 출구 오전 10시까지 만나자 못 박은 장본인은 아직 오지 않아 열이 받은 상태였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갈까 생각했으나 계단을 뛰어오르는 탈색 머리를 보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 엿 먹이는 줄 알았어.
— 야, 뭔 엿이야.
사복 차림의 권순영은 인정하기 싫지만 괜찮았다. 뭘 입어도 태가 나는 몸이었다. 우연히 같은 검은색 컨버스를 내려다보며 제 것을 내 신발 옆으로 맞춘다. 나랑 똑같다. 웃으면 항상 성이 나 있는 얼굴이 무너진다. 눈꼬리는 아래로 휘어지고 입꼬리는 올라간다. 볼에 패이는 옅은 보조개는 킬링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조심히 생각해보기도 하고.
— 아니, 공을 안에 넣으라고.
— 하고 있어 지금. 얼마나 잘해.
— 점수를 봐.
— 어? 영점이네?
오락실에 들어가 먼저 농구대에 선 권순영은 양손 스킬로 조지려 했으나 움직이는 골대 앞에서 맥없이 노골을 기록했다. 집중하면 점수고 뭐고 안 보이는 성격에 점수판을 가리키자 그제야 놀라며 입을 막는다. 그 뒤로 철권, 보글보글, 게임의 원조 테트리스까지 말아먹은 권순영은 초등학교 5,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뒤에서 입을 벌리며 구경했다.
— 야, 너 진짜 잘한다.
— 저랑 한 판 하실래요?
— 아냐, 잘 못해.
그러면서 2p 자리에 동전을 넣는다. 몸집이 큰 캐릭터로 압살해버리겠다는 각오가 민망할 정도로 그 아이는 게임을 잘했고 권순영은 넘어질 때마다 몸을 들썩이며 캐릭터와 일체 됐다. 마침내 K.O.를 찍고 만세를 부르는 아이가 권순영을 토닥인다. 허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게 웃겨 고개를 돌렸다.
— 쟤 진짜 잘한다.
— 넌 뭘 잘해?
— 태권도.
— 그거 빼고.
— 너 좋아하는 거?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한다. 게임과 달리 능구렁이 레벨은 만렙쯤 된 것 같다. 정원 초과 직전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향한다. 사람들 탓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붙여 10층까지 올라가야 했다. 네 숨소리 다 들려. 머리 뭘로 감았어? 궁금한 게 참 많은 권순영이었다.
— 사진 찍자 여기서.
— 핸드폰 줘.
— 같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핸드폰을 건네고 포토존에서 브이를 그린다. 다소 멀리 떨어져 브이 하는 나를 끌어당겨 옆에 세웠다. 멀리 있으면 잘 안 나와. 손을 잡힌 채 어색한 얼굴로 찍힌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권순영은 티켓을 입에 물고 팝콘과 콜라를 들었다. 티켓 확인에 앞서 제 얼굴을 내밀어 입에 문 티켓을 건넨다. 아무렇지 않게 받은 나도, 그렇게 건넨 권순영도 오늘만큼은 이상하지 않다. 분위기가 그렇게 만든다고나 할까. 영화관에 나란히 앉아 한 움큼 팝콘을 잡아 권순영에게 내민다. 그럼 권순영은 입으로 받아먹었다.
— 핸드폰 껐어?
— 어?
— 핸드포온-. 껐냐고오-.
귓가에 본의 아닌 바람을 불었다. 멈칫거리는 권순영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다. 묘했다. 이런 분위기가. 내 손에 담긴 팝콘을 요리조리 빼먹으며 이번엔 내 귀에 바람을 분다.
— 야.
— …….
— 옆모습 예쁘다.
그날 영화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권순영의 얼굴만 떠올랐을 뿐.
*
아이들이 제각각 자신의 소굴로 숨어 들어가는 기간. 다른 말로 방학이었다. 어수선한 교실은 히터 바람을 남기고 고요해졌다. 주번인 나는 마지막까지 교실을 정리하고 자물쇠를 걸었다. 두 달간은 안녕이다. 지긋지긋한 교실 냄새. 적적한 복도를 걸어 교무실 한 켠에 키를 매달고 건물을 나섰다. 현관 앞에서 코트에 얼굴을 묻고 바닥을 내려다보는 권순영이 기척에 얼굴을 든다.
— 안 갔어?
— 기다렸지.
— 왜?
— 같이 가자. 어차피 나도 같은 버스라.
뻔한 거짓말을 하며 웃는다. 전날 눈이 온 탓에 미끄러운 언덕을 내려가며 서로 잡아 주기를 여러 번, 걸음을 우뚝 멈춘 권순영은 빨개진 코를 어루만지는 내게 말했다.
— 다시 말해봐.
— 뭘.
— 아직도 내가 싫은지.
— …….
— 고칠게. 다.
싫은 이유. 고친다는 다짐. 나를 보는 눈빛. 권순영의 모든 것. 눈이 내리고 세상을 덮는 그 순간.
— 없어. 그런 거.
— …….
— 생각해 보니까 너는 그냥 너잖아.
— …….
— 싫어할 이유 하나 없는 권순영.
어떤 사람한테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 사소하고 쓸데없는 데서 시작되는 거야.
내게 저돌적으로 다가온 그 순간부터.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 몰라.
나도 널 좋아했던 게.
+
— 우리 방학하면 또 볼래?
— 공부해야지. 이제 고3인데.
— 공부하면서 볼래?
— 너도 할 거고?
— 옆에서 보기만.
— 죽어도 한다는 말은 안 하지.
— 내가 했으면 좋겠냐?
— 응.
— 손잡는 거?
— 우리 공부 얘기하고 있었는데.
— 그니까 손잡는 거?
— 말을 말자.
— 야, 좀 잡아주면 안 되냐?
— 응.
— 아하하핳핳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