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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방탄소년단 정해인 변우석 세븐틴 더보이즈
1323 전체글 (정상)ll조회 1162l 3
등장인물 이름 변경 적용











[세븐틴/지훈] OFF ON OFF _ 필름 카메라 | 인스티즈

좋아한다며
사진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다면서요.















열을 끓이던 히터가 죽었다. 일정한 소음은 소멸되고 비로소 낯없는 숨소리만 냉랭한 교실에 살아남는다. 저무는 태양이 두꺼운 점퍼에 얼굴을 묻은 아이들의 뺨을 적신다. 칠판에 각진 글자를 써 내리는 교사의 메마른 손가락은 유독 허연 빛을 띠었다. 쏟아지는 졸음에 꾸벅이는 그들을 따라 눈을 감고 몽롱함에 빠진다. 흐름은 아득한 경계선을 넘어 발을 디뎠다.

눈을 감아야 형체는 선명했다. 교사의 발소리와 심장 소리는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은 속도로 머릿속을 침범했다. 닳아진 오른쪽 굽과 비뚤어진 심장이 마구 엉켜 팽창한다.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한 그것은 몸을 뒤덮고 떨어진 파편이 시뻘건 눈동자에 박혔다.




— 다음 문장은 17번이 읽어 보자.

— …….

— 17번.

— …….

— 17번!




적막의 부피를 뚫는 목소리가 허상을 깨운다. 부릅뜬 아이들의 눈은 현실을 방황하다 잠식했다. 땀이 찬 손바닥을 교복에 문지른다. 책상을 디딤돌로 엉거주춤 일어나면 한쪽 다리는 저는 의자. 다음 문장, 그게 어디였더라. 뿌연 안개에 미간을 좁혀 뒤늦게 글자를 좇는다.

노파, 다음부터. 엎드려 있던 짝지가 잉크 펜으로 문장 앞에 점을 찍는다. 교사의 시선을 피해 교과서를 바짝 당기고 글자를 더듬거린다. 눈동자는 불안에 떨었다.




— 노파는 몸을 웅크렸다. 죽음에 가까워지자 종국의 붉은 노을이 거친 살갗을 파고들어 심장을 먹었다. 충혈된 그녀의 마지막 눈은…… 얇은 가지에 피어난 열매를 보며 환희에…….










거친 살갗…… 심장…… 마지막 눈…….

갈라진 목소리에도 교사는 말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 눈을 감는 순간에도 노파는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품에 안았다. 19세기의 전동차, 시애틀의 밤거리, 그리고…….




자간의 공백이 싫어 정성껏 혀를 굴린다. 교사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다음을 기약하며 교과서를 덮었다. 일방적인 종소리에 깨어난 아이들이 교실을 벗어난다. 태양이 적시던 뺨에는 퍼런 자국만 남았다. 김빠진 손난로에 입술을 비비던 짝지가 눈앞에서 손을 흔든다. 괜찮다는 말에 한숨을 쉬는 그녀였다.




— 수술 언제 하는데?

— 조금 있으면.

— 그 소리만 수도 없이 들었네요.




차디찬 책상에 이마를 맞댄다. 머리가 찌르르 울리기 시작했으니 곧 감기가 찾아올 모양이었다. 그녀는 등을 어루만지며 주로 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럼 난 대충 둘러대며 동감했다. 체육 시간 매트 당번이었던 내가 대낮 체육관 창고에서 주저앉아 벌벌 떨던 일이 작년이었으니, 그녀가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증세를 알아차린 것도 그쯤 됐었다. 그리고 거짓말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걱정하는 것도, 받는 것도 싫었던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수술로 완치할 수 있다’라는 거짓말이었다. 병원에서도, 어쩌면 이미 스스로 알고 있었는지 모를 늦은 시기는 늘 거짓말을 동반했다. 그리고 가끔은 그 순간에 취한 내가 있었다. 수술만 하면 기적처럼 나아질 것 같아서, 헛구역질까지 하면서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스스로 만든 거짓에 상처받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면서도 고치지 못했고, 그렇기에 거짓 속에서 깨어나면 끝은 허무했다.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니까.

아픈 나로. 희미해지는 나로.










— 아까 그 노파 말이야.

— …….

— 사진은 어떤 의미였을까.




소설 속에서 차갑게 식은 노파를 떠올린다. 19세기의 전동차, 시애틀의 밤거리, 그리고…….

그녀가 찍은 수 만장의 사진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러다 문득, 가상의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이 프레임에서 찾는 것은 진정 무엇이었습니까.

죽기 직전까지 보고 있던 것은 사진이었습니까, 그날의 시간이었습니까, 아니면…….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가 수그러든다. 먹먹한 눈이 심연으로 떨어져도 얼굴은 반사적으로 익숙한 향기를 따랐다. 희미한 윤곽이 손을 흔들며 미세하게 왼쪽이 조금 더 짧은 교복 바짓단을 앞으로 내밀어 짝다리를 짚는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듣고 싶은 목소리로 마침내 내 이름을 부르면, 난 새벽에 기도했던 것을 되뇌었다.










아득한 세상에서도 저 아이의 반짝이는 눈을 기억하기를.

저 아이를 위해 마지막까지 행복하기를.

나의 엇나간 바느질로 희생양이 된 바지를 특별함으로 생각해주는 저 아이가…….















내가 없어도 부디 외롭지 않기를.




















망가진 렌즈로 보는 세상.
깨진 이지훈은 웃고 있다.













OFF ON OFF
; 필름 카메라


















2018년, 여름.










— 누가 요새 필름을 쓴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달려와서는.

— 방학이니까 그렇죠. 덕분에 아저씨도 먹고살잖아요.

— 예끼, 녀석아. 지금 죽어도 때깔 곱다.




흐린 아침이었다. 낡은 사진관 주인은 비닐 팩에 담긴 필름과 현상실로 향했다. 첩보원 수신호처럼 지직거리는 라디오가 낯설지 않은 공간, 30년째 골목을 지키는 이곳에 현상하러 오는 일은 엄마가 살아있을 때부터였으니까 적어도 10년은 더 됐다. 이젠 그녀가 없지만 곁에 남은 낡아빠진 카메라가 대신 세월을 말했다.




— 사진은 영원을 담는 거야.

……

— 엄마는 그 안에서 계속 살아있을게.




중환자실에서 아파하던 음성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했다. 그녀는 사진을 좋아했고 소중히 여기던 카메라를 선물할 만큼 당신의 딸을 사랑했다. 향초와 영정사진 앞에서 울던 어린 나는 생전 발자취를 따라 카메라를 들었다. 들꽃과 호수, 높은 하늘과 산 중턱에서 바라보는 마을, 그리고 웃고 있는 내 얼굴.

닳아진 모서리에 반창고를 붙이던 어느 날, 그녀가 오래전에 남긴 선물에 기어코 눈물을 쏟았다. 물려주는 건 카메라로 족하다고 원망했던 울음이 떠다닌다. 벌써 재작년 겨울이었다.




— 아야, 비 온다.

— 큰일 났다. 우산 안 가져왔는데.

— 그칠 때꺼정 여기 붙어 있음 돼지 뭘 그려.




장마철 사진관은 천장에서 물이 바가지로 새는 까닭에 휴업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올 8월만 해도 네 번째였다. 그렇기에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허겁지겁 달려와 현상하는 날이 잦았는데, 재수가 없으면 이리 폭우가 쏟아지곤 했다. 오늘이 꼭 그런 날이었다.




— 날씨가 이래서야 쓰겄나.

— 문 닫으시게요?

— 그것은 아니고. 사진이 잘 나올랑가혀서.

— 아저씨 현상 기술 최곤 거 동네 사람들 다 알거든요?

— 흐이구, 아부는.




대기실 중앙을 차지한 커다란 은색 양동이가 천장 이음새를 지킨다. 작은 웅덩이에 비춘 얼굴은 파동으로 부서져 괴기하게 변했다. 수만 개의 조각으로 갈라진 하나의 물체. 파동이 아닌 망가진 렌즈로 찍은, 망가진 눈으로 보는 내 얼굴이었나. 빠져 죽기 좋은 강물을 거둬 화장실 타일 바닥에 퍼붓는다. 형체는 금세 사라졌다.




— 아저씨, 돈 많이 벌면 천장부터 고쳐요. 평생 아껴서 뭐한대?

— 뭐허긴, 우리 조카 대학 등록금 줘야지.

— 조카 지금 어디 있는데요?

— 그 뭐시여, 중요한 일 있다고 한참 전에 나갔시야.




현상실에서 나와 돋보기로 명단을 정리하던 주인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지훈이 그놈은 스무 살이 코앞인디 허구헌날 집에서 콤퓨타만 잡고 요로코롬 화면만 보고 있당게? 요새는 방학이라고 뽈뽈 쏘다니기만 허는디 네가 좀 말려봐라. 진학을 혔으믄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 아녀? 책 한 장 피는 것을 보지도 못했어야.

주인의 한탄에 웃음을 꾹 참는다. 뽈뽈 쏘다니는 아저씨 조카가 학교에서 공부 제일 잘한다니까요. 나중에 대학 합격 현수막 걸고 옆 동네까지 자랑할 거면서. 주인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꼭 누군가를 닮은 눈웃음에 마음이 애끓었다.

이제 내 번호 기억할 때 되지 않았나. 주인을 장난스레 훔쳐보며 큼직한 번호를 써넣는다. 이틀 뒤에 찾으러 올게요. 가방 안쪽에 카메라를 넣고 빡빡한 지퍼를 물린다. 가벼운 눈인사 후 손잡이를 돌리자, 카운터 앞에서 머뭇거리던 주인이 콧잔등을 매만졌다.










— 저, 여주야.

— …….

— 지훈이헌테는, 아직 말 안 혔지?





















[세븐틴/지훈] OFF ON OFF _ 필름 카메라 | 인스티즈

사진관 처마 끝에 굵은 빗방울이 모였다. 밖으로 손을 뻗어 잡히지 않는 그것들을 움켜쥔다. 물때가 번진 누런 운동화가 처마에서 계단으로, 계단 밑에서 도로 밖으로 밀려난다. 하늘에서 쏟는 강한 타격에 혈관이 터지고 비로 둔갑한 파편이 시뻘건 눈동자에 박힌다.  




— 수술도 못 허고 이대로 가믄 네 엄마처럼…….

……

— 아가, 훈이 갸가 너랑 보낸 세월이 자그마치 십 년이 넘었시야.

……

— 난중에라도 그놈이 알믄, 얼매나 맘이 아프겄냐.











[세븐틴/지훈] OFF ON OFF _ 필름 카메라 | 인스티즈

소나기에 흠뻑 젖는다. 눈에 찬 뿌연 안개를, 탁한 먼지를, 징그럽게 깨진 세상을 이 비가 씻어 내리길 바랐다. 죽은 엄마를 대신해 영원을 기록하는 내게 하늘이 내려준 벌이라면 그깟 카메라는 쓰레기통에 처박으면 그만이었다. 신이 있다면 저주받은 눈에 평생 얼룩이 남아도 좋고 남들이 눈 병신이라 때려도 좋으니 내가 보는 세상만큼은 앗아가지 말라 빌고 싶었다.




왜 하필 나인지.

왜 나여야만 했는지.

죽은 엄마의 영혼도 모자라 나까지 데려가려고 하는지.










지훈이를 두고서, 정말 가야만 하는지.










병을 알고 나서 가장 무서웠던 건, 눈을 잃었을 때 카메라를 통해 보지 못할 세상도, 약물에 썩어들어갈 뇌도 아닌, 나를 보며 웃는 아이의 얼굴이 희미해지는 것이었다. 사진이 아니면 엄마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내가 매일 사라지는 얼굴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까. 




— 언제까지 씌워 줘야 돼.




까만 우산이었다. 우산 주인은 삐딱한 시선으로 엉망이 된 꼴을 훑었다. 날씨 좀 보라고. 말 지지리도 안 듣지. 겉보기에도 품이 큰 외투가 어깨를 덮는다. 우산은 한쪽으로 기울기가 심했고 티셔츠가 젖는데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 핸드폰 배터리 나갔어? 전화 안 받길래.

— 아…… 집에 두고 나왔다.

— 접착제 하나 사. 귀에 딱 붙여 놓게.




연락 좀 받아. 애초에 갖고 다니면 더 좋고. 잔소리로 무장한 그가 정류장 앞에서 버스를 확인한다. 59번을 찾는 그는 샐쭉한 얼굴로 도로에 손을 흔들었다. 버스 한참 멀었으니까 그냥 타자. 택시 안으로 밀어 넣은 그가 곧바로 엉덩이를 붙인다. 연희 사거리요. 사진관과 반대 방향으로 출발한 택시는 빗길에 가는 곳마다 신호를 먹었다. 그가 기사에게 받은 수건으로 내 머리카락 물기를 닦는다. 차 안은 작은 볼륨으로 노래가 흘렀다.




— 눈은, 괜찮아?

— 어?

— 빈혈.

— 어, 괜찮아.

— 병원에서 따뜻하게 다니라고 했다며. 그래야 금방 낫는다고.




오늘 봐봐. 낫게 생겼나. 그는 투박한 손길로 물기를 털었고 엉킨 머리카락에 신음을 뱉고 나서야 잠잠했다. 노래가 끝날 때쯤 대화도 끊겼다. 오르막길을 달리는 택시에 적막이 내린다. 약해지는 빗줄기와 빈혈로 둘러댄 거짓말을 함께 떠내려 보낸다. 그래야만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이기적이고 못나야 했으니까.




— 약은.

— 먹었어.

— 열은.

— 없어.

— 내 얼굴은.

— 그런 농담 별로거든.




올봄, 그는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허우적대는 날 본 적 있다. 체험 학습으로 떠난 유원지에서 잠시 조를 빠져나온 나는 시야가 불분명했고 호흡이 딸렸다. 사람들은 까맣게 그을렸고 뒤죽박죽 얼굴이 섞였다. 구역질을 지켜보는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등을 감쌌고, 어떠한 말도 없이 숨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린 사람은 이지훈이었다. 얼굴이 아닌 향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구냐는 질문이 허무할 만큼 진동했던 그 향 때문에.

그날은 교사의 눈을 피해 그가 내 옆을 지켰다.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다 빈혈로 둘러댄 그때부터 그는 안부를 물었다.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리기 바빴다. 지금도 택시에서 내린 그는 인사 대신 습관처럼 확인사살을 했다.




— 스트레스가 어떻게 오면 빈혈에 눈까지 안 보이는 건데.

— 다른 사람보다 예민해서 그래. 너도 알잖아.

— 몇 개도 아니고 약을 한 뭉텅이씩 먹는 건 심각한 거 아냐?

— 비타민이랑 섞어 먹는 거라니까.

— 근데 왜 계속 심해져.

— 뭐가 또.

— 눈.

— …….

— 머리 보지 말고.




언덕을 내려가는 택시가 후미등을 밝힌다. 모든 것을 삼킬 듯 쏟아지던 비도 그쳤다.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태연한 척 밝게 웃는 나와 젖은 우산을 들고 서 있는 그에게 눅눅한 바람이 분다.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고 눈은 계속 습기를 먹었다.




— 방학이라고 밖에만 돌아다니지 말고 삼촌이랑 같이 지내. 사진관 갔는데 너 없다고 적적해하시더라.

— 또 딴말 돌린다.

— 약만 잘 챙겨 먹으면 괜찮다고 병원에서 그랬다니까.

— …….

— ……정말이야.











— 아가, 훈이 갸가 너랑 보낸 세월이 자그마치 십 년이 넘었시야.

……

— 그놈이 난중에라도 알믄, 얼매나 맘이 아프겄냐.










— 친구 걱정 그만 해도 돼. 벽에 똥칠할 때까지 무병장수할 거니까.

— 네가 정의하고 너만 이해한 친구 사이에 이 정도 걱정은 할 수 있지.

— 이지훈.

— 말해.

— 나한테 화난 거 있어?

— 그럼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




진즉 시궁창으로 버린 줄 알았던 감정이 솟구쳤다. 그가 눈속에서 물결처럼 요동쳤을 때도, 산산조각난 거울에 얼굴이 박혀 있었을 때도, 그래서 모든 걸 토해내고 싶었을 때도 그를 위해 숨겨야 했던 나였다. 용기 내서 좋아한다 말했던 나는 병을 알고 나서 애초부터 그딴 마음은 없었던 사람이 되어야 했다. 변덕이 심하고 치졸하고 이기적인 나로 생각하길 바랐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이지훈은 감정에 예민했고 솔직했으며 후회 남기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 좋아한다며. 사진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다면서요.

— …….

— 사람 하나 정신 빠지게 흔들어 놓고 내빼니까 좋냐.

— …….

— 좆같이 미워한다고 했으면 복수라도 하지.




용기 낸 고백이 화살로 돌아와 중앙부를 찌른다. 실은 두려웠던 거다. 진실을 토해내면 이에 상응한 거짓말의 죗값도 치러야 했으니까. 이지훈은 거짓말을 싫어했고 나를 좋아했다. 난 거짓말을 좋아하고…… 좋아하고…… 이지훈을…….




— 걱정 그만하라는 말, 나한테 숨 쉬지 말라는 거랑 뭐가 달라.

— …….

— 네가 싫어하면 안 해. 대신 지금은 못 해. 아픈 거 나을 때까지, 그때까지만 참아.

— …….

— 친구잖아, 우리.




그는 미묘한 말을 남긴 채 내리막길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찾을 수 없을 때까지, 난 같은 자리에서 그를 곱씹었다. 흑색 하늘은 또다시 비를 내렸고, 그가 손에 쥐여준 우산만이 곁을 지켰다.










[김여주 우산]










지훈이 우산엔 항상 내 이름이 있었다.















*
















[세븐틴/지훈] OFF ON OFF _ 필름 카메라 | 인스티즈

이혼 서류에 도장이 마르기도 전이었다. 비를 뚫고 짐 트럭이 언덕 길에 섰다. 동네 사람들은 남편과 아빠가 없는 이혼녀와 여덟 살배기 아이를 가십거리 삼아 입을 모았다. 여자가 독해서 남자를 잡아먹었다, 억지로 이혼한 그녀가 남편을 피해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혼외 자식을 키우는 척하다 먼 동네까지 와서 버리려고 한다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험담으로.

엄마가 죽고 난 후에는 손가락질이 빗발쳤다. 이번에는 자식이 어미를 잡아먹었다고. 사실이 아니기에 화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기댈 곳이 필요했던 나는 전적으로 카메라에 의지했다. 그녀를 기리며 세상을 담았고 필름을 다 쓰면 사진관을 찾았다.

어느 날 후줄근한 민소매를 입은 어떤 아이는 소파에서 배꼽을 내놓고 한여름 낮잠을 즐겼다. 문을 열어놓은 터라 비가 안으로 몰아치는데도 그저 콧잔등을 비비며 잠꼬대를 했다. 손님인지 도둑인지 분간하지 못해 창문을 서성이자, 잠귀 밝은 아이는 기척에 벌떡 일어나 눈가를 비볐다.




— 삼촌 잠깐 약수터 갔어.

— …….

— 여기 앉아도 괜찮아.




제 몸무게로 푹 꺼진 소파를 가리켰다. 발이 바뀐 슬리퍼를 신고 카운터로 간 아이는 뒤꿈치를 들어 수화기를 들었다. 삼촌, 저 지훈인데요. 앵두 같은 입술은 연결된 상대방을 삼촌이라 부르며 귀가를 재촉했다. 긴장했는지 윗옷을 구겨 쥐고 공백 사이 헛기침을 했다.

손님 왔는데 언제 와요. 어, 필름 카메라 같아요. 아니, 내 친구 아니에요. 그는 대화 도중 나와 눈을 맞추는 듯했지만 이내 창문 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통화를 마친 아이는 카운터 의자에 앉아 날 주시했다. 안방처럼 코코아를 타 마시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음악에 맞춰 발을 흔들대는 내 모습을. 소파에 앉아 보는 아이에게는 뾰족한 눈매와 어울리지 않는 볼살과 여염한 입술이 넘실댔다. 예쁜 건 저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기도 했고.




— 너 찍어도 돼?

— 왜?

— 예쁘니까.

— 내가 예쁘다고?

— ……아님 말고.




남은 필름 롤을 세며 목석으로 변한 아이의 눈을 봤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얼굴로 뒷목을 만지던 아이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그리하여 구닥다리 렌즈에 담은 아이의 뺨은 벌건 홍당무 색. 한 장만 찍겠다는 약속을 미루고 여러 장을 박는 나를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여전히 그 사진은 대화 속에 종종 회자되곤 했다.










— 뭘 그렇게 숨기면서 봐?

— 아니, 아무것도.




지루한 장마는 여름 끝에서 짓궂은 심통을 부렸다. 9월 초 개학 당일, 교실은 꿉꿉한 냄새와 땀이 섞여 고약한 악취를 풍겼다. 짝지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흘기다 자리에 앉아 담요를 둘렀다. 아까 너 화장실 갔을 때 이지훈이 찾던데? 연락 안 받는다고 눈썹 막 올리면서 짜증 내는데 내가 왜 그 짜증을……. 담요를 뒤집어쓴 그녀는 짜증받이로 전락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책상에 엎드렸다.




— 오늘 화장도 안 하고 왔는데…….

— 급하면 내 꺼 빌려.

— 그냥 조퇴했다고 말해주면 안 돼?

— 이미 있다고 말했어.

— 그럼 양호실 갔다고.

— 이미 급식실까지 순찰 돌았대.

— 담임이랑 상담 중이라고 말해.

— 어휴, 쟤 봐. 이지훈도 양반은 못 되네.




복도 창문에 붙어 손을 흔든 그가 뒷문을 열어젖혔다. 양쪽 기장이 반듯한 춘추복에 새로 산 슬리퍼로 개학 멋을 낸 그가 손짓한다. 빨리 안 오면 뭣도 없다.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주머니에서 무언 갈 꺼내 흔들고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것이었다.




— 표 어떻게 구했어? 옛날에 매진돼서 찾기도 힘든 건데.

— 현장 예매. 선착순.

— 거기까지 직접 갔었어?

— 그땐 방학이었으니까.

— 방학 언제?

— 너 쫄딱 젖어서 길에 있었잖아. 비 엄청 맞고 돌아다닌 날.




폭우가 쏟아지고 사진관에서 사진을 핑계로 그를 그리워하던 날. 까만 우산이 평생 보지 못할 은하수로 보이던 그날이었다. 사진관 주인의 말마따나 매일 컴퓨터만 보고 있었던 그는, 사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사진전을 구하기 위함이었고, 새벽 기차까지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대기 줄에서 못다 한 잠을 청했을 것이다.




— 이번 주 토요일 한 시. 늦으면 딱 십 분만 기다려 주기.

— 딱 십 분.

— 얄짤 없어.

— 너도.




일 분 남짓 남은 쉬는 시간에 시계를 확인한 그가 손을 흔든다. 늦지 말고. 도착하면 전화해.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은 필름 카메라가 없으니 아쉬운 대로 핸드폰으로 담는다. 카메라 소리에 뒤를 돌아본 그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 내 사진 그렇게 많이 찍었으면서 한 번을 안 보여주냐.

— 싫어. 보여주고 싶을 때 보여줄 거거든.

— 내가 주인공인데도?

— 내 꺼라고.

— 내가? 아니면 사진?

— ……뭐래, 빨리 가.

— 야, 어렸을 때 사진관에서 우리 처음 만난 날, 진짜 내가 예뻤어?

— 그냥 사진 찍고 싶어서 입에 발린 말인 거 딱 봐도 모르나?

— 눈에서 소리 났었잖아.

— 하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하트라고는 말 안 했는데.

— …….

— 맞네, 하트.




옅어져 가는 실루엣에 동그랗게 손을 말아 프레임을 만든다. 빈틈없이 채워지는 뒷모습을 카메라가 아닌 마음에 담는다. 완전한 틀에 갇힌 완벽한 물체보다 미숙한 틀에 담긴 불완전한 그가 아름다워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핸드폰 진동에 문자를 확인하고 참았던 눈물이 터진다.










— [그땐 네가 더 예뻤어]

……

— [지금도 그렇고]










— 시세포 손상이 심해요. 쉽게 말해서 여주 씨 눈을 필름이라 가정하면 필름 가운데 부분이 타서 없어지는 거죠. 변시증 진행 속도도 빨라서 생활하실 때 어려우셨을 텐데.
변시증: 물체가 비뚤어지거나 변형해서 보이는 상태

— 약물치료는 한계가 있고 여주 씨의 경우 지금은 뇌 신경까지 자극된 상태라 수술도 장담할 수 없어요. 보통 환자분들보다 진행 상황도 빠르고 가족 이력도 있고…… 현재로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는 것밖에…….











소설 속에서 차갑게 식은 노파를 떠올린다. 19세기의 전동차, 시애틀의 밤거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영면에 들기 전 그녀가 프레임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은, 죽기 직전까지 보고 있던 것은, 그날의 욕심도, 시간도, 기억도 아닌 단 하나.















사랑하는 당신의 얼굴.





















[세븐틴/지훈] OFF ON OFF _ 필름 카메라 | 인스티즈

여름과 가을이 섞인 오늘은 서랍장 깊이 넣어둔 일기장 냄새 같았다. 탁하지만 생각날 때마다 계속 꺼내 보고 싶은 추억 같은 것들. 아무도 없는 복도에 창문 밖으로 팔을 내밀어 미지근하고 여전히 눅눅한 바람을 만진다. 나의 마지막 계절이 아니기를 바라며.















*















지훈의 푸석한 얼굴이 유리창에 스민다. 비에 젖어 우그러진 앨범을 품에 안은 그가 분골함 앞에서 여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시월의 단풍이 채 오기도 전이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또다시 중얼거렸다. 사진관 주인은 넋 나간 그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 갸는…… 여주 갸는 다 네 사진뿐이여.

……

— 어떻게 된 게 다 너밖에 없어야…….











[세븐틴/지훈] OFF ON OFF _ 필름 카메라 | 인스티즈

지훈으로 도배된 앨범에 첫 페이지에는 그녀가 직접 쓴 글귀가 있었다. 나의 행복은 당신이에요. 당신을 좋아한 순간부터 행복했어요. 그녀가 좋아하던 영화 대사의 일부였다. 2018년 9월에 멈춰 있는 마지막 사진은 그녀가 응급실로 이송되기 전날 찍은, 사진전을 갔다 온 후 그녀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 팜플렛을 들고 멋쩍게 웃는 지훈의 얼굴이었다.










지훈은 그녀가 남긴 유서를 얼굴에 묻고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날은 처음 만났던 날처럼 비가 내렸고

지훈은 눈을 감고 있었으며

그녀는 유리창 너머 잠든 그를 보고 있었다.






















+

2015년, 여름.










— 야, 비 맞지 말고 다녀.

— 남이사.

— 그러다 머리 다 빠진다.

— 대머리 좋아하는 사람 분명 있을 거니까 걱정 마.

— 너 데려갈 사람 불쌍하게 됐네.

— 그냥 길 가지? 안 그래도 시험 못 봐서 담임한테 몽둥이찜질 당하게 생겼구만.

— 야.

— 뭐.

— 우산 없으면 나한테 와.

— 일기예보도 안 보는 사람한테 내가 뭘 바래.

— 매번 씌워 줄 수는 없어도 같이 맞아줄 수는 있어.

— ……뭐래, 바보 같아.

— …….

— 나 먼저 간다!











[세븐틴/지훈] OFF ON OFF _ 필름 카메라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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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아 진짜 너무 좋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 저 눈물 흘렀어요...
5년 전
비회원12.159
아 진짜 글 왜이렇게 잘 쓰세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슬프고 설레고 으앙 이지후뉴ㅠㅠㅠㅠㅠㅠㅠ
5년 전
독자2
아 짠내 콸콸.. ...수도꼭지 잠궈주세요ㅠㅠ저녁인데ㅜㅜㅠ자야는데ㅜㅜ
5년 전
독자3
ㅠㅜㅜㅜㅠㅜㅜㅜ지훈아
5년 전
독자4
아 정말 너무 ...... . . 너무.. ... . . . . . . . . . . ...............글 많이 올려주세요 작가님 행복하세요.........
5년 전
비회원84.114
글 정말 잘 읽었어요 작가님 브금이랑도 찰떡이고 필름카메라를 소재로 이런 글을 써내신다는게 너무 대단하다고 느껴져요..ㅠㅠ 혹시 실례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하프스윗?이라는 예명 쓰셨었나요 그때 너무 재밌게 읽었었는데 필체가 비슷해서... 맞다면 돌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시면 죄송해요...ㅠㅠㅠ 이제는 정지 먹고 비회원이지만 종종 들러서 읽고 갈게요 정말로 글 너무 잘 쓰세요 비올때마다 이 글이 생각날 것 같아요 작가님 응원해요
5년 전
비회원84.114
하루종일 허덕이다가 또 읽으러 왔어요... 가만히 누워있으면 자꾸 사진관의 지훈이가 떠오르는 것만 같고... 여운 장난 아니네요ㅠㅠㅠㅠㅠㅠ 브금이랑 이렇게 찰떡일 수가 있나 싶어요 혹시 브금 정보도 알 수 있을까요??!!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5년 전
독자5
진짜 보면서 울었어요... 내가 미안해 지훈아 ㅠㅠ 하 너무 감정이입이 돼어서 제가다 미안하고 그냥 좋아해서 미안하고 옆에있어서 미안하고 ㅠㅠㅠ 그냥 작가님 글이 저에게 너무 와닿았나봐요 ㅠㅠ 사랑해요 작가님❤️
5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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