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더 할래?
확인 사살.
밤새 온돌에 지진 허리는 뜨겁다 못해 감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반드시 아랫목에 누워야 고뿔에 걸리지 않는다는 조부 말씀에 목화솜 이불에 묻혀 밤을 보낸 것이 그 이유였다. 잠에 취한 눈을 비비며 이불을 걷어내자 문풍지를 비집고 들어오는 추위가 직격으로 몸을 쑤셨다. 역시 조부의 선견지명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어우야, 절대 안 돼. 마빡 깨도 못 나가. 날이 밝으면 아침 운동이라도 나갈까 했던 마음이 쪽도 못 쓰고 죽어버렸다. 원래 운동은 내일부터 하는 거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홀로 아랫목에 누워 다시 목침을 벤다. 곧 있으면 네이버 시계보다 기막힌 족보 있는 토종닭 삐삐가 정확히 일곱 시를 알릴 테고, 조부는 자연산 알람에 맞춰 마루에 튼실한 밥상과 함께 호통을 칠 것이다. 누가 벌건 대낮까지 자고 있냐는, 거의 새벽을 태양이 뻘하게 떠 있는 낮으로 치부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반찬은 꼭 얹어주는 우리 츤데레 할부지의 첫 번째 일과는 스물 서너 살이나 처먹은 손녀 김여주를 깨우는 일이다.
밥상머리서 졸고 자빠지고 앉았다는 조부의 모닝 설렘에 맘을 감출 길이 없어, 대신 미역국을 원샷으로 조지고 볼록 튀어나온 배를 긁었다. 지금쯤 친구들과 곱게 단장하고 5일 장터에 마실 나간 우리 할머니는 삶은 계란으로 칠십 년의 우정을 나누고 있을까 기분 좋은 상상도 해본다.
— 다 먹었으믄 마늘 좀 까잉?
— 아이 할부지, 밥 먹은 지 진심 오 분도 안 됐다요.
— 오 분이고 오십 분이고 먹었으면 일을 혀야지! 밥이 연료여! 일허기 전에 먹는 연료!
— 할아버지 김종국이야?
— 뭐여?
— 아니야. 많이 깔게. 나 사실 두 공기 먹었어. 연료 두 배.
마루 밑 수북하게 쌓인 마늘 대를 들어 올린다. 하루 양 치고는 상당한 양이었다. 그럼에도 구석에 앉아 마늘 까기를 시작한다. 오르막길 너구리 집 전 씨 할아버지와 큰맘 먹고 합작한 마늘 농사가 쫄딱 망한 덕분에 집안 곳곳은 어디 팔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한 마늘 풍년이었다. 전 씨만 아니었으면 대파를 심어 적어도 여섯 짝은 팔 수 있었다는 조부의 후회를 타령 삼아 옹기종기 붙어먹은 마늘을 분해했다.
너희들도 각자 살아. 붙어있지 마. 겨울은 혼자 견뎌야 더욱더 빛나는 법이야. 알맹이가 된 마늘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희열감을 느낀다. 아아, 내가 솔로라서 떼어 놓기를 좋아하거나 이로써 대리 만족을 한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마늘의 삶을 존중해 주는 것이다. '만물인생설'에 의거하여.
오늘따라 알이 굵네. 할부지 종아리 같어. 겨울 방학 직후 엄마 등쌀에 깊은 시골 어디께로 유배당한 나는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누리끼리한 처마에 뿌링클을 그려 야무지게 채색하는 중이었다. 겁나 맛있겠다. 결 따라 흩어지는 저 가루 좀 봐. 마약보다 더 마약 같은 저것들을 보라고! BHC 중동점 알바생이 주소를 기억할 정도로 시켜 먹던 치킨과 생이별을 당한 지 정확히 이 주 하고도 삼 일이 지났으니, 이젠 ‘치킨 왔습니다’ 환청이 아닌, 치킨을 그릴 수 있는 환시에 도달한 셈이었다. 할 짓 없으면 시골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겨울 농사 좀 도우라는 엄마는 백 년도 더 된 기와집에 앉아 치킨의 혁명 뿌링클을 그리워하며 마당에서 활개 치는 삐삐를 보고 있는 나를 알까. 삐삐 미안.
— 야야, 마늘은 됐고 쩌어기 너구리 집 가서 삽 좀 가져와라잉!
— 전 씨 할아버지네? 나 거기 어딘지 모르는데?
— 손잡이가 뻘건 건 내 것인디 아직도 지 것처럼 쓴당게! 모르면 붙잡고 물어야지! 큰집 까만 대문이여!
— 친구인데 좀 나눠 쓸 수도 있는 거지 뭘.
— 꼴도 보기 싫응게 그려 내가!
— 마늘 농사 망했다고 막 그러는 거 아녀.
— 바빠야! 잠깐 내려갔다 올 텐게 갖고서 얼렁 와야 혀! 잉?
굽은 허리에 단단한 뒷짐을 쥐고 아랫마을로 향하는 김두복 씨의 허리가 두툼하다. 먹다 남은 막걸리를 손녀 몰래 집어넣었으니 한쪽 배가 유난히 튀어나와 있는 거다. 박 씨네 양파 농사에 조언하러 간다더니, 아무래도 마을 회관에서 박 씨 아저씨와 진탕 취할 것 같았다. 직감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데이터 베이스다. 지난주 수요일에도 그랬고, 유배 온 첫날에도 박 씨 아저씨와 어깨동무하고 이 집을 넘었으니 말 다했지 뭐.
무른 마늘을 털어내도 가시지 않는 냄새를 핸드크림으로 벅벅 덮는다. 하지만 인공 향과 오묘하게 섞인 그것은 두각을 나타내며 존재를 뽐냈다. 도둑 만나면 손부터 뻗어야겠다. 롱패딩 주머니에 폭탄 같은 손을 숨기고 언덕을 넘는다. 좁은 동네는 가는 길목마다 안면 있는 뭇 어른들이 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부도 묻는다. 방법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 워매, 그게 옷이여? 까며서 밤에는 넌 줄도 모르겄다야.
— 위장용이잖아요. 군대에서만 쓰는.
— 뭐여, 그 흙 지렁이 비슷한 거고마? 생긴 것이?
— 맞아요, 그걸 본떠서 만들었대요.
— 그려어? 내가 또 눈썰미는 좋다고들 허더마.
— 혹시 전 씨 할아버지 댁 어딘지 아세요?
시골에서 인사라는 건 이런 것이다. 어른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 기브앤테이크로 방한용이 아닌 군대 위장용으로 탈바꿈한 롱패딩과 전 씨 할아버지 댁을 바꿨다. 이곳을 떠날 때까지 앞으로도 인사는 이럴 것 같으니 굳이 아니라고 성을 내거나 하진 않을 거다.
핑크색 필라 슬리퍼가 마을을 떠돈다. 패딩 주머니에 마늘 냄새가 베일 때쯤 두 마디 건너 큰집 대문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말한 까만 대문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KBS1 ‘고국 속으로’에 자주 등장하는 관아 같기도 했다. 압도하는 문 앞에 서자 왠지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손목이 시린 것 같기도 했고 죄를 지은 것 같기도……. 벽에 설치된 언밸런스한 초인종을 꾹 누르며 코를 훔친다. 호기심 많은 눈은 문틈 사이를 기웃거렸다.
그러나 다가오는 그림자도 없고 흔한 인기척도 없다. 누군가 문 앞을 쓸다가 버린 빗자루만 놓여 있을 뿐, 기어 다니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민망하리만치 조용했다. 삽을 포기하고 가느냐, 존버는 승리하느냐. 두 개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눈썹이 휘어진다. 한파에 날아다니는 까마귀가 덩굴이 우거진 담에 살포시 앉아 노려보는 것이 못마땅해 같이 쏘아보면서도 고민은 계속됐다. 당장 할아버지의 자존심이 걸린 ‘삽 리턴 프로젝트’를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을…….
— 안 사요.
처음 본 사내가 열린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다짜고짜 사지 않겠다는 다짐과 막대 사탕을 굴리는 입술과 까칠한 눈빛이 독보적이었다. 잠이 덜 깬 건지 원래부터 죽 찢어져 있는 건지 모를 눈이 위아래를 훑으며 외판원이 된 나를 경계한다. 저기요, 네가 뭔데 날 그렇게 봐요? 온통 할아버지 삽으로 가득했던 신경이 꿈틀거린다.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막대 돌림 질에 슬슬 분통이 나고 있었다. 제멋대로 내 직업을 추측한 건 또 어떻고? 갑분외판원으로 경계 당하고 있는 나는 무슨 죄?
긴 호흡 끝에 상황을 정리하려 문을 잡자, 사내는 내 손을 밀어버리고 다시금 사탕을 굴렸다. 아, 남은 문도 잡지 말아라? 사내의 행동에 순간 이성을 잃은 손이 문고리를 잡고 힘을 준다. 그리고 까마귀를 노려본 것처럼 사내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뭘 봐. 뭘 그렇게 맛있게 먹냐고. 진작 구매 거부 의사를 보인 사내는 눈빛으로 어깃장을 놓는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문을 밀어 댔다. 좀 꺼지라는 뜻이었겠지.
— 삽 주세요.
— 안 팔아요. 안 사요.
— 여기 전 씨 할아버지 댁 맞죠?
— 어느 판매사에서 오셨는데요?
끝까지 판매란다. 문틈에 슬리퍼를 구겨 넣고 삽을 되찾겠다는 각오 하나로 눈을 부라렸다. 사내는 뻗친 머리를 뒤로 움켜잡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들어 올린 턱까지 합하면 이 동네에서 본 사람 중 최장신임이 분명했다. 안쓰럽게 껴 있는 필라 슬리퍼를 힐끗 대던 사내가 픽 입꼬리를 올렸다. 화를 내는 것도, 그렇다고 웃는 얼굴도 아닌.
— 저도 필라 있어요. 저번에 세일 해가지구.
— 뭐래 진짜! 삽 가지러 왔다고!
— 분홍색은 취향 타서 안 샀어. 별로야.
반모에는 반모라고 했던가. 이런 미친놈이 다 있구나 싶었다. 내가 고작 슬리퍼 팔고 싶어서 꼭대기까지 오겠냐고! 문을 닫는 자와 필사적으로 막는 자가 대치하는 이곳에서 아까 노려본 까마귀가 집 안으로 날아들었다. 고성방가 급 울음에 사내가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돈다. 방심한 탓에 좀 더 벌어진 문틈으로 할아버지가 말하던 손잡이가 빨간 삽이 눈을 사로 잡았다. 그려! 저 삽! 저 삽이! 저것이 우리 할아버지……!
— 아아아아악! 미친놈아!
까마귀 때문에 정신없던 사내가 막무가내로 미는 힘 때문에 균형을 잃고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마당에서 낯선 사내를 올라타 입을 부비고 있는 나는 뭘까. 할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오르막길 너구리 집 전 씨 할아버지의 아들인지 손자인지 모를 사람과 껴안고 입을 맞춰버린 나는 도대체 뭘까. 넋 나간 얼굴로 입술을 벅벅 문지르며 사내의 어깨에 주먹을 꽂는다. 이 새끼가 돌았나! 미친 새끼야! 막말을 뱉어내는 내게, 사내는 되려 상처 입은 눈빛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어쩐 일인지 왼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사내가 손목을 끌어 당긴다. 이건 또 무슨 헛짓거리냐? 죽고 싶냐? 으름장을 놓으며 순간 발차기라도 할 심산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 야! 안 놔?
— 쫌 뿔어 달라고!
— 뭘 뿔어!
— 눈! 눈 아프다고!
낯선 자의 볼을 부여잡고 입을 동그랗게 말아 호흡기 자랑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눈물을 찔끔 쏟아내며 잠잠해진 걸로 보면 어쨌든 효과는 있었던 것 같다. 회오리 같은 순간이 지나가고 까마귀의 울음도 멈췄을 때, 황량한 마당에 앉아 있는 그가 아까부터 날 노려보고 있었다. 뭔데? 뭘 노려 봐? 구해줬잖아! 사내는 여태 볼을 잡고 있던 내 손에 코를 킁킁거리더니 다급히 후각을 막았다. 원인은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마늘과 핸드크림의 환상적인 조합인 손가락 열 개. 애써 뒤로 숨겨보지만 안타깝게도 먼저 봐 버렸다. 사내의 진중한 눈빛을.
— 마늘을 손으로 먹었어요?
— …….
— 이상한 소스랑. 맞죠.
사내의 이름은 전원우.
울 할아버지가 졸라게 싫어하는 오르막길 너구리 집 전 씨 할아버지네 손자.
— 솔직하게 말해요. 원래 슬리퍼 말고 마늘 팔러 온 거죠? 마늘 농사 망한 거 어떻게 알아가지구.
— …….
— 근데 소스는 진짜 안 사요. 퐁퐁 같아 냄새가.
— 설마 소스가 퐁퐁은 아니죠?
— …….
— 아니, 의심하는 건 아니구.
— …….
— HACCP 인증 받은 거예요?
aka. 말로 사람 여럿 조지는 말장난의 도제.
OFF ON OFF
; 전원우리전원우 (Feat. 말장난의 도제)
* 도제 = 제자(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
빼앗긴 삽을 되찾은 할아버지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그걸로 땅도 파고 모종 심을 구간도 나누고 새벽에 간혹 삐삐를 탐하는 멧돼지나 하이에나를 내쫓기도 했다. 삽의 기능은 생각 외로 다양했다. 뒤지게 늦잠을 자는 손녀 방의 문을 퍽퍽 두드리는 역할도 했고 일의 연료인 밥을 먹고 게으름을 피우면 확 너구리 집 전 씨네로 보내버린다는 위협적인 모션을 취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전 씨네 할아버지라. 순간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당장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날 할아버지가 취한 채로 돌아와서 망정이지, 까만 대문 밖으로 도망치듯 나온 내가 삽 손잡이처럼 빨개져서는 장작은 개똥처럼 패고, 이미 깐 마늘을 조져 놓고, 끓는 가마솥에 온도를 확인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집어넣은 일을 안다면, 이게 다 전 씨네 할아버지 손자 전원우와 입을 부벼댔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다면, 막 빗자루 뒷부분으로 엉덩이 줘 패고 그걸로 막…….
— 안녕하세요.
처량하게 마늘을 까고 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오소소 몸을 떨었다. 모종 삽을 들고 꽃을 심던 할아버지가 퉁명스럽게 인사를 받고 삽 어쩌고 말하는 걸로 봐선 너구리 집 손자 전원우가 맞았다. 문득 지금 내가 산발이라는 것과 사건 일주일 전과 같은 수면 바지를 입고 있다는 것과 허벅지 부분에 보란 듯이 김칫국을 쏟아 마치 중상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 시속 25km로 이 집을 뛰쳐나간다면 보진 못하겠지. 어느 미친년이라 생각하고 말 테지. 그럼. 그렇고말고. 마늘 섬에 묻힌 몸을 일으켜 조심히 슬리퍼를 신었다. 할아버지와 얘기 중인 전원우는 아직 날 보지 못했다. 문 앞까지 대략 열다섯 보 예상한다. 존나 빨리 가는 거야. 난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어!
— 여주야! 뭐더냐!
— …….
— 전에 삽 찾느라 손자랑 고생했담서?
— …….
— 인사혀라. 너 보러 왔다고 하드만.
모종 삽을 들고 바깥으로 뽈뽈 사라지는 할아버지의 뒤태를 감상하며 다소곳 손을 모았다. 정확히 허벅지에. 김칫국물은 차마 보여줄 없어. 차라리 산발한 머리가 나아. 문 앞까지 가는 이 길이 끝나지 않길 바라는 건, 아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쳐다보는 전원우가 있기 때문일 거야. 정신 못 차리고 와중에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븅신 같은 내가 얼마나 개븅신같을까. 그냥 갔으면 좋겠어. 너는 왜 손을 내미는 건데. 제발 일으켜 세우지 마! 손 내밀지 말라고!
— 허벅지에서 피난다.
— 아니야 그런 거.
— 어제 김치 먹었어?
— 아니.
— 언제 먹었어?
— 그냥, 이틀 전에?
— 근데 계속 입고 있었어?
— 세탁기가 오래돼서 고장 나서 그래.
— 너희 할아버지가 하우젠 드럼 세탁기 잘 된다고 어제 자랑하러 오셨는데.
— ……요지가 뭐야?
— 더러움을 감출 필요는 없어. 생활 방식에 따라 차이가 나는 거고 개인은 각자의 성향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지.
— 그니까 존중을 해준다는 거야, 내가 더럽다는 거야?
— 이것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전원우의 입을 막고 헤드락을 걸었다. 그러면 전원우는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일부러 목을 내주었다. 실은 사건 이후에도 길을 지나가다 종종 본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일부러 시선을 돌린 채 외면했다. 이상하게도 하루에 몇 번은 자꾸 마주쳤고, 그때마다 전원우는 손을 들어 크게 인사했다.
처음엔 관종인 줄 알았다. 무려 입술을 부볐는데 아무렇지 않게 인사라니. 하지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네 다섯 번이 되던 날, 그날은 나도 손을 들어 답했다. 인사했으니까 꺼져. 웃으면서 하는 욕에도 전원우는 알겠다고 헤픈 웃음을 지었다. 사탕 굴리며 차갑게 쳐다보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나만 보면 말장난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일곱 살 남자애만 남았다. 짧은 만남에 느낀 것은, 전원우는 쓸데없는 말장난 습관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 자아 만족을 한다는 것이다. 저것은 필히 고쳐주고 싶었다. 남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자아 만족감에 빠져 들다니. 하지만 이런 나를 파악한 전원우는 말장난을 위해 24시간 대뇌가 핑핑 돈다는 것이었다.
— 손으로 마늘 먹고 싶지 않으면 얼른 꺼져.
— 촛불이냐. 꺼지게. 요즘은 전자 촛불이 많아서 꺼지지도 않아.
— ……닥쳐 제발.
— 나도 마늘 좀 까는데 도와줄까.
— 너희 집도 만만치 않을 걸?
— 나는 여기 온 지 좀 돼서 거의 다 깠어.
— 근데 왜 손에서 냄새가 안 나?
— 고무장갑 끼고 했어.
— 마늘이 잘 까지디?
— 주먹으로 막 쳐서.
— 힘으로 승부 보는 구나.
— 너는 한방에 깔 걸? 저번에 주먹빵 맞고 와…… 잠깐 천국 봤잖아.
부모의 강요에 이기지 못해 할아버지 댁으로 유배당한 자가 나 말고 또 있었으니, 그 이름 하야 전 씨네 장남 증손자 전원우였다. 전 씨 할아버지는 마늘 흉작으로 아들 내외가 걱정할까 올해 풍년이니 걱정하지 말라, 마늘 수확은 잘 됐고 그저 일손이 부족할 뿐이니 괜찮다 거짓말을 했는데 바로 그것이 원인이었다. 아들 내외는 군대 전역 후 복학을 기다리고 있는 제 아들을 할아버지 손에 보냈더랬다. 실상은 흉작 된 무른 마늘을 다 까서 억지로 먹어야 하는 것. 전원우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한쪽 구석에 앉아 도란도란 마늘을 까는 척 서로를 경계했다. 굳이 말하면 전원우는 경계한다기 보다 내 눈치를 보며 한 눈에 봐도 우람한 마늘을 내쪽으로 민다던가, 우이씨 욕을 뱉으면 사람은 하루에 이천 자 이상 말해야 우울증에 걸리지 않지만 욕도 그 숫자에 포함되는지 모르겠다는 헛소리를 한다던가, 울타리에 올라 일광욕을 하는 삐삐를 보며 지난달에 봤던 마을 회관 닭 모임을 회상했다.
— 이 동네 닭들 되게 크고 잘 생겼더라.
— 그런 걸 볼 만큼 한가하지 않아. 마늘 까야 하거든.
— 너 오기 전에 마을 회관에서 닭 모임 했는데 진짜 신기하더라니까. 다들 친구처럼 보여서 좀 부러웠기도…….
— 부러우면 너도 참석하지 그랬어.
— 나는 닭이 없잖아.
— 네가 닭이야.
— 아아, 내가 닭을 하라고? 잘생긴 닭?
— 저번에 넘어질 때 머리 다쳤어?
— 언제?
— 그때.
— 언제를 말하는 거야?
— 아니! 그때!
— 너랑 키스했을 때?
— 미친놈아아악 지랄하지 마!
마늘 숲이 요동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늘 껍질을 둘러쓴 전원우는 실실 웃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 또 입술 뺏기지 말아야지. 뒤로 엉덩이를 빼고 마루 밑에 벗어 둔 신발을 구겨 신는다. 얌마, 나 아직 장미 칼 들고 있다. 이게 정말 마늘만 까는 용도일까? 엉? 아무렇게 던져 놓은 슬리퍼를 찾는 나를 보며 아연실색한 놈이 달아난다. 멀쩡한 허우대로 마늘 껍질을 뒤집어쓴 채 윗마을로 향했다. 때마침 돌아온 할아버지는 누군가를 향해 호통을 치며 손짓했다. 다름 아닌 그렇게 싫어하는 너구리 집 전 씨 할아버지, 흉작의 동반자이자 전원우의 조부였다. 그동안 있었던 회포를 푼 것인지 집으로 들어올 땐 서로의 어깨를 맞잡으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조부는, 전 씨 할아버지 손을 맞잡으며 약속했다. 오늘 꼭 저녁 먹으러 오라고. 무른 마늘이 많아서 그렇지, 아직 쓸 건 많다고.
— 그 손자도 데리고 와, 잉?
— 우리 손자? 원우?
— 그려! 여우같이 잘생긴 놈 말여!
여우 같은데 잘생긴 건 도대체 뭘까. 전 씨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윗마을로 발을 옮겼다. 당장 오늘 저녁에 호랑말코 같은 놈을 또 봐야 한다. 한 번만 더 키스 얘기를 한다면 이번엔 마늘 껍질 세례가 아니라 진짜 마늘을 먹여 사람을 만들어 주마. 마당 수돗가에서 장미 칼을 갈고 있는 희번득한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뒷짐을 졌다. 밭일 간 할머니가 곧 올참이니 전 씨네랑 저녁 한 끼 같이 하자는 말에 엄지를 치켜들었다.
키스 얘기는 왜 자꾸 생각 나는지 모르겠어.
*
별안간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마당에서 검은 연기를 마시며 고기를 굽고 있는 나와 전원우는 같은 대학 다른 학과 일 년 차이 동문 선 후배였다. 내가 한 살 더 많으니 이제부턴 누나라 부르라 말해도, 전원우는 고기만 뒤집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난리가 난 건 집안 어른들이었다. 같은 대학이네, 나이도 딱 좋은 한 살 차이, 사는 곳도 가까워서 왕래하기 좋겠다는 우리 할아버지는 거하게 취해 할머니의 부축을 받았다. 전 씨 할아버지도 이하 동문이었다. 상견례 비슷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가는 이상한 분위기, 이곳 마을은 좁디좁았고 고기 냄새에 모여드는 주민 어른들로 인해 잔칫날인냥 사람이 끓었다.
대학 합격 축하 자리를 여기서 할 걸 그랬어. 전원우는 집게로 타다 만 고기를 집어 먹으며 춤바람난 어른들과 슬쩍 춤을 춰댔다. 덩실덩실은 기본 관광버스 춤까지 마스터한 놈은 옥타곤의 황제일지도 모른다. 자꾸 이런 생각이 드니 웃겨 죽을 것 같았다. 어른들과 리듬을 타다 내 쪽으로 다가온 놈이 손을 내민다. 내 또래인 박 씨네 아들이 중세 시대에 나올 법한 왈츠 음악으로 턴 아웃을 해버렸으니. 어른들은 제 짝을 찾아 분위기를 즐겼고, 왜인지도 모른 채 덩달아 전원우의 손을 잡고 마당을 누비는 몸뚱아리 주인은 바로 나.
— 이런 걸 꼭 해야 해?
— 가만히 있으면 재미없잖아.
— 옥타곤 자주 다녀? 왈츠가 메인 스테이지인가?
— 옥타곤? 8도 올라간 음을 가리키는 옥타브는 안다. 베토벤 소나타에는 옥타브로만 구성된 악보가 있을 정도로…….
— 말장난 학원 다니지?
— 어떻게 알았어? 나 거기서 완전 잘나가는 도제였는데.
— 도제가 뭐야.
— 몰라?
— 뭔데?
— 도둑입니다. 제가 김여주를 훔쳤습니다.
— 욕이 이천 자에 포함돼, 안 돼?
— 야, 여기 뭐 묻었다.
허리를 감고 있던 손으로 입가를 닦아낸 전원우는 그것을 그대로 입술에 넣었다. 새벽에 몰래 고기 먹을 때 쌈장 없으면 먹으려고 아껴 둔 건가. 얼굴 바로 앞으로 다가와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까 할아버지 복분자를 뺏어 먹는 게 아니었다. 조금만 터치가 있어도 이렇게 달아오르니 이것은 반드시 피하라는 계시다.
— 나 좀 봐 봐.
— ……왜.
— 나중에 여름 방학하면 여기 또 올래?
— …….
— 닭 모임 하면 같이 나가자. 나는 잘생긴 닭.
— …….
— 너도 잘생기고 예쁜 닭.
— …….
— 솔직히 끌리지? 우리 또 볼 수 있으니…….
순간 가슴팍을 밀어낸 손이 방황했다. 전원우는 토끼 눈을 하고서 갈 곳 잃은 손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모두가 흥에 겨운 밤, 오직 어렴풋한 달빛을 받는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도 나를 알 수가 없다. 하물며 놈의 손을 차갑기 그지없게 내쳤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뜨겁다는 이 느낌, 아랫목에 허리를 지지는 것보다 더 뜨거운 어떠한 것에 사로잡힌 나는 그대로 아랫길로 달렸다.
— 야!
— …….
— 잠깐만!
큰 보폭으로 따라온 놈이 손을 잡는다. 덩굴로 엮어진 벽 앞에서 서로의 눈을 보고 있으니 굉장히 오묘했고, 나를 외판원쯤으로 여기던 놈의 눈빛도 상기됐다. 신밧드의 모험 만 번 탄 것 같아. 다짜고짜 저딴 말을 뱉는 전원우에게 느끼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입술은 말라가고 목이 타는 이것! 바로 이것!
— 손 떼봐.
— 왜 그러는데.
— 손 떼보라고.
— 말을 해줘야 알…….
양 볼을 잡고 호흡기 마냥 눈을 불어 대던 입술이 그대로 그의 것을 감쳐 물었다. 실수도 아니고 복수는 더더군다나 아니다. 이 감정이 어딘가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직감과 적중한다면, 첫 만남에 입술을 비빈 그때와 사뭇 다른 생각과 느낌이라면, 말장난으로 사람 열 받게 만드는 이놈을 정말, 정말이라도…….
— 떨려?
— 어?
— 떨리냐고.
— ……엉.
질척한 입술로 대답하던 그가 자신의 얼굴을 맞잡은 손을 목 뒤로 감았다. 순식간에 목을 감고 안긴 꼴이 된 나를 두 팔로 감아 단단히 옭아맸다. 지그시 내리다 보는 눈. 단 몇 초 만에 주객전도가 된 입장은 뭐랄까, 굉장히 창피하고 떨리냐고 물어본 내가 너무 망측하고, 그걸 또 대답한 이놈은 도대체 뭐 하는 놈…….
— 한 번 더 할래?
— …….
— 확인 사살.
+
— 아, 드디어 집 간다.
— 우등 좌석으로 끊었는데 왜 이렇게 불편해?
— 거의 한 달 동안 마늘만 까댔으니까 허리가 아프지.
— 어쩌라고. 할아버지가 계란 싸줬는데 먹을 거야 말 거야?
— 난 됐어. 도착하면 찜질 팩 사준다 콜?
— 저기 길 막히는 것 봐. 저녁에서나 도착하겠네.
— 집으로 바로 갈 거야?
— 당연하지. 바로 쓰러져서 잘 거.
— 뭐 잊은 거 없어?
— 잊은 거? 없는데?
— 대답해 준다고 했잖아 일주일 전에.
— 뭘?
— 그거…….
— 그거 뭐?
— 아니…… 그거…… 너랑 나랑…… 사귀…….
— 야, 근데 너 왜 자꾸 반말하니?
— 갑자기 너한테 누나 하면서 존댓말 하는 건…….
— 너. 한. 테?
— 누나 귀 괜찮아요? 삐삐 때문에 이상해진 거 아니에요?
— 한번 봐 준다.
— 두 번 봐줘.
— 입.
— 알겠어.
— 머리 기대지 마.
— 이건 내 영혼이야.
— 무거워.
— 앞으로 적응하도록 해주지.
— 너랑 같이 버스 탈 일은 없을 거야.
— 그럼 누나 차 타고 등교해야지.
— 나 뚜벅이야.
— 알고 있었어.
— 네 차 타고 등교할 거야.
— 차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 진짜 있어? 장난한 건데?
— 면허 이번에 갱신 했잖아. 그것도 고급으로.
— 고급은 뭔데?
— 아무나 딸 수 없는 무지개색 장갑.
— …….
— 카트라이더 설날 기념으로 경험치 두 배 주길래 완전 고급으로 땄어 이번에. 승차감 장난 아니야. 야, 누나도 일단 타봐.
— …….
— 야, 누나 팔 완전 포근해.
— 기사님, 차 좀 세워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