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음악 중 제일 싫어하는 노래가 있다면 그건 ‘알’로시작해서 ‘람’으로 끝나는 모든 장르다. 지금까지 이런 알람은 없었다. 이것은 모닝콜인가 악마의 저주인가! 멀찍이 떨어진 핸드폰을 피해 베개로 두 귀를 막는다. 아아아아아악! 새벽 감성에 젖어 설정한 멜로디는 앞으로 평생 듣지 않기로 다짐하는데, 부리나케 달려온 누군가는 방문을 벌컥 열고 냅다 고함을 질렀다.
— 누구여! 도둑이여?!
— 꺼져. 도둑이 널 보고 도망간다 새끼야.
— 워매, 방 좀보라지. 이것은 헛간인가 우리인가?
— 학원이나 가 고딩아!
샴푸질하다 달려온 동생 놈은 바닥에 거품을 흩뿌리며 거칠게 반항했다. 야 씨, 네가 청소 하냐? 빨리 안 꺼져? 다정한 누이 인사에 살포시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며 벽을 더듬던 놈은 기어코 머리를 부딪쳐 아픔을 호소했다. 찬아, 넌 엄마 알면 뒤졌다. 벽에 잔뜩 스민 자국을 가리키며 유유히 지나치자, 놈은 내 파자마가 밑으로 당겨 혈전의 종을 울렸다. 필사적으로 떼어내려 해도 놔주지 않는 건 질풍노도 십 대의 마지막 자존심이 아니던가.
이건 꼭 이기고 싶다. 나이고 뭐고 무조건 내가 이기고 싶어. 오후부터 거실에서 개싸움을 일삼는 남매를 보며 우리 여사님은 조용히 물었다. 달걀 후라이를 반숙으로 먹을 건지 완숙으로 먹을 건지. 손바닥에는 샴푸가 한가득, 안 그래도 미끈거려 찝찝한데 이찬 이놈은 내 머리 기름때 좀 보라며 구역질을 했다.
— 엄마, 누나 진짜 미쳤나 봐. 휴학 괜히 시킨 거 아니야? 나는 반숙.
— 네가 휴학하는데 보태 준거라도 있어? 난 완숙.
— 혈육한테도 개차반인데 남한테는 어떻게 할지 눈에 보인다 보여.
— 무당이냐? 주머니에 쌀 가지고 다니는 거 아냐? 점 볼라고?
— 쌀 점이 훨배 낫지. 누구처럼 풀 때기 점은 안 보거든?
— 거기까지 해라.
— 그 사람이 날 좋아할까? 좋아하지 않을까? 후훗, 역시 좋아…….
— 뒤질래 진짜!
글러브 없이 휘두른 주먹에 배를 잡고 나뒹군 놈이 숨을 헐떡거린다. 얼굴을 부여잡고 생존을 확인하자, 연기 천재는 뷰웅신 또 속냐, 저 말을 지껄이고 화장실 문을 잠갔다. 잠시 후 볼때기에 붉은 멍을 달고 온 놈은 식탁에 앉아 후라이를 홀라당 입에 넣고 엄마 몰래 혀를 놀렸다. 핸드폰이 울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모든 반찬이 제 것이라 끌어모으는 팔뚝에 잇자국을 박았을 거다.
— 네? 스케줄 바꼈어요?
— 네에? 스께쥴 바껴떠여?
— 닥쳐라 너는.
— 닥쵸라 너느은.
약 올리는 놈은 콩알 딱밤이 최고다. 머리를 부여잡고 욕 한 사발 거하게 뿌리는 놈을 외면한 채 화장실로 뛰어가 양치와 고양이 세수를, 방에 들어가 늘 입던 옷에 몸을 구겨 넣었다. 완벽해. 일하기 최적의 조건이야. 현관에서 어제 감은 머리 상태를 확인하는 날 보며 고딩 새끼는 자주 감는데도 항상 더러운 것이 의문이라 추궁했다.
— 설마 그러고 출근하세요? 양심이 없어?
— 누가 보면 넌 있는 줄 알겠어.
— 세수를 했는데도 눈꼽 뭐야?
— 어디? 안 보이는데?
— 좀 있으면 발렌타인데이잖아.
— 어쩌라고.
— 이번에는 좀 받아 보자, 엉?
— 네가 뭔데 날 응원해.
— 줄 사람은 있냐? 받을 사람은 있어?
— 그거 다 상술이야. 애기가 뭘 알겠니.
— 너만 정말 모르는 거 아닐까.
— 학교 결석하고 싶어서 개기는 거지?
— 이번에도 글렀네에에에베베베베.
순식간에 가방과 튀어 나간 몸뚱이가 오후 댓바람부터 춤을 췄다. 나는 너무 받아서 큰일인데 이번에도 좀 줄까? 아파트 복도에 메아리가 울린다.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패딩 모자에 감추고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여기서 잠깐. 다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 건데, 나는 엄연한 선택적 솔로거든? 화려한 솔로 알지? 이상한 둘보다 나은거 있잖아. 그래, 그거.
아무튼 날씨 좋고 바람 좋고 지나가는 건물마다 초콜릿 천지…… 에라이, 옘뱅. 길게 찢은 눈으로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들을 면밀히 관찰하며 쯧쯧 혀를 찼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초콜릿으로 장사하나. 생존은 무조건 시장 분석인데. 스왓, 그거 있잖아. SW 어쩌구 그걸로 다들 어?
— 자기야아. 나 이고. 페라리.
— 바보야, 페레로로쉐잖아.
모퉁이 가게를 서성이는 이상한 생물체를 포착했다. 이상한 둘이 갑자기 껴안더니 머리를 맞댄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어어, 동작 그만. 공공장소에서 음흉한 허리 잡기 있습니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행패는 납득이 안 가는데요?
— 페레로라구? 딘땨? 우움, 나눈 정말 바본가바. 에쿠 에쿠.
— 사실 자기를 위해서 이미 샀지롱.
— 모야아아아, 완죤감동!
— 아구구 귀여워. 사랑해.
아, 존나 스트레스 받아.
OFF ON OFF
; 발렌타인데이
Feat. 드러머 이지훈
어엿한 스물셋의 나이로 잘만 다니던 대학을 휴학했다. 이유는 많았으나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졸업 후 스펙 없이 경제 시장에 내던져질 망아지가 되기 싫어서’.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다. 도피 휴학이라 욕해도 할 말 없다. 사실이니까. 아니, 다들 그렇지 않나. 졸업 후 소속감 없는 자신이 얼마나 두려운지. 그래서 나도 학교에 발이나 담가 놓고 생각이란 걸 해보기로 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 매니저님, 버스 놓쳤는데 십 분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은 사거리 방향으로 나가면 된다. 버스 정류장에서 동동거리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것이 현재 내 좌표였다. 중요한 시기에도 열심히 알바를 간다. 학기 중에도 해온 카페 일이니 부담은 없었으나 어이없게도 스트레스는 같았다. 학교를 안 가도 머리 아파. 차라리 없애는 게 낫겠어. 본관 폭파 지점을 계산하며 버스에 몸을 싣고 이어폰을 꽂는다. 다음에는 건물주 4세로 태어나 요플레 뚜껑만 핥고 버리는 삶을 살자. 복숭아 맛. 얼려 먹으면 개맛있는데.
— 순서대로 갈게요!
— 밀지 마세요! 다쳐요!
목적지 사거리에 일대 마비가 왔다. 버스는 정류장까지 가지 못하고 근처에서 문을 열었다. 선량한 시민입니다. 지나갈게요. 지나가게 해주세요. 사람들과 한데 엉켜 길을 뚫는 어깨가 뒤로 밀려 속도를 내지 못했다. 두 다리는 앞으로 가는데 왜 풍경은 그대로죠. 전 누구이며 여긴 어디일까요. 마이크 굉음에 얼얼한 귀를 막고 눈을 찌푸린다. 곧 악기 소리가 소음과 섞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것에 환호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군중의 힘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촘촘한 인간 성곽, 그 중심에서 멘탈 터진 망아지는 멀리 파스꾸찌 간판을 보며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 의식에 없던 핸드폰이 ‘느긋한 매니저님’으로 딸랑딸랑 신호를 보낸다. 아무래도 천천히 오라는 전화겠지. 내가 이래서 카페를 못 그만두지. 정도 많고 배려심도 깊은 매니저님이 있잖아.
— 어디니? 제발 다 왔다고 말해.
— 성에 갇혔어요. 출구가 없고 멋져요.
— 아이스 초코 나왔습니다. 아뇨! 그건 다른 손님이이익! 안 돼!
누군가의 아찔한 비명. 으음, 바닥에 엎질렀구나. 매니저님은 울고 계실까. 그러네, 흐득흐득 울고 계시네. 스팀기 두 개 동시에 돌아가는 거 보니까 날다람쥐 민규구나. 음료 만드는데 주문을 같이 받네. 바쁜가 보다. 오늘 그만둘까.
전쟁통과 같은 그곳에서 제발 도와 달라는 김민규의 애처로움이 들린다. 멘탈 나갔을 때만 나오는 히죽거림을 듣지 못한 척 태연히 전화를 끊었다. 일단 친구를 살려야 하니 여길 벗어나야 해. 공간을 찾자. 틈을 찾자.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새치기 안 해요. 커피 만들러 가야 해서. 좁은 공간 사이사이 억지로 몸을 밀어 넣어 출구를 찾는다. 교복 입은 소녀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가는 길을 배웅했다. 결국 백팩 자크에 머리카락이 걸리자, 소녀들은 눈초리 대신 육두문자를 뿜었다. 21세기 미래들은 아직 살아있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내 고통 또한. 존나 아파 미친.
— 소낙밴드! 큰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쿵 내려치는 드럼에 심장은 활어처럼 펄떡댔다. 머리카락을 빼내는 소녀와 떨어진 휴대폰을 찾아 바닥을 더듬는 내가 완벽한 조합을 이루고 있을 때, 도입부를 알리는 경쾌한 드럼 소리가 일순간 공간을 헤집었다. 큰 환호성과 천천히 올려다보는 두 눈에 빛이 서린다. 오직 한 사람의 실루엣이 흔들렸다. 어느 영화에서 연출한 장면처럼 서서히 밝아진 무대가 이윽고 주인공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쏟는다. 보컬도 기타도 아닌, 드럼을 치는 남자에게.
가볍게 스틱을 움켜쥐고 리듬을 타는 남자에게 함부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컬이 주목 받는 후렴에서조차 마음을 사로 잡는 저 남자는 대체. 습관처럼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최선을 다하는 저 남자는 뭘까. 죽어있던 세포를 후려치는 외모와 실력에 묘 자리를 짓고 싶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온 건 알겠다. 가방에 걸린 머리카락은 잘라내면 된다. 다시 기르면 되니까. 하지만 이 연주는 지금 아니면 안 돼. 와 세상에, 방금 날 쳐다본 것 같은데? 눈 마주쳤어! 진짜로!
— 오빠아아아아! 지훈아아아! 날 봤어!
— …….
— 나한테 웃어줬어 미친 존나 와 미친.
……뭐, 거리가 있으니까 착각은 할 수 있지. 뻘쭘함에 하나같이 하트를 쏘는 경쟁자를 둘러보며 코를 훔친다. 또다시 심벌을 내려치는 그가 눈 속에 요동쳤다. 저건 드럼이 아니야. 우심실 좌심방 형상이 확실해. 내 심장이랑 백퍼 같은 BPM이거든. 드럼과 심장을 일타쌍피로 가져가는 그를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기타 선율이 흐르고 보컬의 목소리만 남을 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듯 조용히 관객석을 살피던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와 씨, 주먹만 한 얼굴에 눈코입 다 있어. 미쳤어. 어떡해.
— 저기, 드럼 치는 사람 이름 뭐예요?
— 지훈이요. 이지훈.
— 이지훈…….
— 진심 눈물 나게 귀엽죠.
머리카락을 골라내던 소녀가 함박웃음을 짓는다. 난 되려 자중하려 애를 썼다. 스무 해가 지나도 타인에게 관심조차 없던 내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들과 무대를 감상하고 있었으니 이런 감정이 낯선 건 당연했다. 이상 징후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대가 끝나갈즈음 관객석을 둘러보던 그와 정말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이 느낌을 이백 자 이내로 서술하고 싶었다. 이건 찐이야. 진짜 나랑 눈 마주쳤어. 지금도 봐, 날 보고 웃잖아.
— 죄송한데, 머리 괜찮으세요?
— 괜찮아요. 드럼이 멋있으니까.
— 너무 많이 빠졌는데요? 뒷머리도 좀.
소녀는 걱정 많은 눈빛으로 엉킨 머리를 애도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보아하니 내가 미친년이구나. 아아, 이래서 눈이 마주쳤나 봐. 무대에서는 다 보이잖아. 원시인을 본 느낌이었겠지. 아니, 이건 원시인 입장도 들어봐야 함. 결론은 쪽팔려서 죽고 싶다. 얼굴을 푹 숙인 채 빽콤이 잔뜩 들어간 뒷머리를 눌러 내린다. 이야, 스프링 같다. 지나가다 소똥 밟아도 이것 보다는 기분 좋겠다.
— 오고 있어?!
— 네네! 가고 있어요!
한쪽 귀를 막고 시끄러운 공연장을 빠져나간다. 하지만 견고한 성벽을 뚫어 관객들을 가르는 와중에도 내 시선은 줄곧 무대에.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멤버들과 웃는 그에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그 드럼에.
이지훈. 소낙밴드 드러머.
여전히 날 바라보는 착각도 있었고.
***
— 스무디 다섯 잔이 들어왔을 때 난 정말 죽고 싶었어.
— 한산한 것보다 낫지. 시간도 빨리 가고.
— 뒤늦게 와서 지금 뭐래니? 입으로 주문 쏘고 음료 만들고 다음 주문 동시에 받아 봤어? 샌드위치 껍질 벗겨야 하는데 스무디, 모카, 아이스티 단체 주문 받아 봤어? 그것도 골고루?
— 김민규, 너 코피나.
— 으휴, 케찹이야. 아까 손님이 파니니에 케찹 달라고 해서 막 뿌렸는데 코에 묻었네.
카페의 날다람쥐 민규가 티슈를 뽑아 코를 훔친다. 또 다른 말로 청결남인 녀석은 싱크대에서 손을 여러 차례 벅벅 닦으며 지옥 같았던 시간을 회상했다. 매니저님 아까 네 이름 부르면서 울더라. 살다 살다 매니저 눈물도 보고 인생 너무 스펙타클해. 민규의 말에 옆에서 멍 때리던 그녀가 헛웃음을 보인다. 매니저님, 가게는 저희가 볼 테니까 병원 접수부터 하세요. 얼굴이 너무 하얘요. 완전 올라프. 진 빠진 얼굴로 올라프의 퍼스널 컬러를 생각하던 그녀는 쉬는 시간을 핑계 삼아 스태프 실로 사라졌다.
— 오늘 나 한 시간 먼저 들어간다.
— 마감은?
— 매니저님.
— 약속 있어?
— 초콜릿 재료 사러.
— 초콜릿? 왜?
— 발렌타인데이잖니.
— 참나.
— 너는 상관없지? 제외됐지?
— 아까는 동생 놈이 그러더니 이젠 너냐?
샤랄라 배경을 자체적으로 깐 녀석이 몸을 꼬았다. 석 달 전부터 자신의 못생긴 라떼아트를 칭찬해주던 손님과 연애를 시작한 녀석은 한창 죽고 못 사는 시기였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커플링을. 절대 부러운 건 맞아. 그래서 울어.
— 초콜릿은 사서 줘라. 망하면 그것만큼 쪽팔린 게 없거든.
— 망해도 좋아해 줄 걸? 내가 만든 건 다 좋다 그랬어.
— 애인이 부처님?
— 아니, 나만의 님. 쉬즈 마이 엔젤.
— 진짜 싫다. 토 나와.
— 넌 좋다 하는 사람 없니. 가서 좀 달라 그래.
스팀을 마친 민규의 피처가 머그잔에 원을 그린다. 둥그런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조금전의 기억. 좋아하는 사람 없냐고? 사실은 좀 전에 만난 것 같긴 한데, 초콜릿까지 줄 사이는 아니야. 그 사람은 날 모르고 나는 그 사람을 알거든. 뭐라고? 헛것 보냐고? 죽을래? 소중한 첫 만남을 조각내는 넓은 어깨에 뾰족한 손 날을 박는다. 녀석은 닿지 않는 팔로 낑낑대며 아픔을 참았다.
— 저기, 뒤에서 드럼 치는 사람 이름 뭐예요?
— 지훈이요. 이지훈.
또 만나고 싶다. 아니, 또 만날 수 있을까? 지금도 무대 하려나? 쉬는 시간에 보고 오면 안 되나? 가게 창문에 매달려 건널목을 두 번이나 지나야만 보이는 곳을 쳐다본다. 사람들은 많은데 무대를 볼 수 없어서 답답했다. 가게 앞으로 머리카락을 골라내던 소녀 무리가 상기한 얼굴로 방방 길을 뛰었다. 그중 한 소녀는 이지훈을 불러 젖히며 깔깔댔다. 얘들아, 나도 끼워주라. 옛날부터 덕질 사총사 해보고 싶었거든.
— 밖에 뭐 맡겨 놨니.
— 아우 씨, 깜짝이야!
— 뭘 그렇게 봐?
— 뭐를! 그냥 뭐!
— 왜 흥분을 해.
— 내가 언제? 그냥 해, 떠 있는 해 봤구만.
— 언제까지 혼자 볼 거야. 같이 밤새워서 해 볼 생각을 해야지.
— 너 자꾸 염장 지를래?
민규를 피해 빈 테이블을 돌며 의미 없는 행주질을 한다. 아까 밖에 엄청 시끄럽더라? 소낙밴드 왔었어? 민규는 졸졸 따라와 장난을 걸다 손님 없는 틈을 타 자리를 꿰차며 물었다. 소낙밴드. 드럼. 이지훈. 멋있어. 눈웃음. 작살. 큐플레이 연상 퀴즈 금메달리스트인 나의 실력을 보아라. 빠른 두뇌 회전으로 금세 이지훈을 상기하며 귀를 쫑긋 세운다. 소낙밴드? 그게 뭔데? 관심 없는 척 테이블 모서리만 문지른다. 그러자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타박을 시작했다.
— 한 달 전부터 포스터 장난 아니었잖아. 아니, 애초에 소낙밴드를 모른다는 게 말이 돼?
— 그렇게 유명해?
— 길거리에서 시작했다가 드럼 한번 교체된 후에 완전 떴지. 이지훈 하면 ‘드럼 치는 걔’ 이러면서 다들 알 걸? 너만 빼고?
— 아니이, 뭐어…… 아까 지나가다가 잠깐 보긴 했는데 잘 치는 것 같더라.
— 잘 치는 정도가 아니지. 천재지, 천재. 드럼이 존나 멋있어지는 건 이지훈이 스틱을 잡는 전과 후로 나뉜다.
— 뭐야, 이 덕후냄새는.
— 저번에 공연 본 적 있었는데 내가 홀리겠더라니까.
인간 향수 같아. 라잌 디올 옴므 오드뚜왈렛. 할렐루야 이지훈 찬양송을 만들던 녀석이 카운터로 돌아가 손님을 맞이한다. 의미 없는 행주질, 그 속에 이지훈 이지훈. 드럼 하나는 기깔나게 치는 드러머. 내 마음도 같이 조진 드러머. 바에서 음료를 만들던 민규는 영혼 빠진 얼굴로 다가오는 내게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저었다.
— 관심 없는 척하더니. 내일은 앞에서 네오니랑 응원하고 있겠네.
— 내일도 해? 언제?
— 보통 이틀 연속으로 하는 것 같던데. 인별 확인해 봐. 소낙밴드로.
— 계정 하나 파야겠다.
— 야.
— 뭐.
— 이지훈 좋아하냐?
— 아, 아니?
— 아유, 마녀처럼 웃지 마.
왜 저러나 싶은 얼굴로 까대기를 치던 녀석은 매니저 부름에 스태프 실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언제 마녀처럼 웃었다고. 어이없네. 그냥 공연 한 번 더 볼 수 있다니까 좋아서 흐뭇한 거지. 홀로 남은 카페 유리창에 비친 실성한 얼굴을 일부러 잔뜩 구긴다. 방실거리는 볼만 빼고. 아까 스틱 쥘 때 누가 봐도 멋있었는데 좀 찍어 놓을 걸. 야, 뭐래. 지금 일하고 있는데 뭔 생각 하는 거야. 나 자신아 일에 집중해. 시선 딱 앞에 보고! 가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도 좀 하고!
시벌. 망했어.
***
— 아침부터 뭔데? 설마 데이트?
— 이게 예뻐, 이게 나아? 터틀넥은 좀 별론가?
— 아니, 긍게 지금 뭐 하냐고.
— 울 찬이두 참, 옷 고르고 있잖아.
2월 13일. 하품으로 입을 쩍 벌리며 기지개를 켜던 동생은 충격 실태 보도 기자가 되어 현장을 취재했다. 당신을 이렇게 만든 작자가 누굽니까? 닥치고 비키시죠. 협박을 받으신 겁니까? 너야말로 받고 싶습니까. 거울을 방해하는 몸뚱어리를 시원스레 걷어차자, 미끄러진 놈은 엉덩이를 감싸 쥐고 아침부터 칭얼거렸다.
왜 까는데! 터틀넥이 너한테 어울리냐? 목도 짧은 게 보는 눈도 없어요. 곧 죽어도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는 놈은 안방에서 들리는 여사님의 사자후에 금세 목소리를 낮췄다. 후드티가 더 나아. 백곰 되고 싶다고 저번에 그랬잖아. 1라운드를 힘차게 연 놈이 가드를 올린다. 진짜 오늘만큼은 이기고 싶다. 저 깐족을 조지고 싶어.
— 이찬, 학원 안 가냐?
— 가야지.
— 지각 아냐?
— 지각이지.
— 뭔데 태평해?
— 인간이 항상 똑같으면 재미가 없잖아. 변화도 주고 그래야 살맛 나는 거 아니겠어?
— 어제 지각비 좀 내라고 학원에서 전화 온 거 앎?
— 아 씨, 그 새끼들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 어디 무서워서 말이나 꺼내겠냐?
—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데?
— 지각비 플러스 초콜릿도 돌린다고. 황금빛 페뤠로로쉐에.
— 울 예쁜 누나가?
— 아니, 네가.
— 야! 미쳤냐?!
빠르게 신발을 낚아 채 현관을 나선다. 에베베베. 초콜릿 풍년이네에에. 당한 만큼 갚아주는 것이 나의 오래된 신념. 눈치 빠른 여사님은 맨발로 뛰쳐나온 놈의 뒷덜미를 잡아 탈출을 막았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 큰 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작은 꽃집이었다. 공연 끝나고 주고 싶은데 어떤 게 나을까요. 장비도 챙겨야 하니까 아무래도 작은 게 낫겠죠.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처음부터 눈여겨 보던 드라이 플라워를 골라 계산대 앞에 섰다. 카드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지훈에게? 지훈님에게? 아니야, 깔끔하게 이지훈님? 으으음, 디어 지훈……?
To. 지훈
드럼이 좋아지고 있어요
……당신이 좋아지고 있어요.
공연을 기다리며 꽃집 근처 카페에 앉아 SNS에 태그 된 소낙 밴드 영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스틱 돌리는 거 대박이다. 이게 뭐라고 발려. 테이블에 엎드려 같은 부분 무한 재생에 빠지고 있을 때, 순식간에 산만해진 분위기에 곤두선 신경이 문 앞을 향했다. 누가 카페에서 저렇게 떠들어. 패딩 모자 쓰고 귀엽게 웃으면 다냐고.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이지훈이네.
망했다. 진짜 이지훈이다. 멤버들을 줄줄이 소시지처럼 달고 들어온 그가 모자를 벗는다. 난 그냥 얼음물. 너희 마셔. 그들을 앞으로 보내고 정확히 내 옆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켠 그가 부담스러운 시선에 옆을 돌아본다. 다행히 본능보다 앞선 이성이 시선을 피했다. 좋아, 그대로 빠져나가. 후드 모자를 당겨 얼굴을 감추고 편협한 시야로 핸드폰과 가방을 들었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돼. 45도 각도로 자연스럽게. 그렇지.
— 저기요.
— …….
— 이거.
섬섬옥수가 주는 드라이 플라워. 수만가지 생각이 공존하는 이곳에서나는 일생일대 기로에 섰다. 아무렇지 않게 받기엔 손이 떨렸고 오픈 된 장소에서 팬밍아웃을 하자니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한 번이라도 정상적으로 살 순 없는 건가. 자리에 앉아 날 올려다보는 의아한 눈이 후드에 가린 얼굴을 훑는다. 오오, 신이시여. 안 됩니다.
— 감사, 감사합니다.
— 네.
— ……가지실래요?
— 제가 왜요.
절제하지 못한 미약한 본능이 치고 올라와 입을 막는다. 아닙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니, 계시요. 아니, 계세요. 터진 멘탈을 부여잡고 문을 당기는 날 보던 그가 ‘미시오’ 팻말을 가리키며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당기면 안 열려요. 밀어야 돼. 나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얼굴에 왜 이리 마음 아픈지.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니거든요. 아이큐 백 넘어요.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뜀박질하듯 가게를 빠져나와 자책의 무한 루트를 그린다. 그리고 궁금함을 참지 못해 돌아본 가게에는 온통 비속어를 뱉으며 자학하는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있었다.
처음 본 그때처럼.
***
어제보다 인파는 상당했다. 운 좋게 앞자리를 꿰찬 나는 장비를 점검하는 그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보아라, 공중에 스틱을 몇 바퀴를 돌리든 거뜬한 저 안정감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거머쥐는 저 속도를 봐. 헤벌쭉 입을 벌린 채 모든 순간을 담는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자리에 앉아 관객석을 내다보던 그가 스틱으로 날 가리키며 동그랗게 눈을 떴으니까. 평소와 같은 착각이겠거니 넘기려고 해도 스틱은 날 향한 게 분명했다. 쪽팔리고 좋다. 뒷자리 앉을걸.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그는 묘한 웃음을 그리며 첫 곡을 연주했다.
공연이 파한 무대 뒤로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다. 백스테이지 주변을 기웃거리며 타이밍을 엿보는 눈앞에 그를 포함한 멤버들이 단숨에 사라진 이유는 나보다 조금 더 빠른 사람들의 선물 공세 덕분이었다. 어림잡아도 몇 학급은 되겠다. 이럴 줄 알았지. 선물은 무리였어. 카페에서 그냥 줄걸. 촘촘한 성곽밖에서 고민하며 시간을 확인하는데 뒤에서 나긋한 음성이 들렸다.
저기요. 그거, 아까 그거 맞죠. 대신 전해 줄게요. 누구인지 말해줘요.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멤버들을 흘긋 거리며 재촉했다. 여전히 제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서.
— 그쪽 건데…….
— 저요?
— 가지, 가지실래요?
꽃이 흐드득 떨리기 시작하는 건 아마도 내 손이 그러한 모양이었다. 카페에서는 진짜 우연히 마주친 거라서…… 공연 끝나고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내키지 않으면 그냥 가도 되는데……. 하얀 뇌는 무분별한 문장과 이지훈이란 점을 박고 무한 회전을 돌았다. 조심스레 받은 그가 얼굴 옆으로 귀엽게 흔든다. 생각건대, 그는 꽃만 흔든 게 아니었다. 내 마음도 같이 흔들었지.
— 어제 공연 처음 봤는데 드럼 진짜 좋아서…… 리듬이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 아아, 감사합니다.
— 아니요. 제가 더.
— 머리는 괜찮아요?
— 머리요?
— 어제 그…… 머리카락 걸려서 아파하던데. 눈 막 찡그리구.
두 눈을 귀엽게 찌푸리며 어제의 날 재현한다. 그래, 착각이 아니었구나. 정말 날 보고 있었어. 첫인상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이야, 존나 망했네? 하하하. 하하하하하. 제가 덤벙대는 스타일이라 자주 그래요. 별로 안 아팠어요. 마데카솔 바르면 새살이 솔솔 돋아서 기분이 좋거든요. 끝맺음이 남다른 문장 실력을 자랑하고 싶은 욕심은 이곳에서도 그랬다. 물음표 한 백만 개 떠 있는 저 얼굴을 봐라. 망했어 진심.
— 사실 제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 좀 전에 주먹 흔들면서 응원하던 사람 어디 갔어요.
— ……그게 보이는구나. 창피하다.
— 완전 잘 보이죠. 웃는것도 다 보여.
이내 선물 카드를 확인한 그가 잔잔히 웃는다. 드럼이 좋아졌다는 말 되게 좋네요. 작업실 옆에 둘게요. 고마워요. 귓가에서 떠나지 않던 드럼 소리가 좌우간 커지며 외부 소음을 먹는다. 주머니에는 먹다 남은 초콜릿 한 개, 자본주의 상술을 참지 못하고 구입한 그것이 마침내 나머지 주인을 찾는다. 내 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
— 저, 저는 파스구찌에서 일해요! 저기 한신 포차 바로 맞은편에……!
— 예?
— 한신 포차…… 그…….
— …….
— ……닭발 맛있어요. 꼭 드셔 보세요.
닭발 공격에 혼란스러운 그가 초콜릿을 보며 끄덕인다. 아, 내일 발렌타인데이. 고마워요. 결국 망할 상술의 날을 기념한 내가 허탈하게 웃는다. 맞아요. 발렌타인데이. 내일은 못 보니까 미리 주고 싶어서. 정신 나간 대답에 그가 피식 웃는다. 그것마저도 맨정신에 취기가 올랐다. 이런 말은 앞으로도 다신 못 할 것 같아.
— ……예쁘시네요.
— 네?
— 아, 아닙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아니, 계시요. 아니, 계세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란 인간. 깍듯한 인사 후 쏜살같이 꽁무니를 내빼며 울부짖는다. 망할! 옘뱅! 망했어! 사거리 모퉁이에 앉아 흑역사에 영원히 박제될 오늘을 저주한다. 눈치 없이 떠는 핸드폰은 이런 날만 나를 찾았다.
— 바쁘니까 전화 걸지 마.
— 야, 어디야?
— 김민규는 꺼져라.
— 소낙밴드 봤어? 나 아까 여자친구랑 지나가다가 봤는데.
— 봤지.
— 대박이지.
— 엉, 대박이었지.
— 근데 목소리는 왜 그래?
— 너무 좋아서.
2019. 02. 13
민규는 이상형을 븅신 만렙으로 걷어찬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친구가 될 수 있어서 영광이라 말했다
소낙밴드, 좋아했다
이지훈, 정말 좋아했다
이와중에도 치킨이 먹고 싶은 내가 밉다
치킨은 네네치킨
투명 포카 받아야지
***
— 저기요, 카푸치노 시켰는데 거품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 원래 카푸치노는 거품을 많이 내서…….
— 아니, 그러니까 거품을 왜 내냐고. 거품 싫어하는데.
— ……어, 그럼 라떼로 바꿔드릴까요?
— 센스가 없어요? 미리 말을 해줘야지.
— 라떼로 드릴까요?
— 그럼 이걸 그냥 마셔?
— …….
— 매니저 어딨어?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달려온 매니저님은 아예 테이블을 잡고 불만 리스트를 작성하는 손님과 정다운 담소를 나눴다. 테이블에 반 이상 먹다 남은 카푸치노를 가리키던 손님은 카운터에 서 있는 날 쏘아보며 직원 교육을 운운했다. 카푸치노를 시키면 시켰구나 하지, 누가 카푸치노 설명을 하고 있냐고. 처음부터 물어본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미리 카푸치노 에스프레소가 어떻고 스팀은 어떻고 이런 걸 설명해야 하냐고.
— 앞으론 조심해요.
— …….
— 이 매장 정말 별로네.
새로운 라떼와 사라지는 뒷모습이 아름답다. 다음번엔 처음부터 라떼를 시켜주세요. 하트 백 만개 만들어서 드릴 게. 안 오면 더 좋고.
— 지금 쉴래?
— 예쓰.
— 그냥 잊어. 가끔 저런 컴플 들어오잖아.
— 역시 강철 멘탈.
— 나도 컴플 너무 싫어.
— 초콜릿 드셨어요? 오늘 빌어먹을 발렌타인데이잖아요.
— 남은 거 있니?
— 아뇨. 어제 다 해치웠어요.
— 초콜릿 다 상술이야. 먹지 마.
— 근데 왜 우세요.
—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그녀는 얼른 바에서 꺼지라는 손짓을 하며 눈물을 훔쳤다. 괜찮아요. 우리가 초콜릿이 없는 거지 자존심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저도 잠깐만 울고 올게요. 처음부터 끝까지 휘핑크림으로 채운 머그잔을 들고 바 테이블에 엎드린다. 손님도 별로 없고 일찍 퇴근하고 싶은데 그건 다음 생에나 해야겠지. 카톡으로 초콜릿 박스 한 무더기를 찍어 인증샷을 보낸 이찬이나, 만든 초콜릿 자랑하는 김민규나 똑같다. 받는 놈이나 주는 놈이나. 에잇, 둘 다 망해라.
머그잔을 탈탈 털어 입가에 잔뜩 크림을 묻힌다. 창밖 어느 귀여운 커플은 서로 박스를 교환하며 발렌타인데이를 즐겼다. 사이즈 대박이다. 얼마냐 저게. 한달 휴대폰비는 거뜬하겠네. 근데 페레레로쉐네. 나도 어제 줬는데. 꽃도 주고. 진심 예뻤는데……. 눈물을 훔치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커플을 맞는다. 어서 오세요. 저는 고백도 못한 솔로입니다. 그들은 핫초코와 모카를 두고 아옹다옹 사랑 싸움을 시작했다. 그리고 뒤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 온 패딩 차림의 남자는 구석에 찌그러진 나를 보며 알듯 말듯 묘한 웃음을 지었다.
— 별로 반갑지 않나 봐요.
— 뭐…… 야요?
— 에이, 첫 인사가 뭐 그래.
— 이거 진짜 맞아요? 진심?
— 한신 포차 맞은편. 닭발 맛있는 집 앞에 있는 파스구찌.
— …….
— 오늘 일하는지 몰라서 그냥 와봤는데 오길 잘했다.
입에 휘핑크림 묻었어요. 거기 말고 여기. 입주변을 동그랗게 그리며 살살 웃는 그는 환각인가 실제인가. 김민규 말대로 드디어 미쳐서 헛것을 보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볼을 꼬집어 현실을 구분하자, 짜릿한 감각에 얼굴을 감싸 쥐고 발을 굴렀다. 미쳤다. 대박 미쳤다. 그는 과도한 흥분에 어쩔 줄 모르는 나를 쉬쉬 가라앉히며 플라스틱 상자를 건넸다. 앙증맞은 하트 케이스. 찬란한 황금색. 부러움에 앓다 죽을 초콜릿이 드디어 나에게도.
— 빈손으로 오긴 싫어서.
— 주는 거예요? 나?
— 어제 나도 받았잖아요.
— 이지훈, 내 이름이에요.
— 유명하니까 당연히 알죠.
— 나는 모르잖아요. 그쪽 이름.
— …….
— 오늘은 되게 진지하네. 새살이 솔솔 이런 거 듣고 싶었는데.
눈 앞에 놓인 초콜릿과 그토록 그리던 그가 있다. 긴장에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 나와, 다정히 경청하는 그가 같은 시각 한 공간에 있었다. 드럼 앞에 있는 이지훈만큼 눈가에 박힌 눈물점을 가진 이지훈도 예뻤고, 지그시 눈을 감고 연주하는 이지훈만큼 조금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패딩에 얼굴을 숨기는 이지훈도 예뻤다.
'예쁘다'라는 건 당신의 또다른 정의.
그리고 마주한 우리.
— 언제 끝나요?
……
— 그냥, 초콜릿만 주고 헤어지긴 아쉬우니까.
오직 남들을 위한 발렌’타인’데이인줄 알았던 오늘이
나의 첫 ‘발렌타인데이’가 될 줄이야.
+
— 어제 카페에서 너무 티 나게 일어나길래 표정 관리가 안 되가지구.
— 저도 너무 당황해서…….
— 알아요. 그래서 미안했어요.
— 아니에요. 전혀 미안할 필요 없어요.
— 밥 다 먹으면 뭐 할 거예요?
— 딱히 약속은 없어요.
— 으음, 그럼 뭐하지.
— 저랑 계속 뭐 하고 싶어요?
— 어, 들켰다.
— 장난으로 한 말인데…….
— 진담이면 더 괜찮은데.
— 그럼 진담으로 할게요.
— 할게요는 뭐야. 나 싫은데 일부러 잡혀주는 것 같다.
— 아니에요!
— 거짓말.
— 정말 좋아해요! 처음봤을 때부터 막……!
— 나 좋아해요?
— 좋아하니까 꽃도 주고…… 뭐 그런 거죠.
— 솔직히 이건 좀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