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지 항상 궁금했어
이 사람도 나랑 같은 사람은 아닌지
너 말이야
안경 원우가 보고 싶어 쓰는 글 (취향 주의)
Nobel Prize winner Ernest Hemingway is seen as one of the great American 20th century novelists and is known for works like ‘A Farewell to Arms’ and ‘The Old Man and the Sea’. In this century, he got praised by world…….
계단식 강당 끝에 앉아 턱을 괴고 볼펜을 굴린다. 원어민 수업은 구진 음악실에서 볼 법한 벨벳 커튼에 잔뜩 낀 먼지 같다. 별책 부록과 같아서 관심을 보이거나 보이지 않아도 그만인 것. 열변을 토한 헤밍웨이의 위대함과 칭송은 다음 주 중간고사 33번 보너스 문제로 나타나거나 반영률 저조한 수행평가로 처리되어 게눈 감추듯 사라질 것이다.
이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존재감은 학교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과목이 될 수도 있고 미술실의 때가 타서 버린 석고상이 될 수도, 더 나아가 여태 자신의 반 학생의 이름을 되묻는 똥 대가리 담임의 제자가 될 수도 있다. 김여주, 내 이름이 그렇게 어려운가.
— 어디 보자.
— …….
— 아, 저기 원우랑 하면 되겠다.
합반 수업을 피하고 싶은 이유가 나타났다. 남의 반 학생 이름은 줄줄 꿴 담임이 같은 줄 반대편에 앉아 줄 공책에 코를 박고 글을 쓰던 남자애를 내 짝꿍이라 멋대로 지었다. 모든 지구 중력을 끌어 쓴 안경을 코에 대롱대롱 매단 남자애는 멀뚱히 담임을 올려 봤다. 혼자 해도 괜찮은데. 수더분한 머리와 안경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인다. 구부정한 등이 애처로워 보이는 건 이번만이 아니었다. 학기 초부터 그랬다. 책과 펜을 가까이 두는 사람은 존경받아 마땅하나,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 싶을 만큼 그것들은 무척이나 해로웠다. 담배도 마약도 아닌 것이 꼭 영혼의 배를 갈라 독식하는 꺼림칙한 모양새라.
책상에 엎드려 빠질 궁리를 하는데 남자애의 무던한 얼굴이 보인다. 고개를 끄덕이니 담임이 멀어졌다. 반영율 저조한 수행평가 홀로서기의 대실패를 맞이했는데도 좋고 싫음을 종잡을 수 없는 넉넉한 얼굴이 여러 뒤통수를 지나 면상에 꽂힌다. 눈꺼풀을 여닫는 일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업무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끔뻑인다. 뭘 봐. 하던 거나 해. 어디 가서 밥도 못 빌어먹는 성질머리가 입 모양으로 죄 없는 남자애를 공격한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남자애는 다시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일급 기밀문서 작성도 저렇게 하진 않을 텐데.
수업이 파하면 마지막까지 남는 자리는 묻지 않아도 알겠다. 남자애는 그동안 쓴 글을 읽었다. 모든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앉아 팔짱을 꼈다. 이내 가까운 발소리에 뒤늦은 얼굴이 위로 흐른다. 투박한 글씨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으며 공책 밑으로 불룩한 책은 빽빽한 필사의 흔적이었다.
헤밍웨이 좋아하면 잘 됐다. 이미 내용 아니까 감상문도 네가 써. 글을 읽던 뚱한 표정 그대로 눈을 끔뻑끔뻑. 어쩌라고. 이해했으면 말을 하던가. 강당에 날카로운 공기만 둥둥 떠다닌다. 남자애에게 즉문즉답은 영역 밖이라는 거다. 한참 생각 후에 말을 해야 하는, 어떻게 보면 생각을 너무 하다 못해 상대방이 게거품 물고 증발하기 직전에 답할 수 있는 지구상 느림의 미학을 누구보다 실천 중인 남자애가 느긋하게 입술을 뗀다.
— 같이 하자.
— …….
— 짝꿍이잖아.
이 대답만 듣는데 쉬는 시간 다 썼다.
시벌탱.
OFF ON OFF
; THE BOY WEARING GLASSES
옥상 계단에서 느긋하게 사탕을 빤다. 제껴도 그만인 보충을 하고 싶은 짝꿍 새끼를 기다리느라 엉덩이에 좀이 쑤셨다. 가방도 챙겼겠다 밖으로 튀어도 되는데 그놈의 짝꿍 소리에 돼먹지도 않은 소속감이 생겨버렸다. 언제부터 인류애에 죽고 못사는 인간이 된 거냐. 쪽팔리게. 바닥에 버린 껍질을 모아 주머니에 넣고 발목 양말을 당겨 신는다. 이내 도서관으로 오라는 당찬 문자에 입으로 문 사탕 막대를 툭 던졌다. 지가 뭔데 오라 가라. 조온나.
탁탁탁 바닥을 치는 슬리퍼가 2층 행정실 건너편 투박한 문 앞에 멈춘다. 손잡이를 돌려 반이 먼지인 공기에 캑캑대며 뿌연 앞을 휘저었다. 앞치마 비슷한 것을 두르고 카트에 쌓인 책을 정리 중인 남자애가 아는 척을 한다. 되게 빨리 왔네. 저리 멋없게 인사할 바에야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아 책을 분류하는 눈을 응시한다. 사서를 도와주는 역할이라고 하던가. 그 뭐라고 하더라. 불룩한 주머니에서 껍질을 꺼내 휴지통을 찾는데 이번에도 남자애가 손을 내민다. 나에게 넘쳐나는 그것이 상대에겐 한 줌이다. 사서 자리에 들어가 쓰레기통을 찾는 남자애가 허리를 숙인다. 도와주는 역할, 방금 생각났다.
— 여기 보조 사원이야?
— 도서부원.
— 도서 보조?
— 사서 보조.
으레 습관인 안경을 올린다. 이번엔 꽤 오래 눈을 맞췄다. 중간에 타이머만 있다면 눈싸움 경기와 같은 시점, 승부에 관심 없는 내가 먼저 깜빡인다. 얼마 안 되는데 그냥 베껴도 되잖아. 만남의 요지인 반영률 저조한 수행평가를 들먹이며 주제를 바꾼다. 짜집기 해서 쓰면 얼마나 좋아. 카트를 밀어 일련번호 순서대로 정리하는 남자애를 쫓아 답답한 공간의 해방을 꿈꾼다. 사다리 없이도 높은 선반에 가뿐히 책을 꽂는 기럭지에 무심코 내 것을 비교한다. 최소한 백 팔십은 넘으려나. 한쪽 눈을 감고 손마디로 대강 수를 세는데 남자애가 불쑥 뒤를 돌았다. 햇빛 때문에 안경테에 잔뜩 간 실금이 또렷했다.
— 아무거나 쓰는 건 빈껍데기라서.
……
— 글을 그런 식으로 죽이고 싶진 않아.
자신의 필사를 읽던 그 얼굴이다. 소중해서 만지기도 차마 두려운 어떠한 것과 같은. 글의 신념이 확고하다 못해 강렬한 분위기에 도록 눈만 굴렸다. 어차피 네가 쓸 거니까 알아서 하든지. 쿰쿰한 공기를 한껏 들이쉬며 잡히는 대로 책에 손을 뻗는다.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를 읽는 척 요지부동인 남자애를 신경 썼다. 정리할 책은 아직 산더미인데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 발목을. 뻐근함을 핑계로 목을 돌려 얼굴을 살핀다. 무던한 표정과 어울리는 안경이 또 올라갔다. 대출 도와줄까. 곧게 뻗은 손가락이 들고 있던 책을 향한다. 청소년의 올바를 섹스법, 적나라한 정상위 삽화에 의도치 않은 집중을 받았다. 좆됐다.
— 기한은 최대로 한 달까지…….
— 그런 거 아니야!
이번에도 날카로운 공기다. 강당에서도, 이곳 도서관에서도. 던지듯 책을 박아 놓고 가방을 든다. 남자애는 그것의 일련번호를 확인하고 좀 더 높은 곳에 꽂았다. 저놈의 제자리, 평생 에프엠대로 살아라. 이상한 소속감에 꿰어도 단단히 꿰인 정신을 책망할 때, 남자애는 바닥에 떨군 학생증을 주워 건넸다. 읽을 건 내가 찾아볼게. 잘 가. 딱 저 한마디로 모든 걸 덮는다. 정말 그뿐이었다.
도서관까지 날 부른 이유는…… 글쎄. 단순히 글의 애착이 높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라고 간주하는 게 좋겠다. 더 이상 깊게 들어갔다간 왠지 수면으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으니. 산소통 없는 스쿠버 다이빙은 딱 질색이다.
— 안경테 많이 긁혔다.
— …….
— 요즘 괜찮은 거 많아.
아직은, 수면 밖이다.
***
아침 조회 시간 막바지에 등교한 귀찮은 발걸음을 멈춘다. 뒷줄에 앉아 친구들과 얘기하는 옆 반 남자애가, 그러니까 전원우가 안경을 바꿨다. 덥수룩한 머리도 이발해 이제는 안경과 따로 놀았다. 복도 창문으로 그 얼굴을 훔치는데 무엇을 설명하려 두 팔로 크게 원을 그리던 그가 날 보고는 손바닥을 보인다. 입은 안녕인데 손은 꼭 맹세하는 것처럼 올곧다. 갑자기 왜 저래. 적응 안 되게시리. 어벙한 표정을 지우고 빠른 걸음으로 반을 지나친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일부러 돌아보지는 않았다.
내 이름을 되묻고 지각 처리하는 담임을 지나 자리에 앉는다. 책상에 엎드려 지루한 시간을 세는데 자꾸 어색한 전원우가 사이를 비집었다. 대수롭지 않다 생각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안경이든 머리든 때가 되면 바꾸고 자르는 건데. 그냥 내 말이 아니었더라도. 마치 영향력을 크게 작용하는 사람 같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아무것도 아닌 내가. 몰래 껌을 씹으며 이상한 기분도 같이 조진다. 오래도록 잘게 짓이겨서 쓰레기통에 뱉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다. 단물만 먹고 한데 모아 한 번에 버린다면.
영어 수업 감상문거리 찾았는데 종례하고 도서관에서 만나도 돼? 08:52
단물이 빠지지 않는다. 턱이 아파오는데도 계속 씹어야 하는 중독에 걸린 것처럼 죽을 것 같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딱히 생각나는 답이 없다. 그새 전원우를 닮기라도 했나. 삼십 분 전에 온 문자를 교과서보다 뚫어지게 쳐다보며 수만 가지 답을 상상한다. 응,어,엉,옹,웅,ㅇㅇ,ㅇㅋ,엥…… 아, 엥은 좀 아니지 않나.
알겠어 ㅇㅇ 09:37
근데 아까 보니까 안경 잘 어울…….
머리를 내려치는 막대기에 인상을 찡그렸다. 백날 숨겨도 다 보여 인마. 담임은 혀를 차며 옆구리에 막대기를 쑤셔 넣었다. 책상에 붙은 이름표를 확인한 담임은 조심하라는 엄포를 놓고 교무실로 사라졌다.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고통을 참는데 교실을 지나치는 전원우가 보였다. 뒷문에 멈춰선 그가 자신의 안경을 가리키며 웃는다. 애가 정신을 놨나. 왜 저래 진짜. 일부러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답답한 창밖을 본다. 아직까지 켜져 있는 밝은 핸드폰. 아차 싶었다.
아까 보니까 안경 잘 어울ㄹ lㄷ 09:37
사라진 그를 확인하고 나서야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왕천지 푼수 새끼! 그냥 나가 뒤져라! 소중한 쉬는 시간을 자책으로 날려 먹는다. 쪽팔림은 오후 보충을 알리는 종소리에도 변함없었다. 교복 입은 해골바가지 소리가 나올 만큼 현재 주소는 그랬다. 필기를 하는 둥 마는 둥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약속에 입술만 깨문다. 지금이라도 못 간다고 말할까. 내가 언제부터 남을 신경 썼다고. 공책 한 면에 다리 두 개 달린 안경을 그린다. 안경 안에 눈도 그리니 코도 그려본다. 이목구비만 있으면 어색하니까 얼굴 윤곽도 잡는다. 시벌탱. 전원우다.
***
도서관 한바퀴를 크게 돌다 고전 서적 앞에 멈춘 전원우는 허리를 숙여 두 권을 빼 들었다. 입술로 후우 바람을 불어 먼지를 날린다. 방향 감각 상실한 그것이 면전에 회오리처럼 몰아쳤다. 미세 먼지 같다. 미안.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휘휘 손바람을 젓는다. 표지부터 낡아빠진 책을 뺏다시피 가져가자 그는 머쓱히 뒷머리를 만졌다. 책장 그늘에 앉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는 척 딴생각을 하는데, 어느덧 그도 옆에 앉아 나머지 한 권을 읽었다.
너는 내용 다 알잖아. 필사 노트의 대부분이 헤밍웨이 작품인 그가 익숙한 책을 붙잡고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한다. 지금 읽으면 느낌이 또 다를 수 있어. 먼지 묻은 낡은 서적을 만지는 눈에 이상한 설렘이 있다. 책과 사랑에 빠진 소년과 같다. 필사까지 했으면 지겨울 만도 한데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어지간한 광팬을 넘어선 수준이다.
그의 구부정한 어깨가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가 책장을 넘기면 나는 다 읽지 않았는데도 따라 넘겼다. 어느 한 구절을 곱씹으며 나지막이 속삭이면 그 목소리를 속으로 되뇌었다. 문장을 읽는 낮은 울림이 꽤나 좋았다. 나는 이상하지도, 거북하지도 않은 주파수에 속도를 맞췄다. 잠깐 숨을 고르거나 긴장한 듯 침을 넘기는 야릇함이 섞일 때면 간지러운 목덜미를 긁었다.
— ……아.
— 엄청 깊게 자길래.
눈을 떠보니 전원우의 어깨다. 밖은 까마득한 어둠이고 그의 손에 들린 책은 이미 뒷면을 보였다. 미안. 나 때문에 집도 못 가고. 서둘러 가방을 메는데 상대는 어깨를 주무르며 한곳을 응시했다. 풀어진 내 신발 끈으로. 아무렇지 않게 매듭을 짓고 일어난 그가 시계를 확인한다. 버스 오려면 멀었는데. 그리고 또 자리에서 한참을. 나갔으면 벌써 정류장에 도착했을 그 시간에 그는 머뭇거리며 안경을 올렸다.
— 밥, 먹을 시간 아닌가.
— 어?
— 학교 앞에. 떡볶이.
***
떡볶이를 음미하는 미각보다 다리가 길어 슬픈 전원우에게 가는 시각이 더 끌렸다. 처음엔 길게 뻗었다가 걸리적거린다는 주인의 말에 다소곳하게 모으더니 어중간함이 불편해 이젠 다리를 꼬았다. 너한테 의자가 많이 낮나 봐. 꺼릴 게 없는 나는 편하게 떡볶이를 씹는다.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눈치 보던 한쪽 다리가 내 쪽으로 온다. 서서 먹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뜨거운 김에 안경알이 뿌옇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물을 먹다 뱉을 뻔했는데 슬픈 생각으로 용케 잘 참았다.
— 감상문 이번 주까지 제출 맞지?
— 내가 쓸게. 네가 봐줘.
— 아니야. 나도 할게.
— …….
— ……짝꿍, 그거니까.
타는 목을 연달아 물로 잠재운다. 짝꿍. 그래, 그 짝꿍 타령 늪에 빠져버렸다. 전원우는 고개만 주억거리고 나머지 떡볶이를 씹었다. 무던히도. 우걱우걱. 매사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는 늘어짐에 김이 빠진다. 눈을 끔뻑이고 골똘히 생각하고 천천히 입을 떼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저작 운동까지. 똑같이 일 분을 살아도 시간 정의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다.
혹시 주토피아 나무늘보 은행원 알아? 모르면 검색해 봐. 너 나오더라. 그는 말마따나 한 손으로 핸드폰을 만졌다. 곧 나무늘보의 0.7배 느린 리액션이 때아닌 분식집에 퍼졌다. 하. 하.
— 하…….
— 재미 없어.
— 미안.
그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온종일 저 장면만 반복 학습시켜도 모를 성향이다. 빠른 포기가 생명이니 별다른 강요는 하지 않았다. 다르다는 건 틀린 게 아니니까.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제 막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전원우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얘랑 닮았다는 말은 처음인데. 나 되게 빨라. 반응 속도가 이리 늦어야 어디 농담이라도 하겠나. 역시 본인만 모르는 저세상 속도에 일찍이 눈을 감는다. 그래 너 되게 빨라. 그림자도 안 보여. 가방을 챙겨 가게를 빠져나가는데 뒤늦게 전원우도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의 기럭지는 저세상 기럭지, 내리막길이라 가속이 붙어 속도가 맞지 않았다. 똥 빠지게 따라가는 나를 발견한 그가 속도를 줄인다. 정류장 기둥을 잡고 헉헉대는 소리는 흡사 강아지삘. 다 마셔도 돼. 아끼지 말고. 혼자 암벽등반 갔다 온 것처럼 그가 건넨 물을 쉼 없이 들이켰다.
사거리 정체로 연착 중인 버스를 기다리며 서로가 말이 없었다. 빈 물병을 공중으로 돌리며 시간을 죽였는데 갑자기 전원우가 말을 걸었다. 원래 읽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내게 관심 없는 얼굴로 저런 질문을 했다. 긴 글 싫어해. 이해 안 가서. 허공에 붕 뜬 물병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는 그것을 주워 나 대신 재미를 봤다. 빠르게. 더 빠르게.
— 도서관에 시집 기증한 거 너 맞지.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책 정리하다가 봤어. 뒤에 네 이름이랑 반.
— 아, 그래?
— 시는 이해하기 더 어렵던데. 긴 글보다.
버스 연착 시간이 늘었다. 정류장에 엉킨 사람 중 반이 떠났다. 느긋한 전원우는 대답을 기다리며 내 가방을 끌어안았다. 가방을 되찾고 싶다면 답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온다. 그야 당연히 긴 글보다 시가 더 함축적이니까. 빳빳한 고개를 들고 원래 내 것인 가방을 당긴다. 하지만 그는 힘으로 버텼다. 애도 아니고 이딴 걸로 힘 싸움이라니.
— 그리움.
— 그리움 뭐.
— 때로 내 눈에서도 소금물이 나온다.
— …….
— 아마도 내 눈 속에는 바다가 한 채씩 살고 있나 보오.
— …….
— 나도 그 시 좋아해. 나태주. 그리움.
6031 버스가 정류장 앞에 섰다. 그는 가방을 돌려주고 빈 물병을 손에 쥐었다. 내일 같은 시간에 도서관에서 보자. 안경을 올리던 손으로 또 맹세 같은 인사를 한다. 긴 다리로 성큼 걸어가 뒷자리에 앉은 그가 힐끗 옆을 돌아본다. 뻔히 마주친 시선에 화들짝 놀란 얼굴이 서서히 멀어진다.
— 나도 그 시 좋아해. 나태주. 그리움.
정류장 앞 건널목을 건너 아파트 단지로 들어간다. 학교와 집은 불과 오분 거리. 졸음을 참으려 씹은 껌 단물이 빠지지 않는다. 아침과 별다를 게 없는 질긴 그것을 잘게 씹어 목구멍으로 넘긴다. 이젠 토해내지도 못해. 삼켜버렸잖아. 맛있게 먹었으면 됐지. 안 그래?
***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다
하지만 두 눈 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전원우는 저 문장을 감상문에 적고 싶어 했다. 가장 역동적이며 생기 넘치는 구절이라 감히 말하면서.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옆에서 칸쵸를 우물거리며 그의 무던한 표정을 따라 했다. 안경을 올리는 습관까지 복사하려다 상습적인 행동에 지쳐 혀를 찼다. 안경을 조이든지 쓰지를 말든지. 고질적인 성질머리가 가만히 있는 그를 찌른다. 나는 단지 안경에 가려진 콧대가 아까웠을 뿐이다. 사실 안경 너머 또렷한 눈도 그랬다. 안경은 확실히 눈을 잡아먹으니까 렌즈를 끼면 인물이 훨씬 살아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듣는 척도 하지 않던 그가 안경을 벗어 내게 씌웠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에 어지러움을 토했다. 눈이 엄청 나쁘구나. 난시까지 있다구. 미안해.
멋쩍게 웃는 그가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네가 기증했던 거. 그는 새것과 같은 시집을 건네며 다시 감상문에 몰두한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나태주 시집. 심심할 때면 내내 들춰보던 책 앞장에는 새해 다짐, 뒷장에는 내 이름과 반이 적힌,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시집이 돌아왔다. 그때는 푹 빠져 남들도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에 새 학기 새 출발 기증했던 것이었는데 지금 보니 솔직히 아깝기도 했다. 다시 가져가고 싶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뒷장을 펴 이름이라도 확인하는데 대출 카드에 빼곡히 적힌 목록에 눈을 비볐다.
3월 6일 전원우. 4월 6일 전원우. 7월 17일 전원우. 12월 6일 전원우. 3월 2일 전원우. 5월 8일 전원우. 176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시집을 몇 번이나 빌렸는지 두 장이나 꼽혔다. 이거 다 네 이름이네. 차라리 한 권을 사지. 대출 카드를 각각 손에 쥐고 모니터 앞을 방해했다. 화를 낼 만도 한데 내려간 안경만 올린다. 가슴 안에 성모 마리아가 몇 명이 사는지.
— 계속 읽고 싶어서 빌렸어.
— 서점에 널린 게 이런 시집인데.
— 네가 적은 사족은 여기서만 볼 수 있잖아.
— 사족?
— 가끔 시 밑에 붙어있는 사족. 네가 쓴 글.
때로 내 눈에서도
소금물이 나온다
아마도 내 눈 속에는
바다가 한 채씩 살고 있나 보오
절절한 사랑에 관한 시보다
나를 아는 시가 좋다
누가 알아줄까
누가 내 마음과 같을까
누가,
나를 좋아해 줄까
— 누군지 항상 궁금했어. 이 사람도 나랑 같은 사람은 아닌지. 이름이랑 반을 알아도 무턱대고 아는 척 할 수가 없어서 그동안 말은 못 했는데 대신 계속 읽었어. 언제든 어디서든. 붙인 사족 모두 이해하고 기억하고 싶었으니까. 특히 그리움.
누가 나를 알아줄까
이해해 줄까
— ……좋아해 줄까.
이름조차 외우지 못한 담임에게 내 존재의 유무를 찾는 건 애초에 의미가 없었다. 별책 부록 같은 수업도, 몫을 다한 석고상도 더는 나와 관련이 없다.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좋아해 주는, 이름을 불렀을 때 꽃이 되어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으니. 헤밍웨이로 필사를 채우던 공책의 주인공을 나 또한 이해하고 싶었으니. 죽은 글은 쓰고 싶지 않다던 진실함을, 단순한 신념과 애착이 아닌 진중함을, 전원우 그에 대하여.
— 나도 알려줘. 헤밍웨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깊은 수면으로 빠져든다.
산소통 없는 다이빙으로.
+
— 그만 알면 안 될까. 헤밍웨이.
— 생각할 수록 책을 너무 잘 썼다. 그래서 그 다음은?
— 내 말은 듣고 있는 거야?
— 어디 아파? 얼굴이 창백해.
— 너 우리집 언제 왔어.
— 아침에.
— 아침 언제.
— 열시 반?
— 지금 몇 시야.
— 여섯 시.
— 제발 살려줘.
— 아니, 그 다음 어떻게 됐냐니까?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 초고 들고…….
— 시집.
— 뭐?
— 시집 읽고 싶어.
— 갑자기?
— 멘탈 케어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