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불이 밝다
규닝 作
02.
“동아!”
“아해야!”
느린 손으로 닻을 바투 잡고 있던 동우가 반색을 하며 뒤를 돌았다. 잣나무 크기만큼 자란 덤불 사이에서 흰 얼굴이 쏙 튀어나와 동우를 맞았다. 아해야아! 이번엔 아예 닻을 내팽개친 동우가 덤불 가까이까지 내달려왔다. 벌써부터 여름 고뿔을 단 동우가 연신 코를 훌쩍였다. 덤불 사이로 내밀어진 얼굴이 그를 흘겨보았다.
“야. 넌 벌써부터 고뿔이야? 이제 하지가 막 지났는데!”
“하지가 뭐야?”
동우의 멍청한 반문에 샐쭉해진 눈이 한숨을 내쉬었다. 성규가 말을 말자는 듯 오른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멍청이한테는 설명도 아까우니까.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제 보따리를 뒤적이는 손길이 우악스러웠다. 이내 실실 웃고만 있던 동우의 발치로 무언가가 휙 떨어졌다. 성규가 턱짓으로 방금 전 내던진 그것을 아닌 척 쭉 가리켰다.
“그거, 너 해라!”
“아해야. 이게 뭔데?”
“보면 모르냐? 멱신이다. 그리고 그 옆에 건 배자. 여인 품 인 것 같긴 하지만 괜찮을 거야. 너한텐 딱 맞을 것도 같고.”
동우가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집게손가락만으로 멱신을 집어 들었다. 그의 눈이 서서히 둥그레졌다. 제 머리꼭지 높이까지 올려 들어 밑바닥까지 꼼꼼히 훑는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성규가 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혀를 찼다.
“너, 그게 뭔지도 모르지?”
“멱신.”
“멱신인 건 내가 방금 말 해 준 거잖아.”
이 멍청아! 성규가 그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올해는 제용감(濟用監)에서 매년 줬던 것보다 좀 더 일찍 겨울 용품을 나눠주었어. 좀 늦게 간 덕에 남아 있던 건 그게 전부였지만. 그러니 이제 그 구멍 난 신은 좀 버려. 너 발가락 다 얼어. 그면 그거 다 잘라야 돼.”
“응.”
“너, 발가락 자르기 싫지?”
“으응.”
“그럼 내일부터 그거 신어.”
“아해는?”
“야! 당연히 나도 싫지.”
“아해 거는 없어?”
동우가 인중까지 내려온 콧물을 지저분한 옷소매로 쓱 닦았다. 성규가 떫은 표정으로 그의 말에 대답을 해 주다 반문했다. 나? 동우가 왼손 높이 올려 든 멱신을 쿡쿡 집어 가리켰다. 아해 멱신은 어디 갔어? 그제야 아아, 하는 소리를 낸 성규가 별 거 아니라는 듯 그의 얼굴 앞에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집에 있어. 집에 갖다 놨어.
“나 그럼 가 본다! 내일부텀 꼭 신어. 날이 더워도 꼭 신어!”
“아해, 벌써 가? 악기는?”
“나 지금 늦었어. 시진, 아 멍청이! 너는 말 해줘도 모르잖아. 어쨌든 가 봐야 해. 악기는 조만간 다시 올 거야.”
시진 할 시간이야, 하고 말하려던 성규가 괜한 역정을 냈다. 다시 보따리를 단단히 동여 묶은 후, 헤진 천 끝을 덥석 집어 일어났다. 그 덕에 덤불이 크게 흔들리자 가만히 성규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동우의 고개도 따라 올려졌다. 간다! 일말의 미련 없이 몸을 돌린 성규가 앞서 왔던 오솔길을 되돌아가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밟고 달리는 나뭇잎소리가 남은 이의 귓가로까지 사각사각 갈리고 있었다.
새신이다…! 성규의 뒤꽁무니에 한참이나 시선을 두던 동우가 이내 신이 난 얼굴로 멱신을 올려다봤다. 받은 직후부터 주욱 올리고 있던 왼팔이 저려 와도 신이 올랐다. 그가 헌 신 바깥으로 비죽 튀어나온 못난 발가락을 괜스레 꼼지락대다가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아 멱신을 놓았다. 당장이고 그것으로 바꿔 신는 손에 신바람이 묻어났다.
*
조참 직후 시작되었던 경연(經筵)이 길어졌다. 왕의 곁으로 주루룩 늘어앉았던 노련한 대신들의 무릎마저 저려올 즈음이 되어서야 막을 내린 경연 후엔 장계가 쏟아졌다. 명정전 처소의 내관이 품안 가득 넘치려는 장계를 가까스로 떠받들며 왕의 뒤를 따랐다. 그의 한숨소리가 유난히 짙었다. 왕의 뒤를 졸졸 따라 밟는 걸음들이 불편한 그의 심기를 눈치 채고 땅으로만 고개를 박았다.
별운검. 근심이 어린 목소리가 그리 불렀다. 가장 측근에서 따라 걷던 적운검이 말을 받았다. 예, 전하. 왕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낮춰졌다.
“새로 들어와 앉아있던 신참내기들이 우측 맨 끝자락에 늘어섰던 자들이 맞느냐?”
“괴원(槐院) 분관에서 내려온 자들을 하문하시는 것이라면 맞사옵니다. 승문원의 이 판교가 최근 들어 눈여겨보고 있다 말들이 자자한 이들로서, 나흘 전에야 출사를 마친 신참들입니다.”
“승문원이라….”
왕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에 대답을 받들던 적운검이 왕의 안색을 살피며 그의 걸음 또한 늦추었다. 적운검. 예, 전하.
“승문원이 내금위와 얽힐 만한 일이 있던가…”
하문인 듯도 했고, 넋두리인 듯도 했다. 정확히는 무엇을 묻는 것인지 가늠키 어려워 적운검이 대답을 뜸 들였다. 왕의 눈이 명정전 현판 위로 멀어졌다.
“이제 막 조정의 주목을 받고 있는 승문원의 신참들이라면, 보통내기가 아닌 자들이 분명할지언데, 어찌…?”
헌데 어찌….
왕의 걸음이 명정전 아래 그대로 묶였다. 아마 묻는 말이 아님에 확실했다. 쓸데없이 주군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 꾹 다물은 입이 굳었다. 왕의 뒤를 따라 걷던 수많은 나인들 사이에도 정적이 찾아들었다. 골똘히 그의 머리를 짚고 침묵을 지키던 왕이 겨우 다시 걸음을 옮긴 것은 일 촌각(1~2분) 후의 일이었다.
흙바닥 위에서 오래 고민을 하면 이렇듯 빨리 머리가 아파왔다. 경연 내내, 주욱 늘어앉았던 새파란 신참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같은 곳을 가리키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되짚어보면 짚어볼수록 마음이 불편해져만 왔기에 두통이 찾아 들었다. 그들의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자꾸만 되뇌어볼수록 또렷해지는 이목구비들이 둥둥거리며 머릿속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
우현은 제 앞에서 허둥지둥 야단인 제용감 관원을 곧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이오? 물어보면 아직입니다! 하는 말만 빠르게 돌아왔다. 벌써 한 식경(30분)이나 같은 물음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차분했던 우현의 눈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아, 이 작것들은 뭘 하고 있느라 여적지 오지 아니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저도 꽤나 답답한 입장인 듯, 자꾸만 초조한 눈을 뒤쪽으로 뒀다가, 우현의 안색을 바꿔 살피던 관리가 변명 같지 않은 변명과 함께 발을 굴렀다. 내오라 한 물건을 가지러 갔다가 소식 없이 함흥차사가 된 당하관들을 ‘작것’이라 싸잡아 부르며 식은땀을 연신 닦았다. 우현은 줄곧 제 앞에서 좌불안석인 그를 그저 냉한 눈으로 기다려주었다. 한 식경에서 더, 그리고 더 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병조판서 한정호의 집에 혼례가 있는 날이었기에, 왕이 그의 집에 하사하라 명한 가채와 검을 받으러 제용감에 손수 걸음 한 우현이었다. 한 식경 전, 제용감의 관리는 노닥이며 부채질만 일삼다 하마터면 뒤로 까무러칠 뻔 한 것을 가까스로 다잡고 직속 당하관들에 가채를 내오라 명했었다. 보통 이런 심부름이라면, 관련 처소의 나인이나 내관들이 걸음하여 가져가는 것이 다반사였기에 느닷없는 운검의 방문이 당황스러웠던 것이었다. 어인 이유로 운검께서 친히 오셨느냐고 묻는 말에 우현은 그저, 검을 미리 확인코자 왔소. 하며 짧게 대답했었다. 농땡이 비슷하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 찔리는 게 없었음에도, 우현의 목석같은 존재 자체에 불벼락을 얻어맞은 관리가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아, 이 작것들은 죄다 똥뒷간에 처 빠졌나! 왜 오질 않는거야!
“우, 운검 나리.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아마 조심히 내어오려고 하는 통에 늦어지는 것이라 사려됩니다.”
“괘념치 마시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고 있는 관리와는 상반되도록, 고요히 낮은 목소리가 외려 그를 달랬다. 겨우 한 숨을 돌린 관리가 애먼 상 위만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운검의 눈치를 살피려 야단인 마당에, 천막 저 쪽에서 대화중이던 목소리마저 커지기 시작했었다.
“아, 이제 재고가 없다니까!”
버럭, 터지듯이 커졌던 말소리 끝엔 또다시 웅얼웅얼, 작은 목소리가 답했다. 그러면 또 버럭이며 시끄러운 목소리가 터졌다. 우현이 천막으로 가려놓았던 저 편을 힐끔이자, 그의 안색을 살펴보던 관리가 그것을 냅다 걷어 소리를 질렀다. 이보게! 좀 조용히 하게나!
“지금 운검께서 와 계신다네! 말소리 좀 낮추자고!”
“아니, 헌데 이 자가 자꾸…”
제 앞에 둔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이었던 듯, 억울한 눈썹을 해 뵈는 관리가 하소연하듯 말했다. 바로 며칠 전에 마고자며 하는 것들을 받아가 놓고는 다시 와서 야단이란 말입니다. 그러자 안 쪽이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천막이 넓게 걷혔다. 무슨 소란이기에. 이 쪽을 상대하던 관리가 목을 주욱 빼고 저 쪽을 내다보자 자연스레 우현의 눈도 건너편을 향해 갔다.
“이 잡니다!”
관리가 제 앞에 선 이를 삿대질하며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마찬가지로 이 쪽으로 마악 눈을 돌렸던 이가 화들짝 눈길을 피했다.
“장악원에서 자꾸만 보내오는 김 전음이요!”
다시 버럭 터진 목소리가 성규의 머리꼭지를 힘주어 콕콕 가리켰다. 부러, 우현과 반대편으로 고개를 바싹 돌린 성규가 옷깃으로 더워진 제 얼굴을 휘휘 부쳤다.
제 상관으로부터 내려진 심부름에 제용감을 찾았다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관리와 맞닥뜨리게 되어 한껏 말싸움에서 진이 빠져 있던 터에 마주친 사람은 마주칠 적마다 제게 당황감을 안겨 주었던 청운검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홱 고개를 돌린 성규가 곧장 커진 눈을 소매로 가리며 당황한 눈을 몰래 부릅떴다.
그저 냉한 눈으로 이쪽을 내다보던 우현의 눈에 흥미로운 사람이 포착되었다. 그의 눈에 미묘한 생기가 돌았다. 또 김 전음이요? 이제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한 목소리가 혀를 찼다. 그들의 타박에 더욱 민망해진 성규가 너른 옷 폭으로 제 더워진 얼굴을 가렸다.
“또 무엇을 받으러 오셨기에?”
“그, 그. 재차 말씀드리는 것입지만 제 것을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부전율(副典律)의 마고자와 멱신 하나를 가져간다는 것을 빠트렸기에 도로 받으러 온 것이라고요!”
“아무리 봐도 이 자는 수상하다니까요. 장악원에서처럼 많이 이곳에 물품을 받으러 오는 부서는 또 없습니다! 분명 어딘가로 재고를 빼돌리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관리의 근거 없는 확신에, 이번에는 성규 쪽에서 팔짝 뛸 노릇이었다. 제 옆얼굴을 급히 숨기던 것도 잊어버린 성규가 관모를 휙 당겨쓰며 눈을 치켜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관리께서는 제가 지금, 도둑질을 하고 있다 이 소리신겁니까?”
“아니란 소리시오?”
“예! 아니란 소립니다!”
물론 동우 것을 두어개 빼다 준 것만 빼고요! 뒷말은 용케도 목구멍 속으로 삼킨 성규가 배짱 좋게 대들었다. 꼭 저만큼이나 버럭 높아진 성규의 목소리에 기가 차기 시작한 관리가 이것 보게 하는 표정으로 성규를 보고 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리춤에 화난 손을 얹은 성규가 못마땅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다른 부서에들처럼, 받아야 할 것을 마땅히 받아가려 걸음 한 관리에게 이리 대하셔도 괜찮단 말입니까? 제법 당돌해진 목소리가 쏘아붙였다.
“제 것을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당상관께서 받으셔야 할 마고자를 받으러 왔다는데!”
“그게 김 전음의 마고자일지, 부전율의 마고자일지 대체 내가 알 게 뭐요? 그리 마고자가 갖고 싶거든 그대 별급(別給)을 모아 사던지 하시오!”
“예, 예?”
“그리 억울하면 어디 한 번 봅시다. 그 옷깃 안에 이미 마고자를 세 네 겹쯤은 껴입고 있는 것 아니오?”
급기야는 무릎을 털고 일어난 관리가 성규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그에 귀 끝까지 벌게져서 열을 내던 성규의 말문이 턱 막혔다. 제 딴에는 제법 억울해 열심히 대들던 게 무색하도록 퍼득이며 몸이 굳었다. 마고자며 배자며, 이미 멱신도 다섯 개쯤은 겹쳐 신고 있는 것 아니오? 그리 빈정거리며 성규의 잡은 왼쪽 팔목을 휙 들어 소맷자락을 들추기 시작했다.
“뭐, 무얼 하시는 겁니까? 하지 마십시오!”
“어어, 왜 자꾸 손목을 뒤로 빼는 것이오? 무언가 켕기는 게 있어 그러는 것 아닙니까?”
“제용감, 임한성 참봉(參奉).”
성규의 팔을 제 머리보다 높게 들어 올리며 소맷자락을 들추던 관리의 행동이 멈추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말소리가 그의 직책을 재차 불렀다. 임 참봉. 그대가 맞소? 그리 묻는 자가 그들의 바로 앞, 발치까지 드리워졌다.
저의 손을 붙든 관리가 당황하여 얼은 직후, 조그만 말미를 번 탓에 제 소매를 급하게 움킨 성규가 바로 옆을 돌아다보았다. 어느새 기척 없이 옆까지 다가온 우현이 저와 관리 사이를 비스듬히 막아서며 들어왔다. 관리와 마찬가지로 당황한 눈이 그의 옆모습을 훑었다.
“보통 조정의 부패한 관리들은 말 하는 화법하며 행동거지로 관할 부서에서의 모습을 얼추 짐작하여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며칠 사이, 혹은 그 전부터 제용감 장부에서의 입염 의복 재고의 수가 미심쩍다는 사헌부에서의 장계가 올라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그것들의 행방을 임 참봉께서는 알고 계시는지요.”
여전히 앞서 그랬던 것처럼 냉랭한 목소리가 조목조목 그리 말했다. 느닷없이 제 이름이 불리웠던 탓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현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관리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무, 무슨 소리십니까?
“사헌부에서의 장계라니요?”
“무엇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는 시쳇말이 있습니다.”
한 뼘 정도 더, 성규의 앞으로 당겨 선 우현이 아직까지 그의 팔목을 붙잡고 있던 관리의 손을 잡아 내렸다.
“머릿속으로는 줄곧 제용감의 물품들을 그런 쪽으로만 보아 왔기에 다른 이들이 재고를 받아 가는 것마저 아니꼬와 보였던 것이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 김 전음께서는 ‘빼돌린다’는 임 참봉의 말에 그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 듯 아연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궐의 물품들을 가지고, 그런 생각을 갖고 보진 않습니다. 임 참봉. 가만히 계셨으면…”
중간이라도 가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우현이 성규의 팔목을 잡은 관리의 손을 힘주어 떼어냈다. 그 바람에 휘청이며 떨어져나간 성규가 우현 쪽으로 기울어져 버텨 섰다. 우현이 그의 팔을 끌어다 제 뒤쪽에 서게 만든 후, 억세게 잡은 손목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성규가 당황한 눈으로 그의 뒷통수를 보고 섰다.
방금까지도 주상 전하에 버금가는 위용으로 성규를 몰아붙이던 관리의 표정은 아닌 듯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그. 당치도 않으십니다! 가까스로 그리 토해낸 변명은 그 첫 마디를 시작으로 물꼬를 틀었다. 자신은 사헌부에서 그런 장계가 올라갔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분명 사헌부 감찰이 다녀갔을 적에는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는 것까지 세세하게 읊어대는 꼴이 결국 제 치부만을 더욱 드러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 성규는 두 명의 관리들이 때 아닌 우현의 감찰에 머리털부터 쭈뼛이며 얼어붙고 있는 꼴을 어깨 너머 불구경 하듯 바라보다가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관리로부터 붙잡혔던 손목이 이제는 한 결 더 센 힘으로 우현에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이 사실 달갑지만은 않았다.
아씨! 튈까, 말까? 사실은 우현이 붙잡고 선 소맷자락 안쪽에는 미처 숨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집어넣었던 편종 조각이 들어 있었다. 실은 아까 전, 다짜고짜 관리가 제 소맷자락을 들추어 보았을 때 사색하며 그것을 감추려 들었던 것은 모두 그 탓이었다. 여차하면 편종 조각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판이었다. 성규가 아직, 관리의 구구절절한 변명을 그저 들어주고 있는 우현의 곧은 뒷통수를 힐끔이며 눈치만 살폈다.
이걸 여기서 떨어트리면 그대로 모가지야! 사실 우현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사람 목을 댕강 날릴 수 있는 자였다. 첫 만남에서만 해도 그랬다. 그대의 목을 베어버리는 게 마땅한 일이라고. 그 생각에까지 미치자 성규의 등골이 제 앞에서 사색이 되어가던 관리들만큼이나 서늘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물론, 대책 없이 밀리고만 있던 말다툼에서 자객처럼 나타나 도와주었단 사실은 고마웠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었다. 센 힘으로 죄어오는 팔목을 은근슬쩍 비틀어 도망가려고 하면 할수록 등 뒤로 제 팔목을 잡아오는 우현의 손에는 더욱 힘이 실리고 있었다. 성규는 거의 울상에 가까웠다. 마고자고 뭐고, 지금은 그냥 벗어나고만 싶은데!
“…리해서 그리 된 것이지, 저희는 절대 제용감의 장고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처절한 변명에도 성규는 제 손목을 열심히 비틀어보다 꿀꺽, 침을 삼켰다. 셋 까지만 세자. 셋 까지만. 하나, 둘…
“감찰께서 어떠한 내용의 장계를 올렸는지는 모르겠사오나, 절대, 어!”
셋! 마지막 셋 은 저도 모르게 소리까지 내어 외친 성규가 우현에게 붙들렸던 팔을 힘껏 빼고 도주했다. 그 바람에, 세게 잡혔던 오른쪽 팔목이 크게 휘청이며 떨어졌다. 변명을 늘어놓던 관리의 기척보다 한 발 먼저 성규의 도망을 알아챘던 우현이 금방 뒤를 돌아보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일이었다. 제 손에서 벗어난 성규가 꽁지가 빠져라 제용감 문턱을 마악 넘어 달려가고 있었다.
“저, 저저 저 자가! 김 전음!”
궁상맞게 쩔쩔매던 임 참봉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그를 소리쳐 불렀다. 그가 저도 모르게 말아 쥔 주먹을 들어 보였다. 저, 저 도망가는 것 좀 보게! 작것! 역시 뒤로는 무엇이 되었든 네다섯 개쯤은 빼돌려 놓았을거라는 의심이 확신이 되어가는 순간이었다. 켕기는 게 있으니 튀는 거겠지! 차마 우현 덕에, 더욱 긴 의심은 소리 내어 뱉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리는 속을 감내했다. 누구는 저 때문에 때 아닌 벼락을 처 맞고 있는데!
전립을 훤히 올려 쓴 우현이 성규가 사라졌던 문턱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허, 하며 김빠지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가 제용감 모퉁이를 마악 돌아 나가기 전에, 방금까지 붙잡았던 오른쪽 소매 위의 어깻죽지를 덧대었던 천이 완전히 너덜너덜 찢긴 것을 눈에 담았었다. 우현의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헐레벌떡 사라졌던 성규의 다홍색 관복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성규가 주먹만 한 밥그릇에 머슴밥을 퍼 담으며 죽상을 지었다.
이 니미럴, 육시럴! 울음을 꾹꾹 눌러 담느라 턱 막힌 기도에 괜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숟가락을 단디 잡았다. 퍽퍽한 맨 밥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손짓은 이미 한바탕 엉엉 울고 있었다.
“저거, 어떡할 거야…”
벽장 위에 걸어 둔 다홍색 관복의 오른쪽 어깻죽지가 덜렁거리며 뜯겨 있었다. 다시 제용감에다 달라고 해도 안 줄 텐데. 성규가 찔끔찔끔 삐져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슥 슥 닦아내며 밥을 퍼먹었다.
되는 게 없다. 결국엔 제 몫의 멱신도 받아오지 못했던 것까지 감안하면. 이럴 줄 알았다면 동우의 것은 나몰라라하며 제 것이나 살뜰히 챙길 걸 그랬다. 아마 내일이면 관복 꼴에 대해, 전악에 잔소리를 됫박으로 들어먹을 것을 예감하며 마른 눈물을 엉엉 짰다. 아니, 그 전에 금호문(관리들의 출퇴근용)에서부터 복장 검사에 걸리겠지! 성규가 애먼 제 옆통수만을 쿵쿵 때렸다.
내가 멍청이야, 내가 멍청이야…
*
우현은 그 날 이후로 신기하게도 성규를 거의 마주치는 법이 없었다.
그 전 같으면, 하루가 멀다고 궁중 행사 한 켠에서 지겹도록 마주치던 것이 성규였는데 요 며칠 사이에는 원래부터 그림자도 없었던 사람처럼 감쪽같이 사라진 존재에 못내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궐 안쪽을 가로지르다 우연히 만나던 장악원의 행렬에도 성규는 없었다. 결국은 장악원과 비슷한, 붉은 계열의 관복들만 보아도 눈이 돌아가는 지경에 이르자 우현이 생전 멀쩡하던 머리에 두통까지 경험하고 있었다.
아마 제 손을 뿌리치느라 관복이 그리 찢겼던 것 같은데.
딱 신경질이 날 만큼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왕을 따라 간 함인정에서 새로운 무관들을 접견할 때에도, 백운검을 도와 세자에 무술을 익히려 수업을 나갈 때에도 눈앞에 얼쩡이는 다른 각사의 다홍빛 관복에 눈이 멀었었다.
“어이, 청운검. 자네가 요즘 궐 안의 신(新) 암행어사라며?”
대련을 거들던 백운검이 건들거리며 그리 물었다. 우현의 곧은 눈이 검의 끝을 향해 보다 짧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현의 검 끝을 툭툭 치며 백운검이 웃었다.
“제용감 소식은 익히 들었네. 임 참봉 그 자가 좀 수상하다는 소문은 내 들은 바 있건만… 언젠가 사헌부 감찰로부터 한 건 잡힐 줄 예상 했던 양반인데, 그걸 우리 청운검께서 친히 잡아내셨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네.”
“잡은 것 아닙니다. 우연히 제용감을 지나던 감찰께서 개입하여 주셨기에 그리 되었던 것이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청운검은 익을수록 더 고개를 숙이나? 백운검이 껄껄 웃는 소리가 관덕정을 울렸다. 그에 목각 위로 검을 겨누던 우현이 바로 뒤를 돌아 각초석 위로 걸터앉았다.
우현이 며칠 전, 성규의 팔목을 이리 저리 당기며 희롱하던 임 참봉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눈썹을 구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이유 없이 화가 나 다짜고짜 그의 앞을 막아섰던 것이 벌써 나흘 전의 일이었다. 그 아니꼬운 임 참봉도 나흘만에 의금부로 압송되어 벌을 달게 받게 되었는데, 정작 걸릴 것 하나 없는 성규는 감쪽같이 머리꼭지 하나도 눈에 뵈질 않고 있었다. 우현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의 찢어진 관복을 잊어보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것을 반복했다.
그 사이 궐에는 한바탕 귀신 소동이 일어났다.
늦은 밤, 어거지로 관천대로 별을 보겠다 납신 세자가 귀신을 보았다며 온 궐이 떠나가도록 악을 지르며 내달렸던 새벽 이후의 일이었다. 아직 어린 세자가 태어나 처음으로 무언가에 그리 겁을 집어 먹어 야단이었다는 사실이 하루 한나절 동안 궁인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왕은 궐의 담 곳곳에 보초로 세워두었던 내금위 관원들을 죄다 관천대며 세자의 처소 앞으로 둘러 주었다. 가히 쓸데없는 병력 낭비였다. 내금위 수장이며 삼정승들이 왕의 유난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하여 그 후 이틀 동안은 운검들의 눈꺼풀에도 바람 잘 날이 없게 되었었다.
본래 왕의 곁을 지키는 게 그들의 직무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처소 앞에서 뜬 눈으로 밤을 나던 세 명의 운검들이 서로의 무거운 눈자위를 격려하며 보초를 섰었다.
다음 날은 밝고, 또 다음 날도 쉬이 밝았다. 우현이 가까스로 세자의 처소 앞을 뜨게 되어 도로 왕의 곁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는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장악원의 애물단지, 김 전음이 또 한 건을 하셨단다. 이미 그의 소문이 궐 안에 파다하게 돌고 있었다.
*
성규가 저린 무릎을 툭툭 쳤다. 그가 위쪽에 앉은 상전을 자꾸만 힐끔이며 훔쳐다보았다. 상석에 편히 앉은 그가 성규의 숙여진 머리통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래…
“네 그 동안의 업적은 많이도 들어왔다. 연회에서의 화과상을 금상의 앞에 엎질렀었다고.”
“…….”
“내 여전히 너의 배짱 하나는 높이 사는 바이다. 김성규!”
턱가에 자란 수염을 재차 매만지던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에 민망한 성규가 제 뒷통수만을 매만졌다.
“소인도 이미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원님께서는 그것을 제게 되짚어 주십니까?”
“잘못이라. 확실히 매우 큰 잘못이기는 하지. 그래, 그 위기에서는 어찌 벗어났었단 말이냐?”
소리 높여 웃던 원이 자세를 고쳐 앉아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성규가 어물쩡거리며 대답을 망설이다 손을 모았다.
“마침 전하께서… 소인의 얼굴을 먼저 알아봐 주셨던 데에다가.”
“…….”
“소인더러 원님의 사람이냐 하문하시기에…”
“그래서?”
“소인은…그렇다고…”
성규의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도 원의 웃음이 크게 터졌다. 하하하! 내 사람이라고! 원이 크게 박수를 쳐가며 웃었다. 그의 난데없는 박수소리에 깜짝 놀란 성규가 움츠렸던 어깨를 펴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원의 기분은 아주 좋아 뵈었다. 성규의 긴장했던 표정이 슬슬 풀렸다.
본디, 보는 이들의 눈이 없는 밤에만 줄곧 저를 찾던 원이었기에 이런 대낮에 그의 집을 찾아 쓸데없는 긴장감에 지레 몸이 굳어있던 차였다. 분명 무슨 이유로든간에 혼이 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 무색하게끔 기분이 좋아 뵈는 원의 모습에 성규의 입꼬리 또한 슬쩍 올라가기 시작했다. 박 원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래, 그 많은 조정대신들 앞에서 네가 내 사람이라 금상의 말에 대답하였다, 이거지?”
“예… 소인이 다짜고짜…”
“것 보거라. 내가 무어라 했었느냐? 네가 조정에 출사하기만 하면 곧 내 덕을 보게 될 거라 하지 않았더냐?”
원의 말에 성규가 곧 눈을 접어 웃었다. 줄곧 뒷통수를 매만지던 손이 실실거리며 내려왔다. 그것…그래서 소인이 항상 감사합니다. 원님께. 성규의 헤헤거리는 말이 끝나자마자 찾아든 것은 원의 우악스런 손이었다. 긴장을 풀어 웃던 성규의 두 눈이 깜짝이며 떠졌다. 갑작스레 뒷통수로 느껴지는 악력에 그의 어깨가 아까처럼 떨렸다.
“그럼, 이제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맞겠느냐?”
원이 성규의 뒷통수를 움켜쥐며 느리게 웃었다. 그 바람에 원의 얼굴과 바짝 당겨 앉게 된 성규가 바로 앞에 가까워진 원의 눈에 당황한 눈을 맞추고 있었다.
성규가 소리 나게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자 미처 눈을 감을 새도 없이 원의 얼굴이 성규의 입술을 덮쳤다. 아직 숨을 모아 들이키지도 못했는데 입을 막아오는 원에 성규의 팔이 잠시 버둥거렸다. 그의 거칠한 턱수염이 뺨 위로 부벼졌다. 제 뒷통수를 더욱 감아 압박해오는 손아귀에 눈을 질끈 감은 성규가 제 팔을 그의 어깨 언저리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올려 두었다.
원의 고개가 잠시 떨어졌다 다시 그의 입술을 삼켜가며 고개를 빗겼다. 숨이 터질 새도 없이 다시 입을 막아오는 원에 제 목이 뒤로 넘어가려 하는 것을 느낀 성규가 급하게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신호를 주었다. 그러나 물러설 리 없는 원이 저돌적인 힘으로 성규의 입 안을 탐하며 헤집었다. 가까스로 입이 떼어졌을 때에는 차마 뱉어내지 못했던 숨이 터지듯 나왔다. 허나 그것도 잠시, 원의 입술이 턱을 지나 목 언저리로 파고들었을 때에는 입이 막혔던 것보다 더욱 큰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성규의 퍼득이며 굳은 손이 그의 목을 마악 밀어냈을 때였다.
“아!”
이전에 그랬던 것과는 달리, 목에 센 압박을 느낀 성규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목덜미 깊이 입술을 파고들었던 원의 고개가 거두어졌다. 그의 눈이 제 바로 아래서 당황감에 젖어있는 얇은 눈매를 내려다보았다.
성규가 떼어지지 않는 입을 굳게 다물고 원의 입술이 다녀갔던 목덜미를 손으로 가렸다. 원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오늘은 내가 네게 증표를 주었다.”
“…….”
“내 일전에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출사를 하고, 네가 내 덕을 보는 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는 네게 그 때마다 증표를 하나씩 남겨 줄 것이라고.”
원의 손이, 제 따가운 목덜미를 매만지고 있는 흰 손에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성규의 눈이 느리게 깜빡여졌다.
오늘은 그저, 그 첫 번째 증표를 네게 준 것이다. 원이 저를 올려보고 있는 눈을 억지로 감기며 다시 그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대낮, 내금위 최고 수장 박 원의 자택 가장 안쪽 방. 유난히 음영이 짙어 마당 앞 감나무의 그림자가 좁은 방 안으로 길게 드리웠다. 성규의 숨이 부족해져갈수록 그의 뒷통수를 헤집는 손에 희열이 차오는 듯 했다. 성규가 급히 자리하느라 벗어 던지듯이 놓아두었던 신발 한 짝이 툇마루 아래, 섬돌 위로 뒹굴고 있었다.
*
제용감[ 濟用監 ]
조선시대 왕실에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한 관서
멱신
짚이나 삼 따위로 멱서리처럼 결어서 만든 신
장계[ 狀啓 ]
조선시대 관찰사·병사·수사 등 왕명을 받고 외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거나 청하는 문서
경연[經筵]
고려, 조선 시대에,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연마 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일, 또는 그런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