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과? 소아과라고?"
"응."
"나 미치라고 작정했어?"
"아, 왜 또?"
"거기 너네 대학 인턴있잖아. 맞아, 아니야?"
백현아..날뛰는 변백현을 한심하게 쳐다보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어. 소아과로 로테이션 된다는 내 말을 들은 변백현의 즉각적인 반응이었지. 변백현은 은근 질투가 심한 타입이 아니라 대놓고 난리를 치는 타입이기 때문에 한두번 있었던 일은 아니야. 그냥 내 주변에 있는 남자는 김종대빼고 모두를 배척하고 싶어해. 김준면에, 도경수에. 변백현은 아마 병원에서 눈에 쌍심지켜고 다니느라 피곤할거야.
"야, 도경수는 나같은 스타일 딱 질색하는 애야. 니가 이렇게 난리치지 않아도 될 만큼."
"도경수가 니 스타일이잖아."
"..."
"이것봐, 반박 못하는거."
"..그거야, 그거랑은 다르지."
변백현이 한번씩 저렇게 정곡을 콕 찌르고 들어오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입을 꾹 다물어. 도경수가 내 이상형인건, 변백현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 도경수가 원체 나한테 관심이 없었기에 망정이지만 아마 도경수가 작정하고 나한테 들이댔으면 아마, 나는 지금쯤 도경수 옆에 있었을 정도로? 대학 다닐 때도 백현이한테 도경수가 딱 내 이상형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했고 백현이랑 학교 거닐다가 도경수가 가는거 보이면 부끄러워서 백현이 뒤에 숨기도 했었어.
그런거 있잖아, 왜. 좋다좋다하면서 쫓아다니다 보면 그 감정이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심처럼 변한다고 해야하나. 그러니까 내 연애와는 별개로 그냥 쫓아다녔던 거야 내가. 경수도 내가 자기 잘생겨서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었고 내가 사귀자는 식으로 들이댄 것도 아니었거든.
그리고 내가 고등학생때도 이상형을 물어보는 백현이한테 말없고 과묵한 남자가 좋다고 한결같이 대답했었는데, 그게 딱 도경수 성격이었고 변백현은 그 정반대 성격이었지. 경수랑 나랑 같은 학교에다가 우리학교는 의예과랑 간호학과 연계해서 하는 활동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경수랑 접촉도 많았어. 연계라기보다는, 의대실습에 우리가 끼어들어가서 보는 수준? 그 때 마다 나는 도경수 있는 조에 가서 할거라고 빠득빠득거리며 자리를 쟁취하곤 했어. 자리쟁탈전에서 승리한 내가 해맑게 웃으며 도경수 팔을 붙들면 도경수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곤 했었는데..
"성공했네, 대학 때도 도경수랑 붙어먹으려고 안간힘을 쓰더니."
"백현아, 나 좀..설렌다?"
"뭐가."
"나..매일 보겠지? 우리 경수 가운 입은거.."
"돌았어?"
"우리 경수, 본과 소아과로 정한다고 했을 때 어찌나 씹덕터지던지.."
"정신..나갔어?"
"우리 경수, 곰돌이 마스크 쓰고 병동 도는거 봤어? 나 이제 그거 매일 보는거야."
"그래서, 축하라도 하라고?"
잔뜩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는 백현이 앞에서 나는 좋다며 팔랑팔랑 걸었어. 사실 몇 주 전부터 소아과로 로테이션 된다고 이야기가 들어왔었는데, 일부러 백현이한테는 말 안했거든. 얘기할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고 이렇게 놀리려고 작정했던 것도 있었어. 아침까지만 해도 같이 출근한다며 싱글벙글하던 백현이한테는 날벼락같은 소식이었겠지.
"그래서 당장 오늘부터 소아병동으로 가신다?"
백현이의 잔뜩 꼬인 질문에 해맑게 고개를 끄덕끄덕 해주곤 로비에서 작별인사를 했어. 사실 일부러 백현이 놀리려고 우리 경수, 우리 경수 거렸지 대학 졸업한 지 몇년인데, 경수랑은 그냥 친한 대학 동기로 지내고 있어. 소아병동은 처음이라 한시간 일찍 출근해서 어깨너머로 일하는 거 지켜보고 있는데 경수가 이제 출근했는지 옷 고쳐입으면서 걸어오는거야.
"어, 여기 온다는 소리 들었는데. 오늘부터야?"
"응, 반갑지?"
"변백현은 난리 났겠네."
그치, 우리 백현이 지금쯤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거야. 경수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목소리 좋은건 여전하네,하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어.
"병동 같이 돌래? 적응할겸."
나야 당연 오케이지. 아직 출근 전이었지만 자기 병동 도는데 같이 가자는 경수말에 차트를 챙겨들었어. 그 사이에 경수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마스크를 꺼내더니 천천히 자기 얼굴에 쓰는거야.
우리 경수, 아직도 곰돌이 마스크 쓰고 병동 도는구나.
"도경수, 솔직히 너 니가 귀여운거 알지?"
"이거 안 쓰면 왜 안쓰고 왔냐고, 애들이 물어봐."
"애들이 뭘 모르네."
"왜?"
"도경수 이렇게 잘생긴 줄 모르고 자꾸 마스크를 쓰래?"
내 말에 경수가 마스크 밑으로 하하, 작게 웃었어. 소아과도 다른 병동이랑 다를 바가 없는지 도경수도 변백현 못지않게 초췌한 모습이야. 백현이가 레지던트 밟을 즈음에 경수도 레지던트를 달테니까, 둘 다 똑같이 헬게이트가 열린 상태구나.했어. 그렇게 단정했던 도경수였는데 흰색 크록스가 더러워진 상태로 신고다니는거보면 말 다했지.
"채혈 이제 잘 해?"
"그럼, 이제 4년찬데."
"채혈은 변백현이 정말 잘 하는데."
"변백현 팔에 구멍 많이 냈지, 내가."
"걔도 참 대단해."
경수의 지긋지긋하다는 말투에 그저 헤헤 웃었어. 도경수도 알고 있거든. 내가 대학시절부터 채혈에 더럽게 약했고 실습때도 거의 꼴찌를 도맡아 했으며 그 때문에 백현이 팔이 많이 희생됐었다는 걸. 그리고 백현이가 나를 붙잡고 똑같은 가르침을 수십번을 반복했다는 것도. 아직 이른 아침이라 병동은 대체로 조용했고 경수가 살짝 첫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어.
"예빈이.. 아직 자네요? 밤엔 안 보챘구요?"
"새벽에 한번 깨서 울긴 했는데 어제보단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러네요, 목도 많이 가라앉았고."
"예빈이가 어제 곰돌이 선생님 계속 찾았는데.."
"그래요? 이따 다시 올게요, 예빈이보러. 예뻐라."
말 끝에 도경수가 살짝 웃으면서 아기 볼 톡톡 만지더니 나직하게 예뻐라, 하고 중얼거리는데 아..대학시절 도경수 덕후로 돌아간 것 같았어. 자기 찾았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지 연신 눈웃음을 날리면서 옆 침대 아기를 본다고 커텐을 젖혔는데 자고있었을 줄 알았던 아기가 눈 동그랗게 뜨고 경수를 쳐다보는거야.
"선샘님!"
"어, 서희 벌써 일어났어요?"
"곰도리 곰도리! 안아주세여!"
아기가 두 팔 쭉 뻗고 안아달라고 하니까 경수가 읏차, 하면서 한손에 애 안아들고 볼을 슥 내밀었어. 진짜 무심하게 내밀었는데 애가 또 그걸 어떻게 알아듣고 경수 볼에 쪽하고 뽀뽀를 하는거야. 그리고 고개 살짝 돌리니까 경수 마스크에 곰돌이 입에다가도 쪽 뽀뽀하고. 둘다 귀여워서 엄마미소로 쳐다보고..도경수가 성격이 되게 무뚝뚝하다면 무뚝뚝한 애라 소아과 간다고 했을 때도 의아했었거든. 그런데 이런 면이 있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지.
첫날이라 일이 엄청 어렵지는 않았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배우고, 적응하는 수준? 이었어. 일단 1분1초가 피터지는 응급실에 있다가 병동으로 올라오니까 한숨 돌릴 틈은 있었어. 경수는 일이 나보다 한시간 정도 빨리 끝났는데 내가 같이 밥먹어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꼼짝없이 한시간을 기다렸고, 내 일이 끝나자마자 병원 식당으로 내려갔어.
"너는 여기 오면 뭐먹어? 백현이는 제육덮밥먹는데."
"나는 갈비탕."
"..할아버지세요?"
"뭐 먹을래? 우리 병동 처음 왔는데, 내가 살게."
"오, 도경수가 쏘는 거야?나는 된장찌개!"
"너도 입맛 뭐. 변백현은..제육덮밥 시키면 되나."
"변백현?"
"응, 오라고 했어."
왜, 왜 왜, 경수야. 너 나랑 단둘이 밥먹는게 그렇게도 싫었냐며 경수 소매끝을 잡고 난리를 치고 있었을 즈음 저 멀리서 걸어오는 변백현이 눈에 들어왔어. 본능적으로 잡고있던 경수를 놓아주고 세상에서 제일 순진한 표정으로 백현이를 불렀어.
"백현아, 오늘 힘들었어요~?"
"기분 좋아보인다, 되게?"
오자마자 도경수를 마음에 안든다는 눈치로 보더니 내 팔을 잡아당겨서 제 옆에 딱 세워두는거야. 경수는 그런 우리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익숙하게 제육덮밥하나랑, 갈비탕 하나, 된장찌개하나요.하고 주문을 해.
변백현이 끄집는 바람에 억지로 테이블에 앉고 주문을 마친 경수는 뒤늦게 테이블로 왔어.
"변백현, 오랜만이네."
"..아, 왜 하필 소아과야."
변백현이 테이블에 팔을 괸 상태로 제 머리를 마구 헤집어. 도경수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나도 변백현 저러는 거 보니 귀여워서 웃고있는데 변백현만 미칠 지경이었지.
"도경수, 너 얘 꼬시면 죽어. 진짜."
"보다시피..내가 아니라,"
"알아, 아는데. 너 얘랑 눈도 마주치지마."
"..."
"눈 마주치고 웃어주면 정신 못차린다."
무슨, 아이돌 쫓아다니는 여자친구 관리하는 남자친구도 아니고, 변백현의 쓸데없는 걱정에 헛웃음만 흘러나왔어.
"그래봤자 나한테 빠져서 정신 못차리지만."
"카데바 실습할 때, 쟤가 우리조 오겠다고 교수실 찾아가서 조 바꿔 달라고 했었지, 아마?"
도경수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변백현 한방에 때려눕히는데, 경수야..내가 조 바꿔달라고 했던 건 백현이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변백현은 알지 못했던 과거이야기에 뒷통수 세게 맞고 멍하니 나를 쳐다봤어. 도경수는 그런 변백현이 재미있는지 다시 천천히 입을 여는거야.
"아, 교양 같이 듣겠다고 의대교양 따라 들어서 에프 받아간 것도."
"그래서, 뭐. 좋았다고?"
"싫진 않았지."
"뭐?"
"예뻤잖아."
도경수의 돌직구에 내가 정신 못차리고 헤헤 웃고 있을 때 변백현은 뒷통수 두번맞고 정신을 못차렸지. 경수가 셩격이 정말 솔직해서 예쁘면 예쁘다, 귀여우면 귀엽다 좋으면 좋다 확실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어. 대학때도 내가 도경수앞에서 되지도 않는 애교떨면서 귀여워?나 귀여워? 스킬 시전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무심하게 귀여워, 하고 말했던 도경수때문에 며칠을 변백현 붙잡고 경수가 나 귀엽대..하고 정신줄 놓은 적이 있었거든.
예쁘잖아도 아닌 예뻤잖아라는 과거형이 살짝 거슬리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경수의 말에 히죽히죽 거리는 나를 변백현이 굉장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어. 그래도 나밖에 모르는 변백현인데, 내가 풀어주지 누가 풀어주냐 싶어서 백현이 팔 잡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말꼬리 늘리며 말했지.
"에이, 백현아.."
"..."
"나는 너밖에 없는데, 응?"
"..밥, 먹자."
그 때 딩동하고 우리 순서인 번호가 알림판에 떴고 도경수가 밥을 가지러 카운터로 갔어. 변백현은 내 말에 주체할 수 없는 입꼬리를 꾹꾹 누르더니 밥먹자며 말을 휙 돌려. 이십대 후반 남자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건가, 백현이 손가락 사이 사이에 내 손 끄집어 넣고 표정 살피는데 이미 다 풀렸지 내새끼.
도경수가 우리 앞에서 사라지자마자 변백현이 몸을 틀더니 내 볼을 주욱 늘어뜨리는거야. 어버버하면서 놓으라고 팔을 퍽퍽 쳤더니 한숨 푹 쉬며 손을 떼곤 못살겠다는 듯이 말을 해.
"자꾸 이렇게 파닥파닥 거릴거야?"
"백현이, 삐진거야?"
"뽀뽀."
"경수 오는데.."
"경수가 중요해, 백현이가 중요해?"
말이야 경수 오는데, 했지만 백현이가 중요하지. 백현이 삐진거 풀어줘야지 싶어서 볼에 살짝 뽀뽀했더니 아까 뾰루퉁했었던 거 다 어디가고 어디한번 보라는 듯이 도경수 쳐다보는데 이제는 도경수가 못살겠다는 듯 허탈하게 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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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편 댓글보고 우럭..ㅠ_ㅠ...저번 편 100포인트나 내고 봐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려요, 정말정말로!
아, 작가이미지라는게 있길래 민석이 짱귀엽게 인ㅅㅏ하는 짤 넣어놨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다들 한번 보고 씹덕사하시고가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