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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운의 엄마와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와 윤도운이 같은 해에 태어나지 않아 인생의 매 순간순간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처럼 속앓이를 하고 있진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윤도운과 나는 세상에 처음 나와 울음을 팡 터트린 그 순간부터 함께했다. 첫걸음을 떼는 순간에도, 네발자전거 보조바퀴를 떼는 순간에도 내 옆에는 늘 윤도운이 있었다
윤도운은 인기가 많았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윤도운 주변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친구들과 진실게임을 할 때면 윤도운의 이름이 꼭 한번씩은 거론되었었다. 생긴 것처럼 성격도 말랑한 윤도운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윤도운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때마다 남 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다.
내가 윤도운을 좋아하게 된 건 아마 중학교 입학한 직후부터였을 거다. 6학년 겨울 방학 동안 가족 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자그마치 한 달 동안이나 윤도운과 떨어져 지내야 했었다. 살면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윤도운이 없던 적이 없기에 여행하는 동안의 처음 며칠에는 나도 모르게 눈 뜨자마자 윤도운의 이름부터 불렀더랬다.
방학이 끝나고 본 윤도운은 내가 알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키는 훌쩍 자라 나와 머리 하나는 차이가 났으며 어깨는 떡 벌어져 제법 성인 남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또 변성기가 와서 변한 목소리까지, 달라진 윤도운과 친해지는 데 일주일은 걸렸고 그 일주일은 폭풍처럼 나를 휩쓸었다. 처음에는 이 떨림이 그저 처음 보는 윤도운의 모습이 낯설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이 더 지나면 잠잠해질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웬걸, 떨림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져만 갔고 중학교 입학식 날 교복을 갖춰 입고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윤도운을 보았을 때는 떨림을 넘어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쿵 떨어진 심장을 신호탄으로 이 모든 이야기가, 내 지독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1-1
"윤도운?"
샌드위치를 가리키며 묻는 김원필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걔도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아침마다 그렇게 챙겨오냐, 까먹을 법도 한데. 오늘은 사진 안 찍어?"
맞다 잊을뻔 했다. 윤도운이 챙겨준 아침을 사진으로 찍어서 남겨두는 일은 내 아침 일과 중 하나다. 어느새 갤러리 폴더에는 사진이 400장이 넘어가고 있었다. 윤도운과 관련된 모든 것은 내게 결코 작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처음에는 빵 봉지를, 김밥 포일을 버리는 거조차도 아까워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다. 보다 못한 김원필이 쓰레기를 싹 다 모아 버렸던 그날이 아마 나랑 김원필이 가장 크게 싸웠던 날일 거다.
"그래서, 고백할 생각은 여전히 없고?"
"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아니 대체 왜? 야 이 정도 진정성이면 얘도 무조건 너 좋아해. 아니다 좋아하는 거 까진 아니어도 호감은 있어 백퍼야."
"아 아니라니까 이상한 말 할 거면 꺼져."
입을 비죽 내밀고는 제 자리로 돌아가는 김원필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단어장을 폈지만 단어들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도운, 윤도운, 윤도운. 이 세 글자가 내 머릿속을 휘적휘적 휘젓고 다녀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을 다 막아버렸다. 윤도운이 내게 베푸는 모든 호의의 이유는 나와 윤도운이 친구이기 때문이다. 윤도운에게 나는 가장 친한 오래된 친구일 테니까. 그런 친구를 챙기는 것은 윤도운에게 당연한 일일거다. 이런 애한테 어떻게 좋아한다 말을 할 수 있겠어. 차라리 쭉 친구로만 지내는 게 윤도운과 어색해지는 거 보다는 백배 나은 걸 알기에 나는 오늘도 친구라는 단어 뒤에 내 마음을 꼭꼭 감춘다.
1-2
비가 온다.
"우산 없어?"
"엉, 내 좀 씌워도."
씨익 웃으며 내 우산을 가리키는 윤도운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누구는 지금 한 우산 쓰고 걸을 생각에 벌써부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데, 너무나도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윤도운이 조금은 밉다.
"... 니가 들어."
"그래야지. 우리 여주 쪼끄매가 니가 들면 우리 다 불편하다 아이가."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어깨를 감싸오는 윤도운에 내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윤도운한테까지 들릴까 두렵다. 집에 가는 20분이 20시간처럼 느껴진다. 저 앞에 보이는 아파트가 유난히 반갑다.
"나 갈게. 이거 쓰고 가고 내일 줘."
"알았다. 진짜 고맙다. 내는 여주밖에 없다."
윤도운은 꿈에도 모를 거다. 자기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을 나는 몇 날 며칠을 곱씹고 되뇐 다는 것을 윤도운은 절대 모를 거다. 도저히 눈을 쳐다볼 수가 없어 시선을 내리자 푹 젖어있는 윤도운의 한쪽 어깨가 보인다. 또다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아 김여주. "
"...왜."
"요즘 계속 춥다 안 하나. 따뜻하게 좀 하고 다녀. 이거 잠깐 들어봐라."
우산을 맡긴 윤도운이 내 후드집업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는 양손으로 내 볼을 그러쥔다.
"감기 걸리면 니만 고생이다. 옷 잘 챙겨 입어라, 알았제."
이미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고 있다. 묻고 싶다.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고. 왜 너는 사람 속도 모르면서 계속 다정하게 구냐고. 니 행동 하나하나가 나한테 어떻게 다가오는지 알긴 하냐고. 볼을 붙잡고 있던 윤도운의 손을 잡아 내렸다.
"야, 윤도운."
"엉."
"너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어?"
"나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냐고. 왜 맨날 더 못 챙겨줘서 안달인 건데? 니가 우리 엄마야?"
북받치는 감정에 말이 거칠게 나간다. 이러면 안 되는데, 눈물까지 터져 나오려고 한다.
"김여주 니는 뭔 말을 그렇게 하노."
"......"
"우리 친구 아이가. 내가 내 친구 안 챙기면 누가 챙기는데. 그제?"
환하게 웃는 널 보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나한테 넌 이미 오래전부터 친구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목구멍까지 올라온 좋아한다는 말을 삼켜냈다.
+
현생보다 도운이를 더 소중히 여기라는 옛말이 있었지요.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 생각하며 현생은 던지고 도운이 데려왔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