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찬열경수] 망향 07
형편없이 늘어나 있던 고무줄을 몇번씩이나 옭아맨 후에야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있는 창백한 여자의 얼굴이 꽤나 수척하다. 한쪽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만지며 혼잣말로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댔다. '너 도대체...무슨 일이 있었어..?'
그렇게 도경수와 말다툼아닌 말다툼을 하고는, 학교가 파하고 난 뒤에 같은 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도경수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싸한 분위기에 아저씨들이 눈치를 보는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냥...,그래 그냥 도경수라는 인간에 대해 치가 떨렸으니, 죽은 친구의 여자를 흠모하고 또 기억을 잃었다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거짓말을 뻔뻔스레 뱉었으니. 멍하니 거울을 보다가, 앙상한 팔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전에 일기장이 고스란히 놓여져있다. 처음 이 일기장을 열었을 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일기장 겉표지를 어루만져보았다. 오래되어 코팅이 벗겨진건지 일부분이 까끌까끌하게 되어버린 종이 위 적힌 이름이 참 불쌍하다, 김여주. 어쩌면 전에 살던 나만큼 괴로웠을 거 같은 느낌이 든다.
"죽었을 때 많이 아팠어요?"
낡은 일기장 사이 고이 껴두었던 사진을 빼내어, 불에 지져져 구멍 뚫린 얼굴의 남자에게 조용히 물었다. 나도 한번 죽었었는데, 난 고통도 못느끼고 이 곳으로 날아와버렸어요. 들리지도 않을 말을 중얼거리며 세훈의 사진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어 한 번 슥 문질러 보았다. 그와 함께,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 핏빛의 질펀한 동정심이 샘물 솟듯 뿜어져 나온다. 내 일도 아닌데 꼭 내가 겪었던 일처럼 그의 죽음이 참 가슴을 시리게 못박는다.
"여주야."
"...."
"밥 안 먹을거야?"
"...."
"...휴.. 문 앞에 음식 두고 갈게. 먹어."
주말내내 도경수와 말한마디, 밥 한끼 함께 하지 않았다. 어쩌면 괜한 오기였다. 처음에 이런 나를 보고 도경수는 신경 안쓴다는 척 쌩하더니, 한끼 굶은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내 방문 앞에 서서 계속 안절부절 못하는 그가 대답없는 독백을 한다. 이틀째 이렇게 문도 안열어주고 단식투쟁을 하는 나에게 지친듯 갈라진 목소리는 그의 걱정이 한숨으로 몽글몽글 더더욱 불어나고 있는걸 보여주는 것 같다. 안봐도 눈에 선한 도경수의 축쳐진 동그란 뒷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다보니 어느새 사라진 도경수의 걱정어린 말과, 발소리가 끊기고서야 한참뒤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따뜻한 돈가츠덮밥과 단무지, 물 한컵이 쟁반 위에 놓여져있었다. 너풀거리는 티 안에 손을 집어 넣자 꼬르륵 하는 소리가 손을 웅웅 울린다. 어제부터 굶었더니 배고프긴 무진장 배고프다. 조금 자존심 상해도 밥은 먹어야지. 날 보는 사람은 없는데 괜히 눈치보며 쟁반을 방안으로 끌어놓은다음 조심스럽게 문을 다시 닫아 잠궜다.
맛있겠다, 생각하며 한 술 크게 뜬 덮밥을 입에 넣었다. 몇술 뜨고나니 쪼그라든 배가 꽤나 찼다. 워낙 허기졌던 탓에 정신없이 먹느라 찬열이 웃으며 나를 보고 있던 것도 모를 정도였으니. 우걱우걱 먹다가 찬열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수저를 내려놓아버렸다. 입안 가득 밥알이 채워진지라 볼이 빵빵할텐데, 창피하게.. 왔으면 인기척이라도 내지. 저 요정은 항상 몰래 오더라.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입안에 있는 음식을 빠르게 씹다가 꿀꺽 삼키고 나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많이 맛있나봐?"
"아니,왜 그 쪽은 벌컥 벌컥오는 거예요? 내가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으면 어쩌려구?"
그럼 나야 좋지, 능글 맞게 웃으며 대답하는 찬열때문에 한껏 당황했다. 사실 많이 맛있나봐?하고 장난치는 찬열에게서 느끼는 민망함에 화제전환차 꺼낸 말이었는데, 이거 오히려 내가 역관광당한 기분이다. 대답도 않고, 시뻘개진 얼굴로 괜히 쟁반 위에 놓여진 투명한 유리컵을 들어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한쪽눈을 심하게 찌푸리면서까지 웃는 찬열 때문에 나또한 비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진짜 선수같아. 나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이러죠?"
"아아니~ 나 너빼고 인간이랑 얘기 안해."
"정말요? 그럼 나하고만 얘기하는 거?"
"응. 정말."
생각치도 못했던 그의 말에 기색은 안했지만 정말 놀랐다. 나말고 다른 사람들도 영혼 바꿔주느라 바쁜 건줄만 알았는데.
"그럼 나처럼 이렇게 해준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뭐 그렇지. 영혼을 넣을 수 있는건 요정 일생에 단 한번 뿐이라니까."
"...근데 왜 나였어요?다른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건 왜? 설마 아직도 후회해?"
아니, 후회하는 짓은 진작에 관뒀던 일이다. 예전 살던 집을 찾아가 한바탕하고 난 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이 세계에 와 처음으로 정리했던 감정이 바로 전생의 삶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었다. 내가 지금 찬열에게 물은건 후회에 대한게 아니라 원래 궁금했던 진실이었다. 찬열이 선택한 인간이 왜 나였는지. 그리고 왜 이 여자였는지. 모두 다. 그저 말없이 울렁거리는 눈으로 찬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내 눈을 제 큰 눈으로 한참 쳐다보던 찬열이 이내 내가 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 가까이에 있던 자기 얼굴을 뒤로 쑥 빼며 손사래친다.
"어후, 알았어. 알려주면 되잖아. 너 진짜 무섭게 쳐다본다. 한 대 팰 기세야."
"말길게 늘이지 말죠?진짜 한대 패기 전에."
"...음..그냥 너가 좋아서?"
"...아..그..뭐더라, 그 쪽이 내 수호요정? 그런거라서요?"
그냥 너가 좋아서?하는 실없는 말과 함께 뒷머리를 긁적이며 실실 웃던 찬열이 내 마지막 질문을 듣고는 약간 표정을 굳히더니 어느새 내 옆으로 순간이동해 코앞까지 왔다. 그 놈의 순간이동은 매번 겪는 건데도 심장 쫄리는건 면역이 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찬열의 뚜렷하게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 있는게 면역이 되지 않는 건지 모르겠지만 순간 숨을 흡 들이마시고 입을 벌려 깜짝 놀란 표정을 바보같이 지어버렸다. 항상 이렇게 날 순간이동으로 깜짝 놀래키면 '놀랐지!'하며 와하하 웃던 찬열이었는데 이번엔 다르다.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날 보던 찬열이 무언가가 맘에 안드는건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내 귀에 제 입술을 가까이 대더니, 이내 입술을 달싹인다.
"아니, 너가 좋아서."
그 말을 내 귀에 짧게 뱉고 자기도 부끄러워졌는지 괜히 내 어깨에 자기 얼굴을 묻으며 큭큭대더니 한 손으로 내 허리를 감아 어리광부리듯 하는 찬열이었지만, 나는..그걸 당한 나는...새빨개져있을 얼굴이 너무 빤해서. 오히려 내 얼굴도 못쳐다보며 부끄러워하는 찬열의 등을 덤덤하게 토닥였다.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소리가 이미 나라는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요새 늘 푸르렀던 하늘이 어제 새벽부터 내린 비에 어두컴컴해졌다. 그 때문에 교실 안이 더 환해보인다. 사실 오늘이 원래 체육대회날인데 기상예보에도 없던 비가 멈출 기미도 보이지 않으며 내리기 시작한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선생님 긴급회의로 1교시를 홀랑 버렸다. 어수선하게 떠드는 아이들 틈 사이 도경수는 피곤한지 자기 책상에 엎드려 숙면을 취하고 있고, 여자아이들은 저들끼리 다니는 아이들끼리 동글게 모여앉아 삼삼오오 웃음꽃을 피우며 이야기한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 무리 중 한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놀라 잽싸게 책상위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 여자애는 날 한참 쳐다보더니 이내 '나 잠깐만.'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물밀듯 들어오는 초조함과 불안함에 다리를 떨며 애써 덤덤한척 하려 했지만 그 여자애는 금세 여기까지와 내 책상 옆에 서있다.
"여주야, 할 일 없으면 우리랑 얘기할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 여자애를 쳐다보았다. 예쁘게 생긴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걸려있지만 난 숨기고 있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내 이야기를 안주거리삼아 이야기 하려는 그런 뻔하고, 수준 낮은 생각이겠지.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지만 '에이~그러지 말구 놀자~'하며 막무가내로 내 손목을 잡고 이끄는 탓에 억지로 그 무리 사이에 불편한 합석을 하게 되었다. 맘에 안든다는 표정을 팍팍내는 내가 싫을 법도 한데, 굳이 자기 옆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주도해 나간다. 명찰을 보니 '우진주'라는 이름의 아이였다. 진짜. 이 학교 온지 꽤 된거같은데도 처음보는건데 되게 맘에 안들어. 혹시나 도경수가 여기 껴있는 나를 본다며 이 틈에서 구해주지 않을까 싶어 뒤를 슥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숙면 중인지 그 자세 그대로 누워있다. 에휴 평소엔 날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진짜 위급할땐 자냐. 혼자 생각하며, 고개를 작게 절레절레 저었다.
"얘들아 알다시피 여주가 전부터 많이 아팠잖아. 우리가 친구해주면 어떨까?"
우진주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날 데려와 놓고 한다는 소리가 바로 저딴 말이었다. 저 아인 가식 덩어리였다. 한껏 착한 양의 탈을 쓰고 저런식으로 말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자신이 천사표임을 방증하는 듯 했다. 몇몇 애들이 우진주의 등을 내 눈치를 보며 살짝 치며 '야 넌 착해서 탈이야.'하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의도를 다 눈치채고 있음에도 우진주 뜻대로 일부러 움직여주는 그녀의 친구들. 와, 얘네 사람불러다 놓고 뭐하는거지? 슬슬 언짢아있던 기분이 더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쌩쑈하고 있는 그들을 한참 쳐다보는데 다른 여자애가 까랑까랑한 웃음이 담긴 큰소리로 말한다. '큭큭 너네 그러다 저주받아. 오세훈저주.'.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애들이 깔깔대며 웃는다. 간간히 '그거 조온나 무섭네.', '저번에 자살한 애들 걔네도 오세훈저주 걸린거라며?'하며 비웃듯, 또 너무 그들의 죽음을 가벼이 말하는게 귀에 난도질 당하듯 들어온다.
"아참, 김여주씨는 기억을 잃어버리셔서 오세훈이 누군지 모른다네?"
"...그만해."
"너 오세훈 진짜 기억안나? 아.걔가 기억나면 넌 죽어야지. 걔가 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라면 따라서 죽을거같은데."
"...그만하라고 했어."
"오세훈 걔도 인생 존나 불쌍하지. 찐따새끼가 병신같이 지한테 잘해준다고 이 미친년한테 홀려가지곤 그렇게 뒤졌으니."
아이들이 옆에서 부추기듯 자기를 도와주자 제딴엔 힘이 난건지 어쩐건지, 본색을 드러내고 비꼬는 우진주의 말이 세번째 떨어지자마자 꽉 쥐어말았던 주먹을 펴 바로 그녀의 볼에 냅다 쳐버렸다. 주위에는 꺅꺅거리는 소리와, '뭐야.'하는 도경수의 낮고 작은 목소리가 들리고, 내 눈 앞에는 한껏 옆으로 돌아간 우진주의 고개가 보인다. 어이없다는듯 허,허.하는 짧은 실소를 내뱉는 그녀가 이내 머리카락이 다닥다닥붙은 고개를 제대로 들어 눈을 부라리며 내게 달려들며 소리친다. '씨발 이 미친 걸레년이.'
그 말을 끝으로 시작된 싸움. 서로 할퀴고 욕하다가 결국 둘 다 서로의 머리카락을 양손가득 움켜쥐는 꼴이 되어버렸다. 도경수와 다른 남자애들 몇명이 달라붙어 떼어낸 후에야 이 우스운 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나고 나서야 아리는 상처부위에 눈물을 글썽이는 한편 씩씩대며 우진주를 노려보는데도 도경수는 그 시선이 보이지 않는 단 것처럼 말없이 자기 손가락으로 엉킨 머리를 빗다가 손수건으로 볼을 꾹 누른다.
"볼.피나."
"....쟤 진짜 싫어.."
도경수와 한동안 일방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었음에도 기분상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이렇게 날 챙겨주는 모습에 그래도 이 세상에 내 편하난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나도 모르게 애처럼 울먹거리며 '쟤 진짜 싫어.'라고 말하자. 여전히 내 볼에 손수건을 댄채로 나지막하게 말한다.
"나도 싫다."
"...."
"아직도 널 괴롭히는 쟤네도 싫고."
"...."
"널 괴롭게 만드는 나도 싫고, 또."
"...."
"...이렇게 너의 인생에서 좀처럼 떠나지않는 오세훈도 싫어."
잠에서 깬지 얼마 안되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 새로 새어나온다. 무뚝뚝하고, 자조적인 어투였다. 그래서일까, 먹먹하게 차오르는 이상한 감정을 대변할만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그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채 흐르는 시간을 원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