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화희[後宮火熙] : 3
"마님, 자금성에 도착하였사옵니다."
황상궁의 언질에 화희는 가마에서 천천히 내렸다. 궁문을 들어서지 않고 가마를 내림에 화희는 황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태형을 찾았다. 마마, 혹 나으리를 찾으시는 것이옵니까. 황상궁은 나지막히 읊조렸다. 화희는 태형을 찾던 눈빛을 갈무리 하며 황상궁에게 물었다. 어찌 궁문 밖에서 내리라 하느냐? 화희의 물음에 황상궁은 화희의 심기를 건들이게 될까 고개를 연신 숙이며 답했다.
"자금성은 황제폐하와 황후마마만이 중문으로 입출 할 수 있사옵고 비빈들은 이쪽 문으로 입출을 하되 친왕과 친왕부의 사람들은 모두 가마에서 내리어 걸어 가야 하옵니다. 폐하의 비빈들 중 황후마마만이 의가를 타시고 다른 비빈은 의장을 타고 입출을 하지만 간혹 품계가 낮은 비빈은 저희와 같사옵니다."
"이곳도 조선과 같이 계급이 정확히 나누어져 있구나. 아니 어쩌면, 조선보다 더 한 곳이야."
"마님,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영친왕께서는 이미 황제폐하를 알현하고 황후마마를 뵈러 가기 위해 마님을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서두르지 말거라, 어찌 되었건 나는 저들의 눈엣가시 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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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마마, 영친왕부 복진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하게."
황후의 말과 함께 화희는 황후궁으로 들어섰다. 첩첩 쌓인 궁문과 시위들을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보게 되는 시어머니였다. 화희는 조신히 걸어 들어와 인사를 하였다. 황후는 작게 인상을 쓴 얼굴로 화희에게 인사를 거두라 일렀다. 영친왕과 함께 오지 않고, 어찌 혼자 오는 것이냐? 황후의 물음에 서툴게 배웠던 청의 말을 하려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화희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곤 황후의 눈을 바라보았다.
"영친왕께서는 황제폐하를 알현하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그래, 그리 들었겠지. 허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또한 듣지 않았느냐? 어찌 뒷말은 잘라먹은것인지. 조선은 제 지아비도 모른 척 하고 시부모께 인사를 올리느냐? 지아비를 우스이 여기어 효를 다하지 않음에 일벌백계 해야겠구나. 복진이 이럴진데 영친의 후첩인 측복진들은 행실이 어찌 될지 안봐도 뻔하니… ."
황후는 혀를 끗- 하고 차며 화희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앉으라는 언질도 없이 한참이고 화희를 세워두고 따뜻하던 차가 식을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희는 점점 시리듯 아려오는 무릎에도 아랑곳 않고 꿋꿋하게 서 있었다. 밖에서는 석진이 화희를 기다리다 못해 황후를 뵈러 온 것인지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황후궁의 시위들에게 가로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이 묶여 있었다. 황후궁 밖에서 들려오는 화희를 부르는 석진의 목소리에 화희는 이내 황후에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황후궁 안의 궁녀들과 화희의 심복인 황상궁마저 당황한 얼굴로 화희가 나간 쪽만 바라보았다. 황후가 아무런 언질도 없는데 함부러 나가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화희는 황후궁 문 앞에 시위들에게 가로막힌 석진에게 인사를 올리곤 석진의 손을 잡고 황후궁으로 들어섰다. 황후는 얼이 나간 얼굴로 화희를 바라보았다.
"복진, 아주 무례하구나. 그 무례함에 본궁이 할 말을 잃었네."
"어찌 그러시옵니까, 어마마마. 저는 그저 조금 전 어마마마께서 내리신 가르침대로 지아비의 곤혹을 우스이 여기지 않은 것 뿐이옵니다."
"곤혹? 나는 영친의 친 어미이니라. 그런 내가 행한 일이 영친에게 곤혹이란 말이더냐?"
"제가 생각이 짧았으니 또 다시 가르침을 주십시오, 어마마마. 소인이 미천한 나라에서 온 일개 옹주일 뿐이라 청 황실의 법도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여 일어난 일이니 어마마마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조금 전처럼 몇시진이고 어마마마 곁에 서 있을 터이니 제게 귀한 시간을 내어 지아비를 섬기고 효를 다하는 법을 알려주세요."
화희는 좀 전과는 달리 눈을 내리깔고 황후에게 답했다. 석진은 얼굴에 피어오르는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황후는 그런 석진과 화희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석진은 여전히 꿇어앉아 예를 표하는 화희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화희는 서둘러 석진에게 잡힌 제 손을 빼내었다. 허리춤에 끼워두었던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맺힌 땀을 살짝 닦는 시늉을 하곤 석진의 옆에 섰다.
"형수님께서 아주 당차십니다, 어마마마."
"7황자 왔느냐. 폐하를 뵈러 입궁을 해도 이 넓은 황궁에 홀로 있는 어미 한 번 보러 오지 않더니 어쩐 일로 걸음을 하였느냐?"
"형님과 형수님께서 입궁하시어 어마마마를 뵈온다기에 소자도 뵈러 왔습니다."
"7황자님을 배옵니다."
갑작스런 정국의 등장에 황후는 입가에 만연히 피어오르는 미소를 주채할 수 없어 보였다. 화희는 황후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다 이내 석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석진은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얼굴로 황후와 정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무언가 있구나. 화희는 속으로 몇번이고 뇌까렸다. 어쩐지 저를 청의 귀한 적통의 정실로 들인 것 부터가 이상했다. 무언가 하나씩 아귀가 들어맞아 가는 것 같았다.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이건 명백한 사기 혼인 이었다. 적통에 1황자라 곧 황제가 된다더니, 혼례를 올리기 전 제게 투기하지 말라며 진정시키던 석진의 말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 말들은 내게 여인의 칠거지악 중 최악인 투기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석진이 황제가 되지 못하여도 그 자리에 대한 투기나 욕심을 금하라는 뜻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화희가 조금 비틀거리자 석진과 정국이 화희를 부축하였다. 화희는 정국의 손을 쳐낼 정신도 없이 석진의 손을 꼭 잡아 끌었다. 왕부로 돌아가자는 모종의 뜻을 담은 행동이었다. 석진은 곤란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어마마마, 부인께서 많이 힘든 것 같으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석진은 황후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화희의 손을 꼭 잡고 황후궁을 나왔다. 정국은 다급히 황후궁을 빠져나가는 두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화희는 한참이고 석진의 손에 이끌려 황후궁을 나와 걷다 이내 석진의 손을 뿌리쳤다. 석진은 화희가 무언가 눈치챈 것을 알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석진과 화희의 사이에 무겁게 가라앉은 적막만이 쌓였다. 황상궁은 둘 사이에서 그 어떤 말도 올릴 수가 없어 그저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고개를 조아렸다. 화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깊은 숨을 들이 쉬었다 천천히 내쉬었다. 적통, 거짓이었습니까? 화희의 간단명료한 질문에 석진은 고개를 저었다.
"적통입니다."
"황후께서는 황자님을, 낳으셨습니까?"
"어떤 비빈이 낳은 황자라 할지라도 모두 황후마마의 아이입니다."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화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석진은 그런 화희를 바라보다 덩달아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을 느꼈다. 그와 함께 분노도 일었다. 석진은 꺼내지 않으려 했던 말들을 씹고 씹어 내뱉었다. 나의 친 어머니께서는 궁녀입니다. 황제께서 왕부에 계시다 황제로 등극하신 후, 처음으로 안은 여인이 제 어머니란 말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어머니께서는… . 석진이 말을 맺지 못했다. 화희는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제 부군이 어머니를 죽인 사람을 어머니라 부르다니, 정말, 이건 정말… . 화희는 파르르 떨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석진은 물기어린 목소리로 담담히 말을 꺼냈다.
"내가 적통이 된 이유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황후께 제 알량한 자존심을 모두 던져버리고 굽히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내가 황후께 태후를 만들어 드리겠다 약조 했기에 황후는 나를 양자로 들이고 적통이라는 명분을 내렸지. 분명 아이를 낳지 못하는 냉한 몸이라 했는데, 내가 적통으로서 황제의 덕목을 배우고 있을 때 황후께서 7황자를 품었습니다."
"다 거짓말이었어. 다 거짓이었군요. 내가 어찌 차기 황제의 복진이 될까, 수십 수백번을 더 생각했습니다. 결국 끝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였어요. 공녀를 황후로 올릴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난 그저 내 어머니께서 무사하기만을 바라고, 내가 청의 황후가 되어 조선의 내 집안을 알뜰히 보살필 궁리만 했어요. 내가 우스워 보였겠군요. 제가 황자님과 혼례를 올리러 조선에서 청으로 넘어올 때 제게 투기를 멀리하라 하셨지요. 이것이었습니까? 높은 자리에 대한 열망과 그 자리를 빼앗을 7황자를 투기하지 말라는 말이었어요?"
화희의 말에 석진은 눈물을 흘렸다.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면 당신이 행복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이제보니 전부 내 착각인 것 같습니다. 석진의 말에 화희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저는 황후가 되어야 겠어요. 황후가 되지 못하면 이 넓은 자금성에 제일 낮고 천한 여인으로라도 들어와 복수를 할 것입니다. 황자님께서도 최선을 다하세요. 최선을 다해서 그 자리를 지키세요. 적통, 그 적통이라는 명분을 절대 7황자님께 빼앗기면 안됩니다. 화희는 석진에게 모진 말들을 뱉어내곤 급히 걸어 궁문으로 향했다. 석진은 화희가 지나간 길만 눈으로 쓸어보다 이내 두 주먹을 꼭 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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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과 데면데면해 진것도, 청나라에 온것도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화희는 그 시간동안 황후에게 제대로 된 문안 한 번 올리지 않았다. 황제 또한 화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동안 정국은 왕부의 문턱이 닳아 없어질만큼 수없이 화희를 만나러 왔다. 화희는 그런 정국이 제게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인지 몇번이고 궁리를 했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 정국이 저를 찾아오는 일은 대개 황궁에서 가져온 맛있는 간식이라던가 황궁 안에서 하는 연례행사에 꼭 참여해 달라는 부탁 혹은 황제에게 하사받은 귀한 물건들을 구경시켜준단 명목으로 선물을 하는 일들 뿐이었다. 화희는 그런 정국이 불편하여 몇번이고 문전박대 했지만 그럴때마다 형수님이 누이같아 그러니 모질게 굴지 말아달라는 애원만이 돌아왔다. 석진은 그런 정국이 신경쓰이면서 그렇지 않은 척 은근히 화희의 처소 주변만 맴돌며 정국과 화희의 대화를 엿들을 뿐이었다. 며칠간 정국의 발걸음이 뜸해지자 화희는 이제라도 제게 캐낼 것이 없어 발길을 끊었다 생각하고 오랜만에 조용히 태형과 자신의 처소를 서성였다. 태형은 여전히 청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조선의 의복을 하고 갓을 써 영친왕부 노비들의 화두에 몇번이고 오르내렸다. 태형은 그들은 전혀 아랑곳 않는 듯 한참이고 그늘 아래 화희와 서서 갓을 만지작 거리더니 이내 화희의 눈치를 살피다 소매 안에서 상자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조선에서 당도한 서찰이다."
"서찰을 누가 이리 담아서 준단 말입니까."
"…그게, 서찰이 하나가 아니라서이다."
태형의 말에 화희는 미간을 옅게 찌푸리 상자를 슬쩍 열어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많아보이는 서찰에 당황한 얼굴로 태형을 바라보다 이내 멎쩍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자리를 피하는 태형에 화희는 서둘러 처소로 서찰을 들고 들어왔다. 무언가 엄습하는 불안감에 도저히 혼자서는 열지 못할 것 같아 조선에서부터 함께한 황상궁에게 대신 상자를 열라 일렀다. 황상궁은 주위에 있던 노비들을 모두 물리고 화희를 작은 탁자 앞에 앉혔다.
"마님, 이건… ."
조선의 궁에서 온 서찰이 틀림 없었다. 화희는 속으로 수천번을 되뇌었다. 절대 아니어야만 한다. 어머니께서는 전하께서 분명 잘 살펴 주신다 하였다. 조선에서 내노라 하는 최고의 어의들을 붙여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리라 약조하였다. 화희는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열었다.
내용은 화희의 바람이 무색하리만치 잔인했다.
어머니의 부고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수없는 눈물로 써내려간 어머니의 서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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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작가입니다.
처음으로 작가의 말을 써보네요
우선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렇게 작가의 말을 쓰게 됐어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조선에서 청으로 화친을 빙자한 공녀로 차출되어 온 옹주 '화희' 입니다.
화희는 첫화에서 유추했듯이 조선 왕의 친자가 아니며
부와 명예를 가지려던 화희의 친아버지에 의해 조선 왕의 양녀로 입적되어
조선의 공주 대신 청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어요.
남자주인공은 7황자인 '정국' 입니다.
시작부터 많이 혼란이 오셨을 것 같아요.
화희는 1황자인 석진이에게 시집와 차기 황제의 복진, 그러니까 정실부인이 되어
후에 황후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제목은 '후궁화희'입니다.
청나라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형제들끼리의 싸움이 잦아요.
그로인해 화희는 남편도 잃고 돌아갈 조국도 잃고..
그러다 화희는 어떠한 계기로 인해 정신을 차리고
복수를 위해 청의 황실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로맨스와 궁중암투가 많이 준비되어 있어요.
앞전 화에서 보셨듯이 화희는 그리 호락호락 당하는 성격의 주인공이 아니랍니다.
받은건 되로 갚아주어야 하는 성격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짓물린 상처로 인해서 누군가는 그 상처를 감싸줘야 하죠.
그 부분은 크게 정국이가 차지하겠지만
정국이 외에도 화희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어진 이들은 많아요.
그러면서 서서히 자신을 혐오하고 복수만 꿈꾸던 화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스토리 입니다ㅠ-ㅠ
아주 긴 대장정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어쩌면 느리게 굴러갈 것 같고요.
저랑 함께 느리더라도 천천히 서사를 써내려 가실 독자분이 계시다면
저는 더할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럼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좀 더 다듬어진 다음화로 찾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