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지민 |
진짜 예쁜 꽃이 있었는데 너랑 닮아서 가져왔어. 뿌리까지 살리느라 좀 힘들었다. 언제 물을 줘야 할지 몰라서 일주일에 한 번씩 주는데 죽지 않는 걸 보니 매주 일요일 오후 두시에 꼬박꼬박 물을 주면서 네 생각해. 너는 노란색을 닮았어. 생기 있고 발랄하고 햇빛을 받으면 찬란하게 빛나는. 그래서 이 꽃도 노란색이야. 열심히 키워서 성숙해지면 네 옆에 데리고 올게. 네가 질투하는 건 아닌가 싶다. 지금은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햇살이 너무 좋아서 네가 선문해준 양산 쓰고 왔다. 대나무로 만들어 진거라 향이 달라. 아 그 얘기를 안했네. 네가 죽고 나서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 아파트라는 것도 생기고 사람들이 한복입고 돌아다니지 않아. 네가 궁전에서 입었던 가장 좋아하는 한복은 이제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으로 바꾸었더라. 진짜 예쁜데. 네가 입으면 더 예쁘고. 항상 그랬지. 내가 널 찾아오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왕의 옆을 지켜야 하는 무사가 왜 자꾸 이쪽으로 오냐고. 모르는 척 하면서 문 열어주는 네가 예쁘고, 왕은 언제 올까 기다리면서 지치는 네가 예쁘고, 정체성을 버리고 와서 하녀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도 예쁘고, 몰래 강가에 와서 발을 담구고 참방참방 발장난을 치는 네가 예쁘고, 그냥 네가 예뻐서. 너 자체가 예뻐서 그렇게 많이 왔는데. 오늘은 너랑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날이야. 며칠 후면 장마거든. 네가 그랬지 비와서 쓸쓸한 날엔 나와 같이 있어 주겠다고. 왕이 찾으러 와도 숨어 있다가 나와 함께 비를 맞겠다고. 왕도 없고 너를 시기할 다른 사람들도 없는데, 왜 너도 없냐. |
정국지민 |
맑게도 빛난다. 나는 여기 앉아있는데. 발끝이 더럽게 섬세하다. 나는 걷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지민은 침대에 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사람같이 걸으려 개같이 노력했다. 그동안 자신만을 바라보던 정국은 지민이 걷던 골목길을 대신 걸었다. 아름답다고만 느꼈던 자태를 따라 하며 갖고 싶었던 성과를 대신 목에 걸었다. 지민이 잠든 척 누워있으면 언제나 볼에 입맞춤을 한 뒤 오늘은 사과라는 열매를 따 먹었고 내일은 포도라는 열매를 따먹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면 알 수 없는 기분에 끝까지 눈을 뜨지 못하고 정국이 나갈 때까지 그저 숨 쉬는 송장처럼 가만히 있었다. 정국은 열매를 곧이곧대로 지민에게 바쳤다. 형, 형이 그 길을 바라보지 않는 동안 내가 꾸려놨어요. 어서 봐줘요. 형은 이 길을 따라 오기만 하면 돼요. 그냥 일어나서 한 번만 움직여도 금방 올 수 있잖아요, 형은. 두 손을 꼭 잡으며 애원했다. 이제 그만 자는 척해도 돼요. 붕대를 푸르고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지민 혼자 서있었다. 차갑고 시큰시큰하고 저려오는 것이 주저앉고 싶었다. 정국이 오기 전에 빨리 나가고 싶었다. 찾지 못하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왜? 왜냐고 물으면 단지. 지민은 한 문장만이 머릿속에서 하염없이 맴돌았다. 정국아, 나는 네가 추는 춤을 보고 있으면 너무 서러워. 모르겠다. 몇 없는 짐을 싸고 절뚝거리는 다리로 병원을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무작정 택시를 타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내려달라며 엄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냥, 내 심보가 고약해서 더럽고 추악해서 이렇다고 생각해줘, 정국아. 미안해. |
태형지민 |
말은 잘 못하면서 강단 있는 게 대화를 몇 번 하다 보면 한 고집하는구나 알 수 있다. 바보같이 실실 웃으면서 의사표현은 정확하게. 그게 매력이다, 김태형은. 그러다 한 번씩 어긋날 때가 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이 풀리지 않을 때 혹은 너무 잘 풀려서 불안할 때. 웬일로 잘 풀린다 싶은 연습이 태형은 맘에 들지 않았는지 같은 부분은 수십 번 반복했다. 불안해서? 아니면 너무 잘 풀려서? 틀릴까 봐? 널찍한 콧볼을 검지로 건드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그 부분이 거슬리나 보다. 멍한 머리가 뻣뻣하게 움직인다. 움직이라고 관자놀이 부근을 두드렸다. 울리는 느낌이 알딸딸해서 드러누웠다. 너는 내가 거슬렸는지 슬금슬금 다가와 쭈그려 앉았다. 내 이마에 손을 올리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더니 사정없이 흔들었다. 야, 일어나. 야. “너 감기냐?” “몰라.” 들어가자. 조금만 더 연습하다 가자. 아픈 주제에 무슨 연습이야.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팔을 잡고 일으키려 용을 썼다. 바닥을 짚고 일어나니 핑 도는 느낌에 거울을 등받이 삼아 기댔다. 차갑다, 시원해. 내 가방을 언제 챙겼는지 양 어깨에 두 가방을 하나씩 매고 가자며 연습실 문을 열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자 같은 동작을 반복했을 때처럼 미간을 웅크렸다. 맘에 안 드나 보네. 빨리 와라, 오빠 팔 떨어진다. 오빠는 지랄. 간다, 가. 너는 이상하게 표정으로 나를 움직일 때가 참 많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
윤기지민 |
박지민은 알 수 없다. 마냥 어린 아이 같다가도 어느 순간의 눈동자를 보면 세상을 잃은 늙은 노파의 향이 난다. 그럴 때마다 일부러 더 건드려 지금으로 돌려놓는 게 나의 작은 일부 중 하나다. 너는 나에게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괴롭히는 게 아니라 깨우는 거야 등신아. 샤워를 하고 나와 소파를 보면 너는 걸레짝처럼 널브러져 있다. 어린 나이에 하고 싶은 날갯짓을 접고 우아함 따위는 쥐뿔도 없는 힙합을 하고 있으니 속이 얼마나 뭉개져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노래 부르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것. 이것마저 흥미를 잃으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겠지, 그딴 눈빛으로. 억지로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야, 박지민. 씻어. 예에. 잠이 안 깼는지 작은 눈을 깜빡이며 방으로 가는 꼴이 영 시원찮았다. 너에게 다가가자 땀 냄새가 훅 끼쳤다. 죽자고 덤비는구나. 나는 옆에 아빠 다리로 앉고 물었다. “안 지치냐.” 서랍 속에서 속옷을 꺼내다 멈칫 하는 게 사실 힘들었나 보다. 내색 좀 하지. 너랑 동갑인 누구처럼. 방금 꺼낸 것들을 품에 안고 그 텅 비고 허름한 눈빛에 맑은 웃음을 덮었다. 괜찮아요, 형.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네가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너무 텅 비어버린 느낌에 거실로 뛰쳐나왔다. |
정국지민 |
나의 존경하는 그대여 여전히 아름다운지 궁금하군요. 한 마리의 공작새처럼 우아하고 도도한 당신의 발이 난장판이었던 것을 나는 기억합니다. 개구리 발보다 더 울퉁불퉁하고 무언가에 베인 상처들로 가득한 양 발에 입을 맞춘 지도 어느덧 삼 년이 지났군요. 아름답던 당신이 강변 아래로 가라앉을 때 나의 서러움을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영원히 깨지 못할 꿈을 꾸려 그곳에 들어갔는지, 너무 행복한지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내 무의식을 두드리는 당신을 만져보고 싶습니다. 여전히 곱겠죠. 가시 돋친 말에 한껏 찔리면서도 그것이 당신이 준 상처라서 감사하게 감싸 안아 연고 한 번 바르지 않는 나를 보며 남들은 독하다며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죠. 그래도 어떡합니까, 당신이 준 것은 어떤 것이라도 너무 감사한데. 나는 오늘도 이 곳에 있습니다. 당신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 아등바등하는 나를 보고 있을까요. 당신의 시선은 어디를 머무르고 있을까요. 맑지 않은 하늘? 무너질 듯이 아슬아슬한 다리? 제 앞길만 보고 가는 자동차? 열심히 찾으려다 빠질 것 같아 자세를 고칩니다. 차라리 나도 빠질까요. 당신 옆이라면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겁쟁이라서 상체만 숙이고 다리에 힘을 빼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마주할 가치가 없습니다. 결국 나는 당신이 잠든 그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하루를 끝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