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
Eminem, stan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편지를 쓰는 거라 참 어색하네요.
나는 얼마 전에 성규 씨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된 한 팬이에요.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오는 당신의 노래를 듣게 되었어요.
당신의 노래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거기에 멈춰 서서 당신의 노래를 끝까지 들었어요.
그리고 계획에도 없이 레코드점에 들어가 당신의 앨범을 샀어요.
집에 돌아와서 밤이 새도록 듣고 나서 나는 당신에게 푹 빠져버렸어요.
당신에 대해서 더 깊이 알고 싶어요.
만약 내 편지를 읽는다면, 나에게 답장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나의 집 주소는 ...
서투른 글씨체로 쓰인 편지를 거기까지 읽다가 말고 성규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저런 팬레터는 하루에도 수 십, 수 백통을 받는다. 그저 사랑을 표현하기만 하는 맹목적인 내용이 가득한 편지. 이런 건 모른 척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고 다시금 생각하면서 성규는 기계적으로 다음 편지 봉투를 열었다. 10대의 어린 팬이 보낸 듯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글씨체에 문장의 첫머리마다 오빠, 오빠. 성규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번졌다가 곧 사그라졌다. 그 편지도 쓰레기통으로. 앞으로도 읽으려면 한참이나 남은 편지 더미를 귀찮다는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성규는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아까 그 편지, 글씨체가 남자 같았는데. 요즘은 여자들도 글씨를 다 잘 쓰는 건 아닌 가봐.
성규 씨에게.
오늘은 기분이 어땠나요?
나는 회사에서는 조금 힘들었지만, 집에 돌아와 당신의 기사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뮤지컬을 하게 되었다면서요? 축하해요! 앨범 스케줄과 겹쳐서 많이 피곤하겠지만, 힘내요.
당신의 능력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겠네요.
늘 뒤에서 응원하겠어요.
아참, 혹시 내가 전에 보낸 편지를 읽었나요?
초록색 봉투에 겉에 W라고 내 이니셜로 도장을 찍어두었는데.
회사로 보내는 팬레터는 직접 본인에게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 내 편지가 누락됐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이렇게 또 보내면 되니까.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 편지를 본다면 나에게 꼭 답장을 해줬으면 ...
어째서인지 어제와 이거랑 비슷한 편지를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성규는 또 무심히 그 편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성규 씨, 요즘 피곤하죠? 그럴 것 같아요.
당신은 늘 바쁘고 항상 스케줄에 시달리고 있으니까요.
혹시 내가 보냈던 두 통의 편지는 받아 보았나요?
회사에서는 줬다고 하는데, 도통 답장이 없어서요.
읽고서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니죠?
아닐 거라고 믿어요. 성규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오늘도 당신의 목소리가 담긴 CD 한 장을 샀어요.
이제 나에게는 당신 이름으로 낸 앨범 전 판과 당신이 참여한 곡이 들어있는 앨범, 그리고 당신의 화보집, DVD, 포스터, 캐릭터 상품뿐만 아니라 내 생활의 곳곳에 당신과 관련된 것들이 숨어 있어요.
하다못해 물 한 잔 따라 마시는 컵에까지 당신의 얼굴이 프린트 되어 있죠.
주변 사람들이 김성규 박물관을 내도 될 거라고 놀릴 정도로 당신에 대한 물건들이 많아졌어요. ....
팬이 한 명 더 늘어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편지를 매번 읽는 건 즐겁지 않다. 소통하지 못하는 사랑은 괴로울 뿐이다. 일방적인 사랑을 받는 건 주는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받는 사람은 옥죄이는 기분이다. 팬들의 사랑에 고마움과 기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성규는 답답함과 불쾌함도 맛보아야 했다.
성규 씨에게.
안녕하세요.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아침부터 성규 씨 노래를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당신의 노래를 들으면 일상의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에요.
회사 생활이 적성에 안 맞고 힘들지만 성규 씨가 있어서 다 이겨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스케줄이 참 많아서 성규 씨도 힘들죠?
아참, 저 다음 주에 뮤지컬 보러 가요. 저를 보면 꼭 손을 흔들어 주세요.
회사 쉬고 가는 거라 평상복 차림일 거예요.
화이트 셔츠에 초록색 가디건을 입고 동글뱅이 안경을 쓴 사람이 저예요! ...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더라도 활동 중에 라디오에 한 번 쯤은 출연해서 팬들과의 소탈한 의사소통도 좀 나누고 그래야 인기가 유지가 된다. 너무 노출을 하지 않으면 팬들의 열정이 식기 마련이다. 이런 걸 조련이라고 한다지.
"성규 씨. 요즘 많이 바쁘시잖아요."
"네. 많이 바쁘죠."
"그럼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던지, 이런 점은 조금 힘들다, 뭐 이런 거 없으세요?"
"아, 뭐. 딱히 없는데. 요즘 들어 지속적으로 팬레터를 보내시는 분이 있는데, 좀 집요하세요."
"그래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달라는 둥, 뭐 뮤지컬에서 인사를 해달라는 둥. 그런데 저는 그 분을 잘 모르잖아요. 어떻게 생기신 지도 모르고, 여자분인지 남자분인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요구하시는 건 좀 거북하죠."
안녕, 성규 씨.
당신에게 보내는 7번 째 편지네요. 내가 그동안 보낸 편지는 다 받아보셨나요?
라디오 들었어요.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내가 아니길 바래요.
나도 그저 당신에게 나를 알리고 싶은 팬 중 한 사람인데....
이걸 본다면 나에게 반드시 연락을 해 줘요.
난 이제 점점 참을성을 잃어가고 있어요.
지난 6통의 편지의 말미에 모두 나의 연락처와 주소를 써 놓았어요.
당신은 알고 있겠죠?
그걸 보고 내게 연락을 해 줘요. 부탁이에요. -W
미친. 이제 협박까지 하네.
성규는 편지를 구겨버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 올해 도전하는 첫 뮤지컬. 찝찝한 마음을 애써 비워내며 성규는 목을 가다듬었다. 막이, 올랐다.
뮤지컬이 끝나고 차로 이동하는 길목에서였다.
"성규씨!"
여자들 틈 사이로 남자 하나가 성규의 이름을 불렀다. 성규는 잘못 들은 거라 생각하고 무심히 그 쪽을 봤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남자다. 남자가 왜 날 부르지? 남팬인가? 여자 친구랑 같이 온 건가? 딱히 남팬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대놓고 팬질하는 사람은 드물었기에 성규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성규씨! 내 편지 못 봤어요? 성규씨!"
성규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편...지? 다시 그 남자를 봤다. 동글뱅이 안경. 화이트 셔츠. 초록색... 가디건. ...W? 순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에서는 저의 팬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열망과 동경, 거기에 더해 알 수 없는 욕망까지 점철되어 있었다. 성규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걸 느꼈다.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는 남자에게서 성규는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무시하자. 무시해. 생전 처음으로 겪는 남팬의 오프라인 애정 공세에 성규는 어찌 반응해야 할 지 몰라서 그냥 그 사람을 없는 셈 치기로 했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 올 지 모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