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청난 이웃
by. Aby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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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곰 같은 성열, 여우같은 성열
지난 작품 이후로 좀 오래 쉬었더니 드라마며 영화 대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매니저가 그나마 괜찮은 것들로 추려놓은 거라고 했는데도 이만큼이다. 연예인의_인기와_대본의_상관관계_.jpg 내 눈으로 내 인기의 산물을 보고 있으니 뿌듯하긴 한데, 일하기 싫다. 연기하고 조명 받고 이런 건 좋은데 촬영 들어가면 잠도 못 자고 거기에만 매달려 있어야 하고 내 생활도 없고. 역할 잘 못 받으면 다이어트도 빡시게 해야 되고 액션 씬 찍으면 굴러야 되고... 한국은 촬영 여건이라든지 환경이 안 좋아서 일일 드라마 같은 거 들어가면 맨날맨날 밤새느라 진짜 반송장이 된다. 내가 대사를 말하는 건지 생각이란 걸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연기를 하다 보니 연기력 논란도 생기고 기사화되고 일이 커지면 팬들도 쉴드 해제 상태로 퇴출을 시키네 마네 시끄러워 진다. 그래서 웬만한 내공이 있지 않으면 일일 드라마 주인공을 맡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를 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일일 드라마를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많은 영화배우들이 한 번 영화로 대박을 치고 나면 대개 드라마를 찍으려고 들지 않는데 아마 이런 까닭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연예인이 살기가 참 힘든 나라다.
저번 드라마 시청률 40%를 찍었더니 내 인지도도 쑥쑥 올라서 내로라는 감독님들이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보내온다. 이번에 받아온 대본들도 꽤나 이름 있는 감독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어디 보자. 형사 물은 아직 내 이미지 상 이른 감이 있고. 싸가지 없는 재벌 집 도련님은 마지막 작품이랑 캐릭터가 너무 겹쳐서 안 되고. 이건 이래서 패스, 저건 저래서 리젝트. 한참 시놉시스를 훑어보다가 한 대본에서 손길이 멎었다. <곰같은 애인, 여우같은 애인?> 제목이 뭐 이따위야, 촌스럽게. 대수롭지 않게 대본을 읽어 내려가는데, 어라. 이거 좀 재밌다. 어떤 남자가 이중 격을 가진 여자와 연애를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여자가 1번 인격일 때는 한 없이 순수하고 착하고 청순하고 그런데 2번 인격은 엄청난 페미니스트에다 다혈질이어서 남자의 의견 따위는 무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래서 고소 공포증인 남자를 억지로 번지 점프대로 끌고 올라가질 않나, 비위가 약한 남자는 절대 못 먹는 선짓국을 퍽퍽 먹질 않나. 완전 골 때린다. 이거 잘하면 대박이고 아니면 쪽박인데. 감독도 초짜인 것 같고. 아, 고민된다. 재밌을 것 같긴 한데, 내가 하고 싶진 않다. 역할이 너무 찌질해. 왜 엽기적인 그녀에서도 전지현 차태현 투톱 주연이었어도 기억나는 건 전지현 뿐이잖아. 이것도 왠지 여자 주인공한테 스포트라이트가 갈 게 뻔해서 싫다. 그래도 이 대본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왜일까. 왜 이 여자 주인공이, 익숙하지. 내 주변에 이렇게 성격 이상한 여자는 없는데. 이성열이라면 모를까.
헐. 그러고보니 이 여자 이거 이성열 같음. 평소에는 순진무구한 척 내 대시도 다 밀어내고 작업이 작업인 줄도 모르고 그러면서 김명수랑 있을 땐.....!!!! 마치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이 애간장을 녹인다.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땐 착하고 어리버리한 척하면서 나랑 둘이만 있을 땐 와, 진짜 내가 서러워서. 탑스타 남우현님을 귀찮은 짐짝 취급하고 말투도 바람이 쌩쌩. 나 부를 때도 야, 너, 남우현 뭐 이런... 내가 무슨 동네 똥개도 아니고. 그러니까 쟤도 곰 아니면 여우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그렇게 선물을 사다 바치고 좋아하는 티를 내고 저렇게 무덤덤한 얼굴이라니. 미치겠다. 쟤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말하는 거 보면 확실히 모르는 거 같긴 한데 가끔 하는 행동이라든지, 그런 게 아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솔직히 이정도 했으면 좀 눈치 채야 되는 거 아니야? 나랑 지금 밀당하자는 것도 아니고, 뭐야? 쟤 설마... 여자 있는 거 아니야? 여태 없는 척 한 걸 수도 있잖아. 요즘 안 만나는 건.... 바쁘다든지, 뭐 유학을 갔다든지 그런 이유도 있고!!! 젠장! 다 제쳐두고 이것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읽고 있던 대본을 집어 던지고 소식통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아라 받아라 받아라 받아라!!!
"나무 형! 무슨 일이에요?" "야 이성종" 그렇습니다 소식통은 이성종이었음ㅋ나만 비밀로하고 즐거워 했던 사실ㅋ "이성열 여자 친구 있냐?" '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그게 뭔 소리에요." "있냐고 없냐고. 그것만 대답해." "내가 어떻게 알아요. 직접 물어봐요, 옆 집 산다면서요." 옆 집 사는 건 이성종한테 말 안 했는데. "어? 어떻게 알았어?" "어제 성열이 형한테 전화 왔었거든요. 형 막 이상한 짓 한다면서요. 쓰레기 갖다놓고 잠 못 자게 괴롭히고 친구한테 욕하고! 진짜 미쳤어요? 아니 갑자기 성열이 형 사는데 물어보더니 바로 그 옆집으로 이사를 가질 않나. 왜 그래요?" "이성열이 그래? 아, 아무튼 넌 알 거 없고. 이성열 여친 있는지 없는지 진짜 몰라?" "몰라요! 직접 물어보라니까!" "그럼.. 혹시 남자 친구..." "이 형 또 미친 소리 하네. 이거 고스란히 성열이 형한테 이를 거예요. 저 녹화 들어가야 돼서 끊을 거거든요?" "야 이성종 혹시 니가 물어봐 주... 끊었네. 매정한 시키."
믿었던, 사실 그다지 믿음이 가진 않지만 그래도 믿을 구석이 얘 밖에 없기에 믿었던 소식통 이성종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서러운 마음에 두 다리를 팔로 끌어안고 소파에 픽 쓰러져 누웠다. 이성종 진짜 치사해 빠져가지구. 그룹 생활할 때도 얘 별로였어. 막내 주제에 형들 다 이겨먹고, 맨날 방송 나가서 우리 사생활 폭로하고. 너 진짜 이성열이랑 연습생 동기여서 친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너한테 연락 안 해. 얌생이 같은 놈.
이성종이랑 이성열이 친하다는 것도 난 우연히 알았다. 인피니트 데뷔를 앞두고 이성종이 자꾸 연습실 밖으로 나가서 한참 있다가 들어오길래 이 새끼 군기가 빠져가지고 한 번 잡아야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 날도 안무를 한창 맞추고 있던 중에 이성종이 슬쩍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잘 걸렸다 싶어서 몰래 따라나섰다. 이성종은 계단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가서 지하 연습실로 들어갔다. 연습생 애들이 쓰고 있는 그 연습실에 이성종이 무슨 일이지? 지금 연습생 애들도 다 돌아갔을 시간인데. 궁금해져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이 문이 원래 뻑뻑해서 평소에도 잘 열리지 않는다. 용을 써서 문을 찔끔 열었는데, 그 안에서 두 명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만 데뷔해서 미안해, 형." "뭐가 맨날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니가 잘해서 데뷔하게 된 거구, 난 아직 부족해서 그런 건데. 너 자꾸 그렇게 미안해하고 그러면 형 너 얼굴 못 봐. 울지 말구, 성종아." 이성종이 우는 지 훌쩍훌쩍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리고 그런 이성종을 달래주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되게 익숙하다. "그래도 형이랑 나랑 같이 들어왔는데, 난 형이랑 꼭 같은 팀 하고 싶었단 말이야. 근데 나만 이렇게 먼저, 흐헝." "난 니가 데뷔해서 좋아 성종아. 잘된 일이니까 이제 그만 울자. 나도 더 열심히 해서 꼭 데뷔할 거야. 니가 먼저 데뷔해서 잘 하고 있다가 나 데뷔하면 니가 나 도와주면 되지. 너 데뷔하고 나 모른 척 할 거야?" "안 그럴 거야. 절대 안 그래."
계속 우는 이성종을 달래주는 다정한 목소리. 살짝 열린 틈으로 보이는, 거울에 비친, 이성열의 얼굴. 아, 또 쟤야. 초딩같고 시끄러운 면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믿음직하고 형다운 구석도 있었네. 다시 봤다. 둘이 시간을 갖도록 문을 닫아주고 연습실로 돌아왔다. 한참 후에야 눈이 퉁퉁 불어서 온 이성종을 모른 척 해주는 걸로 그냥 넘어갔지만, 그 날 이후로 나는 심심하면 이성종에게 이성열의 안부를 물었다. 그 왜 연습생 중에, 키 커가지고 눈 댕그랗고, 첫 날 지각한 애 있잖아. 성열이 형이요? 어어, 걔. 이런 식으로 성열의 안부를 물어보면 성종이는 아무 것도 모르고 묻는 대로 다 답해주었다. 여느 날처럼 성종이에게 습관처럼 성열이를 물어봤다. 야, 걔 키 큰 애. 요즘 안 보이던데. ....성열이 형 연습 그만 뒀어요. 그 후로 한동안은 이성종이 풀이 죽어 다녀서 이성열에 대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다시 애가 밝아진 후에야 성열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지만 그 즈음에는 이미 이성종과 이성열이 조금 소원해진 다음이었다.
그나저나 이성종도 이성열에 대해서 별로 아는 건 없고. 나한테 협조할 마음도 없어보이고. 어떡한다. 궁금해 미치겠는데. 한동안 고민을 하면서 소파에서 뒹굴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직접 물어보는 거야!!
"어서오세...... 뭐냐." "피, 필요한 거 있어서. 뭐, 왜. 난 편의점 오면 안 되냐?" "....... 아니다. 필요한 거 사."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흘끔 본 이성열이 다시 쭈그리고 앉아서 자기 할 일을 한다. 이 시간에도 물건이 들어오는 구나...... 편의점 아르바이트 따위를 해 본적이 없는 남우현은 시간과 관계없이 재고 정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서 물품을 채워 넣는 성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계산만 하는 게 다인 줄 알았더니. 며칠 전에는 바닥도 닦고, 쓰레기통도 비우고, 고딩들이 다 먹고 치우지 않고서 도망간 책상도 닦고. 무슨 청소를 죙일 하더니 이런 일도 하네. 한참을 보고 섰자 이성열이 물건을 다 정리하고 일어섰다. 나는 괜히 혼자 찔끔해서 물건을 고르는 척 진열대를 서성였다. 아니, 그런데. 내가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망설였는데 이성열은 나한테 별 관심도 없고! 그래도 내가 손님인데!! 그것도 남우현인데!!! 갑자기 용기가 불타올라서 이성열에서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꼭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휙휙 돌리고 이성열을 찾자 이성열은 계산대 앞에 서서 뭔가를 누르고 있다가 나를 쳐다보았다.
"너....." "너 여자 있냐?" 내가 막 말을 꺼내려는데 성열이가 먼저 불쑥 물었다. 아 깜짝이야. 존나 놀랬네. 근데, 웬 여자? "아아니??? 그럴 리가! 물론 내가 인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작품과 활동에 집중해야 할 때이기 때문에 연애는 자제하고 있는데, 왜? 나 여자 없어!" 왠지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답해야 할 가장 상투적이고 식상한 답변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전 연기와 결혼했는걸요, 가 있겠다. 내가 과도하게 오버하면서 대답하자 이성열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없으면 말고. 근데 왜 그걸 보고 서 있어." 내가 뭘 보고 있는데? ....헐!!!!!!!! 코...콘.....생ㄹ........ 이... 이건 오해야! "이, 이, 이, 이거 보, 본 거 아니야! 그 옆에 있는 거!" .....전기 테이프랑 순간 접착제가 왜 이... 이것들 옆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거." 내가 집어 든 건 전기 테이프 옆에 있던 일회용 접시와 젓가락. "그거 살 거야?" ..... 그렇지. 편의점에 왔으니 뭔가를 사야지.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들린 것을 성열이에게 가져와 내밀었다. "4500원. 담아 줘?" "아, 아니... 그냥 들고 갈게." "근데 이게 왜 필요해? 집에 젓가락 없어?" "있는데......그, 손님이 와서." "그래?" 계산을 마치고 내게 볼 일이 끝났다는 듯 성열이는 의자에 털썩 앉아서 컴퓨터를 한다. 내가 그 앞에 머뭇거리면서 서 있으니까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한다. "안 가?" 넌 왜 그렇게 나한테 안 가냐는 질문을 많이 하니.... 내가 싫으니... "가야지......" 아 진짜 언제 물어보지. 어떻게 물어보지. 뭐라고 물어보지. "왜. 할 말 있어?" 밍기적거리는 나를 보고 이성열이 물었다. 그래, 그냥 물어보자. 입이 말랐다. 혹시라도, 여자 친구 있다 뭐 이런 대답을 하면 어떡하지. 뭐라고 물어볼까? "너, 여자 친구 없어?" 물어봤다. 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이성열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여자 친구는 무슨.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데 연애할 틈이나 있겠냐. 나도 여자 있으면 좋겠다. 지금 누구 놀려? 아오, 남우현 저 새끼 진짜. 야, 가. 꺼져, 꺼져." 열 받아서 계산대를 박차고 나와 나에게 발길질을 했다. 다신 오지 말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데도 나는 원하던 답을 얻어서 기분이 좋아져서 점핑점핑점핑업 했다.
그래. 없단 말이지. 그럴 줄 알았어. 아, 물론 니가 인기 없게 생겼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성열아. 넌 나에게도 인기가 많은 걸 보면 매력이 넘쳐. 단지, 여.자. 여자가 없을 줄 알았다구. 그래 성열아. 넌 나한테 올 운명이었어. 여태까지 여자 하나 없이 우울하게 살았다니. 기다려라 이성열. 이 오빠가 널 품에 안아 주마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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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어버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미안합니다ㅜㅜㅜ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어야 하는데...ㅠㅠㅠ미안해요ㅠㅠㅠ